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5. 11:06ㆍ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58>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⑧ 임상원·임수간에 이어 실학의 차인들 대두
경험을 우려낸 독특한 여운… 초월적 세계 茶詩에 담아
햇살에 반사된 차의 새순, 일창이기(一槍二旗)의 모습이다. |
일반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상원(任相元·1638∼1697)·임수간(任守幹·1651∼1721) 부자가 훌륭한 다가를 만들었다. 염헌(恬軒) 임상원은 지금까지 차인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차시는 무려 70수에 달하는 대단한 차인이다. 그의 차시는 죄다 경험을 토대로 구성되고 있으며, 차 생활의 내용 또한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예컨대 가죽나무는 화력이 좋아 숯으로 만들면 좋지만 벌채가 금지된 나무라든가, 세속 안에서도 얼마든지 초월적 세계를 누릴 수 있음을 넌지시 말한다. 그가 노래한 시 제목에도 와영(臥詠·누워 노래하다), 우음(偶吟·우연히 노래하다) 등이 많은 것은 그가 일상에서도 파격과 일탈을 좋아함을 드러낸다. 때로 그는 차를 마시고 난 뒤에 차 사발을 베고 누워서 창에 비치는 새의 그림자를 감상하기도 한다. 그는 선비들이 대체로 전날 술 마신 뒤나 식후에 차를 마시는 일이 많은데 새벽에 일어나 차를 마실 정도로 마니아였다.
“서창에 내리치는 눈보라에 놀랐는데/ 깨어보니 앞산이 산뜻하네./
“농사짓는 불은 산 위까지 보이고/ 고기 잡는 불을 먼 마을 향한다네./ 차 달이니 그 맛 아주 좋고/ 세속의 먼지 씻어 기쁘네
“얼음 깨고 강물 길어/ 가죽나무 숯에 차 달이니/ 푸른 연기 피어나고/ 흰 유화(白花) 엉켜 흩어지지 않네./ 아름다운 차 도구 두 개를 얻었으니/ 흔쾌히 한 잔 가득 마신다네./ 깨끗하고 연한 산나물 곁들여/ 마음 놓고 실컷 마시네./ 찬 바람소리 땅을 치는데/ 깊은 방 구리화로는 따뜻하네./ 산속 마을 깊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이 같은 즐거운 세상 드문 일이네.”
“산골 관리되어 한 해를 지나니/ 고요하고 한가로워 근심조차 없다네./ 합문을 닫고 술과 차를 마시고/ 돌은 차고, 강은 푸른데 혼자 누각에 오르네.”
“봄바람 휩쓸어 눈 무더기 만들고/ 물 위의 백로와 왜가리 다시 돌아오네./ 깊은 골짜기는 얼음 속에 나물 돋고/ 작년에 피었던 고향집 매화 생각나네./ 강물 떠다 차 달이니/ 어찌 시구 찾아 촛불 켜리./ 녹을 훔쳐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지팡이 짚고 이끼 낀 동헌 뜰을 거니네.”
“옛날 배를 타고 바다 건너/ 삼한시대부터 차를 알기 시작했네./ 피리소리 나면 찻잎 끓고/ 고기 눈 떠오르면 흰 거품 넘치네./ 투다(鬪茶)를 하면 공다(貢茶)를 생각하고/ 논공을 하면 다경(茶經)이 자랑일세./ 급히 한 잔 마셔 시 읊은 혀를 축이니/ 어느새 해 돋아 푸른 세상 가득하네.”
“새벽 추위 견디기 힘들어/ 종이 병풍으로 가렸네./ 불씨는 언제나 화로에 있고/ 이지러진 등불은 꽃처럼 변하네./ 골짜기에 구름 피어오르고/ 달은 숲 너머 멀리 비추네./ 편안히 일어나 할 일 없어/ 소나무 해다가 손수 차 달이네.”
“몸의 굴레 벗으니 여유롭고 한가하네./ 깊은 산에 은거한 뒤 흰 머리 들었네./ 언제나 소나무 아래에서 들 점심 먹고/ 개울물에 한가로이 차 사발 씻네.”
“전원에서 늙어가니 미투리 한 켤레/ 두건 하나 썼다네./ 마신 차 사발 베개 삼아 누우니/ 날아가는 새 그림자 창을 지나네.”
“강의 얼음소리 들으니 눈 내릴 것 같고/ 굶주린 매가 하늘에서 슬피우네./ 산골 관가는 적을 서류 없고/ 문 밖의 솔바람은 흰 바위를 쓰네./ 어부는 추위에 낚싯배 버리고/ 태수는 관아를 나와 높은 누각에 이르렀네./ 강물 길어 홀로 차 달이니/ 고요히 지는 해가 앙상한 가지에 걸렸네.”
햇차의 계절을 맞았다. 바다를 면한 남도의 광활한 차밭 풍경은 보기만 해도 생명력이 넘치는 것 같다. |
염헌은 일본의 가루차를 비롯하여 중국의 쌍기차·몽정차 등 한·중·일의 좋은 차를 모르는 것이 없었다.
염헌의 아들인 돈와(豚窩) 임수간도 아버지를 닮아 차의 마니아였다. 그는 ‘연다부(烟茶賦)’를 남겨 차의 시작과 융성, 전매사업 등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기술하였고, 차에 이어 담배도 등장하였음을 소개했다.
“무릇 사람의 입에 모두 좋아하는 맛이 있으니, 소나 돼지의 기름진 고기, 생선회나 구운 고기의 좋은 맛이다. 이는 작은 사물로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문왕이 창포 김치를 좋아하고, 자목이 마름과 연을 좋아하는 것은 혼자 좋아하는 것이니 바른 맛이라고 할 수 없다. 차는 풀로 만들어져 당대에 와서 뚜렷해지고 국가나 개인에게 이득을 주어 소금이나 금에 비유되었다. 손님과 주인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예를 베풀 때 차를 내었으니, 아! 그 융성함이여, 이때에 담배라는 것이 이어서 나왔다.”
그의 차시는 간단하면서도 서정적이다.
“나물 안주에 술맛 좋고/ 맑은 돌샘 물로 차 달이네./ 물끄러미 앉아 아이들 노는 것 바라보니/ 죽마를 하나씩 가졌네.”
“나이 드니 마음 쓸 곳 없고/ 가난하니 그윽해서 좋다네./ 시제를 찾아 먼 산을 바라보고/ 찬 샘물 길어 차 달이네.”
임수간은 특히 1711년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동사일기(東?日記)’를 남겨 일본문화에 대한 견문은 물론이고 당시 일본 차 문화에 대한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동사일기의 처음은 이렇다.
“세 사신(정사·부사·종사관)은 총 481명의 수하(手下)를 이끌고 숙종 37년(1711) 5월 15일에 서울을 떠나 양재·판교·용인·죽산·무극·중원·조령·문경·예천·안동·의성·의흥·신녕·영천·경주·울산·동래를 거쳐 6월 6일 부산에 도착했다. 7월 5일 세 사신은 각각 다른 복선(卜船)을 타고 호행(護行)하는 왜선과 함께 부산을 떠났는데, 부사가 탄 배에 문제가 생겨 회항을 하였다. 15일 다시 돛을 달고 떠났으나 역풍이 불어 노를 저어 갔다. 대마도에 거의 이르러 왜선에 이끌려 먼저 도착한 두 사신과 기쁘게 만났다. 대마도주(對馬島主)의 호행을 받으며 佐須奈浦·西泊浦·平明을 거치는데, 풍랑이 심해 배가 부서지는 등 위험이 적지 않았다. 8월 9일에 一岐島에 도착하여 一岐守의 호행과 지공(支供)을 받았다. 이어 藍島·地島·向伊浦·上關·兵庫·西宮城을 거쳐 9월16일 大坂城에 도착하였다. 9월 28일에는 왜경(倭京·현 京都)에 이르고 淡津原·州股·鳴古屋·金谷·吉原·箱根嶺·戶塚·河崎를 거쳐 10월 18일에 江戶(현 동경)의 東本願寺에 도착했다.”
임수간은 특히 일본의 다옥(茶屋)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일본의 다옥은 차뿐 아니라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는 객관(客官)과 같은 시설로 경치 좋은 곳에 세워졌음을 전했다. 이즈음 일본과의 빈번한 통신사 교류로 일본의 차 생활 기록이 많아진다.
임수간에 이어 신유한(申維翰·1681∼1752)도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해유문견잡록(海游聞見雜錄)’을 남겼다. 해유문견잡록은 당시 일본에 대한 최초의 ‘민족지’ 보고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차의 풍습과 관련해서는 이 책의 ‘음식’ 편에 실려 있다.
“온 나라에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그냥 물을 마시는 법이 없고 모두 차를 끓여 마신다. 그래서 집집마다 곡물보다 차를 준비해 더 신경을 쓴다. 차는 곧 작설 같은 것으로 푸른 잎을 따서 찧고 말려 보드라운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신다. 혹은 긴 잎은 끓여서 찌꺼기를 건져내고 마신다. 매 식후에는 꼭꼭 한 잔 마시기 때문에 저잣거리에 솥을 걸고 차를 달이는 사람이 즐비하다. 그래서 사신행차의 대소 관원 수백 명이 날마다 청차 한 홉과 엽차 한 묶음씩을 받았다. 기나는 객관에서는 따로 다승(茶僧)을 두어 밤낮으로 차를 달여서 대접했다. 이 나라의 일상범절로는 차를 따라갈 것이 없다.”
신유한의 해유문견잡록은 이 밖에도 시모노세키·오사카 등의 발전상과 자세한 소개도 곁들였다.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수많은 선비들이 다녀왔지만, 일본에 대한 이만 한 기록은 드물다. 아마도 신유한만큼 일본을 자세히 탐색하였으면, 결코 일제식민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으로 큰 곤욕을 치렀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아직도 일본을 깔보고 무시했던 것 같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일본과 청나라의 교류는 빈번해지고, 중국과 일본의 차 생활에 대한 지식이 넓어진다. 시대는 바야흐로 실학의 시대를 맞는다.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을 중심으로, 홍대용·박제가 등이 가세하면서 ‘북학파(北學派)’를 일으키고, 뒤를 이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을 중심으로 좀 더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실학파(實學派)’가 태동한다.
북학파는 흔히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한다. 청나라의 선진문명을 적극 수용하여 조선 후기 사회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지식인 집단이다. 대표적인 학자들은 홍대용·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이다.
이들은 모두 연행사(燕行使)의 일행으로 다녀온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의 선진문명을 직접 보고 배웠다. 이 중 홍대용은 북경행(北京行)을 제일 먼저 주장하여 북학파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북학이라는 말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자서’(自序)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북학파는 ‘중국을 배우자’는 슬로건 만큼이나 다른 한편 중국 사대주의적 성향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주체적인 실학을 실천하는 데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왕조 지배계층의 북벌론적인 사고방식이 선비사회에서는 지속되었는데 현실적으로 중국을 지배하는 청나라에 대해서 선비들은 괜한 저항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제동을 걸고 나선 집단이 북학파이다. 그들은 ‘화이일야(華夷一也)’라는 수평적 사고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과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유럽의 자연과학·서양사상·천주교 등을 의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박지원의 ‘호질(虎叱)’ ‘양반전(兩班傳)’은 국부(國富)를 낭비하는 양반층을 질타하는 작품으로 북학파의 노선을 대중적으로 이끌어가는 분수령을 이룬다.
북학파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일어선 학파가 바로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파이다. 실학파의 연원은 북학파에 앞선다. 17세기 한백겸(韓百謙)과 이수광(李?光)·유형원(柳馨遠) 등으로 올라가지만 18세기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을 중심으로 한 성호학파에서 북학파와 맞섰다. 이익의 실학정신은 19세기에 정약용에 의해 그 사상이 종합된다.
이익을 중심으로 한 ‘성호학파’와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는 실학의 연구 경향과 추진방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성호학파는 당시 권력에서 소외된 경기도(近畿)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면 북학파는 서울 도심에 거주하는 집권 노론(老論) 계열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래서 성호학파를 ‘중농학파’(重農學派)라고 하고, ‘북학파’를 중상학파(重商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 후기 차의 부활을 이룬 다산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파는 19세기 전반 실학의 제3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성호학파나 북학파나 실학파는 모두 차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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