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인천공항을 떠난 지 77일째. 드디어 시신 수습 선발대가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지명)의 턱 밑 8750m 지점에서 로프에 매달린 고 박무택씨를 발견했다. 29일 오전 9시쯤. 그러나 박씨의 시신은 마치 '얼음 고치'상태로 100㎏이 넘었다. 3m 길이 로프를 당겨도 꿈쩍하지 않는다. 절벽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자일을 타고 내려가서 피켈을 이용해 떼어내. 시신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후발대로 떠난 엄홍길 대장이 무전기를 통해 소리쳤다. 엄 대장은 자꾸 하늘을 쳐다본다. "날씨가 계속 좋아야 하는데…."
셰르파들이 시신을 절벽에서 분리해 등반로 쪽으로 옮겼다. 발견한 지 3시간여 만이다. 얼음덩어리인 시신이 너무 무겁고 몸을 구부린 상태여서 구조용 색에 들어가지 않는다. 엄 대장은 로프를 이용해 묶어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정상 부근에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히말라야 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다. 운구하던 셰르파들이 "무겁고 길이 평탄하지 않아 하산이 힘들다"고 소리친다. 시신을 묶은 로프를 잡고 보조를 맞춰 내려오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엉금엉금 내려오기를 2시간. 서드 스텝(8700m) 아래에서 엄 대장 일행과 만났다.
겨우 100m 내려온 상황이다. 그런데 눈보라와 함께 강풍이 몰아친다. 오늘 중 캠프 3(8300m)까지는 가야 제대로 하산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특히 세컨드 스텝 50m 절벽 구간이 문제다. 바로 백준호.장민 대원이 실종된 구간이다. 날씨가 좋아도 힘든 상황인데, 박무택의 시신을 운구하면서 안전하게 하산하기는 무리다. "안 되겠다. 여기서 장례를 치른다. 빨리 돌과 바위를 모아라!" 엄 대장은 눈시울을 붉힌 채 결정했다. 자칫하면 원정대가 조난당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셰르파들이 돌덩이를 모으기 시작한다.
당초 계획은 베이스 캠프까지 운구해 거기서 1시간30분 거리인 티베트 사원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거기서 제를 지낸 뒤 화장해 유골만 수습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날씨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금세 돌 무덤(케른)이 만들어졌다. 주위로 눈사람이 된 셰르파들이 모여들었다. 엄 대장은 무전기를 들었다. "베이스 캠프 나와라. 운구가 불가능하다. 케른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겠다." 베이스 캠프는 순간 '아-'하는 탄식이 나왔다. 한쪽에서는 "산사람이 산에 묻히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등반로 바로 옆이니 후배 산악인들이 초모랑마에 오를 때 만날 수도 있고"하는 말도 나왔다.
엄 대장은 박씨의 한국의 유족에게 전달하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두 대원을 찾지 못해 마음이 너무 무겁다고 했다. 어렵사리 구성된 휴먼원정대. 게다가 기상 악화로 수습 일정마저 차질을 빚어 D-데이가 두 차례나 연기됐다. 그러나 6월 초까지 미룰 수는 없었다. 악명 높은 몬순이 시작되는 것이다. "케른도 산악인에 걸맞은 장례다. 이제 시신 수습은 끝났다"고 했다. 현재의 과제는 원정대원들이 무사히 캠프 3으로 하산해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故 박무택 대원이 전하는 지난 1년간 이야기
...... 2004년 5월18일 오전 10시10분
나,박무택은 후배 장민과 함께 초모랑마(8천8백50m,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 정상을 밟았다.홍길 형과 함께 네팔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후 2년 만이다.우리 둘은 정상에서 간단한 기념 촬영을 했다.그리고 스노 피라미드를 거쳐 세컨드 스텝 위까지 내려오는 동안 히말라야 원정이 처음인 장민이 탈진상태를 호소했다.아직도 갈 길은 먼데 걱정이다.게다가 나는 설맹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앞이 안보이니 움직이기가 어렵다.
어떡해야 하나.그렇다고 민이에게 나를 끌고 가라 할 수도 없다.그것은 내 욕심이다.잠시 고민하다 (민이에게) 힘들더라도 혼자 내려가 셰르파를 데려오라고 말한다.8천7백m 죽음의 지대에서 혼자 있는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지만 이 길만이 둘 이 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민이와 헤어지고 나니 나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게다가 산소도 떨어진다.고통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