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年代) | 차인명(茶人名) | 행적(行跡) 및 활동내용(活動內容) |
---|
542~640 | 원광법사(圓光) |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때에 태어남. 중국 진~오나라 구법승으로 화랑의 세속오계를 설하였고 호구산(虎九山)에서 차(茶)생활을 익혔다. |
500년대 | 자장(慈裝) | 신라 진평왕(眞平王, 579~631)때에 태어나서 당나라 구법승이다. 통도사의 차(茶)나무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
617~686 | 원효(元曉) | 성씨는 설(薛),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으로 고려의 이규보가 쓴「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차인(茶人) 원효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
〃 | 사포(蛇包) | 원효대사와 함께 수행했던 도반(道伴)의 사이며 원효대사를 모시면서 차(茶)를 달여 드렸다고 한다. |
668~749 | 행기(行其) | 일본 천평원년의 성무천황(聖武天皇)시대에 살았다. 일본에 귀화한 승려로 백제의 도래승(渡來僧), 차나무를 동대사에 심었다. (東大寺誌)-일본 차(茶)의 최초기록이다. |
653~752 또는 689~789 | 지장(地藏) | 신라때 승려(왕자), 속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교각(喬覺)이며 지장은 법명, 24세에 중국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九華山)에 들어가 수도를 해 등신불이 된 신라의 왕자이다. 중국으로 건너갈 때 차(金地茶)와 벼(黃粒稻)씨를 가지고 돌아갔다.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 보질도태자 또는 김수충설이 있다. |
661~680 | 문무왕(文武王) | 신라 30대왕, 가락국의 시조로 수로 왕릉에 차(茶)로써 제사를 지내게 했던 태종무열왕의 맏아들, 끊어졌던 이 제사법을 아버지의 뜻을 기리어 이어갔다. |
681~691 | 신무왕(新文王) | 신라 31대왕, 삼국유사에 정신왕으로 기록-화왕계(花王戒)에 차(茶) 이야기가 있다. |
?~692~746~? | 설총(薛聰) |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학자로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 태어났다. 신문왕(681~692)의 자문역을 맡았을 때 왕에게 얘기해준 「화왕계(花王戒)」에 임금은 ‘차’와 ‘수’로 정신을 깨끗히 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한다. |
600년대 후반 | 보천(寶川) 효명(孝明) | 신문왕(神文王, 681~692)의 두 아들 삼국유사에 매일 차(茶)를 달여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는 사실이 전함. 보천은 보질도태자이며 지장법사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
742~765 | 경덕왕(景德王) | 경덕왕 23년(765), 삼월 삼짇날 귀정문 누상에서 다회(茶會)를 열었다. |
?~765~? | 충담사(忠談師) | 향가의 대표적 작가이자 승려화랑 중국의 다성 육우(陸羽, 727~803)와 같은 시대를 산 차인(茶人). 매년 3월 3일(삼짇날)과 9월 9일(중양절)에 차(茶)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三花鴒)의 미륵세존에게 바쳤다. 765-충담사(忠談師), 안민가(安民歌)를 지었다. |
704~? | 혜초 | 신라 경덕왕 때 승려이다. |
700년대 | 월명사(月明師) | 신라 경덕왕(742~764)때 화랑출신의 승려, 경덕왕 19년(760)에 도솔가를 지어 두개의 해가 나타나는 괴변을 물리치고 왕에게 차(茶)와 옷 한 벌을 선물 받았다. |
774~851 | 진감(眞鑑) | 오늘날의 지리산 쌍계사를 지었으며 소박하게 차(茶)를 즐겨마셨다. |
~828~ | 흥덕왕(興德王) | 신라 제42대왕, 당나라에서 대렴이 가져온 차(茶)씨를 처음으로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
801~888 | 무염(無染) | 속성은 김(金)씨, 범위는 무염, 시호는 대낭혜화상(大郞慧和尙)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이다. |
?~883 | 원랑(圓朗) | 속성은 박(朴)씨요, 원랑은 시호 |
817~893 | 수철화상(秀徹和尙) | 속성은 김(金)씨, 평소에 차(茶)를 즐김 비문에 茶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
857~894~? | 최치원(崔致遠) | 신라 말엽의 학자로 자는 고운(孤雲)이며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린다. 13세에 당나라에 유학, 과거에 급제, 많은 벼슬을 지내고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 차(茶)와 약을 사서 고국에 부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전해지며, 당시에 햇차를 받고 감사하는 글이 전한다. 그가 쓴「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의「무염국사(無染國師)비명」에 차(茶)에 관한 내용이 있다. |
신라시대 | 영랑(令郞) 술랑(述朗) 남랑(南朗) 안상(安詳) | 화랑 국선(國仙)으로 이들이 차(茶)를 찧어 달여 마시던 다천(茶泉), 돌솥, 돌절구 등이 강릉의 한송정(寒松亭) 밑에 아직도 남아 있다. |
1055~1101 | 대각(大覺) | 고려 천태종의 시조(始祖),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義天), 대각은 시호이다. 의천은 전하는 시에 ‘이슬 함조롬히 내린 봄 아침이나, 달이 밝은 밤이 차(茶)마시기에 좋을 때’라고 읊고 있다. |
1058~1130 | 곽여(郭與) | 문인, 자는 몽득(夢得), 시호는 진정(眞靜), 개성의 청연각으로 예종을 시좌하고 있을 때 임금은 귀한 쌍각용차(雙角龍茶), 송나라 때 임금에게 진상을 차를 용의 형상으로 뭉쳐 만든 것)를 하사했는데, 곽여는 그 귀한 차(茶)를 받고 시를 지었다. |
?~1135 | 정지상(鄭知常) | 고려의 시인, 문관,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이다. |
1061~1125 | 이자현(李資賢) | 고려의 학자, 자는 진정(眞靜), 호는 식암(息庵) 본관 인현이씨, 차(茶)를 즐겨마신 이지현에게 예종이 차(茶)를 내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
~1145~1170~? | 임춘(林椿) | 고려 인종때의 문관,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이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로 인해 쇠약해진 육신을 차(茶)로써 회복코자 했다. |
1148?~1209 | 김극기(金克己) | 호는 노봉(老峰), 문장에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시중에는 차(茶)가 있는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
1100년대 | 요일(寥一) | 고려승려 흥양(興陽)이씨의 시조 李産林의 二子, 쌍명제 중부, 걸퇴(乞退), 이인로를 양육한 백부이다. 무사정권에 비판적인 승려였다. |
1152~1220 | 이인로(李仁老) | 초명은 득옥(得玉), 호는 쌍명재(雙明齋), 인천이씨, 진정한 차맛을 알고 그 풍류를 즐기던 사람, 그의 저서 보현집에 실린 ‘다마(茶磨)’라는 시를 통해 사원에게 말차를 만들던 풍속을 알려주고 있다. |
1158~1210 | 보조(普照) | 본명은 정지눌(鄭知訥),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헌안왕으로 부터 차(茶)를 하사받은 일이 있다. |
1168~1241 | 이규보(李奎報) | 고려의 문장가, 호는 백운산인(白雲山人), 백운거사, 지헌(止軒), 삼혹호(三酷好)선생, ‘차(茶) 한 사발은 바로 참선의 시작’이라고 하였고, ‘차(茶)의 맛은 도(道)의 맛’이라고 하여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중장하였다.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茶에 관한 4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특히 운봉(雲峰)에 사는 노구선사가 조아다(早牙茶)라는 茶를 보내오자 이를 유차(儒茶)라 이름하고 ‘유차송(儒茶頌)’이란 시를 지었다. |
1178~1234 | 진각(眞覺) | 호는 무의자(無衣子), 범호는 혜심(慧諶), 진각은 시호, 보조국사 지눌의 뒤를 이어 조계종의 2세기 되었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차(茶)를 즐기던 다승(茶僧)-시담영상인구육잠(示湛靈上人 求六箴) 우전물암(寓轉物庵)이 있다. |
1190~1266 | 김지대(金之岱) | 고려시대 무신,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시조이다. |
1208~1248 | 천인(天人) | 고려 속성 박, 시호 정명국사(靜明國師) -차운운상인병증작(次韻雲上人病中作)이 있다. |
1206~? | 진정(眞靜) | 법명은 천책(天頙), 진정은 호, 자는 몽차(夢且), 만덕산 백련사의 4代祖師 만년에 용혈암(龍穴庵)에 移居-사선사혜차(謝禪師惠茶) |
?~1282 | 백문절(白文節) | 고려때 문인, 자는 빈연(彬然), 문장에 뛰어났다. |
~1271~ | 김서 | 고려의 무관, 1271년 세자(世子 : 忠烈王)가 원나라에 볼모로 갈때 호부낭증(戶部郎中)으로 시종했다. ‘奇呈龍穴大尊呈丈室’라는 차시(茶詩) 남겼다. |
1226~1292 | 원감(圓鑑) | 호는 법환(法桓), 충지(沖止), 밀암(密庵) 법명은 원개(元凱)이며 원감은 시호이다. 산거(山居), 사김장대선사혜신차(謝金藏大禪師惠新茶 )등 20수에 가까운 차시(茶詩)가 「동문선」과 원감국사 기송(圓鑑國師歌頌)에 전해진다. |
1244~1321 | 이진(李瑱) | 호는 동암(東庵), 송광산 정혜사의 혜감국사(慧鑑國師, 1249~1319)는 해마다 좋은 茶를 동암에게 보냈고, 그때마다 동암은 시로서 이에 보답했다. 차(茶)의 시로 맺은 유불의 교유였다. |
?~1318 | 홍규(洪奎) | 초명은 문계(文系)이며 충숙왕의 장인이다. |
1287~1349 | 박충좌(朴忠佐) | 고여의 학자,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庵)이다. |
?~1349 | 권한공(權漢功) | 호는 일재(一齋), 한송정(寒松亭)이라는 차시(茶詩)가 전한다. |
1287~1367 | 이재현(李齋賢) |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櫟翁),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의 경호선사선사가 해마다 보내주는 차(茶)에 대한 고마움을 시로 표현했다. |
1298~1351 | 이곡(李穀) | 초명은 운백(雲白), 자는 중부(仲父)이고, 호는 가정(稼亭)이며 이색의 아버지이다. 주객이며 차인(茶人)인 이곳은 ‘음주일수동백화부우덕린인(飮酒一首同白和父禹德麟仁)’이란 시에서 차(茶)의 성품을 술과 대비시켜 나타내고 있다. |
| 이연종(李衍宗) | 이승휴의 아들, 박치암으로부터 신차(新茶)를 선물받고 그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칠언고시의 차시(茶詩)를 남길 정도로 차를 좋아했음 |
1318~1379 | 정사도(鄭思道) | 학자이며, 초명은 양필(良弼), 1336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고려후기의 문신이다. |
1319~1398 | 이무방(李茂芳) | 자는 석지(釋之), 광양 이씨(光陽李氏)의 시조, 충목왕때 문과에 급제, 한송정(寒松亭)이라는 차시(茶詩)가 전한다. |
1320~1376 | 나옹화상(懶翁和尙) | 고려 승려, 초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 이름 혜근(惠勤), 양주 회암사에서 수도, 1371년 王師가 되고 여주 신륵사에서 죽다. -摘茶 등 보선자 구송(普禪者求頌) |
1328~1396 | 이색(李穡) |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이곡(李穀)의 아들, 여말 선초에 살았단 대학자요, 정치가이며 문인이다. 10여수의 차시(茶詩)가 전하는데, 차(茶)를 몹시 좋아하여 여러 승려로부터 차(茶)를 선물받기도 했고, 차(茶)가 떨어지면 가동(家童)을 시켜 차(茶)를 구해오기도 했다. |
1337~1392 | 정몽주(鄭夢周) | 호는 포은(圃隱), 고려말의 충신이자 유학자, 포은문집에 차(茶)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돌솥에서 찻물이 끓으며 내는 소리를 솔바람 소리로 들으며 이것을 즐긴다는 내용의 ‘石鼎煎茶’ 등의 시가 전한다. |
?~1398 | 변중랑(卞仲朗) | 호는 춘당(春堂), 변계량의 형 |
1345~1405 | 이첨(李詹) |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上梅堂) |
1349~1392 | 이숭인(李崇仁) | 대학자이며 문장가, 호는 도은(陶隱), 유배지에서 茶를 벗하며 한을 달램, ‘좋은 차(茶)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고 했으며, 많은 차시를 남기고 있다. |
1352~1432 | 이행(李行) | 호는 기우자(騎牛子), 차(茶)로써 유배생활의 울분을 달랬다. |
1353~1432 | 길재(吉再) | 호는 야은(冶隱), 이색,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茶人이다. |
1376~1433 | 함허(涵虛) | 휘는 기화(己和), 호는 득통(得通), 무준(無몇準 ), 爲玉 峰覺靈獻茶獻飯垂語 등 몇편의 차시가 전한다. |
1417~1475 | 신숙주(申叔舟) | 조선의 학자, 정치가 호는 보한재(保閑齋), 자는 범옹(泛翁) 작설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고향의 옛일을 회고하는 내용의 시가 전한다. |
1431~1492 | 김종직(金宗直) | 조선의 성리학자 호는 점필재(佔畢齋), 성종 2년(1471) 봄에 경상도 함양군수로 부임했는데 당시 공물로 바칠 차(茶)가 생산되지 않아 전라도에 가서 쌀과 차를 바꿔 공물로 바쳐야 하는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함양땅에 다원을 조성하였다. |
1435~1493 | 김시습(金時習) | 호는 매월당(梅月堂) 세속에서 벗어나 독서와 바둑에 몰두하여 화초를 가꾸며 살았는데, 그가 기르던 종류의 화초 중에는 차나무도 있었다. 그의 저서인 매월당집에 60여 수나 되는 차시가 전한다. |
1439~1504 | 성현(成俔) | 호는 용재(慵齋) 또는 허백당(虛白堂)이라 한다. |
1471~1498 | 이목(李穆) | 호는 한재(寒齋)로 도학자(道學者)요 문인이다. 점필재의 제자이다. 1,332자로 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시(차노래) 다부(茶賦)를 지었다. 다부에는 차의 이름과 산지, 차나무의 생육환경과 예찬, 차닳여 마시기, 일곱잔 차의 효능, 차의 다섯가지 공로, 차의 여섯가지 덕성을 언급하며 차를 마시며 선비의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을 넘어서 차와 내가 하나가되는 오심지차를 설파한 압축된 문장으로 육우의 다경, 300여년뒤의 초의 선사의 동다송에 비할수없는 명저로서 한국차문화와 도학사상에 영향을 끼친 명문이다. |
1454~1503 | 조위(曺偉) | 호는 매계(梅溪), 가섭암에서 승려에게 차를 얻어 마시며 음다의 효과를 노래한 ‘가섭암’이란 시가 전한다. |
1469~? | 정희량(鄭希良) | 호는 허암(虛庵), 인천 허암봉밑에 숨어 살았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있을 때부터 차를 배웠다. 7편의 차시(茶詩)가 전한다. |
1489~1546 | 서경덕(徐敬德) | 호는 화담(花潭), 조선의 철학자, 성리학의 대가였다. 술과 차를 즐겼다고한다. 박연폭포,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
1515~1565 | 보우(普雨) | 호는 허응당(虛應堂) 또는 나암(懶庵), 조선 중기의 승려로서 선종과 교종 양종을 부활시키는 등 불교를 부흥시켰다. |
1520~1604 | 서산(西山) | 속명은 최휴정(崔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 차(茶)와 더불어 자연과 하나됨을 우금(偶,昑), 도운선자(道雲禪子), 윤방백차운유향봉(尹方伯次韻遊香峰) 등 시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
1533~1608 | 일선(一禪) | 조선 중기의 승려, 호는 정관(靜觀). 서산대사 4대 제자(유정, 언기, 태능, 일선)중 한 사람이다. -<歸與率山> 지었다. |
1543~1615 | 부휴(浮休) | 조선 중기의 고승, 속성 김(金)씨, 이름은 선수(善修), 임진왜란시 승병장. - 산거잡영(山居雜詠), 기송운(奇松雲) 등이 있다. |
1544~1610 | 사명(四溟) |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 송운(松運), 서산의 제자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운 의병장었으며 다수(多數)의 차시(茶詩) 등을 남겼다. |
1562~1648 | 소요태능(逍遙太能) | 속성은 오(吳)씨, 범휘는 태능, 임진왜란 때 승군에 가담하였으며 시문집 「소요당집」에 ‘조주차(趙’州茶)라는 차시가 전한다. |
1581~1644 | 언기(彦機) | 조선 중기의 승려 법호는 편양(鞭羊), 서산대사문화의 편양파의 개조이다. 산거(山居), 차법륜총섭운(次法輪總攝韻) 등의 차관련 글이 있다. |
1582~1655 | 도안(道安) | 조선의 승려 호는 월저(月渚), 화엄대종사로 이름이 높다. 우차팔운(又次八韻)이 전한다. |
1691~1770 | 해원(海源) | 조선 후기의 선승(禪僧) 호는 함월(涵月), 탑과 비가석왕사에 있다. 기해인사(奇海印寺) |
1569~1618 | 허균(許筠) | 조선의 정치가이자 작가, 호는 교산(蛟山), 백월거사(白月居士),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의 동생이다. 차시(茶詩)가 전한다. |
1607~1689 | 송시열(宋時烈) | 조선의 학자이자 정치가 시호는 문정(文正) 호는 우암(尤庵), 검소하고 고집통이었지만 차(茶)만큼은 소중히 생각해 다동(茶童)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
1753~1823 | 영수합서씨(令壽閤徐氏) | 초의선사가 ‘동다송’을 집필하는 동기를 만들어 준 조선 정조의 사위 홍현주(1793년~1865년)의 어머니이다. 차를 즐겼고 차시도 여려 편 전한다. |
1769~1847 | 신위(申緯) | 조선의 학자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 초의선사와 교분이 있었다. 다수의 차시(茶詩)가 전하며 누구보다도 차생활을 즐긴 것으로 전한다. |
1762~1836 | 정약용(丁若鏞) |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등이며 진정한 차맛을 알고 즐겼던 뛰어난 다인이다.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년간 차생활을 즐겼다. 1818년 귀양이 풀려 강진을 떠날 때 제자들을 모아 다신계를 조직하였으며 귤동의 다산초당에는 아직도 많은 차생활 유적이 있다. |
1772~1811 | 혜장(惠藏) | 속성은 김(金)씨, 호는 연파(蓮坡) 또는 아암(兒庵) 다산 정약용에게 주역을 배웠으며 다산은 혜장과 차를 통해 교류하였다. |
1786~1856 | 김정희(金正喜) |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조선의 고증학자이며 금석학자, 서예가로 유명하다. 초의선사와 동갑으로 함께 시문과 다도에 심취한 지기였다 한다. |
1786~1866 | 초의(艸衣) | 본명은 장의순(張意恂), 초의는 호, 정약용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웠다. 1824년 일지암을 증건, 1830년 다신전을 펴내 차를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1837년 동다송을 지어서 차나무의 생태, 차고사, 중국의 이름난 차와 우리차의 우수함, 차다루기 어려움, 차따기와 끓이기, 제다법 등에 관한 내용을 시로써 전하고 있다. |
1820~1896 | 범혜(梵海) | 초의선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며 다가(茶歌), 초의차(草衣茶)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