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관곡지에서 - 수련 (睡蓮) / 完

2014. 9. 1. 18:13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시흥 관곡지에서 - 수련 (睡蓮) / 完

                               / 20140827 수요일, 갬 & 맑음

 

                               수련 (睡蓮)

睡蓮

(Nymphaea tetragona var. angusta)

수련과(睡蓮科 Nymphaeaceae)에 속하는 다년생 수생식물.


 

 
 
 
 
    뿌리줄기는 굵고 짧으며 밑부분에서 많은 뿌리가 나온다. 뿌리에서 나온 긴 잎자루에 달리는 두꺼운 잎은 난형으로 물 위에 뜨고 화살촉과 같이 중앙을 향해 갈라져 있다. 꽃은 6~7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밤에 꽃잎이 접히므로 수련이라고 한다.

    꽃은 3일 동안 피었다 닫혔다 한다. 열매는 꽃받침에 싸여 있으며 물 속에서 썩어 씨를 방출하는데, 씨는 육질의 씨껍질[種衣]에 싸여 있다. 시든 꽃은 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열매도 물 속에서 맺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연못의 관상식물로 적합하다.

    민간에서는 지혈제로 이용한다. 뿌리를 나눠 심거나 씨를 파종한다. 중국·소련·인도·일본에도 분포한다. 수련의 속명(屬名) 님파이아(
Nymphaea)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물의 여신 님프(Nymph)에서 유래되었다.

    수련속
(睡蓮屬 Nymphaea) 식물은 열대지방과 온대지방에 40여 종(種)이 있는데, 한국에는 수련과 애기수련(N. minima)이 서식한다. 이중 애기수련은 황해도 장산곶과 몽산포의 바닷가와 근처 늪에서 자라는 한국 특산식물이다. 수련을 포함한 수련목(睡蓮目 Nymphaeales) 식물은 식물진화적으로 중요한 식물인데 쌍떡잎식물로 분류되면서도 떡잎을 1장 가진다. 또한 안쪽에 있는 꽃잎일수록 수술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 수술이 변하여 꽃잎이 되었다는 설을 뒷받침해준다.

                                                      李相泰 글

 

 



    내용을 인용하시려면 인용 부분에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아야 합니다.
"수련"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2s3313a




수련 - 열대수련

 

 

 




 


 



 

 




 




 




 




 




 



 


 



 

 



 

강희맹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강희맹(姜希孟, 1424년 ~ 1483년)은 조선 초기 문신이다.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하며 화가이기도 하였다.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私淑齋), 국오(菊塢), 운송거사(雲松居士)등을 사용하였고, 시호는 문량, 본관은 진주이다. 의정부좌의정 김질의 아들 김성동의 장인이다. 경기도 출신.

생애[편집]

   돈녕부 지사 강석덕(姜碩德)의 차남이자 소헌왕후의 조카이며, 문종,세조와 이종간이다.(강석덕은 세종의 아랫 동서)[1]

세종 29년(1447년) 문과 친시에 을과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예종  남이를 죽인 공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성종 때에는 이조판서·좌찬성 등을 지냈다. 그는 서화와 문장이 뛰어났으며, 그가 죽은 뒤 서거정에 의하여 유고가 편찬되었다. 저서로 <사숙재집> <촌담해이> 등이 있다.

   142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44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라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장과 서화에 모두 뛰어나 도화서의 제조를 맡기도 하였다.[1] 묘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87호로 지정되어 있다.[2]

가족관계[편집]

  • 증조부 : 강시(姜蓍)
    • 할아버지 : 강회백(姜淮伯)
      • 아버지 : 강석덕(姜碩德)
      • 어머니 : 심온(沈溫)의 딸
        • 형님 : 강희안(姜希顔)
        • 동생 : 영빈 강씨 - 태종의 후궁
        • 부인 : 안숭효(安崇孝)의딸
          • 장남 : 강귀손(姜龜孫)
          • 자부 : 송요년(宋遙年)의 딸
            • 손녀 : 기진(奇進)에게 출가
              • 증손자 : 기대승(奇大升)
          • 차남 : 강학손(姜鶴孫)
          • 자부 : 신면(申㴐)의 딸
            • 손자 : 강영수(姜永壽)
            • 손자 : 강향수(姜享壽)
              • 증손자 : 강오복(姜五福)
                • 4대손 : 강극검(姜克儉)
          • 장녀 : 성세명(成世明)에게 출가
          • 차녀 : 김성동(金成童)에게 출가
          • 삼녀 : 권만형(權曼衡)에게 출가
        • 측실 : 이름 모름
          • 서자 : 강오손(姜鰲孫)
          • 서자 : 강종손(姜螽孫)

작품[편집]

   작품집으로 스스로 엮은 《금양잡록》, 《촌담해이》그리고 사후에 서거정 성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사숙재집》이 전한다.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3]

  • 촌담해이: 촌담해이는 금양 지방의 민담과 관직생활 중 들었던 여러 설화를 모은 것이다. 신기하거나 이상한 이야기, 음담 패설 등을 수록하였다.[3]
  • 사숙재집: 서거정이 강희맹 사후에 그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한시와 교육, 삶의 지혜 등에 대한 글들을 담고 있다.

강희맹은 《금양잡록》에서 "경기에서는 동풍이 불 때 가뭄이 심해 어떤 해에는 논 밭의 물이 모두 마른다."고 푄 현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4]

독조도 등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주석[편집]

  1.  이동:  서울특별시, 서울 육백년사
  2. 이동 강희맹의 묘
  3.  이동:  구인환 편, 촌담해이(우리고전 다시읽기 32), 신원문화사, 2006
  4. 이동 정인경, 청소년을 위한 한국과학사, 두리미디어, 2007, 117쪽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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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계곡’ 서울시 문화재 지정

-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산 백운동(白雲洞) 풍경
라펜트l기사입력2014-08-28
 

겸재 정선의 '백운동'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서울시는 삶의 반세기를 인왕산에서 살며 인왕산 곳곳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던 
겸재 정선(1676~1759)의 ‘장동팔경첩’ 중 ‘백운동’에 그려진 ‘인왕산 백운동 계곡’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보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백운동은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다섯 명소(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청운동) 중의 하나로 
조선전기 당대의 사대가로 칭송받던 김수온, 이승소, 강희맹과 점필재 김종직 등이 
시로써 그 경치의 수려함을 표현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같은 
역사지리서에서도 명승지로 기록돼있다. 
 
또한 백운동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백운동천은 
조선시대 한양의 도성 내 공간의 중심축이자, 
하수도인 청계천이 발원하는 물길 중의 하나라는 기록이 
‘준천사실(濬川事實)’, ‘한경지략(漢京識略)’, ‘육전조례(六典條例)’,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등 
고문헌과 ‘한양도성도’ 등 고지도에서도 확인된다.

   현재 백운동 계곡은 종로구 자하문터널 상부 계곡 일대에 해당하며 
터널공사 및 인접지역 주택건설 등의 개발로 인해 일부 변형은 이루어졌지만 
겸재 정선의 ‘백운동’ 화폭 속 원지형이 아직 남아 있다.
 
이에 따라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전통적 명승지(名勝地)로서 보존가치가 커 
인왕산 백운동 계곡이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할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고 의결(2014. 8. 8.)했다.
 
서울시는 인왕산 백운동 계곡 서울시 문화재 지정에 대해 9월 26일까지 
각계의 의견수렴 후, 문화재위원회 최종 심의를 거쳐 
10월 중 서울시 기념물로 최종 지정고시할 예정이다.

 

   또한 서울시 하천관리과는 청계천 상류 지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백운동천의 복원 타당성조사와 기본계획을 수립 중에 있어 
“백운동 계곡 일대의 수려했던 자연경관의 회복과 청계천의 
자연생태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서울시 기념물은 화양동 느티나무, 세검정 터, 화의군 이영 묘역, 
불암산성, 인왕산 수성동 계곡 등 총 36건 지정돼있다. 
기념물은 서울시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무형문화재) 중 
한 종류로 역사 유적지, 고고 유적, 전통적 경승지, 식물 중에서 
 학술적ㆍ역사적ㆍ예술적 가치가 큰 것을 지정한다.
 
문의_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02-2133-2639)


한양도성도(1770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상의 백운동


 
현재 백운동천 바위글씨 근경 - 광무7년(1903) 가을에 동농 김가진이 새긴 글씨



 

서울시, 겸재 정선 ‘백운동 계곡’ 市문화재로 지정

글자크기
[헤럴드경제=최진성 기자] 겸재 정선(1676~1759년)의 ‘인왕산 백운동 계곡’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됐다. 

    서울시는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백운동’에 그려진 ‘인왕산 백운동 계곡’을 시 기념물로 지정, 보존한다고 21일 밝혔다. 기념물은 시 지정문화재의 한 종류로 학술적,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재를 지정한다.

장동은 백악산 계곡에서 인왕산 남쪽 기슭에 이르는 일대로, 현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에 속한다. 장동팔경첩은 장동 일대의 풍광이 담겨있다. 현재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본이 있다. 



헤럴드경제



    이중 ‘백운동’은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다섯 명소(삼청동ㆍ인왕동ㆍ쌍계동ㆍ백운동ㆍ청운동) 중 하나로, 조선전기 사대가로 칭송받던 김수온, 이승소, 강희맹, 김종직 등이 시로써 경치의 수려함을 표현하곤 했다. 현재는 자하문터널 상부 계곡 일대에 해당하는데 터널공사, 주택건설 등으로 인해 일부 변형됐다.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정선의 백운동 화폭 속에 원지형이 남아 있는 만큼 전통적 명승지로서 보존가치고 크다고 보고 ‘인왕산 백운동 계곡’을 시 기념물로 지정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한달간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심의를 거쳐 10월 중 최종 고시할 예정이다. 이창학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장은 “시에서 청계천 상류 지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백운동천의 복원 타당성 조사와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면서 “백운동 계곡 일대의 수려했던 자연경관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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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스커스 

- 아욱과의 열대무궁화 종류(상록성 관목)




 

부처꽃

 

- 가난한 자의 꽃 공양물에 쓰였던 꽃으로, 

이러한 연유로 부처꽃이라는 이름이 붙혀졌다.

 

부자들을 배를 빌려서 연못한 가운데로 가서

연꽃을 꺾어 부처님께 꽃공양을 올리는 데 비하여

 

가난한 자(貧者)들은 배를 빌릴 삯이 없어 연못가의

수변식물(水邊植物)인 이 소박하고 소담스러운 꽃으로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성스럽게 꽃공양을 올렸다.


그날밤 부처님께서 이 꽃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들의 꿈 나타나셔서

오늘 여태까지의 다른 꽃공양 보다 무척 청정한

꽃공양을 받았노라 하시며 즐거워하셨다.

이  꿈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후로 이꽃으로 꽃공양을 많이 올렸다고 한다.


 

이 소박한 꽃공양의 의미는 무릇 모든 공양이란 

공양물은 그 크기나 외형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양을 올릴 때의 청정하고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후로  분홍색 꽃의 이 수변식물은 부처꽃으로 불리워졌다는 설화가 있다.


 



 

또다른

부처꽃의 전설  

 

심신이 곱고 깊은 불자가 부처님께 연꽃을 봉양하러 연못에 갔는데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물이 불어 연꽃을 딸 수 없었다.

어쩔줄 몰라하는 불자 앞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보라색꽃을 가리키며 대신 이꽃을 꺽어 바치라고 했다

그래서 연꽃 대신 꺽어 부처님께 바쳤는데 이후 그 보라색 꽃을

부처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우란분절(음력 715) 부처꽃을 불단에 바친다고 한다.


 

부처꽃의 꽃말 : 슬픈사랑. 비련

 

부처꽃의 유래(전설):

 

부처꽃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두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 하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가 있다.

즉 넓은 들판에 홀로 우뚝하게 솟아 자라난다는 데서

그 이름의 유래를 찾을 수가 있고

두번째는 이꽃을 부처님 앞에 많이 올렸다고 해서

'부처꽃'이란 이름을 얻었다고도 한다

 

 

재(齋)를 지낼 때, 봉투의 두께로 신자들의 성의를 판단하는 

소위 일부 사판승(事判僧)들은 

절마당에 있는 연못가에 이 부처꽃을 키우며

날마다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뜻깊은 풀꽃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화가의 삶 (24)

강희맹 강희안 강희언 | 한국화가의 삶
e-sang 2008.08.28 12:28



 

 

 강희맹-독족도

 

 

 

 강희안-고사관수도

 

 

 

 강희언-사인삼경도

 

 

 

 

 강희언-사인휘도

 

 

 

 강희언-산수도

 

 

 

 

 강희언-인왕산도

 


 

 

자생 연꽃 :노랑어리연꽃




 

 


관곡지를 둘러보고 나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각종 귀화종연꽃들과 열대수련 등의 화훼종 연꽃과 수련들은

잘 배치되어 있고 그 단아함과 청정함을 뽐내고 있었서

이들을 가꾸고 돌보는 관계자들의 노고가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지만,

 

 다만 우리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사후의 하늘연꽃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연화화생(蓮花化生)을  뜻하는

우리 고유의 수련과 연꽃들에 대한 배려가 이 노랑어리연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이 연화화생의 정신세계는 조선조에 지은 심청전에서도

심청이가 인당수에서 바다로 뛰어든 후에 용궁을 거쳐서 

 연꽃속에서 다시 태어나 왕후가 된다는 소설과 판소리 대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한민족 고유의 사상적 기반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우리 토종 수련인 각시수련, 애기수련, 개연, 남개연, 왜개연, 어리연 등에

대한  설화를 테마로 한 우리 연지(蓮池)를 만들어

각종 우리 연들에 대한 문화유적이나 고미술품에서

나타난 것에 대한 설명문을 곁들인다면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닌 ,오늘이 있기까지의 어제에 대한

연결고리가 있어서 금상첨화라고 아니 할 수 없겠다.

 

면면히 이어져 오는 문화적인 정서가 내일을 준비하는 데에도

밑거름이 되는 자양분이 될 수 있거니와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정체성을 확립해주고 더 낳은 미래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외래종 일년생 귀화식물인 부레옥잠




 



 

목화 꽃

 

- 덜 여문 목화열매는 다래라고 하여

군것질 거리가 없던 시절에

아이들의 달착지근한 간식거리가 되었다.




 


 

관곡지의 중국 남경의 전당지에서 강희맹이 씨를 얻어온  옥순(玉純) 연꽃

고려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던 문익점이 당시 금수작물(禁輸作物)인

목화씨를 붓뚜껑에 숨겨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목화 ......


우리나라에서 귀화식물중 이 두 종류가 

도입유래에 대한 확실한 사실기록(史實記錄)이 있는 식물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여행(전호태) | 서평및소개(소장도서)
mooncourt 2013.01.02 10:18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2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삶을 읽다 



고분벽화, 고대 사회의 이면을 말해주는 역사적 통로
 


   그림은 만국 공통ㆍ시대 공통의 언어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그림만큼 좋은 것이 없다. 왜? 그림이 훨씬 쉬우니까. 인터넷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디자인된 그림을 매개수단으로 삼았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고대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사회에서 의사소통은 상당기간 문자가 아닌 그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쐐기문자가 출현하기까지는 천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데모틱demotic이라 불리는 ‘기호’에 가까운 문자가 되기까지 소요된 시간도 2천 5백 년 가량이었다. 
   요컨대 고대 사회가 남긴 그림은 해당 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요소다. 그림은 문자 이상으로 많은 이면의 이야기를 제공해준다. 고분벽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고분벽화는 고대 사회의 다른 여러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전 펼쳐졌던 삶의 온갖 모습과 생각을 현재와 이어주는 귀중한 역사적 통로이자 증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인의 삶을 담은 그릇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게 고분벽화는 역사 속 한 시대를 나타내는 전시 포스터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여러 종류의 책 표지, 특정 기관이나 단체의 광고지 디자인 재료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라. 강서대묘의 주작은 철학연구서의 표지를 장식한다. 무용총의 사냥 장면은 궁술 관련 단체의 광고지에 등장한다. 무용총의 수박희手搏戱 장면이나 무용 장면은 한국고대사 분야의 저서에 시대 분위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쓰인다. 이처럼 오랜 기간 고분벽화는 상징적 기호 정도의 쓰임새를 넘어서지 못했다. 고분벽화가 벽화 이면에 감춰진 역사적 사실 혹은 정황을 파악하기 위한 원재료로 사용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던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 전호태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 두 번째 책인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여행》을 통해 이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읽는 통로를 펼쳐 보인다. 한국 문화의 원형을 담고 있는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인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가 고구려 역사, 문화의 흐름과 그대로 닿아 있는 역사문화 자료이자 고구려인의 종교관과 신앙세계를 담은 보고임을 가능한 한 알기 쉽게 설명한다. 고구려 벽화고분이 고구려의 역사적 경험이나 한국 고대 문화의 빼어난 수준을 담아낸 작품이라는 사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짚어냄으로써 독자 여러분을 고분벽화를 읽는 통로로 안내한다. 그 길을 따라가 보자. 



고구려 고분벽화를 읽는 길 

고분벽화, 고구려로 오다
 


   고분벽화는 말 그대로 무덤 안 공간의 벽과 천장을 캔버스 삼아 그린 그림을 말한다. 벽과 천장이 나무판자로 마감되었을 수도 있고 벽돌이나 돌로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지만 면을 여러 가지 방식을 동원하여 잘 다듬기만 하면 그림을 그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이 고분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을까? 


   기원전 1세기 중엽, 압록강 중류와 혼강渾江 일대 예맥 사람들의 나라들 몇이 모여 소국 수준을 벗어난 큰 나라 고구려의 건국을 선언했다. 예맥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모여 만든 고구려 사람들은 오랜 기간 시신을 넣은 관을 강돌로 덮어 마무리하는 돌무지무덤을 고유의 무덤 양식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의 한漢 문화와의 접촉 이후 한인들의 돌방무덤 양식을 받아들인다. 돌방무덤은 강돌이나 판돌로 벽과 천장을 만들어 그 공간 안에 관을 넣고 돌방 바깥은 흙으로 덮는 방식이었다.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의 변화는 새롭게 생겨난 무덤 내부의 공간, 즉 돌방을 장식하는 문화까지 만들어냈다. 공간을 채우거나 공간을 이루는 면, 즉 돌방의 벽과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하는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중국 한인들은 장식에 능했고, 관념을 형상화하기를 좋아했다. 산 자들의 집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거처에도 온갖 장식을 남겨두었다. 한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고구려 사람들은 한인들의 이 같은 문화, 구체적으로 죽은 뒤의 세계나 죽은 자들의 새 삶터를 형용한 그림과 온갖 장식물들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벽화미술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국에서 고구려로 수용되었다. 



고구려, 독자적인 고분벽화를 남기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는 3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이 가운데 3세기 중엽부터 5세기 초까지 제작된 고분벽화는 초기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 고분벽화의 공통주제는 생활풍속이다. 무덤 주인 부부의 일상생활 모습, 무덤 주인 생전의 기억할 만한 사건이나 무덤 주인의 신분 및 지위를 나타내는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생활풍속이 주제인 고분벽화에 의식주를 포함한 생활 현장의 이모저모가 그려지고 무덤 주인의 삶에서 기억될 만한 장면이 함께 묘사되는 것은 생전의 삶을 지하세계에 재현하면서 내세의 삶을 기약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이의 생전 생활상이 그대로 다시 그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벽화에 죽은 이와 그의 자손이 바라는 현재와 내세 삶의 모습이 상당 부분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장의미술에서 공통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기원, 소망’이고 ‘주술적 효과’라는 점에서 보면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다. 


   5세기 중엽부터 5세기 말에 걸쳐 제작된 중기 고분벽화는 초기에 비해 주제가 다양하다. 생활상을 재현한 것 외에 상징성이 높은 장식무늬를 주제로 한 것, 천문신앙을 바탕으로 성립한 사신四神을 주제로 삼은 것이 모두 발견된다. 또한 중기 고분벽화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동북아시아의 패권국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 모습을 담고 있다. 연꽃무늬 고분벽화는 고구려 사람들 사이에 불교적 내세관이 크게 유행했음을 보여주며, 낯선 서역인의 얼굴과 팔다리에 뱀이 감긴 우주역사의 모습은 당시 고구려가 활발한 대외 교류를 행했음을 알려준다. 


   6세기 초부터 7세기 전반은 후기 고분벽화가 제작되는 시기다. 후기 고분벽화의 주제는 사신이다. 이 시기에는 장식무늬나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가 제작되지 않는다. 후기 고분벽화가 제작되던 시기의 고구려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대외관계에서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귀족세력 간 권력투쟁, 기존 불교세력과 신흥 도교세력 간 갈등으로 정치사회적 안정이 깨지면서 문화적 역동성도 약화된 것이다. 중국 남북조에서 유행하던 미술양식이 그대로 옮겨진 것처럼 보이는 고분이 여럿 확인되는 점도 이 같은 당시 고구려의 혼란을 말해준다. 그러나 후기 고분벽화 시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강서대묘나 강서중묘는 고구려 문화의 저력을 재삼 확인시켜주는 좋은 사례다. 



고구려 고분벽화, 지키고 보존해야 할 우리의 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그러나 웃을 수만은 없다
 


   2004년 7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벽화고분과 일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고구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한국 고대사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가 세계적 수준의 문화유산을 남겼음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구려 벽화고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활동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깊이 빠져든 일본의 한 노老화가가 중심이 된 민간단체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의 지속적인 노력이 주위의 호응을 얻으면서 추진운동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90년대 초부터 ‘고구려 열기’에 빠져든 국내에서는 몇몇 연구자들이 고구려 벽화 고분 보존과 관련한 학술적 소견을 표명했을 뿐, 정작 이에 호응하면서 국민적 관심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려는 단체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보존을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분이라는 특수한 건축물의 일부이자 1300년에서 17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회화 작품이다. 따라서 보존과 관리가 대단히 어렵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고구려 고분이 위치해 있는 중국과 북한에게는 최소한의 정보 공유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해방 후 중국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 조사는 발굴 과정과 내용에 대한 자료의 일부만 외부로 공개되었다. 어떠한 보존 조치를 취했는지, 벽화 상태의 변화가 정기적으로 점검되고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기 어렵다. 대다수 고분벽화의 현재 보존 상태 역시 외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우리에게 고구려 고분벽화는 책 표지 재료, 포스터 재료, 광고 재료로만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북한과 중국 내 고구려 벽화고분 보존 관리 방안을 꾀하고 인력과 기술과 비용을 투입할 의지를 먼저 표명해야 한다. 우리부터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적 문화자산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안팎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모색’을 진행해야 한다.

 

 

- 다음 블로그<mooncourtMooncourt> Mooncourt 님의 글 중에서 전재.... 


 




 



 

만강홍(萬江紅)

 

-  중국에서 서해의 조류를 따라 씨가 떠내려 온 물고사리 종류.

서해안에 가까운 강이나 연못에서 자라고 있다.

 

가을이 되면 이 물고사리가  붉게 물들어 양자강이

온통 붉게 물든다 하는 유래에서 만강홍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홍수련(紅睡蓮)과 네발나비과의 표범나비

 


 

고등해법  /   ZUM 학습백과

도자설(盜子說)(강희맹)

목차

핵심 정리


갈래

한문 수필, 고전 수필

성격

교훈적, 훈계적, 설득적, 우의적

제재

도둑 부자(父子)의 일화

주제

자득(自得)의 중요성

특징

  • '일화(도둑의 이야기) + 교훈'의 2단 구성
  • 유추를 통해 아들을 훈계하고 있음

연대

조선 성종 15년(1484년)

출전

"사숙재집(私淑齋集)"


작가 소개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 사대부로서의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 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했다. 저서에 "사숙재집(私淑齋集)"이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작품


강희맹, '승목설(昇木說)'


현재 자신의 위치를 낮은 것으로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오르려고만 하면 언젠가는 몸을 다치게 되므로, 오히려 안전한 가운데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교훈적인 내용을 유추의 방법으로 쉽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자설'과 상통한다.


이해와 감상


  •    '도자설'은 글쓴이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쓴 '훈자오설(訓子五說)'중 하나로, 실제로 경험한 일을 서술하여 독자에게 교훈을 전달하는 교술 갈래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     글쓴이는 아들에게 스스로 터득하는 '자득(自得)'이 학문 연구에서도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지극히 천하고 몹쓸 짓을 하는 도둑의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아버지 도둑이 아들 도둑에게 스스로 지혜를 깨우치도록 하기위해 일부러 아들을 창고에 가두는 이야기('발단- 전개- 위기- 결말'의 서사적 구성 방식을 취함)를 먼저 제시한 뒤, 이러한 도둑 이야기에서 유추하여 아들에게 훈계하고자 하는 내용을 뒤에 제시하고 있다.


  •    이처럼 글쓴이는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일화+교훈'의 2단 구성 방식과 유추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의도를 아들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 '훈자오설(訓子五說)'의 구성


제목

제재

주제

도자설(盜子說)

도적의 생활

자득의 중요성

담사설(啖蛇說)

뱀을 먹는 풍습

탐욕과 방탕에 물들지 말아야 함

등산설(登山說)

등산하는 자의 습성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야 함

삼치설(三雉說)

꿩의 생태

방탕한 친구를 멀리하고 성품을 굳건히 해야 함

익통설(溺桶說)

양반집 자식의 오줌 버릇

나쁜 버릇은 고쳐야 함


작품 연구실


▶ '도자설'의 창작 동기 및 글쓴이의 의도


  •    강희맹의 아들 '귀손(龜孫)'이 문음(門蔭)으로 출사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을 하러 돌아오자, 어떤 사람들은 "벼슬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학문은 제때에 해야 한다."라고 하여 아들의 거취가 혼란스러웠다. 이에 강희맹은 아들에게 직접적으로 훈계하지 않고, 우언(寓言)으로 가르치기 위해 이 작품을 창작하였다.


  •    아버지 도둑에게 쉽게 도둑 기술을 배워 도둑이 된 아들 도둑은 문음으로 쉽게 관직에 진출한 강희맹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맹은 아들이 안주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들이 등과(登科)하여 출사한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학문이 완성되지 않은데다가, 그런 상태에서 자만하여 혹 실수라도 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문에까지 누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희맹은 도둑의 도(道)에도 '자득(自得)'이 있듯이 학문의 도(道) 역시 자득(自得)이 있어야 천하에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아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했다. 강희맹은 아들이 학업을 온전히 이룬 뒤에 관직에 나아가 공명을 이루고, 그 학문을 바탕으로 곤궁한 처지에서도 자신을 지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제목 : 강희안의 <<양화소록>>

*책소개

   『양화소록』(養花小錄)은 조선 초기의 선비이자 저 유명한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의 화가인 인재 강희안이 손수 화초를 기르면서 알게 된 꽃과 나무의 특성, 품종, 재배법을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이다. 각 화초에 대한 옛 사람들의 기록을 폭넓게 인용하고 이들의 품격을 논한 문장이나 시를 보탠 다음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식으로 서술된 이 책은, 각각의 식물에 관한 단순한 관찰 기록이라는 의미를 넘어, 꽃과 나무의 상징성 속에 자연의 이치와 천하를 다스리는 뜻을 담아낸 우리 선조의 소중한 정신 유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하고 보배로운 저서이다.


*산책

   깊은 사랑은 꾸밈없는 마음에서 나온다. 사랑은 자연스러움이라 했으니, 하나의 존재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이라 했으니, 그러한 마음자리를 일러 본연(本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꾸밈없는 마음으로 꽃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깊은 사랑으로 보살펴 그 성질을 관찰하고 기록한 강희안의 『양화소록』은 우리에게 본연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상대방의 천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다만 살피고 깊이 아껴 하나의 궁극을 피워내는 선비 화가의 꽃 기르는 마음은, 지배와 소유를 관계의 능사로 아는 후인들에게 사랑하는 자의 참된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지각도 운동 능력도 없는 풀 한 포기의 미물이라도 그 풀의 본성을 살피고 그 방법대로 키운다면 자연스레 꽃이 피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이 본받을 만한 품성으로 그는 소나무에서는 장부 같은 지조를, 국화에서는 은일의 모습을, 매화에서는 품격을, 석창포에서는 고한(孤寒)의 절개를, 괴석에서는 확고부동한 덕을 찾고 있다. 이와 같은 덕을 지닌 꽃과 나무를 본성대로 길러서 언제나 눈에 담아 두고 마음으로 본받을 수 있다면 수신과 치국에 있어서 문제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해제에서)

   사물의 본성을 살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순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아집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성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아집을 제거해야 한다.

   화초를 기르는 일은 아집을 버리는 도를 가르쳐 준다. 꾸밈없는 마음이 아니고는 꽃을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화초를 기르면서 배우게 된다. 본성을 배려 받지 못한 화초는 말라죽거나 뿌리가 썩어 죽는다. 사람도 그러하고 관계 또한 그러하다. 그런즉 진정한 사랑이란, 끊임없이 나의 본연에 너의 본연을 수용하는, 명상이며 수행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이 봄에 곰곰 생각한다.


*책 속에서

   "아! 화초는 식물이다.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 채, 습한 데에 맞는 것은 마르게 하고 추위에 맞는 것은 따뜻하게 하여 그 천성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죽게 될 것이니, 어찌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겠는가."

   "왕휘지가 집을 빌려 살았는데, 집안에 즉시 대를 심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자, '하루라도 이 군자(대)가 없다면 어떻게 살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또 휘지는 창포를 대에 비교하여 말하기를 '창포는 아홉 마디로도 귀하다고 하는데, 대는 그보다 더욱 우뚝 빼어나게 서 있다. 그러므로 창포는 대에 정중히 절해야만 한다. 그러면 대가 어찌 절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명성과 이익에 골몰하여 고달프게 일하는 것이 죽음에 이르도록 끝이 없다.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가? 벼슬을 버리고 강호를 소요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공무의 한가한 틈에 맑은 바람 밝은 달 아래 향기 진한 연꽃과 그림자 뒤척이는 줄이나 부들을 대하거나 작은 물고기가 개구리밥과 수초 사이로 뛰노는 광경을 만날 때마다 옷깃을 풀어헤치고 거닐거나 노래를 읊조리면서 노닌다면, 몸은 명예의 굴레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세상사에서 벗어나 노닐 것이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소개

    강희안(姜希顔, 1417∼1465)의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이다. 지돈녕부사 강석덕의 아들로, 좌찬성을 지낸 희맹이 그의 동생이다. 그의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세종의 부인인 소헌 왕후의 자매였다. 즉 부친이 세종 대왕과 동서 사이로, 그는 세종에게는 처조카, 세종의 아들인 세조와는 이종사촌간이 되었다. 1441(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인수 부윤, 호조참의 등의 벼슬을 거쳤다.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붙이고, 최항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에 주석을 붙였으며,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관여했다.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세조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여 관을 부의로 하사했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나, 자신의 흔적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을 꺼려하여 전해지는 작품이 많지 않다. 삶을 관조하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한 「고사관수도」 등의 그림과 이 책 『양화소록』에는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며 담백함을 즐겼던 그의 천성이 그대로 배어 있다.




 



 

강희맹 선생같은 정치인-공직자 어디 없나? | 사찰
황세옥 2009.09.16 20:02



 

강희맹 선생같은 정치인-공직자 어디 없나?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 강희맹 선생 찾아...


09.08.02 17:16 ㅣ최종 업데이트 09.08.02 17:16  이장연 (friday1519)
                                         강희맹, 정치인, 농학자, 시흥시, 연꽃

지난 7월 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그린웨이(자전거도로)를 따라 보통천을 거슬러 물왕저수지까지 가던 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인 강희맹 선생이 명나라에서 연꽃씨를 가져와 심은 뒤 널리 퍼트렸다는 관곡지 인근 연성동 억방죽들(연꽃테마파크)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해가 서쪽 바다로 넘어가기 시작해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쉬워, 지난 주말 다시 자전거를 타고 찾아갔습니다. 강태공들로 북적이는 물왕저수지를 휙 돌아 물왕교차로에서 하천변을 따라 내려가다, 하직골방죽들을 가로질러 관곡지로 향하던 길에 아파트 숲에 가려진 강희맹 선생의 묘와 신도비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관곡지 주변에 자리한 연꽃재배단지,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 이장연
 연꽃테마파크

 

  
 연성문
ⓒ 이장연
 연성문

 

  
 문량공 사우
ⓒ 이장연
 문량공사우

 

진주강씨 문량공 강희맹 선생(1424-1483)은 조선 초기의 뛰어난 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종 29년(1477) 별시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9년(1463) 중추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성종 13년(1483)에는 의정부에서 일반정사를 처리하는 좌찬성에 이르렀습니다.

 

선생은 문장이 당대 으뜸이고 글-그림에도 뛰어났으며, 박학다식하며 공정한 정치를 편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유교경전과 역사, 중요한 의례에 밝아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조실록> <경국대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의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그가 그린 그림이라 알려진 <독조도(獨釣圖)>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강희맹선생 묘역
ⓒ 이장연
 강희맹선생묘

 

  
 묘역과 산자락 밑까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 이장연
 강희맹선생묘역

 

  
 신도비
ⓒ 이장연
 신도비

 

시흥시 시도기념물 강희맹선생묘역 코앞에 고층아파트

 

52세 때 관직에서 물러난 선생은 장인 안승효가 준 약 1만㎡의 땅을 근거로 금양(조선시대 시흥의 옛지명)에 와서 살면서 <금양잡록>이란 농서를 썼다 합니다. <금양잡록> 외 저서에는 <사숙재집> <존담해이> 등이 있습니다.

 

묘는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독특한 모습의 문인석이 있습니다. 가파른 묘역 왼쪽 아래는 성종 19년(1488)에 세운 신도비가 있습니다. 서거정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이 글씨를 썼다 합니다. 시흥시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강희맹선생묘와 신도비 묘역에는 가족, 후손들의 묘와 한글창제 도움비, 문량공 사우, 연성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탈진 강희맹 선생 묘역을 둘러보고 택지개발로 잘려나간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목을 축인 뒤, 비를 머금고 쿵쿵거리며 몰려오는 먹구름을 올려다보니 참 못난 정치판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강희맹 선생처럼 땅과 농업의 가치를 알고, 공명정대하게 일하며 공부하는 그런 괜찮은 정치인이나 공직사회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되묻게 되더군요.

 

  
 강희맹 선생의 묘
ⓒ 이장연
 강희맹선생묘

 

  
 특이한 모습의 문신상이 좌우에 있다.
ⓒ 이장연
 문신상
 

 




 



 

빅토리아 아마조니카 연꽃

(Victoria Amazonica)

 

- 연잎의 지름이 90~180cm 크기인 지구상에서 최대의 연꽃 종류.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에서 서식하는 열대연꽃이다.



 

 


 

 

 



 


 


강희안의 산수도

 

노을 2012.04.29 10:22


 

  산수도(山水圖)  강희안(姜希顔)   족자비단에 담채   96.5 x 52.5 cm

 


이그림은 근경으로 부터 중경을 거쳐 후경의 주산(主山)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깊이감.

 

근경과 중경의 경물(景物)들이 이루는 x 자형의 구성.

 

유기적인 연결을 염두에 둔 구도등이 
매우 돋보이는 그림으로

 

산이나 바위의 묘사에서 보이는 필묵법(筆墨法)과 준법(?法). 

 

안개에 쌓인 중경의 마을 표현. 수지법등(樹枝法)등에는 안견파 화풍의 접촉이 약간씩 감지된다.

 

고사관수도 와는 차이가 많이나는 작품이지만

 

근경의 큰수목은 그의동생 강희맹(姜希孟)의 
독조도(獨釣圖)에 보이는 고목(枯木)들과도 형태상 비슷하여 주목된다.

 

조선초기 산수화의 또다른 일면을 엿보게 한다.

 
- 다음 블로그 <노을, 옛그림과 놀다> 노을 님의 글 중에서 전재...


 


 

四友亭詠松(사우정영송)

 

사우정에서 소나무를 읊다


         - 姜希顔(강희안)


 

 

階前偃盖一孤松

계전언개일고송

 

枝幹多年老作龍

지간다년로작룡

 

歲暮風高揩病目

세모풍고개병목

 

擬看千丈上靑空

의간천장상청공

 

 

계단 앞을 덮어 드리운 한 그루 홀로선 소나무

 

가지와 줄기가 오래되어 용의 형상 되었네.

 

세모에 바람 높이 불어 병든 눈을 비비고 보니

 

마치 용이 천길 높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네.


 

 

    姜希顔(강희안 1419-1464)본관 진주(晋州), 자 경우(景遇), 호 인재(仁齋). 희맹(希孟)의 형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돈령부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443년 정인지 등과 세종이 지은 정운(正韻) 28자에 대한 해석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1444년에는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과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였다.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주석하였다. 한편 조정의 추천을 받아 명(明)나라가 보낸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8글자를 직접 옥새에 새기기도 하였다. 1447년 이조정랑이 되어 최항 ·성삼문 ·이개 등 집현전 학자들과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4년(단종 2) 집현전직제학이 되어 수양대군 ·양성지 ·정척(鄭陟) 등과 조선 8도 및 서울 지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으나, 1456년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 1462년 인순부윤이 되었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하여 말수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소박하여 출세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의정부에서 일찍부터 검상(檢詳)에 추천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 ·그림 ·글씨에 뛰어나 세종 때의 안견 ·최경 등과 더불어 3절(三絶)이라불렸다. 문집에 원예에 관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으며, 그림으로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전하는데, 산수화 ·인물화 등 모든 부문에 뛰어났다. 글씨로는 아버지의 묘표인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 등이 남아 있는데, 왕희지와 조맹부의 작품에 비견되기도 한다. 또한 세조 때 임신자(壬申字)를 녹여 활자를 새로 주조할 때도 자본(字本)을 썼는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한다.

 




 

자수장 한상수, 200여 작품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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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장인의 바느질로 재현한 일본 국보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 〈사진〉이 관람객을 맞는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닮은 인물과 거북·구름·연꽃 문양을 한 땀 한 땀 수놓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한상수 보유자가'자수 한평생전'을 서울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10일까지 연다. 십장생 10폭 병풍 등 한씨의 자수 작품을 비롯해 중국·일본의 자수와 복식 등 200여점을 선보인다.                   02)552-5445 


 

잎에 무늬가 든 반엽종(斑葉種) 황금메타세콰이아나무



 

열대토란인 타로토란



 

쇠서나물

- 잎이 소의 혀(쇠서)를 닮음.

 



 

원예도입종 물수세미 종류



 

 사데풀 (일명 : 석쿠리, 시투리)

- 어린 순은 식용.




 

자생식물인 물옥잠




 




 

올미




 



 

강희맹의 사위인 안동 권씨 문중의 저택

앞마당에 있는 원래의 작은 연지 - 관곡지 (官谷池)

 

 

오동나무 열매




 

연지사적비(蓮池史蹟碑)



 

-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전설이 깃든 잎과 줄기가 질긴 풀.



 

수수




 

가뭄 때 구황식물이였던 메밀 꽃




 

실제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식물들은

수수, 메밀이나 팥 그리고 가지 같은 곡식류와 채소류이다.

 

이들의 꽃이나 씨앗들은 너무 흔하다고 생각하여 지나치기 쉬우나

이 평범하고 소박한 꽃과 열매들에게도 수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들 곡물류와 채소류가 없었다면,

 아직 인류가 수렵채취경제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들이 아직 원시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화려한 수련이나 청정한 연꽃도 휴식을 취하면서 꽃을 감상하고 

정신적인 위안이나 감흥을 얻으며 시서화(詩書花)의 소재로도

흔하게 이용되어 문화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왔으나,

기실은 위의 곡물류와 채소류나 의복의 재료가 되었던

목화 재배와 양잠기술 등이 없었다면 

이러한 문화의 창달도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것을 

항시 잊어서는 안된다.


기본을 잊는 자들은 항상 자만심과 허영심에 빠지기 쉽다.

항상 오늘날 기본적인 삶이 있게 한 

고마운 식물들에 대한 감사를 되새겨 볼 일이다.


연지 안의 정자에서 놀이문화는 바쁜 일을 끝내놓고

쉬는 틈틈이 잠시 동안의 힐링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무릇 질박(質朴)과 검덕(儉德)에서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인 문화가 창달되고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팥 꽃



 

가지 꽃



 

뜨거운 햇살 아래 작은 가지가 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