(28)난봉꾼 제우스를 위한 변명

2014. 8. 20. 23:31잡주머니






       28)난봉꾼 제우스를 위한 변명|[310] [신화에세이]

정암|조회 63|추천 1|2011.05.16. 00:50http://cafe.daum.net/jsseo43/LRRs/30 

<새천년을 여는 神話에세이>(28)난봉꾼 제우스를 위한 변명


   로마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로마 신화로 확대 재생산하면서 `제우스'를 `유피테르(Jupiter)'라고 부른다.
`주피터'는 영어식 발음이다. `제우스'라는 이름은, `빛'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뒤아우스(Dyaous)'에서 유래한다. 


    언어학자 유재원(한국외국어대)교수에 따르면, 그리스어`아버지 제우스(Zeus Pater)'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어 `유파테르(Jupater)',  라틴어 `유피테르(Jupiter=Diespiter)', `빛이신 아버지'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뒤아우스 피타르(Dyaous Pitar)'와 언어학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한다. 결국 제우스는 그냥 제우스가 아니라 인류의 `아버지 제우스'가 되는 셈이다.


   `제우스 파테르(아버지 제우스)'는 바람둥이로 유명하다. 그는 질투심이 강한 정실부인 헤라의 훼방을 무릅쓰고, 무수한 여신들, 요정들, 인간세상의 처녀들, 심지어는 유부녀들까지 겁탈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 악명은 그가 겁탈한 여성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둔갑의 명수였다는 점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그는 정실부인 헤라를 꾈 때는 뻐꾸기로, 에우로페를 꾈 때는 황소로, 다나에를 꾈 때는 황금소나기(황금 빛줄기)로, 유부녀 레다를 꾈 때는 백조로 둔갑했다. 뿐만 아니다. 딸 아르테미스의 몸종 칼리스토를 꾈 때는 딸 아르테미스로, 유부녀 알크메네를 꾈 때는 유부녀의 신랑 튄다레우스로 둔갑하기도 했으니, 언필칭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셈이다. 그는 심지어는 고모뻘 되는 여신들에게도 무수한 자식이 태어나게 했다.


    하지만 제우스에 대해서 약간의 변호가 필요하다. 그가 고모뻘 되는 이치의 여신 테미스의 몸에 끼친 자식들의 이름을 열거해 보자. 테미스가 낳은 딸들은, 신들의 나라 올륌포스를 치장하는 계절의 여신 호오라이 세 자매, 미풍양속의 여신 에우노미아, 정의의 여신 디케,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와 동침하고 낳은 딸 아홉 자매는 누구던가. 

    오늘날 우리가 `뮤즈'라고 부르는, 바로 무사이 아홉 자매다. 그러니까 제우스는 그냥 바람만 피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새로운 개념으로 가득 채우려고 했던 셈이다. 제우스가 설치던 그리스의 신화 시대를 `인간 관념의 시운전장'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다. 

    그가 겁탈한 여신이나 요정들 또한 지혜의 여신 아테나,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음악의 신 아폴론,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전령의 신 헤르메스, 술의 신 디오뉘소스, 청춘의 여신 헤베를 낳는다. 그가 `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겁탈한 처녀나 유부녀는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미노스 같은 신인(神人)을 낳음으로써 인류의 세상을 차세대 문화 영웅들로 가득 차게 한다.

    신화학자들은, 제우스가 그리스 신화로 편입된 시기, 즉 북방계 언어가 그리스어에 편입되기 시작하는, 기원전 20세기 경으로 본다. 그때부터 천신(天神) 제우스는 토착 신앙체계를 밀어내고 전지전능한 올륌포스 신으로 등극하게 된다. 선대(先代)에 속하는 거신(巨神) 티탄(Titan)들과의 전쟁, 거인 기간테스(Gigantes, Giants)들과의 전쟁은 토착과정의 갈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우스가 이 갈등구조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전지전능한 신으로 등극하자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왕통을 제우스에게 끌어다 대고 싶었을 것이다. 제우스가 본 모습을 감추느라고 둔갑해서 한 처녀에게 접근하여 자식을 끼치니, 그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이 저희 나라, 혹은 지방의 시조(始祖)라는 식이다.

   로마제국이 그랬다. 로마는 문화의 부실한 토대를 다지기 위해 그리스 신화를 끌어들이고 윤색하여 저희 왕통을 그리스 신화의 신통기(神統記)에다 이어붙였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저희 왕통을 제우스에게 끌어다 붙일 때 벌어진 것과 아주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신화의 보편적인 상징체계가 이해되지 못하던 17세기에, 한 기독교 선교사가 서인도 제도에서 교황청으로 보냈다는 한장의 보고서는 당시의 교조적인 조직종교가 인류의 문화유산인 이 신화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조지프 캠벨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나오는 이야기다.

   기독교 한 경외전(經外傳)은 마리아의 회임과 관련된 부분을 이렇게 기술한다.
"마리아는 항아리를 들고 우물가에 서 있었는데,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복을 받으라. 네 자궁은 하느님이 거하실 채비가 끝났음이라. 빛이 내려와 너에게 거할 것인즉, 그 빛은 너로 인하여 세상을 비출 것이라.'"

    문제는, 당시의 선교사들이 세계의 도처에서 이와 유사한 신화의 모티프를 발견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선교사들은, 신화의 주제나 흐름이 신약성서 앞 부분과 어찌나 똑같았던지, 악마가 성경 이야기를 위작(僞作)하여 세계 도처에 뿌리고 다닌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페드로 시몬이라는 선교사는 `서인도 본토 이야기'라는 저서에서 실제로, `그 땅의 악마가 선교에 불리한 교리를 펴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쓰고 있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대목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가 막히는 것은, 선교사들의 수태(受胎)에 대한 교리 설교가 시작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구아케타 마을 처녀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구아케타 마을 처녀의 자궁을 빌려 빛으로 수태시키고, 처녀의 몸은 그대로 둔 채로, 말하자면 동정녀에게 아기를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를 펼치면, `둔갑한 제우스'가 다른 모습을 하고 여러 차례 등장한다. 환웅이 그렇다. 제우스가 이오를 소로 둔갑하게 했듯이, 환웅은 자신이 둔갑하는 대신 곰을 웅녀로 둔갑하게 했을 뿐이다. 진한(辰韓)땅 여섯마을 촌장들이 임금이 있기를 소원했다. 어느날 양산(楊山) 기슭의 샘가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빛같이 땅에 비추고 있었다. 꿇어앉은 흰 말 앞에 자줏빛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이가 신라 시조 혁거세다. 

    알을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었을뿐, 여기에도 둔갑의 신화가 있다. 문득 환한 빛이 시림(始林)에 나타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갔다. 보라색 구름이 땅에 뻗치었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궤가 걸려 있었다.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목궤에서 나왔듯이 바로 이 황금 궤에서 신라의 알지왕이 나왔다.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부자의 딸이 아비에게,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와서 사랑하고 간다고 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긴 실을 바늘에 꿰어 사내의 옷에 꽂으라고 했다. 그날 밤 딸은 사내의 옷에 바늘을 꽂았다.
   날이 밝자 딸은 풀려나간 실을 따라가 보았다. 바늘은 북쪽 담 밑의, 뱀같이 굵은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딸이 잉태하고 아들을 낳으니 곧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를 지은 승려 일연(一然)은 어떤가. 번역본 해제에서 국문학자 김영석(배재대) 교수는 일연이 잉태되는 과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날 햇빛이 방 안에 들어와 어머니 이씨의 배를 비추기 시작한 지 거의 사흘만에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거룩한 아기의 어머니는 이렇듯이 수동적이다. 여성이 수동적이면 남성의 능동성이 두드러지지 않으면 안된다. 둔갑한 제우스의 난봉은 그 능동성의 극치에서 피어난 꽃이다. 이 꽃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자극제였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가 잘 쓰는 말이다. 곧이곧대로는 믿을 필요가 없는 `그저 그렇다는 말, 그저 그렇다는 이치', 이것이 신화, 인간의 꿈과 진실이다.

 
  
             -  다음 카페 <아름다운 미술관 >  정암 님의 글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