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5. 10:41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60>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⑩ 채제공·유도원·박지원·이운해·이덕리
茶飯事 실천했던 채제공 차시에 탁월
인격수양 위해 茶 벗한 유도원도 유명
박지원 ‘열하일기’서 중국 차문화 소개
茶에 대한 남다른 가치관 후세에 전해
성호 이익은 실학의 차인들을 이끈 원조였다. 그 뒤 서인이 주축을 이룬 북학파들도 차를 즐기긴 했지만 주로 차인으로 크게 떠오른 인물들은 남인들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출세를 이끌고 나중에 후견인 역할을 한 인물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차 생활에서도 정약용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부풍향차보’가 발견된 선운사 전경. 부풍은 부안의 옛 이름이다 . 월간 ‘차의 세계’ 제공
채제공은 남인 가운데서도 청남(淸南) 계열로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고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가 영조 때에 도승지(1758)가 된 후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킨 인물이다.
조선 후기에서 채제공 만큼 넓은 지식과 함께 아량을 갖추고 균형잡힌 인물은 없다. 그는 차시에서도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숲의 푸르름 물방울처럼 떨어지고/ 차 향기는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네./ 신선이 정말 있다고 한다면/
여기 돌아가는 물굽이에서 노닐 것이다.”
“길은 교룡의 굴을 가르고/ 바위엔 일월의 정령이 스며 있네./ 비구가 이런 사정을 알고/
마음 시원하라고 차솥을 들고 오네.”
“자리 펴서 좋은 향 피우고/ 부슬비 내릴 제에 차 달이네./ 신선들의 단약을 어이 얻으리./
삼신산을 찾아서 구해봐야지.”
“시상이 막힐까봐 찻잔 가까이 하고/ 글 쓰는 버릇 미련하기에 촛불 켠다오./
그대 머무르면 주려고 자세히 살피고/ 시재를 발휘하여 한층 분발한다네.”
채제공은 5대조 충연(忠衍), 종조부 팽윤(彭胤) 등 차 명가에서 태어났다.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면 으레 차를 마시는 것으로 다반사를 실천했다. 그는 정조와 함께 실학을 이끌며 개혁을 이끌어가다가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1780) 때 함께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공격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정조의 특명(1788)에 의해 복권되어 우의정을 맡았으며 이어 좌의정과 영의정을 거쳤으나 만년에는 수원 화성 축성에 온 정력을 쏟았다. 화성 축성은 정약용이 설계자였다면 채제공은 총감독이었다.
그가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천주교 박해가 미미하였으나 은퇴 후 박해가 심해지고, 결국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나고 정약용도 귀양살이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 후기 개혁도 흐지부지되고 만다.
남인 계열의 인물로 노애(蘆厓) 유도원(柳道源·1721∼1791)과 그의 동생 동암(東巖) 유장원(柳長源·1724∼1796), 그리고 동암의 종증손인 유치명(柳致明·1777∼1861) 등도 이름난 차인이다. 유장원과 유치명은 특히 조선 후기의 상례(常禮)와 변례(變禮)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설을 모으고 해설을 붙인(유장원) ‘상변통고(常變通攷)’를 간행(유치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후기의 예학의 전모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유도원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면서 차를 벗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차 정신은 유장원과 유치명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가 동생인 유장원에게 보낸 차시를 한 수 보자.
“산 채로 잡은 붕어가 있기에/ 작지만 그대에게 보내네./
한 마리는 울을 뚫고 나가버렸다네./ 아마도 다원(茶園)에서 밝힐지도 모르지.”
유도원은 비록 차시는 적지만 차에 관한 지식은 풍부하였다. ‘퇴계집(退溪集)’에 실린 그의 차에 관한 지식은 대단하다. ‘차에서 고기눈과 게눈을 의심하지 말라’ 등 ‘다경(茶經)’의 삼비(三沸:세 가지 끓는 모양)를 알았던 것은 물론이고, ‘다록(茶錄)’에 나오는 여러 구절을 인용하고 있으며, 송대의 명차(名茶)인 두강(頭綱)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집에 다원(茶園)을 두고 차를 손수 재배했음은 주목할 만하다.
북학파 가운데서 가장 차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긴 인물은 역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다. 박지원은 차시보다는 산문을 많이 남겼다. 연암이 양인수의 초당인 주영염수재(晝永簾垂齋)에 갔다가 쓴 기문(記文)은 당시 선비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양궁이 성정이 게으르고 숨어 살기를 좋아해서 권태로우면 곧 발을 내리고 오궤, 칼, 향로, 술병, 다조(茶?), 서화의 축, 바둑판들이 있는 방에 뒹굴며 지낸다. 잠이 깰 때면 발을 걷고 갠 하늘을 쳐다보고, 섬돌 위에 나무그늘이 지고 울타리 아래서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이때 상 위의 칼을 보거나 거문고 몇 곡을 뜯고는 술을 한 잔 마신다. 기분이 풀어지면 혹 향을 피우기도 하고 차(茶)를 달이기도 한다. 또 서화 축을 들척이며 감상하기도 한다.”
연암은 또 ‘소리’에 대해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차 끓은 소리’에 대해서도 탁월한 해석을 가한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의 종류를 비교해 보았다.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다.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다.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다.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노한 탓이다. 천둥과 우레가 급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다. 찻물이 센 불과 약한 불이 조화롭게 끓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아취(雅趣)를 가졌기 때문이다. 거문고가 궁(宮)과 우(羽)에 맞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다. 종이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의심하는 탓이다.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품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탓이다.”
결국 사람들이 듣는 소리는 모두 흉중에 품은 뜻, 다시 말하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듣는다고 그는 주장을 한다.
그의 연행록인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문화적 깊이와 유려한 문체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전이지만 북경에서 만나는 여러 나라와 지방의 외교사절과의 교류 시에 차를 나누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만나서 인사를 하면 바로 차를 내었다. (중략) 차는 한 잔으로 끝나지 않고 몇 차례 돌렸다.”
또 중국에서도 차나무 차가 아닌 대용차인 꽃차도 성행하고 있었음을 전한다. 오늘날 차의 주생산지로 유명한 민월(閩越:복건성·절강성 지역) 지방에 국화차가 성행했음을 전한다. 중국인들이 꽃차(花茶)를 좋아하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전북 고창군 선운사에서 발견된 ‘부풍향차보’ 원문. 약용 차의 제다법이 실려 있다. |
실학이 성했던 18세기는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와 ‘기다(記茶)’ 등 우리나라 ‘차의 고전’들이 줄줄이 저술되었던 시절이다.
필선(弼善) 이운해(李運海·1710∼?)의 ‘부풍향차보’는 1755년쯤 부안현감으로 있던 시절, 전북 고창군 선운사 인근의 차를 따서 약효에 따라 7종의 향약(香藥)을 가미해 만든 약용 차의 제다법에 관한 내용이다. 부풍은 전북 부안의 옛 이름이다. 부풍향차보는 이재(?齋)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일기인 ‘이재난고(?齋亂藁)’에 그림과 함께 인용되어 있다.
‘이재난고’에 수록된 부풍향차보는 서문과 차본(茶本), 차명(茶名), 제법(製法), 차구(茶具)의 네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일기는 쓴 지 19년 뒤에 황윤석이 적은 저자 이운해에 관한 추기가 붙어있다.
황윤석의 ‘이재난고’는 50책 6000장(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으로 저자가 10세부터 63세로 서거하기 2일 전까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것을 정리한 책이다. 문학(文學)·경학(經學)·예학(禮學)·사학(史學)·산학(算學)·병형(兵刑)·종교(宗敎)·도학(道學)·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易象)·언어학(言語學)·전적(典籍)·예술(藝術)·의학(醫學)·음양(陰陽)·풍수(風水)·성씨(姓氏)·물산(物産) 등을 기록했으며 한국 실학의 최고 업적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동다기(東茶記)’로 알려진 이덕리(李德履·1728∼?)의 ‘기다(記茶)’는 차 생산의 산업화와 무역을 제안하고 있다. 이덕리는 숙종 때 조선 최고의 무인이었던 장한상(張漢相·1656∼1724)의 외손이며,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거쳐 영조 때 병조판서에 올랐던 무신 이삼(李森·1677∼1735)의 처조카였다. 그는 무인 계통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그는 ‘기다’와 함께 국가경제와 지리 등의 내용을 담은 ‘상두지(桑土志)’를 저술한 인물이다. 정약용이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대동수경(大東水經)’에 인용할 정도의 책이었다. ‘상두지’는 국가 경제와 지리 등의 내용을 담은 실학 계통의 서적이다. 이 책 또한 ‘동다기’와 마찬가지로 다산의 저술로 오인되기도 한 책이다.
이덕리가 쓴 ‘강심(江心)’에 수록된 ‘기다’ 끝 부분에는 필사자 이시헌(李時憲·1803∼1860)이 남긴 기록이 있다.
“‘강심(江心)’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이 한 책에 적힌 사(辭)와 문 및 시는 바로 이덕리가 옥주(沃州)에서 귀양 살 때 지은 것이다(江心之義未詳. 此一冊所錄辭文及詩, 乃李德履沃州謫中所作).”
이 책의 저자가 이덕리이고, ‘옥주적중(沃州謫中)’에서 저술했다고 했다. 옥주는 진도(珍島)의 별호다. 이덕리가 죄를 지어 진도 유배 중에 지은 셈이다. 다산의 둘째형 정약전(丁若銓)이 진도 바다의 어족을 연구한 ‘이산어보(玆山漁譜)’와 같은 처지의 저술이다. 다산의 일표이서(一表二書)는 물론이지만, 당시 유배야말로 선비들이 당대 문화를 총정리하고 반성하는 좋은 기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다’를 처음 발굴한 한양대 정민 교수는 “막상 전의이씨 대동보에는 이덕리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그가 진도에 장기간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뜬 일과 관련이 있다. 또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족보에 이름마저 지워진 것을 보면, 그의 죄는 역모죄나 이에 준하는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한다.
이덕리가 ‘기다’를 저술한 동기를 보면 그의 차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황량한 들판의 구석진 땅에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에서 얻어 이것으로 국가를 돕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그 일이 재물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하여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가 국부 창출의 자원이 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북방인은 육식만 하므로 차를 마시지 않으면 배열병(背熱病)에 걸린다. 그런 까닭에 비싼 값을 주고 차를 마시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해 그 수요의 일부를 우리 차로 감당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그는 끝으로 차에 무지한 조선의 실정과 발상 전환을 통한 차 무역 제안을 담았다.
그런데 ‘부풍향차보’와 ‘기다’는 집필 과정에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기다’의 저자인 이덕리는 ‘부풍향차보’의 저자인 이운해의 친동생인 이중해(李重海)와 절친한 친구 사이이다. 만약 이덕리가 부풍향차보를 동생 이중해를 통해 진작에 보았다면 이를 계기로 차에 관한 더 높은 안목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정민 교수는 말한다.
아무튼 정약용의 실학 집대성과 차 문화의 중흥이 있기까지 여러 선비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저술이 있었고 차에 대한 실학적 접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실학의 끄트머리에서 솟아난 글자 그대로 산(山)에 해당한다. 다산이 갑자기 적소(謫所·귀양지)인 전남 강진에서 차를 접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부터 차에 익숙한 터였으며, 도리어 차의 재배에 적합한 강진으로 귀양 가면서 그곳에서 끊길 뻔한, 차 재배와 법제, 식음 방법을 포함해서 종합적으로 차 문화를 부흥시키는 계기를 맞는다.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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