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茶脈)] 〈61〉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⑪ 다산 정약용

2014. 9. 5. 10:25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茶脈)] 〈61〉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⑪ 다산 정약용



      세계일보 원문 l 입력 2013.06.17 17:54 l 수정 2013.06.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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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 중흥조 3인의 핵심… 직접 생산해 약용으로 즐겨

초의 의순·추사 김정희와 주류 이뤄

사찰서조차 선차 전통 찾기 어려워

유가 선비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일부선 中 용봉단차 등 고급차 즐겨

   조선 후기의 차 중흥조를 말할 때 흔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과 초의(草衣) 의순(意恂·1786∼1866),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든다. 이들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가장 핵심인물인가를 물으면 사람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겠지만 역시 다산이 으뜸이다. 

   흔히 차인들은 초의 의순을 다성(茶聖)이라고 하고, 그가 쓴 ‘동다송(東茶頌)’은 중국의 다성 육우(陸羽)가 쓴 ‘다경(茶經)’에 비유한다. 이는 동다송의 가치평가나 영향력 때문이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보면 초의는 다산의 제자다. 더욱이 초의가 차를 배운 것은 다산에게서다. 

    초의가 다산을 처음 찾은 것은 1809년, 그러니까 다산이 48세, 초의가 24세 때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24세. 다산이 스승이고, 초의가 제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초의는 출가승이고 다산은 유학자인데 어찌 사제관계가 성립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초의는 15세 출가한 이후, 줄곧 스승이 될 선지식을 찾아다녔으나 실망만 하다가 다산을 만나게 된다. 초의는 당대의 거유(巨儒)인 다산을 만나는 순간, 이미 그의 사람됨에 빠져들고 있었다. 초의의 시집 속에 다산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담은 구절이 적지 않다. 초의는 대둔산 승려들의 환속 염려를 일으킬 만큼 다산에 빠져 있었다. 여러 승려의 충고와 경계로 인하여 초의는 점차 다산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초의의 학문에 다산은 크게 영향을 미친다. 초의는 차 정신을 중정(中正)으로 요약한다. 중정이란 바로 유교정신의 핵심이 아닌가. 

   실지로 초의는 다산초당을 드나들면서 차를 배웠고, 제다법도 그때 익혔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같은 사실은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학)에 의해 소상히 밝혀졌다. 당시 차에 대해 가장 종합적인 식견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은 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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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과 연지(蓮池), 그리고 연지의 석가산(石假山)이 보인다.


   물론 다산의 차 공부는 한강 일원의 서울·경기 지방에서 유행한 조선 후기 남인들의 차 문화를 몸에 익힌 것이다.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유가의 선비들은 차 생산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고급문화였던 차 문화를 즐기고 전수한 주류세력들이었다. 

   이에 비해 척불의 대상이었던 사찰에서는 오랜 선차(禪茶)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차를 직접 재배하는 영호남의 몇몇 야생차 자생지역의 사찰을 제외하고는 차 문화의 전통이 단절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차 문화의 중흥지로 알려진 대둔사(현 대흥사)의 경우도 선차의 전통은 끊어지고 초의도 다산으로부터 차를 배울 정도였다. 

   조선 중후기의 차 문화는 도리어 선비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선비들은 나름대로 훌륭한 차 생활을 하였으며, 국내의 차 생산량은 적지만 중국의 용봉단차를 비롯하여 여러 고급차를 접하고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중국의 수입차에 의존하였을지라도 차 문화를 형성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선비들의 차를 즐기는 풍류는 상당히 수준 높았음을 그들의 차시들은 전한다. 

   다산은 차를 주로 약용으로 사용했으며, 유배생활에서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차 문화의 중흥을 견인하였던 셈이다. 다산은 귀양지의 척박한 환경 탓으로 늘 만성적인 체증에 시달려야 했다. 또 귀양살이 중에도 늘 서책을 가까이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수많은 책을 집필하였던 까닭에 차를 먹지 않고는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다산은 답답한 현실로 인해 울화가 쌓였고 부실한 영양상태 등으로 늘 학질에 시달렸으며, 말기에는 빈혈과 중풍에도 시달렸다. 이를 종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명약이 차였다. 그래서 그는 걸핏하면 혜장과 초의에게 걸명(乞茗)하는 글을 보냈다. 

   다산의 남양주 능내리 시절 초기 차 생활은 다음의 시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백아곡(白鴉谷)의 새 차가 새잎을 막 펼치니/ 마을 사람 내게 주어 한 포 겨우 얻었네./ 체천의 물맛은 맑기가 어떠한가./ 은병에 길어다가 조금 시험해 본다네.”(‘춘일체천잡시(春日?泉雜詩)’ 중에서) 

   백아곡은 경기도 광주 검단산(黔丹山) 북쪽 계곡이다. 이곳에서 작설차가 난다고 한다. 백아곡은 다산의 집이 있던 여유당에서 배만 건너면 닿는 곳이다. 20대 초반에 이미 다산은 차맛을 알고 있었다. 다산은 차가 약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떡차를 소량으로 상비해 두었다가 이따금 약용으로 복용했던 것 같다. 

   “시험 삼아 용단차로 고질병을 다스리니/ 해맑기 수정이요 달기는 꿀맛일세./ 육우가 온다 하면 어디서 샘 찾을까./ 원교의 동쪽이요 학령의 남쪽이리.”(‘미천가(尾泉歌)’ 중에서) 

   다산이 본격적으로 차를 마신 것은 강진 땅에 유배되면서부터다. 유배생활 중에 얻은 병 때문에 차를 찾았는데 때마침 만덕산 백련사에서 야생차를 발견하는 행운을 얻는다. 초당과 백련사의 거리는 지척(800m)이다. 다산은 아암(兒菴) 혜장(惠藏·1772∼1811)이 대흥사에서 백련사로 건너와 머물며 다산을 만나려고 애를 쓴다는 소문을 듣고, 어느 날 일부러 신분을 감추고 백련사로 놀러가 한나절 대화를 나누게 된다. 

   둘은 급격하게 친하게 되어 다산은 혜장에게 주역을 가르쳐 주게 되고 사제관계를 맺는다(1805년 4월 17일이다). 또 혜장 등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를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아암 혜장과의 해후는 그의 제자 수룡 색성 등에게도 다산의 제다법이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후에 차를 만들어 다산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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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다산초당’ 현판.


   다산이 여러 차례 혜암에게 걸명시를 보냈다. 

   “듣자니 석름봉 바로 아래에서/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지금은 보리 말릴 계절인지라/ 기(旗)도 피고 창(槍) 또한 돋아났겠네./ 궁한 살림 장재(長齋)함이 습관이 되어/ 누리고 비린 것은 비위가 상해/ 돼지고기 닭죽 같은 좋은 음식은/ 호사로워 함께 먹기 정말 어렵지./ 더부룩한 체증이 아주 괴로워/ 이따금 술 취하면 못 깨어나네./ 스님의 숲 속 차 도움을 받아/ 육우의 차솥을 좀 채웠으면/ 보시하여 진실로 병만 나으면 뗏목으로 건져줌과 무엇이 다르리. 모름지기 찌고 말림 법대로 해야/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으리라.”(‘혜장상인에게 차를 청하며 부치다’) 

   다산은 혜장의 제자 색성(?性)이 그에게 차를 보내주자 감사한 마음을 전한 차시도 있다. 

   “장공의 여러 명 제자 중에서/ 색성이 제일로 기특하다네./ 화엄의 가르침을 이미 깨치고/ 겸하여 두보 시를 배우는구나./ 초괴(草魁)을 볶아내는 솜씨가 좋아/ 고맙게도 나그네를 위로하였네.”(‘색성이 차를 부쳐준 것에 감사하며’) 

   다산의 제다법은 백련사에서 장흥 보림사, 해남 대흥사 등지로 퍼져갔다. 이는 이규경이 쓴 ‘도차변증법(?茶辨證說)’과 이유원이 쓴 ‘죽로차(竹露茶)’와 ‘임하필기(林下筆記)’의 ‘호남사종(湖南四種)’ 등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인근 야산에 차를 심고, 차를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나중에 강진을 떠날 때는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차를 제다하고 먹는 것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 차를 공급하고 소비하는 계(契)조직을 했던 것이다. 다산초당에는 약천(藥泉)뿐만 아니라 차 맷돌, 차 바구니, 차 화로, 차 부뚜막인 다조(茶?) 등 차와 관련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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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직접 쓰고 새긴 석벽의 정석(丁石)이라는 글자.

   다산이 야외에 설치한 다조에 대해 쓴 시를 보자. 다산이 12승(勝)을 노래한 ‘다암시첩’의 제5수에 나온다. 

   “마른 벽돌 쌓아 만든 작은 다조는/ 이화(離火)와 손풍(巽風)의 형상이라네./ 차 익을 제 산머슴은 졸고 있는데/ 하늘하늘 연기만 홀로 푸르다.” 

   ‘이화순풍’은 밑에서 바람을 잘 빨아들여 위에서 불을 잘 타게 하는 풍로(風爐) 모양을 말하는 것인데 주역의 ‘정(鼎)괘’를 의미한다. 

   다산은 다산초당의 4경으로 다조와 약천(藥泉), 석병(石屛), 석가산(石假山)을 꼽았다. 약천은 뒤뜰의 석간수를 말하고, 석병은 다산이 친필로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긴 석벽을 말한다. 석가산은 연지(蓮池)라는 작은 연못에 조성한 돌산(돌탑)으로 다산이 바닷가에서 손수 돌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다산은 초당으로 옮긴 후 비록 유배생활이긴 하지만 제자들을 가르치고 정원도 가꾸고 차 생활도 결들이면서 나중에는 풍류를 도모할 여유마저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초당의 서암(西菴)은 제자들의 거처였다. 다산의 서재인 다산동암(茶山東菴)은 솔바람이 분다고 하여 송풍암(松風菴)이라고 불렀고, 동암 뒤편으로 삼사십보 옮기면 천일각이 있었다. 천일각은 다산이 진도에 유배된 형 정약종을 그리워하며 남해바다(강진만 구강포)를 바라보던 곳이다. 

   다산은 1810년에 자신이 만든 차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그는 이후 차를 구걸하는 편지를 쓰지도 않았고, 도리어 호의(縞衣) 스님에게 떡차 10개를, 우이도로 떡차 50개를 보내기도 했다. 

   다산의 차 생활은 직접 생산에서 소비까지 완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다산 없는 초의를 생각할 수도 없다. 

   다산이 마신 차는 지금과 같은 잎차가 아니라 떡차였다. 다산이 69세 되던 1830년 강진 백운동에 살고 있던 이대아(李大雅)에게 보낸 편지에는 떡차 제조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삼증삼쇄(三蒸三?·세 번 쪄서 세 번 말림)의 이야기가 나온다. 

   “올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 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참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알겠는가?” 

   다산이 구증구포(九蒸九曝·아홉 번 쪄서 아홉 번 말림) 얘기를 처음 언급한 것은 ‘범석호(范石湖)의 병오서회(丙午書懷) 10수를 차운하여 송옹(淞翁)에게 부치다’라는 시의 둘째 줄에 나온다. 

“게을러져 책을 덮고 자주 아이를 부르고/ 병으로 의관 벗어 손님맞이 더뎌진다./ 지나침을 덜려고 차는 구증구포(九蒸九曝) 거치고/ 번다함을 싫어해 닭은 한 쌍만 기른다네.” 

   차의 성질이 지나치게 강한 것을 순하게 하기 위해서 구증구포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산의 구증구포 이야기는 ‘임하필기’ 가운데 ‘호남사종’에도 나온다. 

“강진 보림사의 죽전차(竹田茶)는 열수 정약용이 얻었다. 절의 승려들에게 구증구포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이 보이차에 밑돌지 않는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치니, 이를 일러 우전차(雨前茶)라고 해도 괜찮다.” 

   당시 차의 주산지였던 영호남의 대표적인 차 4종은 영남 대밭에서 나는 죽로차(竹露茶), 밀양부 관아 뒷산에서 나는 밀성차(密城茶), 강진 만불사에서 나는 만불차(萬佛茶), 강진 보림사 죽전차(竹田茶)였다. 

   다산과 초의의 만남은 1809년 초의가 다산초당으로 찾아와 배움을 청함에 따라 비롯된다. 다산의 명성이 대둔사에 자자했다. 대둔사 강백이었던 혜암을 단 한 차례의 질문으로 제자로 삼았던 다산을 초의는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학구열에 불탔던 초의가 아니던가. 다산은 초의를 유학의 길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초의는 끝내 불문을 떠나지는 않았다. 

   초의가 대둔사로 돌아가며 예물로 지은 작별시를 보자. 

“부자는 남에게 재물을 주고/ 어진 이는 남에게 말을 준다네./ 이제 장차 선생님을 떠나려 하니/ 올리는 예물이 어이없으리./ 공경스레 비루한 맘 펼쳐보여서/ 선생님 책상 밑에 펼치나이다./ 참된 풍도 아득히 떠난 지 오래/ 큰 허위가 이를 따라 일어났다네./ 골목마다 한 사람의 어진 이 없네./ 고을마다 모두 다 근심 찌드니/ 오랑캐 땅 이치가 그럴 수밖에./ (중략) 하늘이 이웃에 스승 내셨네./ 덕업(德業)은 온 나라에 으뜸 되시고/ 문질(文質)이 모두 다 빈번하시네./ 계시는 곳 언제나 의(義)를 붙드시고/ 경행(經行)은 항상 인(仁)을 놓지 않았네./ 가득 차도 넘치지는 아니 하시니/ 언제나 마음 비워 포용하시네. (중략)”(‘탁옹(?翁) 선생께 받들어 올리다’ 중에서) 

   초의는 다산으로부터 유학의 근간이 되는 내용들을 섭렵하였다. 아마도 이때에 습득한 유학의 지식과 지혜는 초의가 불문에서도 남다른 독자적인 학설을 가질 정도로 큰 선승이 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초의 스님은 ‘다성’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실은 선학(禪學)에도 일가견을 가진 선승이다. 

   결국 초의는 다산에게 차와 유학을 배우고는 불문으로 돌아갔다. 그 돌아감은 그로 하여금 후일 차와 선(禪)을 집대성하고 융합하여 한국판 선차일미(禪茶一味)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끝내 다성으로 발돋움하는 중대한 발걸음이었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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