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의 차 문화를 찾아서 - 선차 문화의 중심 동리산 태안사/ 곡성 茶 문화사 (3)

2014. 8. 26. 14:13차 이야기




선차 문화의 중심 동리산 태안사  /  곡성 茶 문화사 (3)

영웅 2010.11.07 20:52



       


곡성의 차 문화를 찾아서

 

-한국 발효차 연구소장 박희준

 

    섬진강 보성강이 만나는 압록강으로 난 길을 가다보면 산은 물이 있어 아름답고, 물은 산이 있어 더 아름다운 것을 실감하게 된다. 길이 넓혀지고 철길이 복원되면서 모양이 조금은 흐트러졌지만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편안한 마음이 절로 든다. 그렇다. 곡성에서는 '크게 편안한'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가 있다. 자하 신위의 죽로차 관련 시 한 편과 <여지도서>의 곡성 물산 조에 나오는 "작설"이란 글자 그리고, [조선의 차와 선]에 나오는 차에 관한 간략한 언급을 바탕으로 곡성의 차 문화를 찾아가다, 나는 뜻밖의 자료들과 마주친다. 금명보정(錦溟寶鼎1861-1930)다송자(茶松子)의 차 한잔을 발견한 것이다. 늘 초의 선사의 [동다송]을 외우면서 초의 선사의 직계임을 차 한 잔으로 몸소 보여주던 다송자는 초의 선사 이후 조선 차 문화를 이끌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르는 곳마다 차밭을 일구고, 다회를 즐겨 열던 다송자는 곡성의 차 문화에도 활발한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선차 문화의 중심 동리산 태안사

 

 

    태안사가 자리한 곳은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봉두산(鳳頭山) 아래다. 봉두산은 또 다른 이름으로는 동리산이라고도 한다. 이 지명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적 상징물은 대나무, 오동나무, 봉황이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상상의 새인데, 봉황이 나타나면 뭇 새가 따를고 태평성대가 온다고 한다. 이 신화적 공간이 바로 태안사이다. 태안사에은 태평성대의 염원이 서려있다.

 

    태안사를 소개하는 문건들은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을 바탕으로 작성되어 있다. "태안사는 경덕왕 원년(742) 2월에 이름 모를 신승 세분이 개창하고 그로부터 1백여년이 지난 뒤 혜절선사가 당나라 서당지장에게 법을 전수받고 문성왕 원년(839)에 귀국한 후 이곳에 신라하대의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이룬 것은 문선왕 9년(847)년이다". 라는 기록을 주로 인용하면서 이름모를 신승 세분이 개창한 것은 증면할 문헌이 없다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런데 1982년 능파(凌波) 스님이 발간한 <태안사 사적.에 보면 서쪽에서 온 허씨(許氏) 성을 가진 신승 세분이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치 신라판<가락국기>를 보는 듯한 이 기록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기록에서 차향을 맡게 되는 것일까? 서쪽에서 온 허씨 그리고 승려라는 말만으로도 조건반사를 하는 것일까? 이 기록은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이다. 증면할 문헌이 없다고 외면하지 말고 침착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곡성 동리산 태안사 전경

 

    신라말 견당구법승들이 주로 머물던 양자강 하류의 강서지방은, 마조도일(709-788)과 서당지장(735-814)이 이곳에서 간화선(看話禪)이란 새로운 수행의 선풍을 날리고 있었다. 신라 구산선물 중 실상산문 실상사 홍척, 가지산산문 보림사 도의 동리산문 태안사 혜철선사(785-850)가 모두 서당의 심인(心印)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당시 꽃피어나던 선차문화의 중심에 그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상기시켜 준다. 이 시기에 대렴이 차 씨앗을 가져와서 흥덕왕이 자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것이나, 김교각 지장 선사가 중국 구화산에 신라의 차씨앗을 심었다는 것은 그 당시 차문화교류가 가져온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풍성한 선차의 황금시대에 혜철선사는 939년 귀국하여 태안사(泰安寺:전남곡성)를 중심으로 동리산문(동리산문)을 개창했는데, 그 선풍이 도선(道詵)-경보(慶甫),-여(如)-윤다(允多)에게 계승되었다. 도선 국사의 태조 왕건에 대한 협조가 고려 개국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 혜철선사 부도 담장 너머로 대밭이 보이고 대숲에 차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어수선한 신라 말기의 부패한 정치의 후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생긴 갈등을 풀어내면서, 혜철 선사와 도선 국사꿈꾸었던 세상을 크게 편안하게 만드는 꿈은 고려의 건국과 함께 그렇게 이미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전국을 다니며 나라의 허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사찰을 짓고,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던 도선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세상을 크게 편안하게 만드는 꿈은 진행되었다. 또한 도선의 <십요십조>에 신라 때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국가적 축제라고 할 팔관회(八關會)를 고려가 이어가게 하였고, 그 팔관회에 후대의 고려의 왕들은 차를 직접 갈아서 공양을 올리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가장 성스러운 자리에 차를 있게 한 도선의 안배는 고려를 차문화의 강국으로 떠오르게 한 것이다.

 

    또한 도선국사가 광양의 백운산 옥룡사와 같이 35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나 도선의 창건설화가 서려있는 순천 선암사, 진주 청곡사 등 창건하는 절마다 차의 향기가 짙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선도선 국사가 고려문화의 심층에 뿌려놓은 차씨앗이 잉태한 태안사에는 과연 어떤 차향기가 숨어 있는 것일까?

태안사에서 가장 낮은 문높이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하는 배알문(拜謁門)을 지나면 보물 273호호 지정된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이 있다. 바로 혜철선사의 부도탑이다. 그 너머로 보이는 언덕의 대밭에 차가 자라고 있다. 한때 화엄사와 송광사를 말사로 거느리던 태안사가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그 위치를 잃어버리고 현재는 화엄사의 말사가 되어있다. 화엄사와 송광사가 우리나라 차의 성지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태안사의 예전의 차살림을 상상할 수 있는 작은 편린에 불과하다.

 

    그러나 태안사의 창건이후 현재에 이르기 까지의 중요한 기록들은 잦은 전란과 화재 속에 모두 사라졌다. 다만 효령대군이 시주한 대바라와 조선시대 초기의 동종등 몇몇 문화재 그리고 부도전에 남아 있는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선사 윤다의 부도탑과 부도비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도들이 무리를 지은 부도군이 옛 시절의 영화를 묵묵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눈에 번쩍 띄는 차문화재가 하나 남아있다. 청정탑 아래에 있는 선원(禪院)의 기둥에 구한말의 유명서예가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가 쓴 4개의 주련이 있다는데, 예서체로 꿈틀거리는 서체로 쓰여진 시의 내용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움직인다. 

 

一粒粟中藏世界(일입속중장세계) 한 알 좁쌀 속에 세계가  감추어져 있으니

反升內煮山川(반승당내자산천) 반 되들이 쇠솥에 산천을 달인다네.

香浮鼻觀烹茶熟(향부비관팽다숙) 떠오는 향기에 코가 열리니 차는 이미 익었고

喜動眉間煉句成(희동미간련구성) 즐거이 양미간을 펴며 시 한 구절을 어렵사리 이루네

 

 

 

▲주련에 차시가 적혀 있는 태안사 선원

 

   앞의 두 구절은 <지월록(指月錄)>에 소개된 중국 도가의 팔선인 중에 하나인 여동빈과 황룡선사의 일화에서 따온 것인데 호방하면서도 응축과 확산의 미학이 숨어 있다. 지면상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가 주어비면 하도록 한다. 이 주련이 붙어있는 선원은 1830년대에 지어졌다. 바로 우리차문화가 꽃피던 시기에 지어진 선원이다. 그 시절 그 이름에 걸맞게 수 많은 선승들이 다화를 꽃피워 내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창암 이삼만, 성당 김돈휘라는 유명 서예가의 글씨가 태안사의 일주문에서부터 배알문, 해회당 그리고 선원 현판과 주련에 이르기까지 자리잡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차 한잔의 용광로 속에 승속(僧俗)을 초월한 어울림이 있었던 것이다. 그 어울림은 다음의 다송자 관련 글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대숲에 자라는 오동나무가 천년의 곡조를 품고 태평성대를 알리는 봉황을 깃들이게 하듯, 이제 태안사 대숲에서 자라는 죽로차가 세상을 크게 한번 편안하게 할 봉황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을 알겠다.




     - 다음 블로그 <자연속 맑은차 > 영웅 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