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26. 14:23ㆍ차 이야기
“조선의 茶와 禪”에 나타난 곡성차 / 곡성 茶 문화사 (3)
“조선의 茶와 禪”에 나타난 곡성차
곡성차를 알 수 있는 우리측 현대자료는 찾기가 쉽지 않다. 1918년에 제작된 <곡성군지> 물산조에는 약종류의 하나로 "작설"이란 품목이 보일 따름이다. 즉 <곡성군지> 편찬자는 약으로서의 차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의 다송자의 수행음료로서의 차 또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차와는 상당한 시각차이가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곡성군지>의 편찬자는 정봉태(정봉태)이다.
<조선의 차와 선>을 쓴 이에이리(이에리리)가 곡성에서 만났던 책수장가가 바로 이 정봉태라는 사실은 곡성의 차문화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절로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만약 이에이리가 정봉태라는 사실은 곡성의 차문화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절로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만약 이에이리가 정봉태를 만나지 않고 죽곡면 유동이나 당동 아니면 원달리로 발걸음을 옮겼으면 <조선의 차와 선>에 기록된 것과는 전혀 다른 기록이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곡성군지>에 약종류의 하나로 작설을 기록한 것은, 당시 조선지식인의 차문화정보에 대한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곡성군지>을 편찬할 정도의 지식인이다 또한 책수장가인 정봉태와 이에이리에게 나눈 대화는 우리차문화를 찾아나선 일본지식인과 우리 것의 숨은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는 조선지식인 사이에 벌어진 해프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것을 남의 것이라 하는 조선지식인의 몰이해와 이에이리가 바쁘게 일어나면서 모습에서 나는 임진왜란 때 선조와 명나라의 양호가 조선의 차를 가지고 벌였던 한편의 에피소드의 재판을 보는 듯 하다. 선조와 양호가 그러했듯이 정봉태와 이에이리 만남은 정말 싱겁게 끝나고 만다. 이긴 자도 진 자도 없지만, 당시 곡성차와 우리나라의 새롭게 만들어진 차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현장하나가 그대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 현장을 이에이리의 기록을 통해서 다시 살펴보자.
정봉태씨(54세)의 집은 대부분 책으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집안의 어디든지 책이 쌓여 있었다. 거실로 안내된 나는 가지고 있던 청태전을 보여 주었다. "이 차는 자기 아이가 상해에 갔을 때 구입한 것을 본 일이 있다"고 한다. "몽고의 차가 아니야"고 말하기도 한다. 차에 관한 책은 없었으나 최근 <여유당전서>(정다산 선생의 도서를 집성한 것)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기타 차에 관한 책은 없었으나 아래의 책은 차에 대해 써 있다고 보여 주셨다.
그리고 정봉태가 이에이리에게 보여준 <여유당전서> 1936년 신조선사판, <동국통감> 1911년 조선광문회판,<동국여지승람> 1481년판, <신증 동국여지승람> 1530년판이 바로 당시 조선지식인들이 개략적으로 나마 차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창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웃에 정규태(丁奎泰 당시 53세)의 집을 방문하여 <동의보감> 에 나오는 '고차(苦茶)' 항목을 이에이리는 그 바쁜 와중에도 전사한다.
그 집을 떠나면서 오곡면장 안규선씨 댁에도 상당한 고서가 있다는 소개를 받지만 틈이 없어 곡성을 떠나고 만다. 물론 이에이리가 곡성을 방문하는 것은 광주에서 구례화엄사로 가기 전 곡성을 들러서 차관련 서적을 찾아보고자 했던 일이기에 곡성차가 눈에 띄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곡성에서 청태전(떡차)를 찾고 싶어했지만, 그것이 없자 곡성에서 흥미를 잃었을 지도 모른다. 곡성에는 청태전이 없다는 것은 곡성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곡성의 차생산현황을 파악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은, 같은 책의 <조선차의 역사와 분포>의 3항에 <현재 전남의 차 생산량 조사>에서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호남지방의 차생산현황상황을 생산지와 기원과 연혁, 생산수량과 판매처 그리고 제다의 특성에 이르기 까지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의 면을 차지한 광주, 장흥, 나주, 강진, 해남, 구례외 지역의 차에 관해 소략한 귀중한 자료를 남기고 있어 일제강점기의 우리차문화의 재조명을 위한 기초적인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이리가 조사한 지역은 모두 23개 지역인데 앞서 언급한 지역을 포함한 곡성, 보성, 화순, 담양, 순천 등 20개 지역과 완도, 진도, 제주도의 3개의 도서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는 곡성지역으 현황만 가려서 살펴본다.
차의 생산지 | 기원 및 연혁 | 생산 수량 | 판매처 | 비 고 | |||||
군 명 | 읍 면 | 리 동 | |||||||
곡 성 | 죽 곡 | 류 정 | 임야에 산재 | 800斤 | 군내 | 제다법 (새싹을 음건하고 솥에서 찐다) 같은면 원달리에서도 차나무가 있어 자가 용으로 쓴다. | |||
당 동 | |||||||||
옥 과 | 설 옥 | 기원불명 |
이 표에서 곡성군의 차 생산이 죽곡과 옥과에서 주로 이루어 지고 있으며, 죽곡의 류정과 당동 그리고 원달리가 주된 생산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달리는 바로 동리산 태안사가 있는 곳이다. 생산량 또한 800근에 이르렀고 군내에 판매유통이 되었다는 것은 차의 산업화 전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생산된 찻잎은 청태전 형태의 떡차가 아니라 잎차였을 가능성이 크다. 정봉태가 <곡성군지>에 작설이란 품목을 올리고 있는 것과 이에이리와의 대화에서 떡차(청태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곡성에서 만들어진 차는 과연 어떤차였을까? 비고난에 나오는 곡성차의 제다법은 '차싹을 음건하여 솥에 쪄서 만든다 한것은, 한국발효차의 새로운 모습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차싹을 음건한다는 것은 실내위조 또는 찻잎의 열을 식히는 과정인 탄량(灘凉)의 공정으로 보이는데, 실내위조일 때는 주로 카테킨 계열의 함량이 변화를 하고, 탄량공정에서 향기성분의 변화와 함께 아미노산 계열 성분의 함량이 증가한다.
1828년 초의선사가 화개의 칠불사를 방문하며 기록한 홍차형 발효차와 1936년 이전 이에이리가 조사한 곡성의 청차형 발효차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차문화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사료이다. 특히 곡성의 새로운 발효차의 등장에 주요한 인물로 다송자를 지목할 수 밖에 없다. 다송자 시문집에서 우리는 5곳에 이르는 차밭에 관련한 언급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르는 곳마다 차밭을 일구고 차회를 연 다송자의 손길이 이곳 태안사와 순천의 송광사에서 꽃을 피웠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인이 경영했던 광주의 다원, 같은 시기의 송광사에 차저장고를 지을 정도의 다송자이고, 육우의 <다경>과 초의선사의 <동다송>을 늘 외우고 있는 다송자라면, 다산이 구증구포의 새로운 제다법을 발견하였듯이 곡성의 '음건하여 솥에 찌는 '음건증청'법 경발효차의 발전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 다음 블로그 <자연속 맑은차 > 영웅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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