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 30년사

2014. 8. 22. 22:36산 이야기






      



[ 기획특집]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 30년사  해외산행 정보 

2007/09/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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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 30년사
15개 루트 중 6개 루트에 도전, 5개 루트만 성공
77년 9월15일 한국 초등 이후 07년 실버원정대에 이르기까지

▲ 설연이 휘날리는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위용. 한국산악인들은 77년 고상돈씨의 한국초등 이후 올봄까지 62개팀이 도전, 40개팀이 정상을 밟았다.<사진=이한구>


   에베레스트에는 현재 1953년의 초등 루트인 사우스콜 루트와 1960년 중국팀의 노스콜 루트, 1963년 미국팀의 서릉~혼바인 쿨와르 루트, 1975년 영국팀의 남서벽 루트, 1979년 유고의 서릉 직등루트, 1980년 일본의 북벽 쿨와르 루트, 폴란드의 남릉 루트, 라인홀트 메스너의 북벽 그레이트 쿨와르 루트, 1982년 러시아의 남서벽 그레이트 쿨와르 루트, 1983년 미국의 캉슝페이스(동벽) 루트, 1984년 오스트리아의 북벽 노턴 쿨와르 루트, 1986년 캐나다의 웨스트숄더~혼바인 쿨와르 루트, 1988년 캉슝빙하~사우스콜(동벽) 루트, 1995년 일본의 북동릉 루트, 1996년 러시아의 북북동 쿨와르 루트 등 15개 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한국의 고상돈 대원과 셰르파 펨바 노르부가 1977년에 오른 루트는 1953년 초등 루트인 남동릉 루트다. 이후 한국의 원정대는 여러 루트로 등반을 시도했는데, 어떤 루트로 등정 시도를 해왔는지 루트별로 등반사를 정리해 보겠다.



초등루트 남동릉…30개팀 도전, 20개팀 등정


   영국은 유니온잭 깃발이 24시간 휘날리던 시절에 북극과 남극 탐험경쟁에서 미국과 노르웨이에 뒤져 각각 2위로 밀려나자, 에베레스트를 제3의 극지(The Third Pole)로 정하고 국가적인 지원을 하며 초등 경쟁에 나섰다. 그러나 1921년, 1922년, 1924년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등반대를 구성하여 티벳쪽으로 도전했지만, 조지 말로리와 샌디 어빈의 미스터리만 남긴 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이후 1950년, 네팔 왕국이 개방되면서 본격적인 등정 가능성의 길이 열렸고, 1953년 남동릉 루트를 통해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가 초등에 성공했다.


    한국은 30개팀이 이 루트로 등반해서 동계 등정과 무산소 등정을 포함해 20개 팀이 성공했다. 1977년 고상돈이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에 성공한 루트가 이 남동릉이며 가장 많은 등정자를 배출했다. 고상돈은 58번째 등정자이며 국가별로는 8번째였다. 이 원정대는 김영도 대장과 대원 17명으로 조직됐는데, 당시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던 통산 25번째 등반대 중에서 단 한 번의 시도 끝에 오른,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온사이트(on-sight) 등반에 성공한 원정대였다.


    고상돈의 한국 초등 후 두 번째로 도전한 원정대는 1984년의 양정산악회 동계팀이었다. 오인환 대장과 대원 13명은 사우스콜을 눈앞에 둔 7,900m 지점에서 악천후로 하산했고, 1985년 동계에는 고려대팀이 75일간 악천후에 시달리며 8,500m 지점에 도달하는 것으로 후퇴했다.





▲ 77년 9월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고상돈씨가 대한민국 국기와 네팔 국기를 들고 있다.


1986년 오인환 대장이 이끈 한국팀은 히말라야 등반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허영호, 바인타브락과 알프스 3대 북벽을 등정한 바 있는 유한규 등 7명으로 구성됐다. 소수정예로 도전한 이 팀은 사우스콜(8,000m)까지 진출했다. 1987년에는 함탁영 대장이 꾸린 한국산악회 합동대가 도전하여 고상돈 이후 10년만에 허영호 대원이 한국 제2등과 동계 등정에 성공했다. 그는 두 번의 시도 끝에 셰르파 앙 리타와 함께 등정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최창민 대장과 전국에서 선발된 대원 21명으로 구성된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는 6명의 등정자를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차 등정은 김창선과 엄홍길 대원이, 2차에는 장봉완 부대장과 정승권, 장병호 대원이 올랐다. 3차에는 88 서울올림픽 폐막일에 맞추어 남선우 대원이 등정하면서 로체팀과 함께 같은 날에 등정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9년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의 동계 원정대는 김하경 대장과 대원 25명의 대규모 등반대였으나, 고산병으로 셰르파가 사망하고 계속되는 악천후로 사우스콜(8,000m)에 진출하는 데 그쳤다. 1990년 노종백 대장의 한일 합동대는 부산 산악인 11명과 일본 산악인 3명으로 구성됐다. 복진영, 김재수, 박창우 대원과 두 셰르파가 등정에 성공했고, 일본 대원은 도중에 포기했다. 그러나 등정조를 지원하기 위해 사우스콜에 올라와 있던 함상헌 대원이 실종되어 에베레스트에서 일어난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1991년에는 대구 지봉산악회가 동계에 도전했다. 김특희 대장과 5명의 소규모 원정대는 8,600m 지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날씨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대원들도 지쳐 하산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1993년 한국 여성원정대는 지현옥 대장과 13명의 여성 산악인으로 구성됐다. 등반대는 고소적응이 잘 안 됐고 눈보라와 심한 바람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지현옥 대장, 최오순, 김순주 대원이 셰르파 4명과 함께 정상에 섰다. 한국 여성으로 처음이며, 세계적으로는 16, 17, 18번째의 여성 등정자로 기록됐다.


    같은 해, 남서벽 등반에 실패한 동국대팀은 루트를 바꿔 남동릉을 통해 박영석 등반대장과 안진섭, 김태곤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이때 박영석 대장은 국내 처음으로 무산소 등정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하산 도중 안진섭 대원이 사우스콜 부근에서 실종되어 한국인 두 번째 에베레스트 희생자가 됐다.


    한편 전북연맹 원정대는 전병만 대장과 12명의 대원으로 출발했지만, 깊은 적설량을 뚫지 못하고 세 차례 등정 시도를 무위로 8,400m 지점에서 하산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철수를 선언한 이틀 후 당시 에베레스트 등반사상 가장 많은 40명이 한 날에 등정했다.


1996년 조선대산악회가 개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한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는 임형칠 대장과 9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로체 페이스 상단부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셰르파가 사망하고 고정로프가 손실되는 사고 때문에 등반이 지연됐지만, 최종태와 신광철 대원, 셰르파 3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2000년 손중호 대장과 8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대한산악연맹의 7대륙 최고봉 원정대는 악천후와 체력소모 등으로 세 차례의 등정 시도를 무산시키고, 네 번째 시도에서 박헌주와 모상현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같은 해 가을 충북연맹의 6대주 최고봉 원정대는 윤홍근 대장과 7명으로 조직됐고, 김영문 대장과 16명의 대원으로 출발한 울산 연맹팀은 에베레스트와 로체 연속 등정에 성공했다. 이 두 팀의 연속 등정은 1988년 대한산악연맹팀의 연속 등정에 이은 성과였다. 충북연맹팀은 김웅식, 조철희, 홍순덕 대원이, 울산팀에서는 김환구, 조성철 대원이 정상에 올랐다. 김환구 대원은 이때 45세로 당시 국내 최고령 에베레스트 등정자로 기록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 진출을 기원하는 합동 원정대는 10명의 대원으로 구성됐고, 엄홍길 대장, 이인, 박무택, 나관주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같은 해 가을, 에베레스트-로체 연속 등정에 도전한 충남연맹팀은 이세중 대장과 9명의 대원이 눈사태와 강풍으로 실패했지만 로체 등정에는 성공했다.





▲ 중국 쪽 북릉~북동릉 루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인 세컨드스텝. 중국측이 사다리를 설치해놓았다.<사진=대구시산악연맹>



    초등 50주년을 맞은 2003년에 도전한 건국대 원정대는 대장 임종하와 8명의 대원으로 조직되어 등정 시도를 꾀했으나 8,500m 지점에서 악천후로 하산했다. 같은 해 재미산악인인 선우중옥씨는 60대 나이에 상업등반대를 통해 등정을 시도했으나 8,000m 지점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04년에는 네팔의 반정부군과 마오이스트들의 준동으로 국제 등반대가 11개팀에 불과했다. 인하대산악회는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원정대로 천병태 대장과 10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천병태 대장과 심성보 대원이 등정에 성공하면서 이 산악회의 5대륙 최고봉 등정도 달성하면서 천 대장(당시 46세)은 한국 최고령 등정기록도 경신했다.


2005년 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양정고산악회 원정대는 정기범 대장과 9명의 대원이 도전하여 김근생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최흥환 대장과 5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한양대산악회도 이상세, 석진호, 안종호, 김형철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2006년에는 4개팀이 도전해서 한왕용의 청소등반대를 제외한 3개팀이 모두 등정에 성공했다. 황순광 대장과 8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천안 원정대는 이세중, 박주열 대원이 정상에 올랐고,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중동고산악회는 지훈구 외 8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신장섭, 이명호 대원이 등정했다. 이상배 대장과 2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양산 원정대의 곽정혜도 등정에 성공했지만 하산 도중 탈진으로 조난당했다. 그러나 때마침 등반 중이던 중동고팀의 등장조 세 대원 중 최인수, 박재우 두 대원이 이들을 구조하느라 등정 시도를 포기하는 일화도 남겼다. 한왕용의 청소등반대는 8명의 대원으로 사우스콜(8,000m)까지 진출하여 쓰레기를 수거했다.


2007년 한국산악회의 김성봉 대장과 7명의 대원으로 조직된 실버원정대는 전 대원이 60세 이상으로 김성봉 대장(66)과 이장우 대원(63)이 등정했다. 김성봉 대장은 현재 국내 최고령 등정자로 기록됐다. 2007년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3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도로공사 노조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박상수 대장의 희망원정대는 로체 서벽과 에베레스트를 동시에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 팀의 대원으로 참가한 김홍빈씨는 장애인 7대륙 원정에서 다섯 번째 등정에 성공하여 남극의 빈슨매시프와 인도네시아의 칼스텐츠만 남겨 두었고, 김미곤과 윤중현 대원은 최초의 개인 연속 등정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1987년 한국에서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던 허영호는 자신의 등정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등반에 나섰다. 그는 등정에 성공하면서 개인 통산 3회 등정으로 엄홍길과 함께 한국인 에베레스트 최다 등정 기록을 세웠다.




중국쪽 노스콜 루트…19개팀 중 17개팀 성공


    노스콜~북릉~북동릉~정상으로 이어지는 중국 티벳쪽의 노스콜 루트는 중국과 러시아가 12회에 걸친 시도한 끝에 1960년 중국팀에 의해 겨우 성공했는데, 티벳쪽에서 처음으로 거둔 성과였다. 43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대원 중에는 운동선수, 공무원, 지질학자, 기상학자까지 포함됐으며, 추윈화와 왕푸추, 콤부가 등정했다.


    그들은 최고의 크럭스인 세컨드스텝을 한 대원의 어깨에 올라 무등을 탄 채로 피톤을 박으며 통과했고, 정상에 모택동의 석고 흉상을 남겨놓고 하산했다. 한국에서는 이 루트로 그동안 20개팀이 17개팀이 등정에 성공했다.




▲ C2에서 바라본 남서벽. 올봄 남서벽 신루트에 도전했다 사고를 당한 박영석원정대. 대원들이 등반에나설 준비를 하고있다.<사진=이한구>


1993년 한국히말라얀클럽팀이 처음으로 티벳쪽에서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오인환 대장과 5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허영호 등반대장이 나티 셰르파와 함께 정상에 오른 후 네팔쪽 남동릉으로 하산하면서 두 번째 에베레스트 종단기록을 수립했고, 개인 통산 2회의 등정 기록을 세웠다.


1993년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팀은 임형칠 대장과 10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네팔을 경유해 티벳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등반을 순조롭게 진행시키며 박현재 대원과 셰르파 1명이 정상에 올랐는데, 광주 전남 산악인들에게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것이다.


1995년에는 3개팀이 합류해서 도전했다. 전주 개척산악회의 이동호 대장이 진행한 원정대는 서울과 전남 산악인 8명이 합류한 합동대였다. 이 팀은 고소적응을 위해 시사팡마(8,027m)를 먼저 시도했으나 등정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초반에 눈사태 사고로 사다가 목숨을 잃고 박영석 등반대장은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음에도 등반을 강행해 북동릉 7,800m 지점에 C4까지 설치했으나 전력 약화로 등반을 포기하고 북릉을 거쳐서 북동릉으로 오르는 루트로 변경했다.


    개척산악회팀은 대원 후송과 악천후로 등반이 지연되고 있던 고려대팀과 포철팀과 함께 공동으로 루트를 개척하기로 했다. 개교 90주년을 기념하는 고려대팀은 김종호 대장과 8명으로 구성됐고, 포항제철팀은 이동연 대장과 11명의 대원으로 조직됐다. 이들 3개팀은 인도팀과 합류해 14명의 대원을 1차 등정조에 포함시켜 시도했지만, 장비 부족으로 세컨드스텝에서 후퇴했다. 2차 등정조는 포철팀과 인도팀이 포기하는 바람에 고대팀의 조용일 대원과 장부 셰르파, 개척산악회의 한왕용과 홍성택, 타시 셰르파가 나서서 등정에 성공했다.


1997년 봄, 이동연 대장과 9명으로 구성된 경북산악연맹 원정대는 원래 라인홀트 메스너가 초등했던 북벽의 그레이트 쿨와르가 목표였다. 그러나 북서벽 트래버스가 불가능하자 루트를 변경했다. 강풍과 폭설로 고전하던 등반대는 1차 공격조인 이인과 이홍길 대원, 두 셰르파를 세컨드스텝에 올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지친 이홍길 대원과 셰르파 1명이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을 하는 도중, 셰르파 타망이 고정로프가 끊기면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했으며, 등반을 계속한 이인 대원과 셰르파 1명은 등정에 성공했다.


1997년 가을, 경북산악회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세계 5대륙 최고봉 연속등반에 나섰는데 그 네 번째 목표가 에베레스트였다. 김특희 대장과 13명의 대원이 순조롭게 진행하던 등반은 갑작스런 눈사태로 최병수 등반대장이 휩쓸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원정대는 실종된 최 대장 수색작업을 폈으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고 등반을 포기해야만 했다.


2002년 대구산악연맹 원정대는 대장 김보열과 6명의 대원이 소수 정예로 도전하여 배영록과 박종철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고, 2003년 티벳등산협회와 합동등반한 서울시산악연맹팀은 대장 강태선과 15명의 대원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강풍에 텐트가 파손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엄홍길, 구은수, 박종관, 박주헌, 고용준 등 5명이 등정했고, 티벳 대원 4명과 셰르파 1명 등 전부 10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 네팔쪽 남동릉 루트 최난구간인 힐라리스텝을 오르는 산악인들.<사진=양정산악회>


2004년 계명대산악회는 배해동 대장과 8명의 대원으로 조직됐다. 그러나 등정에 성공한 박무택과 장민 대원이 하산 도중 탈진으로 사망했고, 이들을 구조하러 올라간 백준호 부대장도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한편, 여성 7대륙 최고봉 등정을 추진하고 있던 수원대산악회의 오은선은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오은선은 이 등반 도중 8,750m 지점에 있는 세컨드스텝에서 로프에 매달려 숨져 있는 계명대팀의 박무택 대원을 발견하기도 했다.


2004년에 조난사한 계명대팀의 백준호 부대장, 박무택, 장민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휴먼 원정대가 2005년 봄, 손칠규 대장과 엄홍길 등 18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세컨드스텝에 있던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등로에서 벗어난 바위지대로 옮긴 뒤 돌무덤을 만들어주었으나, 이들을 격려차 왔던 한승권 계명대산악회 회장이 고산병으로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2006년에는 6개팀이 도전하여 모두 등정에 성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박영석 에베레스트 횡단등반대는 11명의 대원으로 박영석 대장, 오희준, 이형모 대원이 등정했고, 박영석 대장은 네팔쪽 남동릉으로 하산하는 횡단등반에도 성공했다. 대전의 It’s Daejeon 원정대는 윤건중 대장과 9명의 대원이 도전해서 이승복, 강연룡, 김영일 대원이 등정했으며, 백두인 외 7명의 전남대학교 원정대에서는 이현조와 이형관이 등정했다. 부산산악연맹의 홍보성 대장과 6명의 대원 중 김진태와 서성호 대원이 정상에 올랐고, 장덕상 외 4명의 제주 원정대는 정상수, 김대량, 김민호 대원이 등정했다. 또한 제주의 설암산악회는 이창백 대장과 4명의 대원이 도전하여 고경만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남서벽…8개팀 도전, 1개팀만 등정


2007년 20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김해 플라잉점프 원정대는 김재수 대장과 9명이 등정하여 단일 팀 최다 등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상호, 윤치원, 김지우, 이성인, 고미영, 송귀화, 정재복, 윤삼준, 박경효 대원 등이 영광의 주인공들이다. 송귀화 대원은 58세로 한국 여성 최고령 등정자가 됐으며, 고미영 대원은 스포츠클라이머에서 고산등반가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었다. 경남 양산의 이상배씨는 그동안 네 차례에 걸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섯 번째 원정대를 꾸려 등정에 성공했다. 


1970년 안나푸르나 남벽을 등정하면서 히말라야의 8,000m급 거봉의 거벽등반시대를 연 영국은, 1975년 남서벽에 도전하여 더그 스코트와 듀갈 해스턴, 피터 보드만이 초등에 성공했다. 1953년의 남동릉 초등자인 힐라리는 영국팀 대원이었지만 국적이 뉴질랜드여서 이들이 영국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로 기록됐다. 당시 영국 최고의 클라이머 18명과 33명의 셰르파, 국영방송인 BBC의 지원 등 108명이라는 대규모 원정대였다. 이 남서벽에서 한국은 8개팀이 등반하여 1개팀만 성공했다.


1985년 동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 루트에 도전한 박영배 대장과 8명의 원정대는 악천후와 물량 부족 등으로 7,500m 지점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1986년 12월에 재도전한 크로니산악회팀은 박영배 대장과 4명의 소수 정예 대원으로 조직됐다. 록밴드 8,300m 지점까지 고정 로프를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C4에서 C5로 짐을 수송하던 셰르파가 고정로프가 끊기면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결국 철수했다. 1988년 박영배 대장 외 전국 합동대 11명은 7,500m 지점까지 진출했다.


1990년, 네 번째 도전장을 낸 박영배 대장의 합동대는 6명의 소규모 등반대였다. 이 팀은 스페인팀이 먼저 등반 중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루트를 개척해 나갔지만, 계속되는 악천후와 물자 부족 등으로 철수했다. 1991년 다섯 번째 한국 원정대가 조직됐다. 이강오 대장과 11명의 대원은 15일만에 세 번째 캠프지(6,950m)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C4 루트공작을 시도하던 박영석 대원이 강풍에 균형을 잃고 100여m를 추락하여 안면 골절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이후 남선우 등반대장과 김진성 대원이 C5 지점에서 비박하며 등정을 시도했으나 악천후와 체력 소진 등으로 등반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93년 여섯 번째로 이 루트에 도전한 동국대 원정대는 이종량 대장과 7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이 팀은 악천후와 신설의 악조건을 뚫고 8,300m 지점에 있는 록밴드에 150m의 고정로프 작업까지 마쳤지만 등정에는 실패했다. 이 팀은 루트를 남동릉으로 변경해서 등정에 성공했지만 남서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남원우 대원이 남서벽을 단독으로 오르다가 추락사하여 에베레스트에서 세 번째 한국인 희생자가 되는 비운을 맞았다.


1995년 여섯 차례의 실패를 거듭하던 이 루트에 경남연맹팀의 김영태와 박정헌 대원이 두 명의 셰르파와 함께 한국 초등에 성공했다. 조형규 대장의 경남연맹팀은 16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등반대로 쿰부 빙하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후 48일만에 한국 산악인의 숙원을 풀어주었다.


2007년 봄, 한국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남서벽 신루트 개척을 목표로 박영석 대장과 6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악천후로 지연되던 등반은 오희준과 이현조 두 대원이 눈사태로 희생당하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캉슝 페이스…99년 한산팀 1개팀 도전


▲ 99년 한국산악회팀이 도전한 캉슝벽~남동릉루트.


    캉슝 페이스는 에베레스트 동벽으로 1921년 제1차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조지 말로리가 처음으로 정찰했다. 그는 눈사태가 쏟아져 내리는 협곡과 빙탑, 오버행의 거벽으로 된 이 루트를 정신 나간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루트라고 평한 바 있다. 1983년 미국팀은 등반 시작 40일만에 대원들간의 불화와 갈등, 부상을 딛고 카를로스 뷸러 등 6명의 대원이 초등에 성공했다.


1999년 에베레스트에서 최난 루트로 알려진 이 루트에 한국산악회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도전했다. 허영호 대장과 15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셰르파 없이 무산소와 신 루트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워낙 어렵고 위험한 대상지였고, 체력 소진과 예상치 못한 폭설 등으로 캠프1(6,450m)을 최고 도달지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서릉 유고 루트…89년 합동대 등정 발표


    이 루트는 웨스턴쿰에서 로라와 웨스트숄더를 거쳐 서릉을 직등하는 것으로 1979년 유고의 안드레이 스트렘펠리와 제르네이 자폴로트릭에 의해 초등됐다.


    김기혁 대장과 16명으로 구성된 한국 원정대는 1985년 동계에 처음으로 이 루트에 도전했으나 7,500m 지점에서 악천후로 21일만에 후퇴했다. 1989년 전국합동 원정대는 한국산악회의 이석우 대장과 10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정상용 대원과 두 명의 셰르파가 이 루트를 통해 정상에 올랐고 다시 서릉으로 하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루트는 워낙 경사가 심해서 유고팀은 혼바인 쿨와르로 하산했고, 불가리아팀은 같은 루트로 하산하다 실족사했을 만큼 험난한 데다, 이 팀은 정상이라고 할만한 뚜렷한 사진을 제시하지 못해 국내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남릉…남릉~남동릉 루트로 한 차례 성공


1980년 폴란드의 안드레이 촉과 예지 쿠쿠츠카가 웨스턴쿰~사우스필라~남봉으로 이어지는 남릉 초등정에 성공했다.


1989년에는 마산 산악동지회팀이 처음으로 남릉~남동릉 루트를 통해 조광제 대원이 정상에 오르면서 에베레스트 국내 통산 네 번째 등정에 성공했다. 1991년 김광진 대장과 10명의 동국대 동계 원정대는 지봉산악회와 일본의 남서벽팀과 함께 C2까지 공동으로 루트를 만들어 나갔지만, 박영석 대원이 8,300m 지점까지 도달했다. 




세계적인 추세와 달리 등로주의의 대상에 머물러 있어


    에베레스트는 더 이상 높이나 난이도를 추구하는 대상은 아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도전의 대상으로서 상징성이 강한 하나의 아이콘으로 남게 됐다. 그것은 에베레스트에 개척할 만한 초등 루트가 사라지면서 전문 산악인들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에베레스트에는 등반성의 추구보다 각종 모험의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다. 스키 활강이라든가 패러글라이딩 활강, 부부 등정과 부자 등정, 16세 소년의 등정과 70세 노익장의 등정, 정상에서 텐트를 치고 21시간 체류, 맹인의 등정과 두 발이 없는 장애우의 등정, 그리고 한 해 한 해 단축되는 최단시간 등정기록 등이 그것들이다. 올해도 한 시즌에 셰르파를 포함해 500명 이상이 등정하는 최다 등정자 기록을 남길 정도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베레스트 초등 루트 15개 중에서 우리가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루트가 9개나 있고, 등정자를 낸 루트는 5개에 불과하다. 그것도 사우스콜과 노스콜 루트에 과도하게 몰려있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와는 달리 아직도 에베레스트가 우리에게는 등로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 글 호경필 한국산서회 회원



 


               - 네이버 블로그 < 동성주막 > 동성님의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