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8. 22:23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北 "고구려, 한때 베이징까지 점령">
[연합뉴스] 2006년 09월 14일(목) 오전 11:27
다큐멘터리서 日 저명학자 초청 주장(홍콩=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북한이 자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고구려가 한때 현재의 중국 베이징(北京) 일대까지 진출한 강대한 자주 독립국이었다고 주장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북한이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을 주장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대 명예교수를 초청,
에가미 교수의 원작으로 지난 95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기마민족국가' 3부작 시리즈에서 나타났다.
연합뉴스가 14일 입수한 이 다큐멘터리에서
북한은 광개토왕비, 고분벽화, 산성, 역사전설, 각종 유적.문화재 등을 소개하며
고구려가 한민족의 독자적 국가임을 강조했다.
북한 문화성 소속의 조선과학교육영화촬영소가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김일성훈장'까지 수여받아 고구려사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으로 손색없으며,
일본 저명 학자의 입을 빌려 객관성을 높였다는 점에서도 눈에 띈다.
에가미 교수는
"2차대전후 내놓은 기마민족설은 사료 부족으로 고구려 부분을 간단히 언급했으나
반세기가 흘러 북한의 초청으로 북한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고
고구려 문화 유적지를 돌아볼 계기가 생겼다"며
"고구려야말로 동방역사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강대한 기마민족국가였다는 사실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에가미 교수는 지난 2002년 숨졌다.
다큐멘터리는 고구려가 한족 왕조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 기마민족국으로
주변국과의 무력투쟁을 통해 옛 고조선의 영토를 확보한 뒤
베이징 부근까지 진출했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각종 영상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평양시 덕흥리에 위치한 고구려 국소대형(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고분벽화를 소개하며
고구려가 370년 전연의 잔여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만리장성 서쪽 지역인 유주(幽州)로 진출한 사실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설명에 따르면 신도현(信都.지금의 평북 웅전) 출신의 고구려 대신 진은
만리장성 동서에 걸친 유주의 13군 75현의 넓은 땅을 다스리며 13군 태수의 정무보고를 받기도 했다.
에가미 교수는 "내가 알기엔 유주의 주소재지인 반계는 지금의 중국 베이징 부근"이라고 말했다.
덕흥리 고분벽화를 고구려의 베이징 진출설 근거로 보는데 대해
그간 남.북한, 일본, 중국 학계에서도 논란을 벌여왔다.
북한의 이런 주장은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돼 주목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또
수나라가 300만대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왔다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수나라 별동대 30만5천명 가운데 겨우 2천700명만 살아돌아간 역사기록을 전하며
고구려의 강대한 군사력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발굴된 7세기 궁전벽화에서
고구려만의 장식 특징인 고리칼을 찬 고구려 사신이 있는 모습이 발견돼
고구려의 외교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다큐멘터리는 전했다.
북한은 이 다큐멘터리 제작 방영 이후에도 학습교육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jooho@yna.co.kr
(끝)
(어떤 대화) 초 대강국 고구려
오프라인상에서 있었던 간략한 대화 내용을 재구성하여 올려봅니다
주제는
“과연 하북성이 고구려 주강역 이었는가요 ?”
입니다
(김군)
하북성까지 고구려 주강역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주장아닌지요.
확실한 증거들이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답변)
기존의 식민사학자들이 우리의 뇌리에 고정화 시켜놓은
왜곡된 역사인식 때문에 받아 들이기 어렵겠지만
지금부터 설명하는 것을 잘 들어주기 바랍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나 사실들을 제시하겠습니다
기존의 역사인식을 비우고 다시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전부 설명은 곤란하므로 몇가지만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김군) “네”
(답변)
그러면 설명순서를
첫째 사서에 나오는 대표적 기록 소개와
둘째 유물에 나오는 기록 소개
셋째 천문학으로 연구한 자료소개
순서로 합니다
(1) 첫째 고구려가 하북성 유역을 점유했다는 사서의 기록 소개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4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원문)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해 설)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자 이기록을 먼저 지도상에서 살펴볼까요
하북성을 통과하여 산서성 태원까지 고구려가 공격을 한 기록입니다
주의할 것은 고대북평은 지금의 부평으로 태행산맥 가까이 있었습니다
상곡은 지금의 탁록지방을 말합니다
이기록은
중국정사인 “후한서”에도 동일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후한서”에는 북평을 “우북평”이라 기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청나라때 교간된 것만을 볼수 있는데
후대에 “우”자를 첨가 기록하여
고구려 강역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려 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북평”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북평 - 태원으로 이어지는 군사진격로도 지도상에서 맞아 떨어지지요
(김군)
그런데 고구려가 강성시 잠시 갔다가 온 것은 아닐까요
계속 점유하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단편적인 예인 것 같습니다
(답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다음에 설명하는 추가 내용들을 보고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고구려 초기는 물론 말기의 전쟁지명들도 하북성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간과 해서는 안됩니다
어쨌던
위 기록을 일부OO들은 “오기”라던지
그당시 고구려 국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언급자체를 금기시 한다는 것을 추가로 말씀드립니다
전쟁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위기록은 고구려가 국력이 더 강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상식적으로 보아도
한반도나 만주에서 산서성 태원까지 쳐들어 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바로 하북성이 고구려 주강역 이었다고 본다면
태행산맥을 기점으로
한족과 고구려가 공방전을 벌이던 전투 접경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김군)
그다음에 예를 들것은 무엇인가요 ?
(답변)
고구려 유물로 본 고구려 강역입니다
(2) “고구려 국소대형(유주자사) 진의 무덤”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앞의 설명이 사서의 예문이었다면
이것은 “실증주의 사학”이라 주장하는 OO가
제일 좋아하는 실증유물이지요
물론 이 유물도
하북성이, 아니 중국 동해안 전체가 모두 고구려 땅이라
증빙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볼까요
① (발견지역)
1976년도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인데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에서 벼슬을 지낸
국소대형(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이라는 분입니다
“유주자사”라는 직책은
“유주”라는 것이 북경인근을 말하는데
여기에 위치하면서
고구려에 속한 여러 지방을 총괄하여 다스리던
지금 우리로 말하면 “경기도지사”정도로 비유하면 맞을까요 ?
하여간
중국 동해안 전체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관리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덤발견위치)
1976년 발견되길 망정이지
일제시대때 발견되었으면 아마 어떻게 조작되었을지 모를일이지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OO는 언급을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추가로 소개하겠지만
북경유역에 땅을 파서 고구려 유물이 나오지 전까지는
이 유물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유주위치)
(김군)
그런데 이무덤안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요 ?
(답변)
자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② 무덤안의 내용
우선 무덤안 전경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여기에 기가막힌 역사적 실증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무덤안 전경)
중앙에 있는분이 국소대형(유주자사)를 지낸 “진”으로
무덤의 주인공이고
▒ 유주자사 “진”
유주자사 “진”은
331년 태어나 408년 죽을때까지 고구려는 4대왕이 바뀝니다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331년 ~ 408년 사이 중국 동해안이 고구려 땅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기간중 일부를 점유하였던 하여간 중국의 동해안 옥토를
모조리 지배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좌측에 서있는 분들이
국소대형(유주자사) “진” 통제하에 있던 고구려 지방지도자인 13개 태수들입니다
▒ “진” 관할하에 있던 13개 태수
(김군)
그렇다면 13명의 태수는 어디에 위치한 사람인가요 ?
(답변)
자 놀라지 말고 다음 설명을 잘 이해하길 바랍니다
③ 13개 태수의 위치
무덤벽면에 있는 사신들을 보면 우측에 어디에서온 태수라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
(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
(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
(11) “현도(玄도)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
(13) “............(판독 불능)”
(김군)
도대체 13명의 태수가 있었던 지역은 어디라는 것이지요 ?
(답변)
자 중국 현재지도에 표시하기 전에
어떻게 증빙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까요 ?
이 지역은 중국지역이므로 당연히 중국고지도를 보고 찾아야
가장 근접한 위치가 되겠지요
자 송나라때 지도인 송본지리지장도 중 일부에서 한번 찾아 볼까요
물론 중국정사 지리지에 나오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전문적인 부분이라 일일이 언급하기가 어려우므로
나중에 라동현 선생님의 저서부분을 인용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위치가 대동소이합니다
일단 중국 고지도에 나오는 부분만 살펴 볼까요
일단 고지도나 중국 군사지도에 나오는 부분을 개괄적으로 알아봅니다
아래지도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자 위 지명들을 현재 중국지도상에 나타내볼까요
하북성은 물론 산서성까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통치하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 아래지도를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언제 그랬다는 것인가 ?
유주자사 진이 태어난 331년과 408년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로 그때 이지역를 고구려가 통치했었다는 실증유물입니다
왜 이것을 숨기고 교육하지 않는 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민족의 영광을 말하면 죽이려 달려드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
무역센타에서 고구려 유물전을 할때도 이 무덤 벽에 기록된
글자에 대한 소개는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도데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
(김군)
그렇다면 고구려가 산서성까지 갔다는 말인가요 ?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요동, 요서, 현도태수의 위치는 어디인지요?
(답변)
지도에도 표시해 놓았듯이
사서에 나오는 9세기이전 요동, 요서의 기준지역은
틀림없이 태원 아래쪽 “요” 지금은 “좌권”으로 변경된 곳입니다
그런데
요동, 요서 태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므로
“요”를 기점으로 한 지역구분으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추측해 보지만
사서에 여러 가지 내용들이 산재해 있어
요동, 요서, 현도태수의 위치에 대한 부분은 나중으로 미룹니다
어쨌던 유주자사 진은 북경유역에 있으면서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신하로써
고구려땅 일부를 통치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진은 331년 ~ 408년 고구려 신하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비교를 하고 넘어가야될 대목이 있는데
바로 중국 남제서에 나오는 백제 동성왕 시절 7태수에 대한 부분입니다
백제 제 24대 동성왕(東城王)은 479년부터 501년까지 재위에 오르신 분으로
산동성에 무덤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는 분입니다
고구려 유주자사 진이 사망하고 70년 뒤의 일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아주시겠습니까 ?
동성왕 시절 백제는 7지역의 태수를 두고 중국 동해안을 깡그리 지배를 하였습니다
그 7태수 지역이
광양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낙랑태수(북경 아래유역)
대방태수(북경 아래유역)
조선태수(북경지방)
등 입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이 겹칩니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 영역을 백제가 강성해진 동성왕 시절
고구려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보아야 되는 것 아닌지요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 등지는 바로 우리민족의 주강역 이었다는 것을
유물과 정사의 기록이 중복적으로 증빙해 주고 있습니다
절대 허구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군)
놀라울 따름입니다 ? 혼란스럽기도 하고요
이 유물에 대한 학계 등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
(답변)
아래 신문기사를 읽어 보시겠습니까 ?
판단은 김군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다 읽어 보았지요
상기 기사는 78년 유주자사 진 무덤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입니다
이보도는 일본신문을 인용보도 한것인데 국내반응이 참 재미있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일본과 국내의 반응이 극과극을 이루는데
먼저 일본의 반응은
-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 영역이 북경까지 였음을 증빙하는 유물이다
- 한국 고구려사는 수정이 불가피 하게 되었다
- 무덤 벽화 인물이 일본 것과 유사하여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라며 충격적인 유물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다음으로 북한 역시
- 고구려의 북경유역 진출을 확인해주는 명문의 유물이다
라는 반응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남한만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서울대 고고학 김원룡이라는 교수 왈
- 일본, 북한의 주장은 비록 명문이 있어도 믿을 수 없다
- 북경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와야 믿을 수 있다
- 혹시 귀화한 중국인 무덤일 수도 있다
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군)
학계의 현실이 어떠한지 이제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오며 머리가 아파옵니다
마지막으로 천문학적인 분석자료를 마져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
(답변)
그래요
진 무덤 안에는 14행 154자의 묵서명이 있는데 복잡하므로
오재성 선생님의 설명을 곁들여 별도로 설명하기로 하고
진 무덤은 여기까지 합니다
(오재성 해설) 고구려진묘비 덕흥리고분묵서명 : 14행 154자
아래 내용은 진 무덤 내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고구려 신하였던 "진"의 무덤 규모가 다른 왕릉보다 크다
그 왕릉들은 단한자의 글도 없다
무엇을 보고 왕의 무덤이라 하는가 ?
"진"유적 만이 고구려 무덤임을 증빙하고 있다
그기에 하북성 산서성이 고구려 땅이라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
▒ 한국고대사금석문 72-90쪽 서영대 해설을 참고한 것임
□□郡信都□都鄕中甘里(□□군신도□도향중감리)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이며
(주)
라동현 선생님에 의하면
“진”이 고구려 사람이 아니었다면 국명을 기록하였을 것이라며
이 기록은 고구려 영토내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라 주장
(신도현)
평안북도 박천(영변)과 하북성 안평으로보는 두가지 설이 있음
釋加文佛弟子□氏鎭仕(석가문불제자□씨진사)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은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주) 국소대형 등은 고구려에만 있는 관직이름이다
龍(양)將軍遼東太守使持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용(양)장군요동태수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진)
용양장군요동태수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였다.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년칠십칠훙언영락십팔년)
太歲戊申十二月辛酉朔二十五日(태세무신십이월신유삭이십오일)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을유성천이옥구주공상지)
진은 77세로 죽어 영락18년
무신년 초하루가 신유일인 12월25일
을유일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를 옮겼다.
(주) 고구려는 건원칭제하였음을 입증하는 부분이다
광개토대왕의 연호가 “영락”이었음을 증빙하는 유물이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는 기록하지 않았을까 ?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공자택일무왕선시세사일)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시간을 선택하였다.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량장송지후부급칠세자손)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번창사환일천위지후왕)
날짜와 시간의 선택이 한결같이 좋았으므로 장례후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는 후왕에 이르도록 하라
造장萬功日煞牛羊酒肉米粲(조장만공일살우양주육미찬)
不可盡掃旦食鹽시食一(종)記(부가진소단食鹽시식일(종)기)
之後世寓寄無疆(지후세우기무강)
무덤을 만드는데 만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창고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을 방문하는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오재성 해설)
신도는 하북성 안평으로 보고 있다.
안평 근처에는 고구려 “동황성”이 있다.
동황성은 고구려사 343년 수도를 옮긴곳이다
이곳은
49년 고구려가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평정한 곳의 남쪽이며
고구리와 당이 대결했던 용도, 은산, 고대인성, 신성이 있는 곳 근처이다
무신년은 408년이다.
삼국사기에는 호태왕 17년이라고 하고 있으나 무신년은 408년이다
고분에 기록된 지명은 하북성 근처이다
연(燕), 어양(漁陽), 상곡(上谷), 광령(廣寧), 대군(代郡),
북평(北平), 창려(昌黎), 유주(幽州)가
북평과 태원사이
안평 즉 신도 근처에 있으니
그곳 사람이며
이곳은 고구리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구리 강역이니
진은 고구리인이다
수도인 동황성 근처인이라고 하면
현재로 따지자면 수도가 있는 경기도 지사쯤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2월25일 사망하고 2월2일 묘실을 폐쇄하였다.
유일하게 축조 년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하북성 동황성이 있는 근처의 신도인이 덕흥리에 묻혔다면
현 평양은 고구리 별도 “한성”으로 보는 것에 타당성은 없을까
수도 동황성과 별도 한성을 왕래 할수 있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별도 한성은
32년 낙랑국을 합병하고
503년 신라가 독립하므로서 631년 만주 고구리장성과 대치하기 이전 유적인 것이다
진묘비의 큰 의미는
북평과 태원까지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구려가 통치한 기록을 보충하여 주는 기록일 것이다
(오재성)
(보충)
< 고구려 평양 동황성(平壤 東黃城) >
(산동성지 중 안국시 부분입니다)
("동황성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상의 표시)
- 북경 아래 부분에 안국시가 위치해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 13년(343)
봄 2월에
왕은 그의 아우를 연(燕)나라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이에 따라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그 어머니는 여전히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은)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성은 지금 (고려)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에 있다.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十三年 春二月
王遣其弟 稱臣入朝於燕
貢珍異以千數 燕王乃還其父尸
猶留其母爲質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遣使如晉朝貢
冬十一月 雪五尺
(한글병기)
십삼년 춘이월
왕견기제 칭신입조어연
공진이이천수 연왕내환기부시
유류기모위질
추칠월 이거평양동황성 성재금서경동목멱산중
견사여진조공
동십일월 설오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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