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7. 17:07ㆍ경전 이야기
종 목 | 보물 제73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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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 (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 |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사찰본 |
수량/면적 | 3권1책 |
지정(등록)일 | 1982.11.09 |
소 재 지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통도사성보박물관 |
시 대 | 고려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통도사 |
관리자(관리단체) | 통도사성보박물관 |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에 대한 설명입니다.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설법한 내용을 경전에 담은 것이다. 원나라에 귀화한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이 고려 금강산법기보살도량(金剛山法起菩薩道場)에 참가하였을 때, 고려 충숙왕이 지공에게 설법을 요청하자 이 책을 내놓고 설법하였다고 한다.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3권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으며, 크기는 세로 26.1㎝, 가로 19.2㎝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쓴 이색(李穡)의 간행기록을 통해 1353년에 강금강(姜金剛)이 간행한 것을 고려에서 다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예안군 우공(禹公)이 옮겨 새기려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성암사(聖庵寺)의 시주로 1386년 5월에 완성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한국·중국·일본에 전하고 있는 여러 대장경 목록에 책이름이 나오지 않은 유일본으로, 불교의 교리연구에 있어서 그 자료적 가치가 크게 평가된다.
해인사 문수최상승무생계첩(文殊最上乘無生戒諜)
1997년에 목조비로나자불의 복장유물로 발견된 병풍식 계첩으로, 여래유교제자 전수일승계법 서천선사 지공(如來遺敎弟子 傳授一承戒法 西天禪師 指空)이라는
친필로 쓴 지공이라는 자필서명이 보이고, 이 것는 지공대사가 전법계사로서 수계제자 각경에게 전계를 할 때 내려준 계첩이다.
9*50센티미터 크기의 감지금니사경으로 표지에는 보상화문과 계첩명(戒諜名)이 있고, 다음 장에는 문수보살이 꿇어 앉아 비로자나불에게 계를 받는 그림이 그려져 있
다. 이 꼐첩은 통도사의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을(文殊舍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의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서, 무생계경의 요지(要指)인 "중선불수 제악부조(重善不
修 諸惡不造) ㅡ 온갖 착한 일도 닦지 말고 온갖 악한 일도 짓지 말라."라는 <금강경>의 반야공(般若空)을 이루는 과정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바로 비로자나불
이 설(說)하고 문수보살이 전한 말이다.
"이 계 안에서는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번뇌없는 법신(無漏法身)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만약에 선남선녀가 이 계를 받고자 할진대
자신에 대하여 애착해서도 아니되고 자신을 포기하여서도 아니되며, 유심(有心)으로 받아서도 아니되고 무심(無心)으로 받아서도 아니된다."라는 수계를 받을 때의 마음
가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 계첩은 태정(泰定) 3년(고려 충숙왕 13년) ㅡ 1326년 8월에 수계자 각경(覺慶)에게 준 계첩으로 각경의 친필 서명이 있다.
마지막으로 육조 혜능(六祖 慧能)선사가 세수 76세 때의 입적시에 쓴 열반게를 소개할까 합니다.
올올부선수 兀兀不善修 오롯하게 착한 일을 닦지 말며
등등부조악 騰騰不造惡 높이 올라 악한 일을 만들지 마라.
적적단견용 寂寂斷見用 고요히 보고들음 모두 끓어 버리고
탕탕심무착 蕩蕩心無著 마음 쓸어버려 집착하지 말지어다.
위의 육조 혜능의 열반게의 요지나 서천선사(西天禪師) 지공의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상계경>의 중심도는 뜻이나 다 일맥상통 한다.
이는 비로자나불께서 말씀하시고 문수보살게서 전한 화두(話頭)이며, 석가모니佛께서 우리 사바(沙波)세계에 던지신 화두이다.
지공선사는 고려 충숙왕 13년 당시의 수도인 개경에 있는 감로사(甘露寺)에 들렸을 때, 국왕과 여러 대신들로 부터 <환생한 부처님>처럼 환대를 받는다.
고려 충숙왕과 왕사들은 지공선사가 고려에 오래 머물어 불법을 설하여 주기를 여러차례 간청하였으나, 원나라 황제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원나라 수도인
연경(燕京 :현 북경)으로 되돌아 간다.
해인사 문수최상승 무생계첩(文殊最上乘無生戒諜)
1. 계첩의 발견
97. 3. 11 해인사 큰법당인 대적광전에 모셔진 목조 비로자나불상의 복장내부에서 고려 충숙왕13년(1326)에 작성봉안된 서천(西天: 인도) 지공(指空)선사의 "문수최상승 무생계첩(文殊最上乘無生戒諜)" 1첩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계첩은 1997년 대한불교조계종 성보문화재연구원(원장 범하스님)이 해인사를 방문, 불교문화재에 대하여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이미 몇년 전에 부처님 복장에서 인출하여 금고속에 보관중이던 무생계첩 등을 발견, 세상에 소개하게 되었다.
해인사 대적광전에는 몇분의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중 가장 큰 소조부처님(흙으로 빚은 부처님) 3분은 본래 가야산 해인사 뒷편 성주군 수륜면에 있는 금당사의 부처님이었다.금당사가 폐사될때 인근 용기사로 옮겼고 다시 1897년 용기사가 폐사될때 당시 해인사 주지 범운스님이 해인사로 모셔왔다.
큰 부처님 3분은 가운데는 비로자나불, 왼쪽은 문수보살, 오른쪽은 보현보살이시다. 그 사이에 작은 부처님들을 몇분 모셨는데 이들 작은 부처님들은 본래 해인사 대적광전에 주불로 모셨던 고려시대의 소형목조 부처님이시다. 계첩은 문수보살 옆에 계시는 목조(木造) 비로자나불 부처님 복장에서 출현했다.
해인사 대적광전은 7차례나 불이나서 다시 재건 했는데 나무로 만든 부처님이 화재에 불타지 않고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676년이나 보존되어 왔으니 불이 날때마다 부처님부터 먼저 업고 나온 역대 해인사 스님들의 필사적인 보존공로도 크다 아니할수 없다.
발견된 유물은 감지금니(문종이에 금물 은물로 쓴)로 쓴 병풍식 계첩 1권, 고려시대의 옷가지 11점, 진단구(鎭壇構:부처님 밑의 땅)에서 나온 광배에 보석이 박힌 소형 파불(破佛) 2분, 계첩을 넣은 오색 주머니 1점 등 몇가지의 유물이 나왔다. 이들 유물들은 2002년에 개관된 해인사성보박물관에 고스란히 전시되고 있어 관심깊은 분은 다른 보물도 배견할겸 해인사에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이 "문수최상승 무생계첩"은 장문의 계문을 적은후 끝에 태정(泰定)3년(1326) 8월 日이라는 연대가 있고, 수계제자 각경(覺慶)이라는 수계받은 본인의 자필서명이 있으며, 끝으로 "여래유교제자 전수일승계법 서천선사(如來遺敎弟子 傳授一乘戒法 西天禪師) 지공(指空)"이라는 전계법사의 명칭이 있는데 그 중에서 指空이라는 글자는 자필서명이다.
2. 계첩의 내용과 가치
해인사 계첩은 9센치*50센치 크기의 병풍식 검은 문종이에 검은 물을 들이고 아교풀에 금가루를 개어 계첩을 쓴 이른바 감지금니 사경으로서 첫장은 표지에 보상화문을 그리고 경명(經名)을 적었고 다음장엔 문수보살이 꿇어앉아 비로자나불로 부터 계를 받는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다음장 부터 본격적인 계문을 적되 괘선을 치고 자경 0,7Cm정도의 작은글씨로 또박또박 썼으며, 맨 끝에는 범어 주문을 4자 적은 후 그 다음 장에는 크고 둥근 도장을 찍어 놓았다. 2면에 그려져 있는 변상도는 비로자나불이 로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시립을 받으며 서있고 문수보살이 꿇어 앉아 계를 받는 모습인데 그 사이에 책상을 하나놓고 책상위에는 마니보주 소탑과 보상화분이 놓여있다. 주변에는 온통 하늘에서 내린 천우(天雨)가 뿌려져 있으며 보리수나무 밑에는 책상위에 놓인것보다 더 큰 마니보주탑이 보인다.
고려때는 금자원(金字院)을 설치하고 이런 류의 경전을 전문으로 사경하던 스님들이 약 200명 있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사람들의 감지금니 사경 솜씨가 어떻게나 좋던지 인기품목이 되는 바람에 원나라 황실에서 100명을 보내주도록 요청하여 원나라까지 원정가서 사경을 할 정도였다.
이 계첩은 본래 지공화상이 한문으로 번역한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통도사에 1권소장, 보물지정)을 축약한것으로서 서문,4귀의, 6대서원, 최상승무생계, 축원의 순서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계첩의 핵심이라할 최상승무생계 부분에 "중선불수 제악부조(衆善不修 諸惡不造)"라 하여 온갖 착한일도 닦지 말고 온갖 악한일도 짓지 말라고 계를 주고 있어서 사뭇 일반 계와는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즉, 화두로서 계를 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온갖 착한일도 닦지 말고 온갖 악한일도 짓지 말라.....이 뜻이 무엇일까? 부처님 당시에는 화두란것이 없었고 중국에 들어와 송나라 때 부터 화두가 생겼다고 하는데 인도에서 전해오는 고유 계법은 선도 짓지 말거니와 악도 짓지 말라고 교시하고 있어 다분히 금강경에서 말하는 반야공(般若空)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계첩은 문화재적인 가치로 인하여 향후 국보로 지정될 전망이다. 보다 중요한것은 계첩내용이 지금까지 우리가 팔만대장경에서 볼수 없었던 부처님 당시의 귀중한 가르침이라 불자가 이 계첩 하나만 잘 지켜도 성불에 이를수 있는 불교의 진수라는 점이다. 즉, 계문 본문에 이 계는 옛날 법식과 법도를 그대로 유지한것이므로 또렷이 들을 경우 귀에 한번 스쳐도 불도를 이룰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상불 이 계문을 한번 읽기만 해도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면 계첩의 본문을 보자.
3. 문수최상승 무생계경(文殊最上乘 無生戒經)(계첩본문)
(서 문)
대저 무생계란 모든 성인이 태어나는 땅이요, 온갖 善이 생겨나는 터전이다. 터전을 닦지 아니하면 어찌 聖과 善이 설수 있으랴!
터전을 닦지 않고 聖과 善을 세우려는 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성취될 날이 있을 손가. 마치 인분을 깎아 향을 만드려는 것과 같으니 끝내 기약할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 괴로움의 바다를 건느려면 반드시 부처님 자비로운 배(慈航)를 빌려타야 하고 어두운 거리를 지나가려면 반드시 지혜의 횃불을 밝여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이 이 계법을 받지 않고 불도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
이 계법은 온갖 형상있는 존재이거나 형상없는 존재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받아 지녀야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이계법은 비로자나불이 몸소 연설하고 문수보살이 전해 준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이로 말미아마 도를 이루고 모든 보살은 이를 의지하여 인행(因行:수행하여 부처될 원인을 심음)을 완성하여 청량(淸凉)으로서 번뇌를 없애고 영락으로서 법신을 장엄하였다.
이 계 안에서는 유정과 무정을 가릴것 없이 모두 번뇌없는 법신(無漏法身)을 성취할수 있다.
만일에 선남선녀가 이 계를 받고자 할진대 자신에 대하여 애착해도 안되고 자신을 포기해도 안되며, 有心으로서 받아도 안되며, 無心으로서 받아도 안된다.
자신에 대하여 애착하면 사마에 떨어지고, 자신을 포기하면 외도라 부르며, 유심으로서 받으면 생사를 계속하게 되고 무심으로서 받으면 허무에 빠지게 되며, 성품과 형상으로 받으면 성취할수 없게 된다.
이 계법은 본래 일정함이 없어서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으며,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만약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 무바니가 이를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모두 받아 지닐수 있다.
(1) 4귀의를 깨끗이 믿으라.(受淨信四歸依)
1. 歸依佛無形(귀의불무형)형상없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2. 歸依法無生(귀의법무생)무생의 부처님 법에 귀의합니다.
3. 歸依僧無諍(귀의승무쟁)다툼없는(無諍) 스님네께 귀의합니다.
4. 歸依最上無生戒(귀의최상무생계)최상승 무생계(無生戒)에 귀의합니다.
(2) 모든 삼업죄를 참회하여 없애라(懺除諸三業罪)
本來淸淨道(본래청정도) 도는 본래 깨끗하건만
爲迷無所知(위미무소지) 미혹하여 모른 까닭에
造罪無邊量(조죄무변량) 한량없는 죄를 짓게되어
受此煩惱身(수차번뇌신) 번뇌의 이 몸 받았네.
我今求懺悔(아금구참회) 제가 이제 애달피 참회하오니
早證佛菩提(조증불보제) 불보리를 속히 증득해지이다.
(3) 육대원을 크게 발하라.(發弘誓六大願)
1. 일체중생이 성불치 아니하면 저 역시성불치 않겠습니다.
2. 일체중생이 지닌 모든 번뇌를 제가 대신 모두 받겠습니다.
3. 일체중생의 어리석음을 밝은 지혜로 바뀌게 하겠습니다.
4. 일체중생이 지닌 모든 재난을 안온케하겠습니다.
5. 일체중생의 모든 탐진치를 계정혜로 바뀌게 하겠습니다.
6. 일체중생이 모두 저와 더불어 정등각을 이뤄지이다.
(4) 최상승 무생계(最上乘無生戒)
온갖 착한일도 닦지 말고 온갖 악한일도 짓지 말지어다(衆善不修 諸惡不造)
위의 조항들은 옛날 법도를 갖추었으므로 또렷이 지닐 경우 한번만 귀에 스쳐가도 모두 보리를 증득 할 수 있나니 깊이 사유하고 수습하여 영원토록 부처님 법을 신봉함으로써 다함께 어지러운 이 나룻터를 떠나 깨달음의 저 언덕에 오를지어다.
(축원)
ㅇ 황제의 성수(聖壽)가 만세에 이르소서.
ㅇ 태자와 여러왕들의 수명이 천추에 이르소서.
ㅇ 황후 황비의 생산이 영원토록 무성하소서.
ㅇ 국왕전하의 복수(福壽)가 무강하시고 문무관료의 벼슬이 더욱 높아지고 천하 태평
하고 바람과 비가 알맞아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여지이다.
ㅇ 부처님 위대하심은 빛을 더해가고, 부처님 법은 언제까지나 구르소서.
ㅇ 태정3년(충숙왕 13년, 1326)8월 일
ㅇ 수계제자(받아 지니는 제자) 각경(覺慶자필)
ㅇ 여래유교제자 전수일승계법 서천선사 지공(指空) (指空은 친필임)
(범어 주문 4자)
4. 계첩문안의 해설
이 계첩의 출처는 비로자나부처님이 문수보살에게 전한것을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바에 설하여 그것이 대대로 인도 조사에게 전승, 지공화상에게 이르고 지공화상이 고려인들에게 수계한 뜻 깊은 계문이다. 인도 고유로 전해오는 것이므로 중국을 거쳐 들어온 팔만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로서 화엄경에서 소의불로 의존하는 상상의 부처님이다. 문수보살 또한 부처님 10대제자 중의 한분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지혜제일보살이라고 설한 상상의 보살이시다. 상상의 부처님이지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한 부처님이므로 법계에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고 사바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종교차원에서 신앙하게 된다.
이 계첩문안은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을 지공스님이 구두로 설하였고,이를 고려의 강00 이란 거사가 글로 구성한것을 지공스님이 교열감수하여 한역을 필했고 이를 축약한것이 이 계첩이다. 계첩문안은 구구절절히 부처님 법에 들어 맞아 한 글자도 뺄 곳도 더할곳 도 없는 명문이다.
"문수최상승무생계"라는 계첩제목을 풀이하면, 문수보살은 지혜제일보살로서 사바의 중생들과 화광동진(和光同塵:중생과 함께 어울려 교화하는 것)하기 위하여 성불을 늦춘 분으로 이 계를 비로나자불로 부터 받은 분이기 때문에 "문수"라는 이름을 넣어 준것이요, 최상승이란 이보다 더 높은것이 없는 가장 높은 수준의 불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육조단경에 4승에 대하여 풀이한 것이 있다. 보고듣고 외우기만 하면 소승이요, 법을 깨쳐 아는것은 중승이며, 바른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것은 대승이며, 만가지법을 다 통하고 만가지법을 다 갖추어 온갖 것에 물듦이 없이 모든법의 모습을 떠나 하나라도 얻을 바가 없으면 최상승이라한다. 이처럼 무생계는 최상승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무생(無生)은 불생불멸의 불생(不生)과 같은 뜻으로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불성(佛性), 즉, 중생의 마음자리를 나타낸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불교의 제1의로서 계이름에서 부터 벌써 선도리를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서문에서는, 이 무생계가 성(聖)과 선(善)을 세우는 밑바탕이 되므로 누구나 받아 지녀야 할것을 강조하고, 애착을 갖거나 자포자기한 상태,무심이나 유심으로 받아 지녀서는 안될것을 경계하고 있으며, 승속과 남녀노소 누구나 받아 지니면 번뇌없는 법신을 성취할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이 계를 받아 지니지 않고 부처를 이루려 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것 같이 넌센스라고 말하고 있어 이 계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 즉 이 계에서 제시한 점차(漸次)의 마음을 닦지 않고는 견성으로 나아갈수 없다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1)항, 4귀의를 바르게 믿으라는 항에,
우리가 평소 천수경에서 외우는 불법승 3보에 귀의합니다 외에 "최상승무생계에 귀의합니다"를 하나 더 넣어 4귀의라 한것이 특이하다. 이는 무생계가 부처를 이루는 첩경이므로 특별히 1가지를 추가한것으로 보인다.
또, 단순히 불법승 3보라 하지 않고 형상없는 부처님, 무생의 법, 다툼없는 스님네들께 귀의 한다고 하여 형용사를 못박은 것도 특이하다.
4귀의는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하여는 맨 처음 3보와 무생계에 귀의 하는 마음부터 내야하는 것이므로 점차에 의거 보살이 내야할 첫 발심을 계목으로 제시한 것이다.
(2) 3업죄를 참회하여 없애도록 하라는 항은,
부처를 깨닫고자 하는 자는 먼저 지은바 업장을 참회해야 맑은 마음이 나타나므로 업장참회를 강조했다. 물밑을 보려면 먼저 물이 맑아져야 하므로 업장참회를 계목의 두번째로 넣은 것이다.
게송의 첫구절에 "도는 본래깨끗하건만"(本來淸淨道)이라하여 우리의 자성이 본래 깨끗한 것이라고 의미 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이는 "부처와 중생과 마음, 이 세가지는 같다"(心佛及與衆生 皆是無差別者)고 한 화엄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업장은 어떻게 참회하는가? 주력이나 염불을 해도 좋다.
그러나 마음을 요달할수만 있으면 그 이상의 참회가 없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는 자성이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나는것.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마음이 멸하면 죄역씨 없어지리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죄도 마음도 함께 없어지면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그를 일러 진정한 참회라 이르느니
그러므로 참선 잘하여 견성하면 참회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를 나는 죄를 많이 지었는데 내가 감히 어찌 부처를 이룬단 말이냐? 하고 겁을 내는 수가 있다. 이것은 중생의 오랜 폐습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조사스님들의 말씀에, 죄를 모조리 참회해야 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죄를 그대로 안고 견성한다고 하였다. 죄를 다 닦아내야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죄는 죄대로 놔두고 참마음을 깨달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계문 (2)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몰라서 지은죄는 견성하여 알고 보면 꿈을 깬것과 같이 모두 없어진다. 그러므로 퇴굴심을 내지 말라. 이것은 여러 조사스님들의 당부말씀이다.
(3) 6대서원을 크게 발하라(發弘六大誓願) 항에서
1. 일체중생이 성불하지 않으면 저역시 성불하지 않겠다.
2. 일체중생의 번뇌를 제가 모두 받겠다.
3. 일체중생의 어리석음을 밝은지혜로 바꾸겠다.
4. 일체중생의 재난을 안온하게 하겠다.
5. 일체중생의 탐진치를 계정혜로 바꾸겠다.
6. 일체중생이 모두 저와 더불어 정등각을 이뤄지이다.
하고 현실에서 이루어 질수 없는 가상적인 서원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실은 이러한 서원은 모두 실현가능한 일이다.
조선 초기 함허득통(涵虛得通)선사께서 "금강경오가해" 서문에 말하기를,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하고, 비록 천겁이 지난다할지라도 옛날이 아니요,
긍만세이장금(亘萬世而長今)이로다. 만세가 온다하더라도 이제일 따름이다. 라고 했다.
즉, 이마음은 아무리 오랜세월이 지났다하더라도, 또, 아무리 긴 세월이 온다할지라도 현재의 이 마음자리일 뿐, 마음자리는 변함이 없다. 즉,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영원한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영원에 서있는 이 마음에 일체중생을 구제하고 일체중생과 더불어 성불하고자 하는 서원을 발하고 있는것이므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영원에 통한 어느 한 시점에는 실현 가능한 일이다.
이 마음, 즉 부처를 논함에 있어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4차원의 세계에서 이 계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큰 서원은 성불을 향하여 출발하는 보살의 기본자세이다. 성철스님을 비롯한 대선사들이 모두 이와 같은 대서원을 발하고 있음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대 서원은 성불을 향해 나아가는 보살의 기초자세이기 때문에 점차(漸次)의 하나로 넣었다.
5. 무생계의 본문 탐구
이 계문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서문, 4귀의, 참제3업죄, 6대원을 차례로 설하여 본계를 설하기 위한 절차를 갖춘후 최종적 본계로 제시한 (4)최상승 무생계로서,
衆善不修 諸惡不造(중선불수 제악부조) "온갖 착한일도 닦지 말고 온갖 악한 일도 짓지 말지어다"라고 한 부분이다.
칠불통계(七佛通戒)(과거현재의 모든부처님이 공통으로 내린 계)에서는
衆善奉行(중선봉행) 온갖 착한일은 봉행하고
諸惡莫作(제악막작) 온갖 악한일은 짓지말라.
自淨其意(자정기의) 그 뜻을 스스로 맑히면
是諸佛敎(시제불교)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고 했는데 무생계에서는 온갖 착한일도 닦지 말라고 했으니 어찌된 까닭인가?
이는 말할것도없이 선문에서 말하는 선도 악도 닦지 말고 본래 마음만 지키라는 선문 고유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마치 육조 혜능대사가 행자의 몸으로 오조 홍인대사에게서 법을 받아 신수의 무리에게 쫏겨 도망갈 때 끝까지 따라와 바루를 뺏으려 했던 장군출신의 혜명스님을 교화하던 말씀과 비슷하다. 도망치다 못한 육조대사가 바루와 가사를 큰 바위에 엎어놓고 이것은 법을 전하는 신표인데 가져갈수 있으면 가져가라! 하면서 수풀속에 몸을 숨기자 혜명은 바루를 집으려 했으나 바루는 꼼짝도 않는 것이었다. 그 때야 비로소 도력을 깨달은 혜명이 행자님! 저는 바루를 취하러 온것이 아닙니다. 법을 위하여 왔을 뿐이오니 저를 위해 법을 설해주소서! 하니 육조대사께서 비로소 수풀에서 나와 바위에 좌정한 후 혜명에게 하신말씀,
"그대는 마음을 가라앉히라.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어떤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고? "
이 한마디에 혜명스님은 도를 깨닫고 혜능의 제자가 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문수최상승무생계는 일반 보살계와 달리 화두로서 계를 준것이다.
이 계첩의 핵심이 되는 본계는 "衆善不修 諸惡不造" 8자 뿐이다. 이것을 펼쳐보이기 위하여 4귀의니, 참제3업죄니, 6대원이니 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러면 "衆善不修 諸惡不造"란 무엇인가? 선도 닦지말고 악도 짓지말라....이것이 무슨 뜻인가?
육조스님의 풀이에 의하면,
선과 악의 성품이 공한줄을 알아 선을 짓되 지음이 없고 악을 끊되 끊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착한것은 악한것의 빌미가 되므로 착한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하거니 하물며 악한것을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악한생각, 선한생각을 모두 떠나 본래의 그마음을 찾으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양변(兩邊)을 여의고 쌍차쌍조(雙遮雙照) 하라고 가르친다. 양변이란 좋다 밉다, 예쁘다 추하다,길다 짧다 등 온갖것을 대립상태로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대립상태로 구분하지 말고 이것은 저것을 포용하고 저것은 이것을 포용하여 두루 원융무애하는것을 중도(中道)라한다. 그리고 중도를 운용하는 것을 쌍차쌍조라 한다. 유가의 중용(中庸)은 지나치지도 말고 모자라지도 아니한 가운데를 취하라는 뜻이지만, 중도는 가운데를 취하란 뜻이 아니다. 이쪽을 포함한 저쪽, 저쪽을 포함한 이쪽을 두루 비추어 도무지 집착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본래 마음을 찾기 위해 가만히 다리를 개고 앉아 궁구해보면 온갖 생각만 일어날 뿐, 본래 마음은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것은 지은 죄업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육조 혜능스님은 어떻게 도를 깨달았는지 참고해 보자.
육조스님(638-713)은 당나라 초기의 스님이다.스님은 24세 까지 산에 나무를 해다 쌀되나 팔아서 어머님을 봉양하는 나무꾼이었다. 어느날 나무를 여관에 팔고 엽전을 받아 돌아 서는 순간, 어느손님이 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듣는 그 한마디가 가슴에 크게 와 닿으면서 마음이 열리는 듯 했다. 노총각은 손님에게 닥아가 물었다.
읽는 책이 무슨 책입니까? 손님왈- 이것은 금강경인데 황매산 홍인대사로 부터 받은것이네.
노총각은 은전 몇잎을 얻어 어머님이 여생을 편히 보낼수 있도록 생활비를 마련해 드린후 드디어 황매산으로 떠난다. 몇개월을 걸어 황매산에 도착, 대중에 둘러싸인 홍인대사를 뵈었다. 대사가 먼저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는가? 노총각왈- 남방에서 왔으며 오직 부처를 구할 따름입니다. 남방에서 왔다면 무지렁이가 아닌가? 무지렁이가 어찌 부처를 구한단 말인고? 사람은 비록 남북이 있을 지언정 법에 어찌 남북이 있사오리까? 제법 똘똘한체 하는구나. 나가서 방아나 찧으라. 그리하여 9개월 동안 몸에 돌을 달고 디딜방아를 찧는 노행자가 되었다. 어느날 홍인대사께서 대중에게 고하시되, 너희들은 각자 깨달은바 소견을 게송으로 적어보여라. 법을 깨달았으면 6대조로 삼으리라. 대중의 수제자인 신수는 전전긍긍 끝에 게송을 지어 스님이 드나드시는 복도에 써 붙였다.
신시보리수(身是普提樹)요. 몸은 이 보리수요,
심여명견대(心如明鏡臺)니 마음은 명경대일세.
시시근불식(時時筋佛拭)하여 때때로 먼지를 쓸고 닦으면
막사유진애(莫使有塵埃)어라. 밝은 거울이 나타나리.
노행자는 이 게송을 듣고 마음을 깨닫지 못한 글이라 말한후 내가 한게송을 부를테니 글로 써 달라고 하였다.
普提本無樹(보제본무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面鏡亦非臺(면경역비대) 명경 또한 대가 없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본래 한가지 물건도 없는데
何處惹塵矣(하처야진의) 어느곳에 먼지가 낄수 있으리오.
하고 써붙이니 대중들이 모두 놀랐다. 어느날 홍인대사가 오셔서 방아확을 세번 치고 갔다. 그날밤 삼경에 오란 뜻임을 알고 노행자는 삼경에 조실방에 들어갔다. 대사는 조실방에 장막을 치고 네 소견이 쓸만하다고 생각했으나 시기하여 너를 해칠까 보아 말하지 않았다. 이제 금강경을 설할테니 너는 자세히 들어라. 그리고는 금강경을 설해 내려갔다.
"색으로 그 마음을 얻을수 없고 내지 수상행식으로도 그마음을 얻을수 도 없다. 마땅히 어디에 의지하지 말고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 하는 문구에 이르러 갑자기 노행자는 마음이 쿵 하고 열리면서 도를 깨달았다. 그것은 육조스님이 전생에 오랫동안 마음을 닦았기에 금생에 와서 듣자말자 도를 깨달은 것이다.
도를 깨달은 후 육조스님이 제1성으로 하신 말씀은 "어찌 내 자성 가운데 이러한 부처의 경지가 있을줄을 알았사오리까? 하고 3번 감탄의 말을 한다
그처럼 부처란 우리 마음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부처님을 어디 다른 높은곳에서 모시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내마음 자체가 본래 부처였던 것이다.
그래서 법성계 마지막 귀절에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옛부터 움직인바 없건만 그를 일러 부처라 한다네)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어디서 오신것이 아니요, 내마음 자체가 본래부터 부처 였건만, 우리 스스로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육조스님은 24세에 도를 통하고 16년간을 숨어지내다가 39세에 수계하여 스님이 되었고 76세에 입적하셨다. 마지막 입적에 앞서 우리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확고히 밝히는 자성 진불계(自性眞佛戒)를 남기시고, 다시 열반게 한게송을 지어 보이셨다.
兀兀不善修(올올불선수) 오똑하여 착한일도 닦지말며
騰騰不造惡(등등부조악) 높이솟아 악한일도 짓지말라
寂寂斷見用(적적단견용) 적적하여 보고들음 모두끊고
蕩蕩心無著(탕탕심무착) 툭트이어 집착일랑 갖지말라
즉, 육조스님 게송의 전반부 2구가 선도 닦지 말고, 악도 짓지 말라고 하고 있어 지공선사의 문수최상승무생계와 동일한 취지이다. 그렇다면 필경 이 문구에 무슨 비밀한 연유가 있는것이 아닐까?
그 비밀이란, 다른것이 아니다. 비로자나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화두이며, 문수보살께서 받아 전한 화두이며, 석가모니불께서 사바에 설한 화두이다. 착함도 악함도 짓지 말고 단지 자신의 본래 마음만 지키라는 요지의 이 화두는 우리 마음을 깨닫는 가장 빠른 첩경의 화두이다.
부처님께서 설한 법이 2가지일 수 없다.
인도에서 내려온 지공스님의 무생계나 중국의 조사인 육조스님의 열반게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 있으면, 어지러운 생각만 떠오른다. 사량분별로 화두를 따진다면 미래겁이 다 지나도록 공부해도 깨달을수 없다고 육조스님은 경계하고 있다. 마땅히 생각에 의지하지 않고, 머무는바 없이 본래의 그마음을 내어야 비로소 부처를 볼수 있는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어떻게 내란 말인가? 그것은 삼매를 의미한다. 선도 닦지말고 악도 짓지 말라....이것이 무슨 소리일까? 이같은 화두 한가지만 의심하고 의심하면 삼매에 몰입하게 되고 그 삼매속에서 머무는 바 없는 그마음을 낼수 있는 것이다.
참선은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賁心), 대의정(大疑情)이 3요소다. 공부를 하면 틀림없이 부처가 나타난다는 것을 굳게 믿는 大信心, 이 공부를 반드시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大賁心, 화두를 이리저리 잔꾀로 굴리지 않고 크게 의심만 하는 大疑情을 말하는 것이다. 어려운것 같지만, 이렇게 간절히 하려고 하는 마음만 내면 공부는 다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또 중요한것은 보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보살의 마음이란 무생계에서 설하고 있는 (1)사귀의 (2)참제업장 (3)발대홍서원의 마음을 내고 고요히 합장하여 법계에 공손히 부합하는 일을 말한다. 계목에 (1)(2)(3)을 제시한것이 괜히 넣은 것이겠는가? 과거 부처님들이 부처를 이룰때 발심했던 점차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는 옛법식을 따랐다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조 승찬스님은 신심명에서
至道無難(지도무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唯嫌揀擇(유혐간택) 오로지 간택을 꺼려할 뿐이다.
但莫憎愛(단막증애) 단지 밉고 고운것만 버리면
筒然明白(통연명백) 대통이 훤히 뚫린것처럼 명백하리라. 이라 하였다.
고 하였다. 간택이란 무엇인가? 임금님이 규수를 열지어 세워놓고 왕비를 고르는 것을 말한다. 이처녀가 좋은가, 저처녀가 좋은가 고르는 것, 그것은 시비선악을 말한다. 요리조리 따지는 식심(識心), 그것을 갖고는 도를 얻지 못한다. 머무는 바 없이 내는 그마음, 삼매의 힘이라야 자성을 볼수 있는 것이다.
불교는 평등하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으신후 사람들을 교화하기 시작하자 단시일내에 민중의 환영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는 엄격한 캐스트제도에 의해 부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아, 수드라 의 4계급을 구분지워 놓고 있었지만, 부처님의 혜안으로 이를 관찰해보니 그것은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실답지 않은 제도일 뿐 사람은 높고 낮음이 없는 똑같은 불성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평등을 주장하자,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 불교는 높고 낮고, 싫고 좋은 것이 없다. 평등하다. 불교는 민주주의도 수용하지만, 공산주의도 수용한다. 그 어떤 주의가 생겨도 불교는 수용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3조 승찬대사는 신심명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다만, 간택을 싫어 할뿐이다. 싫고 좋고만 버리면 도가 환히 보일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참선을 오래 하게되면 처음에는 마음이 맑아지면서 잠이 밀물처럼 쏟아진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화두를 놓지 않으려고 애쓰면 이번에는 과거 다생겁에 지은 죄업의 힘들이 발버둥을 친다. 즉, 마왕의 보궁이 흔들리므로 군사를 풀어 마지막 도전을 해 오는것이다. 부처님께 기원하여 이 난관을 이겨내고 깊은 삼매에 들어가려고 애쓰면 이때가 깨닫기 직전이다. 화두가 앞뒤 어디로도 나갈수 없는 은산철벽 같은 상태에 이르러 더욱 굳게 정진하면 삼매의 경지, 오매불망이 되고 여기에서 백척간두 진일보하면 본래의 부처가 나타난다고 옛선사들이 참선과정을 설명하신 바 있다.
삼매에 들수 있는 기간은 3일, 혹은 7일, 또는 1년 이상 걸리는 수가 있다. 간절하지 않으면 평생동안 닦아도 그저그렇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선객들은 주력이나 기도를 겸수하는 이들이 많다. 이 마음이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으면 본래의 내 마음을 볼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부가 힘들다고 미리 겁을 먹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고해에 와서 얼마나 고생하고 눈물 흘렸는데 여기까지 와서 부처를 포기한단 말인가?
이러한 약간의 노력은 우리가 지향하는 깨달음, 곧, 성불의 엄청난 가치에 비교하면 작은 댓가에 불과하다. 이 조그마한 수고를 견디지 못하여 부처를 이루지 못한단 말인가?
생자필멸이다. 우리 인생은 죽는다. 죽기는 죽어야할 운명인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이르러 무엇으로 대처한단 말인가? 공부해놓지 않으면 늙어서 필경 후회한다. 뒤늦게 깨닫고 허둥대나 목말라서 우물파는 격이다. 때는 이미 늦어 소용없는 일이다. 불교를 만나기도 어렵지만, 정법을 만나기 어렵고, 정법을 만났다 하더라도 어설프게 알면 필경 이 모양으로 헛되히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명심해야 된다. 선지식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내일내일 하고 미루거나 방일하면 안된다. 길은 오직 하나, 간절히 삼매를 이루는 그 과정을 한번 겪어야 하는 것이다.
옛날 중국의 고위 관리들 중에는 도를 깨달아 스님을 능가하는 도인들이 많았다. 육긍대부(陸亘大夫), 황산곡(黃山谷), 배휴 상공(裵休), 장상영(張商英), 위자사, 방온(龐蘊)거사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옛날 공무원들이 도를 깨달았다면 오늘의 공무원이라고 해서 깨닫지 말란 법이 없다. 공무원들은 지혜 총명하므로 참선에 약간의 취미만 있어도 별 힘을 안들이고 한소식을 할수 있다.
중국의 1,700 공안 중에도 "부모에게서 태여나기 전의 본래면목은 어떤것인고?(父母未生前 本來面目)"하는 공안이 있기는 하지만, 인도에서 전해오는 부처님 당시의 원래공안은 무생계에서 지공스님이 지시하는 "衆善不修 諸惡不造"의 8자 - 이것 만이 비로자나불로부터 문수보살이 받아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바에 전한 공식 화두이다.
이 화두는 선한 생각도 악한 생각도 모두 버리라. 즉, 한 생각도 내지 않을 때 나의 본래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가? - 를 궁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화두의 전부이다.
그러나 본래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찾아서는 안된다. 부처의 자취를 찾으면 억겁을 앉아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옛선사들이 경계하신 바 있다.
자취가 끊어지고 말길이 끊어졌는데(言語道斷) 어떻게 부처님의 자취를 찾는단 말인가? 비록 그렇다할 지라도 간절히 부처를 향하여 삼매를 이루는 곳에 홀연히 한 소식의 경지가 나타나야 이 집안의 일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서장(書狀)에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의 어록이 나온다."선은 고요한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끄러운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있는것도 아니고, 사량분별(思量分別)을 하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고요한 곳과 시끄러운 곳과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와 사량분별처를 버리지 않고 홀연히 눈이 열려야 비로소 이 집안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고려 때의 보조국사는 이 훈계를 보고 홀연히 마음이 열렸다고 한다.
공부를 하면 그 정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마음의 편안한 경계를 느끼게 된다. 박사학위 공부하는 셈치고 몇년간 짬지게 공부하시면 부처님이 머리를 어루만지며 박사학위의 1억배의 표창을 주실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삼처전심(三處傳心), 즉, 염화미소, 다자탑전 반분좌(설법도중 가섭이 뒤늦게 오자 자리를 나누어 부처님과 나란히 앉게했다), 곽시상부(부처님 열반시 가섭이 도착하자 두발을 곽밖으로 내보이심) 등 많은 비밀한 뜻을 보이신 바가 있지만, 그 뜻을 참구하라고 가르치시지는 않았다. 쉽고 쉬운 일상 생활의 비유만을 들면서 진리를 가르치고자 애쓰셨을 뿐, 참선이니, 화두니 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는 화두란 것이 없었고 유행하지도 않았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衆善不修(중선불수) 諸惡不造(제악부조) 〃온갖 착한일도 닦지 말고 온갖 악한일도 짓지 말라" 이 문구는 비로자나불이 설한 것이고 문수보살이 전한 문구이다. 하고 설법함으로서 미지의 화두를 전한것이며, 계법이란 형식으로 인도의 조사스님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다가 지공화상에 의하여 고려인에게 전해 졌으니 이 계첩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알수 있다.
6. 지공스님의 행장
전계화상 지공스님은 인도의 스님이다. 인도왕족으로 18세때 나알란다寺의 비나야바드라(律賢)스님에게 출가하였고 19세에 남인도 랑카아國 길상산 정음암에 가서 사만다프라바자(普明)스님으로 부터 법을 받았다.
지공스님의 선맥 법계를 살펴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의 선맥은 가섭에게 전해지고 그로부터 22대에 마라라가 있었는데 그에게 두사람의 제자가 있었다. 한분은 학륵나로서 그 문하에서 보리달마가 출현하였고, 또 한분은 좌다구라로서 그로부터 전해져 107대가 보명스님이며 지공스님은 보명스님으로 부터 법을 받았으므로108대 조사라고 지공스님 스스로 밝힌바 있다. 달마스님으로 부터 중국선맥이 전개되었고, 서천에는 그들 나름대로 선맥이 전해 내려왔다.
지공스님은 중국의 보리달마스님 계통이 아닌 인도 계통으로 전해 내려온 108대 조사스님이다.
지공스님은 북인도를 넘어 감수, 운남, 라오스, 귀주, 양주를 거쳐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 이르렀는 데 때는 태정연간(1324-1327)이다. 원나라 황제로 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고 불교계의 존숭을 받았다. 고려의 나옹, 무학 등의 스님들이 찾아와 고려인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데다 나옹을 수제자로 여겼으므로 나옹의 고려방문 권유를 받아들였으며 또,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을 꼭 보고 싶은 염원이 있어 고려를 방문하게 되었다.
지공스님이 우리나라에 온것은 충숙왕13년(1326) 3월로 개경의 감로사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마치 부처님이 오신것처럼 예배하고 환영했다. 스님은 약 20일간 여러절을 다니며 환대를 받은후 4월에 금강산에 올라가 법기도량에 참배했다. 이때 유점사에서 계를 설했는데 나옹스님에게 준 계첩이 전해져 오고 있다.
스님은 우리나라에 2년 8개월동안 머무시다가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그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문수최상승무생계"를 설했다.
당시 수계한 많은 계첩중 1첩이 해인사 목조 비로자나불 부처님 복장에서 발견된것이다. 이와같은 "문수최상승 무생계첩"은 현재 국내에 3첩이 발견된바 있는데 1326년 4월 묘덕이라는 여신도에게 준것, 나옹스님에게 준것, 이번에 해인사에서 발견된 1326년 8월에 각경에게 준것 등 3본이다. 3본은 모두 같은 내용인데 그중 훼손되지 않은 완전본은 해인사에서 출현한 이번 계첩이다.
스님은 원나라로 돌아가 혼란한 원나라 말기의 시세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고 10년동안 묵언을 하고 지내시다가 원나라 귀화방장에서 입적하였고 유언에 따라 달현이라는 제자가 유골을 고려로 모시고 와서 나옹스님이 거주하는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부도를 모셨다. 회암사는 강이 3개, 산이 2개 모이는 곳으로 인도의 마라난타사와 지형이 비슷하므로 절을 짓는 것이 좋겠다는 지공스님의 권유에 따라 지은 절이다.
지공스님은 변발을 하고 흰수염을 길게 길러 위엄이 넘쳐흘렀고 참선을 오래하여 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듯날카로왔으니 나옹선사는 영정에 쓴 찬에서 소름끼치는 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원나라 황비에게도 "너는 내 제자다" 라고 할 정도로 담이 크고 당당하였다고 한다.
7. 당시의 고려사회
원나라는 1206년 몽고의 쿠빌라이가 건국한 나라로 15대 163년간 지속했다. 징키스칸은 한때 전세계를 정복했고 그 후예들은 마침내 중국을 정복하여 원을 세웠다. 우리나라에는 40년 동안에 걸쳐 7차례 쳐들어왔는데 고려인들은 처인성싸움 등 끊임없는 항쟁을 해보았지만, 그들의 기마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나라는 고려를 100년간 지배하게 된다. 충열왕(1274) 이후 원나라의 공주를 고려왕실에 보내 왕비로 책봉하고 왕도 그들이 승인하였다. 따라서 고려말의 충열, 층선, 충혜,충숙, 충목, 공민왕, 우왕, 공양왕 등 고려왕은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이고 왕비 또한 대대로 원나라 황실에서 시집왔다.
당시의 고려국 사정을 살펴보면, 몽고의 흉악한 말굽은 고려를 완전 점령하여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에 불과했으며 그들의 부당한 요구대로 금, 은, 인삼,여인 등 조공을 바쳐야 했으니 사회분위기는 침체되고 희망이 없는 사회였다.
원나라의 지배하에서 어둡고 답답한 고려사회였으나 본래 불교사회인만큼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절대적이어서 지공스님이 오시자 황족, 귀족, 사족, 승려, 일반신남신녀에 이르기 까지 소견 있는자는 "문수사리보살 최상승무생계"를 받고 환희작약하며 희망에 부풀었다.
지공화상의 계첩을 받고 교만하던 귀족들이 겸손해졌으며, 술먹던 자들은 술을 끊고, 고기먹는 자들은 살생을 금지했으며, 무속을 하던 자들은 무속이 뜸해졌다고 지공 화상 비문에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적고 있다.
8. 우리의 각오
우리는 676년전 고려시대의 선조들이 인도승 지공화상으로 부터 문수최상승무생계를 받고 환희작약하던 그 심정을 그려볼수 있다.
시대가 6백여년이 지나갔다 하더라도 마음자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비로자나부처님이 문수보살에게 전한것을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바에 설하여 그것이 대대로 인도 조사에게 전승, 지공화상에게 이르고 지공화상이 고려인들에게 설한 "문수최상승 무생계첩!" 이 계첩의 뜻을 잘살펴 문안대로 닦으면 지공스님에게서 계를 받은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이계첩을 읽는 분들은 "衆善不修 諸惡不造" 의 뜻이 무엇인지 참구하면 큰 이익이 있을것이다.
이 계첩은 옛날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오는 계문의 원안과 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므로 귀에 한번 스쳐도 깨달을수 있다고 계문에 밝히고 있으니 영험과 소득을 지공선사께서 보장하고 있다할 것이다.
계첩문안에 나오듯이 고해를 건느려면 부처님의 자항(慈航)을 빌려 타야 하는데, 자항이란 불교를 말한다.
불교는 호한하여 팔만장경이 있고 온갖 수행방법이 있지만, 이 계첩은 5백 여자의 짧은 글로 금강경의 반야공과 관련이 깊은 최상승무생계를 설하여 성불하는 첩경을 제시해 놓고 있다.
계첩의 문안에 보이는 것처럼 깊이 사유하고 수습하여 영원토록 부처님 법을 신봉함으로써 다함께 어지러운 이 나룻터를 떠나 깨달음의 저 언덕에 오르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이다.
願以此功德(원이차공덕) 원컨대 이 공덕으로써
普及於一切(보급어일체) 널리 일체에 미치게 하시고
我等與衆生(아등여중생) 우리들과 중생들이 함께
皆共成佛道(개공성불도) 다 같이 불도를 이루어지이다.
강경구의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서
수많은 문화유산, 불보종찰 통도사 양산의 보물들 ④
10) 통도사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놓은 장생표의 하나로, 절의 동남쪽 약 4㎞지점에 거친 자연석면 그대로 서 있습니다. 이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며, 국장생이라는 명칭은 나라의 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장생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등의 구실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장생은 경계표와 보호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제작된 것으로, 나라의 통첩을 받아 세웠다는 글이 이두문이 섞인 금석문으로 새겨져 있어 국가와 사찰과의 관계를 알아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양산에서 통도사 쪽으로 35번 국도를 따라가면 통도사 입구를 좀 못 미쳐 국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러나 양산의 다른 문화유산과 마찬가지로 문화유산에 관해 팻말은 전면 없이 양산에서의 문화유산을 찾기 위해서는 어렵게 고달프게 물어서 찾아야만 합니다. 몇 군데 문화유산에 대한 안내팻말이 있기는 하나 그곳에는 아름다운 문화유산에까지 문화유산을 대해도 디는 것인지 정말 한심한 상황이었습니다.
< 국장생석표 >
11) 통도사은입사동제향로(보물 제334호)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를 총칭하는 말로 화안, 향완이라고도 합니다. 향로는 모양에 관계없이 향을 피우는 도구를 총칭하는 말이고, 화완 ․ 향완은 밥 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갖춘 향로만을 말합니다.
높이 33㎝, 앞지름 30㎝, 받침대 지름 24.7㎝인 이 향로의 전체는 굵고 가는 은 ․ 금실을 이용하여 연꽃무늬, 덩굴무늬, 봉황, 구름무늬로 가득 차게 새겼습니다. 몸통 중앙 네 곳에 원을 두르고 그 주위에 꽃무늬가 있습니다. 현재 원 안에 범자를 찍은 둥근 주석 판을 4개의 못으로 고정시켰는데. 이것은 나중에 보수한 것입니다. 원 사이 공간은 덩굴무늬가 새겨 있으며, 몸통 아래에는 연꽃무늬가 돌아가며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몸통의 덩굴무늬 사이를 은판으로 채운 것은 이 향로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받침대는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위쪽은 연꽃무늬, 아래쪽은 덩굴무늬, 중앙은 넓은 공간에 구름문과 봉황이 굵고 가는 선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입 주위의 넓은 테인 전의 일부가 약간 휘어진 것이 흠이지만, 외형상 새긴 무늬가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보박물관에 보관된 이 보물을 마주 했을 때 그 빛나고 찬란한 보물에 대해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통도사 은입사 동제향로 >
12) 통도사 봉발탑(보물 제471호)
영축산에 자리한 통도사는 우리나라 3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사찰이며,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운 절입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와 승복의 하나인 가사,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모시고 창건하였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중요한 절이었습니다.
이 봉발 탑은 통도사의 용화전 앞에 서 있는 것으로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본 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 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희귀한 모습입니다. 받침부분의 돌은 아래 가운데 윗부분으로 r성되며 장고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입니다. 받침돌 위에는 뚜껑과 높은 굽 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이 있습니다.
만들어진 연대는 연꽃조각과 받침부분의 기동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지만. 받침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물과는 품격의 차이가 느껴지므로 동시대의 작품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통도사 봉발탑, 기단과 탑신 부위를 파손이 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엄청난 위대한 보물, 많은 통도사 보물 중에서도 단연 제일인 듯한 그런 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탑신의 틈바구니에 수많은 동전을 끼어 놓는 그런 몰지각한 행동은 여기서도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 통도사 봉발탑 >
13)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보물 제738호)
문수사리보살최상무생계경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설법한 내용을 경전에 담은 것입니다. 원나라에 귀화한 인도의 고승 지공이 고려 금강산법기보살도량에 참가하였을 때, 고려 충숙왕이 지공에게 설법을 요청하자 이 책을 내놓고 설법하였다고 합니다.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3권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으며, 크기는 세로 26.1cm, 가로 19.2cm입니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쓴 이색의 간행기록을 통해 1353년에 강금강이 간행한 것을 고려에서 다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예안군 우공이 옮겨 새기려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성암사의 시주로 1386년 5월에 완성하여 간행한 것입니다.
이 책은 한국 ․ 중국 ․일본에 전하고 있는 여러 대장경 목록에 책이름이 나오지 않은 유일본으로, 불교의 교리연구에 있어서 그 자료적 가치가 크게 평가됩니다.
<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 >
14) 감지금4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46>(보물 제757호)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입니다.
이 책은 당나라의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주본 80권 가운데 권46으로, 불부사의 법품의 전반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검푸른 빛이 도는 종이에 금색으로 정성껏 글씨를 써서 만든 것이며, 표지부분은 떨어져 나가 새로 붙여 놓은 것입니다. 종이를 길게 이어 붙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으며, 펼쳤을 때의 크기는 세로 28.3cm, 가로 758.2cm입니다.
권 앞부분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가 금색으로 그려져 있고, 본문의 내용이 금색글씨로 정성껏 쓰여 있습니다. 변상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이 약간 훼손되었으나 그 밖의 상태는 대체로 양호합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만들어진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종이의 질이나 그림과 글씨의 솜씨 등으로 미루어 14세기에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 화엄경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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