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정만주원류고 外雜

2013. 5. 29. 07:45우리 역사 바로알기

 

 

 

 

中國이 경계하는 책 ‘흠정만주원류고’

 

중국이 경계하는 책 '흠정만주원류고', 첫 발간 이후 232년 여 만에 한국서 첫 번역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에 흠정만주원류고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재 신채호 선생 이래 역사학계에 뜨거운 논란을 제공했던 청나라 역사 연구서 '흠정만주원류고(滿)'가 세상에 나온 지 232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됐다. 우리의 사촌격인 여진족의 거의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과 번역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검찰공무원 출신의 한학자로서 번역자인 장진근 씨는 "그간 이 중요한 책이 번역이 안됐다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해왔다"면서 "2년에 걸쳐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 재야사학자와 한문학자가 2년간 번역에 매달려

 

2년 전 번역을 결심한 장 씨는 자신의 블로그(blog.naver.com/ckchang1)에 번역한 내용을 차근차근 올리기 시작했다. 이 내용은 인터넷을 타고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낯설지만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고 있는 내용을 보러 누리꾼들이 그의 블로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난의 번역 작업이 누리꾼들의 열렬한 지지에 의해 힘을 얻어 2년 만에 완역의 결실을 거두게 된 것.

장 씨의 번역 원고는 다시 재야사학자들의 감수를 거쳐 정식 출판물로 거듭났다. 책을 출판한 뒤에도 장 씨는 원문과 번역본을 자신의 블로그에 PDF 파일로 올려놓았다. 마음껏 가져가 검증하고 오류를 지적해 달라는 의미다.

이 책의 어떤 점이 누리꾼들과 젊은 역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는 것일까? 무엇보다 책의 성격을 규정한 '흠정()'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흠정'은 중국의 사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황제가 직접 제도나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뜻한다. 황제가 직접 짓거나 황제의 명에 의해 씌어진 책에도 '흠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때문에 '흠정만주원류고'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만주(滿)의 원류()에 대해 연구한 책()'이라는 뜻이다.

'흠정만주원류고'는 건륭 21년(1778년)에 지어졌다. 건륭제는 청나라의 르네상스를 이끈 3현제(강희-옹정-건륭) 가운데 한 명이자 청나라 문명의 결정체인 백과사전 '사고전서()'를 편찬한 인물이다. 그가 청 제국을 세운 여진족의 원류와 만주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직접 편찬을 명한 것으로 미루어 꽤 중요하게 집필된 책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책의 저술에는 청나라 인문학의 절정기에 중국의 모든 역사서를 모아놓고 탐구했던 훈고학(¤)의 최고 권위자 43명이 동원됐다.

일찍이 '단군조선'과 '발해'를 재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단재 신채호 선생도 '흠정만주원류고'를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재정립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단재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우리 민족을 서술하면서 이 책을 직접 언급했다. 즉, '조선()'의 어원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며 "'만주원류고'에 조선의 원래 발음은 쥬신이고 그 뜻은 주신()의 소속 관경()인데 관경의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살고 있는 온 누리"라고 밝혀 주신에서 숙신과 조선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여진의 역사가 아닌 미처 예상치 못했던 우리의 역사가 줄줄이 흘러나온다. 부여()와 삼한()의 역사는 물론 만주에 대한 연고권이 없을 것 같던 백제와 신라까지도 책의 주요 대목을 꿰차고 있다.

 

●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 집필을 지시한 만주역사의 근원

 

청나라 건륭황제(1711-1799)를 그린 건륭융장도 건륭제는 청나라 문화를 절정기를 이룩한 현제로 추앙받고 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워 약 200여년 존속한 것으로 알려진 발해()는 아예 여진족의 자랑스러운 선조로 당당히 책에 이름을 올렸다. 책의 중간쯤에 등장하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나라의 뿌리를 밝힌 대목은 꽤 충격적이다.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합부()인데 처음 고려로부터 왔다" (부족7 완안()편 )

"삼가 생각건대, 금나라의 시조는 원래 신라로부터 왔고, 완안씨()라고 하였으며, 다스리는 부를 완안부라고 하였다. 신라의 왕은 김씨 성인즉 금나라는 신라의 먼 친척이다" (부족7 완안편 원서())

이렇게 청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집결됐으면서 동이족의 뿌리를 밝히는 역사서가 오랜 기간 국내 사학계에서 외면 받았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3년 단 한차례 원문이 발간됐을 뿐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한글 번역을 시도한 적이 없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성씨는 다름아닌 애신각라이다. 이 성은 금나라의 선조가 신라에 닿아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이 책은 훈고학의 전통에 따라 과거 중국 25서에 묘사된 만주 지역의 국가와 강역에 대한 내용을 재해석하고 오류를 바로 잡는 데에 집중한다.

 

강단 사학계 중 단군학회 회장인 선문대 이형구(64) 교수는 "내용의 진위를 떠나 청나라 관찬(·관청에서 편찬한 서적)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다"며 "우리와 연관된 내용이 많으므로 번역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조심해서 취사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가 바라보는 '민감성'의 근원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함경도 이북에 살았던 여진족의 성격 때문이다. 단군을 뿌리로 하는 여진이기 때문에 우리와 사촌 격임은 확실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면 우리의 역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원류라 알려진 숙신과 부여 읍루 물길이 다 포함됐음에 한반도에 머물고 있던 우리 역사의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만주원류고를 감수한 파워북 홍순만 기획위원

 

이 책의 감수를 맡은 파워북 기획위원 홍순만 씨는 "우리 강단사학계는 한반도라는 강역을 지키고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제대로 된 우리의 역사를 외면해 온 측면이 없지 않다"면서 "정보기술(IT)이라는 새로운 유목 환경이 열린 새로운 시대에는 만주 유목민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한산성의 치욕'을 겪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을 정복한 여진족을 편향된 시각에서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이제까지도 여진족은 '로또 맞은 사촌' 또는 '문명을 정복한 야만'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은 여진이야 말로 우리와 피를 나룬 친족이자 위대한 문명을 개척한 유목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연 건륭제의 뜻은 232년이 지난 조선 땅에서도 빛을 볼 수 있을까?

 

  

돈으로 평화를 산 중국
 
우리는 중국하면 강대국,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이라 생각한다. 중국은 넓은 영토, 무한한 자원, 그리고 13억이 넘는 인구를 지닌 대국이다. 하지만 중국이 과연 대단한 나라인가? 사실 중국은 넓은 땅 덩이에 비해 그리 대단한 나라는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만큼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은 나라는 없다.
 
한나라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고 그 솟아오르는 힘으로 북방의 위협인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유방은 초한대전 이전부터 각 군벌들간의 전쟁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군사적으로 북방 기마민족과는 근본적으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유방은 오만하게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흉노족은 모돈선우라는 영걸이 나타나 흉노족의 힘이 막강할 때였다.
유방의 30만 대군은 기세좋게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흉노족의 포위에 걸려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유방은 온갖 뇌물을 다 바치고 앞으로 매년 엄청난 조공을 할 것이며 모돈선우를 황제나라 어버이로 모시고 유방은 신칭을 하기로 했다. 흉노족 일대의 영걸 모돈선우는 이 정전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유방을 풀어 주었다.

중국 사서는 유방이 모돈선우의 신하가 된 사실을 극구 숨긴다.
그리고 바친 조공도 오랑캐에 대한 하사품이라 왜곡을 하였다.
 
당나라 시대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북방에서 위세를 떨친 위구르족들에 대해 중국은 갖은 선물을 다 바치고 구걸외교를 했다. 황소의 난과 같은 일대 국가위기도 위구르족의 전사들이 아니면 평정할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사서는 당나라 황제가 위구르족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역사왜곡을 한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송이긴 하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쿠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나라에는 매년 금 20만냥과 비단 50만필을 서하에게는 금 10만냥과 차 2만근을 보내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를 지배하다가 몰락한 몽고족의 기마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개국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영걸인 영락제가 즉위하고서는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초원에까지 명나라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바람같이 사라지는 몽고기병대를 토벌하지는 못했다.
 
중기에 들어오면 몽고족이 아니라 투르크계통의 오이라트족 에센 타이지가 몽고초원을 통일했다. 그들이 명나라를 위협하자 이미 나약해빠진 명나라는 이 몽고족에 대해 마시장을 열고 울며겨자먹기로 수십만 마리의 몽고말을 비싼 값에 사주었고 몽고의 사신이 오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선물을 안겼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천명까지 정원으로 하여 오라는 사신이 무려 삼천명씩이나 왔다. 명나라는 이 삼천명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말하자면 돈으로 북방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산 셈이다.

그래도 명나라 입장에서 북방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비보다 이게 훨씬 싸게 먹혔다.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몽고족 입장에서 중국을 집어삼키지 못할 바에야 목숨걸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명나라를 위협하여 평화적으로 삥을 뜯는게 그 또한 구미에 맞았다.

명나라는 돈으로 명분도 얻고 북방의 국가안보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어떻게 되는가?

몽고의 오이라트 4부의 패자 에센이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자 황제께서 사은품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자가 부족한 몽고족 입장에서야 하사품이라 하든 뭐라고 치든 재물만 두둑히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결국 명나라의 방대한 사서만 남았다.
몽고가 보잘 것 없으나마 조공품을 들고 황제에게 조공하러 왔을 때 천하의 주인인 황제께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변방의 오랑캐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게 실제와는 정반대인 그 날들의 황당한 중국역사이지만 글자로 남겨진 사서만이 진실이 된다.
 
에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이것이 진실된 역사이고 이조차 사서는 전부 엉터리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명나라가 몽고족에게 한번 선물을 제대로 안주다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서 마치 코미디처럼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조정의 실력자 왕진이라는 환관의 고집으로 몽고족에게 도전할려고 50만대군을 일으키고 그도 왕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황제가 직접 친정을 하였다가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야전에서 생포를 당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이 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이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우여곡절 끝에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다시는 몽고족에게 변변한 저항을 한번 하지 못하고 망할 때까지 비싼 경비를 들여 북방의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사서는 그래도 명분은 황제가 몽고족에 물품을 하사한 것으로 뻔뻔스럽게 기록을 하였다.

허풍이 심하기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중국인들의 행태가 결국은 역사상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남아있는 것은 대개 중국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라 보면 된다.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은 것은 통일왕조가 들어선 수, 당 시대 때이다.
그런데 수양제나 당태종이나 왜 책봉국을 그렇게 수백만의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고자 했을까?
책봉은 외교적인 일종의 형식일 뿐 수 당을 진정으로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자 오만한 양제나 당태종이 분노했던 셈이다.

그러나 허풍이 세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중국의 사서는 고구려가 마치 중국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가로 조작한 것이다. 이를보면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이 얼마나 형편없고 잘못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이 자랑하는 한나라 역시 우리민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예를 들면 한나라는 고구려와의 경계선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곳에 한나라의 물품을 갖다놓고, 고구려로 하여금 그 물품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 나머지 물품을 주며 고구려의 침략을 막은 것을 마치 하사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6대 임금인 태조는 자주 한나라를 공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임금이었다. 태조 때 하도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을 잡아가자 한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주민을 돌려주면 어른은 비단 48필, 아이는 그 반의 값을 주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안시성에서 양만춘에게, 요택에서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한 후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궁과 궁복을 하사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중국측 기록도 당나라가 고구려에 크게 패해 전쟁배상금을 문 것을 거꾸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보면 중국은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동이족에게 갖은 침탈을 당한 나라였다. 우리 동이족에 비해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은 돈과 물품으로 평화를 살 정도였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나라,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의 흐름이고 그들의 실체이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에 잡혀있지 않은가?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지고 역사를 다시 보자.
그러면 중국을 호령한 북방민족, 동이족, 고구려의 기상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져야 한다.

 

 

빙하기 바이칼의 한민족

 

시베리아 최고의 성지인 바이칼호 내 올혼섬에서 바라본 호수와 불한 바위. 기후가 건조해 섬의 대부분이 초원이고 소를 방목한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한민족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해답을 한반도 내에서만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북방 아시아인과 언어 문화 뿐 아니라 생김새와 유전적 특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뿌리를 찾으려면 국경은 물론 학문 간 장벽을 뛰어넘는 종합 연구가 필수적이다. 그 첫 시도로 우리나라의 유전학자, 의사, 지질학자, 고고학자, 민속학자 22명과 러시아 학자 4명이 8월 5일부터 8일까지 러시아 이르쿠츠크대에서 ‘동아시아 민족의 뿌리’를 주제로 세미나를 갖고 시베리아의 성소로 추앙되는 바이칼호를 답사했다. 동아사이언스는 서울대 내분비대사영양연구소, 배재대 한국시베리아센터, 이르쿠츠크대가 공동 주최하고 (주)미토콘과 (주)SIS가 후원한 이 행사를 단독 동행 취재해 보도한다.》

해외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거리에서 한국인을 한눈에 쉽게 알아보고 아는 척 한다. 그러나 비행기로 4시간 거리나 떨어진 바이칼호에서 맞부딪친 시베리아 원주민이 한국인과 구별이 어려울 만큼 얼굴이 똑같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 아시아인은 다리가 짧고, 두터운 지방층을 가지고 있다. 또 얼굴이 평평하며 코가 낮고, 입술이 작고, 눈꺼풀이 두텁고, 눈이 가늘다. 이런 생김새는 동상과 찬바람을 견디고, 흰 눈 속에서 지내는데 보호막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의대 이홍규 교수는 이런 북 아시아인의 체질이 빙기 때 시베리아에서 형성됐다고 생각한다. 이번 행사를 조직한 이 교수는 20년 전 북방과 남방 아시아인의 당뇨병 유전자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 뒤부터 한민족의 기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추위에 적응된 체질이 형성되려면, 오랜 기간 고립된 지역에서 살았어야 한다”며 “2만5000년 전쯤 시베리아에 매우 혹독한 빙기가 닥쳤을 때 바이칼호는 아시아인들의 선조에게 오아시스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당뇨병 전문가인 이 교수로서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추위에 적응된 체질’을 갖고 있다는 게 중요한 문제이다. 생활 수준이 높아져 이제는 추위를 모르고, 영양도 과잉 상태다. 이런 급속한 환경 변화와 체질의 부조화가 비만과 당뇨를 일으키는 것. 이 교수는 “실제로 시베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와 유전적으로 비슷한 미국의 피마 인디언은 거의 모든 성인이 비만 상태이고, 절반은 당뇨병에 걸린다”고 설명한다.

 

이 교수를 포함한 전세계 유전학자들은 80년대 말 세계 주요 인종의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를 토대로 등장한 ‘아프리카 인류 기원설’을 신봉한다. 흔히 ‘분자 시계’로 불리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엄마가 딸에게만 물려주고 돌연변이가 빨라 조상을 추적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아프리카에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은 15만년 전 쯤. 이어 5∼7만년전 쯤 중동지역으로 진출해 빠른 속도로 아시아와 유럽, 아메리카로 퍼졌다.

이런 흐름에 비추어 국내 유전학자들은 한국인의 원류가 된 북 아시아인이 마지막 빙기인 5만년 전부터 1만2000년 전까지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면서 추위에 적응된 체질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교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북 아시아인의 체질을 갖고 있지만, 남방계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유전자 등도 일부가 섞여 크게 4개의 유전학적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며 “이는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질을 4종류로 구분한 것과도 일맥상통해 유전자 검사를 통한 사상체질의 진단법을 만드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단국대 김욱 교수(유전학)도 북 아시아인이 한민족의 주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남방계 혈통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본다.

김 교수는 한국, 일본, 몽골, 중국, 태국 등 아시아 8개 민족 1211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1만6500개의 DNA 가운데 CCCCCTCTA라는 9개의 글자가 빠진 특이 유전자를 가진 비율이 한국인은 16%, 일본인 14%, 중국인 13%였다. 반면 몽골인은 4%, 베트남인은 23%, 필리핀인은 30%여서 북쪽으로 갈수록 낮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높았다. 김 교수는 “이 결과를 통해 한민족의 형성과정에는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바이칼호 주변에는 ‘무덤 계곡’이란 지명이 있을 정도로 많은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석기를 연구한 목포대 이헌종 교수(고고학)는 “2만5000년 전부터 날씨가 추워지면서 정교한 세형돌날 문화가 시베리아에서 발원해 한반도로 확산된 것은 빙기와 인구 이동의 연관성을 엿보게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고고학의 권위자인 이르쿠츠크대 게르만 메드베데프 교수는 “빙기였던 1만7000년∼1만9000년 전 바이칼호 인근의 시베리아가 사막화되자 더 좋은 기후를 찾아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한국과 일본에 인구가 밀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홍규 교수는 “국내 구석기 유적에서 나온 뼈에서 DNA를 추출해 시베리아 원주민이나 인골의 DNA와 비교하면 한민족의 이동경로를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우리 특유의 질병 패턴을 찾는 연구에 정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칼호 독특한 생태계▼

흔히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바이칼호는 넓이는 세계 7번째지만, 담수량을 기준으로 볼 때는 세계 최대의 호수이다. 최대 수심 1642m인 이 호수에는 전세계 민물의 5분의 1이 담겨 있다.

초승달처럼 북동에서 남서로 길게 뻗은 바이칼호는 길이 640km, 평균 너비는 48km로, 면적이 남한의 3분의 1이나 된다. 호수의 최대 투명도는 42m. 여기까지 물밑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맑아 그냥 마셔도 될 정도다. 주변의 숲과 초원에서 365개의 강이 바이칼호로 흘러들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것은 오직 하나 북극해와 연결된 앙가라강 뿐이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김주용 박사는 “바이칼호는 3000만년 전부터 호수 북쪽의 땅은 융기하고 남쪽은 벌어지면서 단층 운동에 의해 형성됐다”고 말했다. 지금도 바이칼호 주변에서는 매년 3천번 이상 지진이 일어난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지질학자 구엔나디 우핌체프 박사는 “지금도 호수 주변은 1년에 1㎝씩 융기하고 호수는 매년 2㎝씩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칼호에는 2500종의 동식물이 산다. 이 중 상당수가 바이칼호에만 사는 고유종이다. 세계 유일의 민물 바다표범을 비롯해 철갑상어, 오물, 하리우스 등 어종이 이곳의 명물이다. 이처럼 생물 다양성이 높은 것은 바이칼이 생성된 지 오래된 호수이고, 일반적인 호수와 수심 깊은 곳까지 산소가 공급되고 자체 정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호수 주변에는 온천이 많다. 90년 미소 합동조사단은 잠수함을 타고 수심 420m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구멍을 발견하기도 했다.맑은 물, 높은 생물 다양성, 많은 온천은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던 초기 아시아인에게 좋은 안식처가 됐을 것이다.

브리야트족의 샤먼 발렌틴.

▼바이칼호 주변 부리야트족▼

시베리아에는 여러 아시아 소수민족이 있다. 인구 40만의 부리야트족은 이 중 최대의 소수 민족으로, 바이칼호 주변에서 자치공화국을 이뤄 살고 있다. 특히 부리야트족이 간직한 샤머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많아 관심거리이다.

원래 바이칼의 주인인 이들은 17세기에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에 동화돼 부리야트족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남쪽 국경 너머 몽골과 중국 북부의 몽골인과 뿌리가 같고 언어도 비슷하다. 유목민인 이들은 모두 자신을 징기스칸의 후예로 믿고 있다.

부리야트족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똑같은 민족 설화를 갖고 있다. 한 노총각이 바이칼호에 내려온 선녀에 반해 옷을 숨겼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 열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방심하는 틈에 선녀는 숨겨놓은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얘기이다.

답사단은 이르쿠츠크시를 떠나 시베리아 최고의 성지인 바이칼호의 올혼섬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을 10시간 동안 달리면서 우리는 길가에서 오색 천조각을 두른 나무말뚝을 수없이 만났다. 배재대 이길주 교수(러시아학)는 “샤머니즘의 상징인 이 말뚝은 오리를 조각해 나무 꼭대기에 꽂아놓은 우리의 솟대나 서낭당과 상징적 의미와 형상이 거의 똑같다”며 “이는 한국의 토속신앙과 샤머니즘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이르쿠츠크에서 여행사를 하는 정정길씨는 “부리야트족도 우리처럼 천한 이름을 지어줘야 오래 산다고 믿어 ‘개’란 뜻의 ‘사바까’란 이름이 흔하다”고 귀띔한다. 아기를 낳으면 탯줄을 문지방 아래 묻는 전통도 우리와 비슷하다는 것.

마침내 석양이 바이칼을 온통 붉게 물들일 무렵 우리는 올혼섬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에서 부리야트족의 샤먼 발렌틴을 만났다. 그는 검푸른 호숫가의 신목() 아래서 바이칼의 신 불한(칸)을 부르는 굿판을 벌였다.

바이칼을 찾는 사람과 손을 맞잡고 부르는 샤먼의 북소리와 애잔한 노래 가락은 우리 정서와 금세 공명을 일으킨다. 함께 따라서 추는 춤은 강강술래 같다. 예전의 샤먼이 썼던 모자는 사슴뿔 모양으로, 신라의 왕관과 모습이 닮아 시베리아의 샤먼 전통이 한반도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3차례 바이칼을 답사한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은 “스탈린 시대 때 많은 브리야트족 샤먼이 처형당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바이칼호에는 다시 샤머니즘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했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2-08-27 17:44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한겨레 | 기사입력 2004.08.13 07:34

 

중 ‘헤이허일보’ 보도…“중앙정부 무관” 주장 허구로
고구려사 연구소 자료서도 최고위지도자 지휘 드러나
 

 

한민족 고대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이 중앙정부·당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중국 쪽 주장과는 달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등 중국 최고위 지도자들의 승인과 비준 아래 추진돼왔음이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13일 <한겨레>가 확인한 중국공산당 헤이룽장성 헤이허시위원회 선전부 간행 <헤이허일보> 기사 등의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지난해 8월5일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제3차회의가 헤이허시에서 열린 사실을 보도(사진)하면서 “전체 이름이 ‘동북변경역사와 현상 시리즈 연구공정’인 동북공정은 후진타오 동지가 2000년 중국사회과학원을 통해 지시해 승인한 사회과학 연구항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고구려사 왜곡에 앞장선 대표적인 연구기관 가운데 한 곳인 지린성 퉁화사범대학의 고구려연구소 내부자료에 따르면, 이 연구소가 1998년 주최한 고구려 학술 토론회가 중국 중앙 영도자들의 고구려사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후진타오 당시 국가 부주석(현재 주석), 리란칭 당시 국가 부총리, 첸치천 당시 국무위원, 리톄잉 당시 국가교육위원회 주임 겸 서기(현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겸 동북공정 고문), 딩관건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 겸 중앙서기처 서기 등 동지들이 잇따른 중요한 지시를 내렸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 역사와 문화 연구가 극히 대대적으로 추동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자료는 또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새 천년이 시작될 즈음 ‘국가 중점 공정항목’인 ‘동북변경역사와 현상 시리즈 연구공정’이 시작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자료는 98년 6월26~28일 퉁화시에서 퉁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가 지린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과 공동으로 ‘전국 제1차 고구려 학술 토론회’를 연 뒤 이 토론회 내용을 <당대중국변강연구> 제32기에 싣자 후진타오 등 많은 중앙 영도자들이 고구려사 연구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중국 랴오닝성 문사연구관의 내부 자료에 따르면 이곳 쑨진이 연구관이 쓴 고구려 역사 관련 서적이 “중앙과 랴오닝성 지도자들의 중시와 지지를 받았으며, 후진타오, 딩관건, 리란칭, 첸치천, 리톄잉 동지의 중요한 지시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쑨진이 연구관이 쓴 <동북아역사지리연구>(2000)는 동북공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고구려사 등을 중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지리 연구서다.

 

이런 자료들은 “동북공정이 ‘지방정부’에서 추진하는 것이어서 중앙정부가 통제하기 어렵다”는 중국 외교부의 설명이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중국 중앙정부 최고 지도자들의 승인과 지시 아래 진행돼왔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6일 박준우 외교통상부 아·태국장이 중국을 방문해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항의했을 때 “중국은 역사 왜곡의 의도가 없으며, 동북공정은 지방정부의 일이이서 통제가 어렵다”고 해명한 바 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고구려인 노예, 당나라서 쿠데타

 

‘현종 집권’ 이뤄낸 경호 노비 왕모중…
군사·재정 확충해 병권 잡은 뒤 정권 탈취 기도

 

“노예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 병권을 장악, 황제에 대항해 쿠데타를 기도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지배선 교수는 ‘고구려인 왕모중의 발자취’란 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이 인물은 조국 패망 후 당나라로 끌려가 노비로 살았던 고구려 장수 왕구루(王求婁)의 아들 왕모중(王毛仲)”이라고 말했다. 지 교수는 “왕모중은 당시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져 있던 이융기의 호위 노예였다”며 “발군의 능력으로 이융기의 정권 탈취를 도와 그를 황제로 옹립한 뒤, 그 공로로 ‘3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융기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본명이다.

 

지 교수는 또 “왕모중은 CEO로서의 능력도 뛰어나 군사력과 재정을 확충, 현종 통치하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개원지치(開元之治)’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며 “당나라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그는 훗날 정권 탈취를 기도,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다”고 주장했다.

▲ 왕모중의 보필을 받아 당나라 최고의 황금기인 '개원의 치'를 이뤘던 당현종 이융기의 모습, 이 그림은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이다
고구려 유민사를 연구하며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을 쓰기도 한 지배선 교수는 “고구려인에 의한 당 황실 전복 쿠데타는 이것이 유일한 기록”이라며 “제나라를 세우고 765~819년까지 산동지역을 다스린 이정기·이납 부자가 당나라 전복을 꾀한 바 있지만, 이것은 쿠데타라기보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주간조선 2003년 2월 6~13일자 보도)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왕모중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그런 인물이 당나라 실세로 존재했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왔을 뿐으로, 그의 출신과 행적에 관한 연구 논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의 지원으로 이뤄진 이 논문은 신·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된 것으로 내년 초에 출간될 예정이다.

 

현종과 함께 쿠데타… 대장군에 올라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은 장정 20만명을 잡아가 노예로 삼았다. 장수였던 왕모중의 부친 왕구루도 이때 끌려가 관노가 됐다. 왕모중이 태어난 시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지 10여년 뒤인 681~683년. 노비의 신분을 이어받은 왕모중은 나이가 비슷한 ‘임치왕’ 이융기(685년생)의 수행 노예가 됐다.

이융기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사냥을 즐겼던 그는 용맹한 사람을 만나면 돈과 음식을 하사해 자신의 사람으로 삼았다. 총명하고 깨달음이 빨랐으며 고구려인답게 기마와 궁술에 능했던 왕모중은 이 과정에 적극 개입, 세력을 규합해 이융기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다.

이융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710년이었다. 황제 중종이 황후 위씨(韋后)와 딸 안락(安樂)공주에 의해 독살된 것이다. 중종의 조카였던 이융기는 “위후 일파를 제거해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일으켰다. 왕모중은 이 과정에서 황궁 수비대를 사전 장악, 거사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융기 군사는 왕모중의 활약에 힘입어 황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위후와 안락공주를 살해, 중종 시해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거사를 이뤄낸 임치왕 이융기는 ‘평왕(平王)’으로 왕호를 높여받은 뒤, 문무 주요 관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심었다. 위후를 살해한 종소경(鐘紹京)은 ‘중서령’으로, 위후 제거 후 조칙을 쓴 유유구(劉幽求)는 ‘중서사인’으로 임명해 정사를 관장하게 했다. 또 거사에서 무공을 세운 설숭간(薛崇簡), 마사종(麻嗣宗), 갈복순(葛福順) 등과 임치왕 경호를 맡았던 이의덕(李宜德) 등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왕모중도 이때 장군으로 파격 제수됐다.

지배선 교수는 “이융기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사람이 한족이 아닌 고구려인이란 사실에 의미를 두고 싶다”며 “이 사실로 미뤄 당시 중국 사회에서 고구려인들이 다양한 활약을 벌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나라를 장악한 이융기의 남은 과제는 황제가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변의 눈’을 의식한 이융기는 명분을 쌓기 위해 중종의 동생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예종’을 황제로 옹립한다.

▲ 당나라 상류층들이 즐겨던 격구 장면, 이 그림은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이다.

실권을 쥔 이융기는 예종의 장남이자 자신의 맏형 이성기를 제치고 황태자가 됐다. 그가 착수한 작업은 쿠데타의 주축이었던 좌우영(左右營)을 격상시키는 일이었다. 이융기는 좌우영의 이름을 ‘용무군(龍武軍)’으로 바꾼 뒤 최고의 대접을 해줬다.

당서(唐書) ‘왕모중전(王毛仲傳)’은 용무군에 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양가 자제들은 군역과 요역을 회피했다. 하지만 용무군만은 예외였다. 앞다퉈 들어가려 뇌물을 바칠 정도였기 때문에 (1000명이었던) 부대 규모가 수천명으로 늘었다. 용무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는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예종이 즉위한 ‘격변의 해’ 710년 하반기, 왕모중은 3품의 품계를 받고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야심가 이융기는 712년 자신의 뜻을 달성, 천자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가 훗날 ‘개원의 치’를 이룬 황제 현종이다.

노예 출신의 ‘대장군’ 왕모중은 713년 다시 한 번 부각된다. 7명의 재상 중 5명을 장악, 권력을 휘두르던 예종의 누이 태평공주가 ‘현종 폐위 음모’를 꾸민 것이다. “태평공주측에서 병사를 동원, 7월 4일 침입해 올 것”이란 극비정보를 입수한 현종은 역공을 취했다. D데이를 하루 앞둔 7월 3일, 왕모중과 그의 병사 300명을 동원해 공주 일행을 주살해 버린 것이다. 현종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상 숙지충을 비롯한 태평공주 측근 전원을 죽이고, 자신과 고종사촌인 공주의 아들들까지 모조리 주살한 뒤, 이미 세상을 뜬 공주 망부(亡夫)의 시체를 꺼내 부관참시했다.

 

병력·재정 확충해 ‘개원의 치’ 틀 마련

 

사태를 신속하게 ‘정리’한 사람은 왕모중이었다. 그 공로로 그는 7일 뒤인 713년 7월 10일, 보국대장군·좌무위대장군·검교내외한구 겸 지감목사로 임명되면서 국공(國公)의 작위와 함께 장안의 저택과 식읍 500호를 받았다. 황족을 제외하면 진압에 공을 세운 인물 중 최고의 포상이었다.

지 교수는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말(馬)을 관리하는 직책인 검교내외한구”라며 “이것은 현종 이융기가 임치왕에서 평왕으로 봉해질 때 함께 받았던 관직이자, 훗날(754년) 현종의 양아들로 총애받았던 안록산이 받기도 했던 요직”이라고 말했다. “황실과 군사 양쪽에 말을 공급하는 핵심임무를 독점함으로써 왕모중이 물자 수송과 병력관리의 맥을 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왕모중은 검소했다. 황제로부터 호화저택을 하사받았음에도 ‘병마양성’을 위해 변방의 처소에서 사병과 함께 생활했으며, 사심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게다가 CEO로서의 경영능력도 뛰어났다. 목동 1000여명을 모집해 그들에게 방목을 맡기는 현대적 개념의 ‘전문가 아웃소싱’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왕모중은 24만마리이던 병마의 수를 43만마리로, 3만5000두였던 소를 5만두로, 1만2000마리였던 양을 28만6000마리로 늘렸다. 그는 죽은 짐승도 버리지 않았다. 가죽을 팔아 비단 8만필을 구입했고, 동맥·목숙 등의 사료를 준비해 겨울을 대비했다.

사욕을 부리며 재물을 축적하던 다른 관리들과 달리 왕모중은 이익을 재투자, 매년 수만석의 잉여 물자를 확보해 황제에게 추가로 바쳤다. 현종은 왕모중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노예 출신인 그를) 연회석에서 황제의 형제·자식들과 나란히 앉게 해 ‘왕’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줬다”는 당시의 기록은 그에 대한 현종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당서(唐書) 기록에 따르면 “현종은 연회 때 왕모중이 보이지 않으면 근심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와 밤새워 대화를 나누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밤을 새고 난 뒤에도 그 다음날이 저물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전쟁에선 기병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말은 최고의 군사자원이었다. 왕모중은 빠르고 멀리 달릴 수 있는 병마를 단시일 내에 확보하고 재정적 확충을 이룸으로써 당이 ‘세계국가’로 뻗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현종의 정치적 안정을 일컬었던 ‘개원의 치’는 왕모중이 닦아 놓은 재정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멈추지 않았다. 현종은 왕모중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감목송(監牧頌)’을 지어 부르게 했으며, ‘이씨’라는 여인을 부인으로 하사했고, 그녀에게 ‘국부인(國夫人)’의 칭호를 내렸다. 또 왕모중의 어린 아들에게는 5품 벼슬을 제수하고 황태자와 함께 놀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 왕모중은 상승을 거듭, 721년 당나라 북부의 병력을 총괄하는 ‘지절충삭방도방어토격대사(持節充朔方道防禦討擊大使)’로 임명돼 중국 북부의 군권을 장악했고, 4년 뒤인 725년엔 1품 고관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임명돼 ‘3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파격적인 황제의 총애는 환관들의 질시를 불러왔다.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물욕·권력욕이 유달리 강했던 환관들과 강직한 성품의 왕모중은 애초에 맞는 궁합이 아니었다. 왕모중은 드러내놓고 환관들에게 모욕을 주곤 했다. 그러자 환관들은 은밀하게 왕모중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축이 된 사람이 훗날 현종에게 양귀비를 소개하는 환관 고력사(高力士)다.

 

“당나라 황제를 노려라” 또 다시 쿠데타

 

환관들의 ‘작업’은 은밀하고 집요하게 진행됐다. 틈을 노리던 그들에게 기회가 왔다. 729년 6월, 황제 호위를 담당하는 ‘용무군’ 대장 갈복순의 아들과 왕모중의 딸이 결혼을 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도가들은 혼인을 통해 세력 결속을 꾀한다. 권력자의 입장에선 이것이 달가운 일만은 아니다. 현종의 경우엔 특히 그랬다. 당나라의 병권이 ‘한 집안’으로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장군들이 왕모중을 따르는 상황에서, 그가 황실 경비대장 갈복순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좋지 못한 일입니다. 게다가 왕모중은 소인배인지라 총애가 지나치시면 나쁜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현종은 탁월한 전략가였다. “짐은 그대들의 충정을 알겠노라.”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상적으로 비대해진 왕모중의 권력이 거슬리던 판이었다. 현종은 “간언 내용을 극비에 부칠 것”을 명했다. 만에 하나 왕모중 제거 의사가 새나갈 경우 역공을 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공주를 제거할 때, 왕모중과 함께 역공을 폈던 현종이다. 그는 은밀하게 작전을 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갈등이 표출된 것은 730년이었다. 왕모중이 황제에게 ‘병부상서’ 자리를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병부상서는 당의 군사력 전체를 총괄하는 요직이었다. 왕모중을 제거하려 마음먹은 황제가 그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 현종은 드러내놓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왕모중도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왕모중의 행위는 당 지배질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이의덕(李宜德), 당지문(唐地文), 왕경요(王景燿), 고광제(高廣濟) 등 당대의 무장 수십 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자적 군사력을 키워온 왕모중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황제에 대한 도전은 황실을 전복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게다가 왕모중에겐 힘이 있었다. 그가 더이상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현종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왕모중은 자신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현종에게 대항할 뜻을 굳혔다. 그는 더 많은 장군들을 포섭,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다져갔다. 현종도 자위 수단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왕모중과 대립관계에 있는 환관들을 동원해 정보수집에 착수, 왕모중의 비리를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종의 권한이 강화될수록 환관들의 권한도 그에 비례해 커지는 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왕모중은 흥분했다. 그는 현종의 조서를 갖고 온 환관들에게 노골적으로 모욕을 줬다. 조서를 받드는 환관에겐 황제에 버금가는 예를 갖추는 것이 당시 신하의 본분이었다. 왕모중은 더이상 현종의 신하가 아니었다.

먼저 칼을 뽑은 것은 황제였다. 왕모중이 극비리에 병기를 수집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황제는 측근 엄정지(嚴挺之)를 등주자사·태원소윤에 임명, 왕모중의 군사기반인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왕모중도 당시 최대의 군수기지였던 태원·삭방·유주 등지에서 군량과 병마·무기를 사들이며 쿠데타 계획을 진행시켰다.

때는 731년 정월. 현종은 왕모중을 따르는 장군들과 왕모중의 아들들을 강등시켜 변방 한직으로 내모는 신년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그리고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왕모중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양대 세력은 충돌했다. 하지만 ‘두 세력이 어디서 어떻게 부딪쳤는가’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문헌은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왕모중이 패하여 죽자, 황제는 엄정지의 충성을 평가해 그를 형부시랑으로 불러들이고, 이후 고위직인 ‘태부경(太府卿)’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지배선 교수는 “왕모중의 사망에 대해 구당서(舊唐書)는 ‘현종이 왕모중을 죽이도록 조서를 내려, 영릉(零陵)에서 목매달아 죽였다’고 적고 있다”며 “이 두 가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전투에서 패한 왕모중이 (장안에서 직선거리로 800㎞ 떨어진) 호남성 서남쪽 영주(永州)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훗날 현종이 애첩 양귀비를 죽일 때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당시 조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을 처형할 땐 목을 매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   주간조선 [1773호] 2003.10.09

 

옛날 한국인의 평균신장

 

고구려시대의 기록을 보면 주변국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었고,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동쪽에 동이족이 있는데 동이족은 활을 잘 쏜다. 말을 잘 타며, 덩치도 크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들이 주변국에 비해 덩치가 컸음을 추측할 수 있지만 정확한 평균키를 알기는 어렵다.

서울교대 조용진 교수가 복원한 가야인의 모습은 대체로 키가 크고, 뼈가 가늘며, 쭈그리고 앉아서 일한 흔적이 없는 ‘큰키형’ 민족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서 출토된 성인 유골의 평균신장은 남성 167.4㎝, 여성 150.8㎝로 조사됐다.

고려시대 또한 정확한 평균신장을 알 수는 없지만 경북 경주시에 위치한 고려시대 고분군을 발굴한 성림문화재연구원과 동아대 김재현 교수에 따르면 남자는 162.2㎝, 여성은 156.97㎝였다. 남성은 삼국시대(가야)인보다 작고, 여성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당시 러시아[표트르 1세 Pyotr I, 1672.6.9~1725.2.8] 남자들의 평균키는 155cm였고, 독일과 네덜란드는 164㎝로 기록되었다.

조상들은 일본을 왜(倭)라고 불렀는데, 倭라는 한자를 파자하면 人+禾+女 로 이루어져있는데 벼(禾)의 키만한 여자(女)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人)라는 뜻으로 작고 왜소하다는 의미다.
고증에 의하면 왜군에 의해 동래(현재의 부산)성 전투에서 전멸하여 발굴된 남성인골 19개체의 평균신장은 163.6㎝, 여성 5개체의 평균신장은 153.4㎝로 당대 일본 에도(江戶)시대 왜인의 평균 키(남성 155.09~156.49㎝, 여성 143.03~144.77㎝)보다 8~10㎝ 큰 것으로 밝혀진다.
왜군에 의해 사망한 19개체의 신분은 치아를 확인할 수 있는 두개골과 하악골 32개 가운데 26개체의 에나멜 질감형성(Enamel hypoplasia 영양실조에 의해 치아발육부진을 나타내는 선 )으로 보아 양반이나 지배계층이 아니라 일반인으로 400년전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10cm 정도 차이를 보이고,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외국인의 눈에 비친 19세기 말의 한국’이라는 책에도 한국인의 평균키는 164㎝로 나온다.

 

일본인들이 왜소한 근본이유는 음식때문이다. 나라 시대의 천황이 불교를 기초로 육식을 금하게 한 것이 긴 세월 동안 단백질공급을 받지 않게 되었던 계기다. 물론 일본에는 이슬람처럼 절대적인 종교적 습관은 없기 때문에 이슬람권에서 돼지고기를 금기하는 것처럼 엄격하진 않아 천황 가에서는 육식을 해 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이 돼지건 소건 살뿐만 아니라 귀부터 꼬리까지 전부 사용하는 요리를 발달시킨 것과 비교해 볼 때 긴 쇄국 시대로 인해 일본의 육식 요리는 매우 빈약했으며, 따뜻하고 습한 기후와 부패 문제로 고기보관이 쉽지 않아 고기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들은 불쌍한 노력을 해왔다. 두부의 다용, 그리고 무엇에든 참기름을 사용해서 기름지게 처리하는 발상. 곤약을 잘라서 참기름으로 볶아 국건더기로 하는 너구리 국. 씹는 순간에 고기처럼 생각되어 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서민들은 운송 문제로 해안에 살고 있던 사람이 아니면 생선도 잘 먹지 못했다. 신선한 생선을 먹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영양면에서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20세기가 되어 음식문화가 개방 될 때까지 서민의 신장을 왜구 싸이즈로 묶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대때의 한,일 양국간의 평균키는 일제의 수탈로 인해 정체되지만,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141727235&code=960100
자료를 보면 성인(남20~50세)들의 평균 키는 164㎝로, 같은 연령대 일본 농부들(157.6㎝)보다 크다.

 

오늘날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이 ‘신체치수측정조사사업’ 결과로 내놓은 ‘한국인 체형정보’에 따르면 1979년 남성은 167.4㎝, 여성은 155.4㎝였고, 2004년에는 남성이 173.2㎝ , 여성은 160.0㎝로 과거 긴 시간의 성장속도보다 최근 25년 간의 성장폭이 월등히 큰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체력실태조사

http://www.mcst.go.kr/web/dataCourt/statisticsData/statisticsView.jsp?pMenuCD=0408000000&pSeq=469

 

뱀빨

신체조건에 비해 한국의 강인한 근성과 얼굴은 일본인들에겐 '괴물'로 회자되기도 하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공한증과 경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일예로 일본의 스포츠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의 한국계선수들

 

일본의 각종 스포츠에서 한국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히 많아 귀화한 선수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현역 선수 중 20% 이상이 한국계로 추정된다. 연예계나 스포츠계로 진출하는 한국계가 많은 이유는 일본사회에서 제외국인의 취업이 강하게 제약을 받는 것이 원인이다.

야구계만 살피면, 오가사와라가 ‘한국인’ 선수에서 한국계 선수가 된 것은 2003년의 일이다. 2004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나가시마 시게오 대표팀 감독의 끈질긴 설득으로 귀화했다.
한국인의 귀화를 위한 행정절차는 최소 6개월, 보통 1년이 걸린다. 그런데 오가사와라는 이틀 만에 서류가 정리됐다.

김성한 전 KIA 타이거즈 감독이 1996년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코치 연수를 갔을 때의 일. 당시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감독은 김 전 감독을 따로 불러 함께 식사했다. 드문 일이었다.
김 전 감독은 “호시노 감독이 팀 내의 한국계 선수와 코치들을 하나하나 얘기해 줬다. 그 양반도 한국계라는 소문이 있던 터라 용기를 내서 물었더니 빙그레 웃기만 했다”고 회상했다.
호시노 감독이 자신이 한국계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몇 해 전 NHK 해설위원에 지원했을 때 이력서에 ‘한국계’라고 썼다고 한다. 호시노 감독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자 일각에서는 “한국계 감독이 일본 대표팀을 맡아도 되는가” 하는 반론이 일기도 했다.

히로시마 카프는 마무리 투수 나가카와 가즈히로를 비롯해 30% 이상의 선수가 외국인 등록증(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기량으로 보면 팀 전력의 절반 이상을 한국계 선수들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계임을 드러내는 선수는 많지 않았으며, 일본 미디어도 야구 스타들의 뿌리를 굳이 파헤치지 않았다. 합의된 침묵이었다.
그런데 최근 스스로 한국인 또는 한국계임을 밝히는 선수가 나오고 있다.
한신 타이거스의 가네모토 도모아키(김지헌)가 대표적이다.

세상이 달라져가고 있는 것일까.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은 재일동포 2세로 42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고향은 경남 진양. 김 감독은 59년 재일동포 고교선발팀 선수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다.
그는 고교 시절 한국인의 얼굴을 가진 친구들과도 ‘핏줄’에 대해 얘기하지 못했는데, 한국에 와서야 서로 “너도 한국인이었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일본 지바 롯데 머린스 코치로 있을 때 재일동포 2, 3세 선수들로 가상의 라인업을 만들어 봤다.  “재미삼아 한번 써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이 선수들이면 세계 최강급 팀을 만들 수 있다”며 웃었다. 재일동포 사회와 일본 야구계의 속내를 잘 아는 그의 ‘증언’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 선수들과 우리 국대를 합치면.. 지구방위대 수준이다.

 

‘재일동포 드림팀’에는 우선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증조부가 한국인)ㆍ마쓰이 가즈오(콜로라도 로키스: 2001년까지 북한 국적을 유지, 불의의 화재로 사망한 아버지 이름이 박재윤으로 밝혀짐 )등 메이저리그 스타들이 포함된다.
기요하라 가즈히로(오릭스 버펄로스)ㆍ오가사와라ㆍ퍼시픽리그 최고의 투수 다이에의 에이스 사이토 가즈미(齊藤 和巳),(소프트뱅크ㆍ2003년 귀화)ㆍ아라이 다카히로(히로시마)ㆍ모리모토 히초리(니혼햄ㆍ森本稀哲;한자 ‘희철’을 ‘히초리’로 발음)ㆍ미야모토 신야(야쿠르트ㆍ일본 선수노조 회장)ㆍ하야시 마사노리(요미우리ㆍ한자이름 林昌範) 등을 더하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색없는 강팀이 된다. 김 감독은 “뉴욕 양키스의 이가와 게이도 한국계”라고 단언했다.

 

그동안 야구선수가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는 대표적인 ‘한국인 선언’ 방법은 일본 대표팀 발탁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일본 야구의 간판급 타자ㆍ투수인 기요하라와 사이토는 끝까지 일본 대표팀 유니폼을 사양했다.
뉴욕의 마쓰이가 지난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참가를 끝내 고사한 것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일본인들이다.

 

기요하라는 태도가 분명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오사카 출신인 한국계 종합격투기 선수 추성훈(아키야마 요시히로)의 경기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며, 2005년 추성훈이 오사카에서 K-1 데뷔전을 할 때는 세컨드를 맡았다.
지난해에는 안면이 전혀 없는 이승엽에게 불쑥 방망이 한 자루를 선물하고는 “우리 생일이 비슷하니 함께 파티를 열자”고도 했다

선동렬 선수가 주니치에서 뛸 때 경기를 가질때마다 정중히 인사를 했다는 한신의 외야수 히야마 신지로(檜山 進次郞3할-30홈런-30도루를 기록)는 주위사람들에게도 자신이 한국계임을 떳떳하게 밝힌 선수이며, 그의 팀메이트인 가네모토 도모아키(金本 智憲), 선동렬과 배터리를 이뤘던 요코하마의 나카무라 다케시(中村 武志)도 한국계다.
오릭스 구대성의 팀메이트인 가네다 마사히코(金田 政彦), 2000년 CL 수위타자에 올랐던 요코하마의 긴죠 다케히코(金城 龍彦), 재작년에 은퇴한 야쿠르트의 90년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케야마 다카히로(池山 隆寬), 요미우리의 투수 히야시 마사노리(林 昌範), 올해부터 오릭스 감독을 맞게될 이하라 하루키(伊原 春樹)감독, 히로시마의 내야수 아라이 다카히로(新井 貴浩), 히로시마의 투수 하야시 마사키(林 昌樹), 요미우리의 백업포수 리 게이치(李 景一), 니혼햄의 내야수 하야시 다카야(林 孝哉)도 한국계다.
한국계임을 떳떳히 밝히는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를 감추는 선수도 많다.
참고로~! 일본 선수 이름중에 성(姓)에 金자가 들어가면 십중팔구는 김씨고, 성이 新井이면 100% 박씨다. 林자는 말 그대로 임씨다. 그리고 한국계 스포츠 선수들의 부모는 대부분 정육점이나 음식점(육식)이 직업인 경우가 많다.  일본[야게] 2008.08.31

 

미국의 한국계 선수들

 

먼저 NFL 피츠버그 스틸러스 소속의 NFL 정상급 와이드리시버 하인스 워드(Heins Ward),
NHL 미네소타 와일드의 역시 수준급 센터포워드인 리처드 박(Richard Park, 박용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국계 선수이다.
하인스 워드는 미군이었던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집을 나간이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워드가 NFL에서 성공을 한 후 아버지가 찾아왔으나, 끝끝내 내쫓았다. 그만큼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선수다.

리처드 박은 출생지가 서울이나 3살때 미국에 이민을 간 이후, 미국에 정착한 교포이다.
NHL 드래프트에서 피츠버그 펭귄스에 드래프트 됐으나, 외국선수에 비해 왜소한 체격과 약한 체력때문에 NHL에 올라가지 못하고 하부리그를 전전했으나, 1999년 확장드래프트때 현 소속팀인 미네소타로 옮기고나서 팀의 중요한 선수가 되어 현재 미네소타의 부주장을 맡고 있다.

리처드 박 이전에 NHL에서 뛴 한국계 선수로는 짐 백(Jim Paek,백지선)이 유명하다.
짐 백은 미국 태생으로, 피츠버그 펭귄스에서 수비수로 뛰며 90년대 초반 스탠리컵을 차지할때의 멤버였다.
이후 오타와 세네터스, 새너제이 샥스를 거쳐, 현재는 국내에서 아이스하키 장비 판매 및 아이스하키 저변확대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작년에 MLB에서 유망주로 소개돼었던 데이빗 김(David Kim)도 St.루이스 산하팀에서 메이저리그로 올라오기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고려시대 여진과 거란관계

 

거란은 고려와 비슷한 시기인 10세기 초에 일어난 북방민족으로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거란은 우리나라 남북국시대의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세력범위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송나라 및 고려와 상당 기간의 투쟁기와 평화시기를 거친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멸망하였다. 금나라는 거란을 멸망시켰으며, 중국 대륙에 진출하여 북송을 멸망시킨후 상당 기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다 몽골에 멸망하였다. 거란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국보로 지정된 초조대장경 인쇄본이 있으며, 거란에서 만든 청동거울이 많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나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 함경도 지역에 금나라인들이 세운 비석이 있으며, 다양한 도자기들 또한 남아 있다.

***거란군을 무리치려고 새긴 대장경의 인쇄본.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유가사지론'의 제 32권을 당시의 경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현종2년 거란군이 개경을 침범하자 부처의 가호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새기기 시작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거란군을 물리치고 강감찬이 세운 탑의 글.

흥국사 석탑에 새긴 탑기를 탁본한 것이다. 흥국사 석탑은 거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의 주인공 강감찬이 전쟁 2년 뒤인 현종 12년에 건립한 탑으로, 오래오래 나라가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명장 강감찬의 우국충정이 새겨져 있다.<출처:국립중앙박물관>

거란 글자가 새겨진 청동 거울. 위의 있는 청동 거울에는 거란글자로 '장수복덕'이라고 적혀있다. 거란에서 청동거울이 많인 수입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거란 소자가 새겨진 청동거울이다. 거울 꼭지를 중심으로 네모난 테두리 안쪽에는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장수복덕'으로 읽히는 거란 문자 네개가 양각되었다. 같은 문자, 같은 모양의 거울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출토된 곳으로 보아 거란에서 수입되어 실제 개경 주민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10세기 초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일어난 거란은 고려가 중국 대륙 중심부의 송과 통교하면서 자신들을 적대하자 고려를 침략해왔다. 이때 고려는 서희의 활약 속에 송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강동 6주를 얻는 성과를 거두며 강화하였다. 그런데 국제교역과 군사상 요충지인 강동6주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거란은 11세기 초 두차례에 걸쳐 다시 고려를 침략해왔고, 고려는 양규,강감찬 등의 활약 속에 이를 격퇴하여 강동 6주를 확고한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고려인들이 불력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전쟁을 끝내고 국교를 맺은 두나라는 약 100년 간 평화롭게 교류하였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아래사진 없슴(***표 : 위, 아래 사진 無)

 

***여진을 정벌하여 얻은 땅에 비를 세우는 그림. 이 그림은 윤관과 오연총이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한 다음 9성을 쌓고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고 새긴 비를 세워 경계로 삼은 것을 묘사하고 있다.
 

***금나라에서 수입한 도자기. 백자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 금나라 사람들이 함경도 경원에 세운비

 

함경도 경원 지방에 중국 금나라 사람들이 세운 비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문자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이 지역 오롱초사라는 절의 건립 및 불상 제작과정, 시주자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여진문자와 여진 인명, 지명, 관병 및 어휘와 형태소들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북쪽 변경의 여진족은 초기에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다가 거란이 쇠퇴하던 12세기 초에는 고려를 강력히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을 키웠다. 고려는 숙종.에종 때에 윤관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정벌케 하였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세력을 더욱 키운 여진은 만주 일대를 장악하여 국호를 금이라 하더니, 곧이어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까지 양쯔강 이남으로 밀어내리며 중국 대륙을 장악하였다. 게다가 금은 과거 자신들이 조공하던 고려에 대해 거꾸로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논란 끝에 이자겸의 현신론을 따라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두나라는 금이 몽골에 멸망하기까지 평화를 유지하였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역대 조선왕 STUDY

 

 
 
 조선 시대 역대 들의 진기록
 
 
 1] 32년간 세자로 있었던 임금은 순종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 임금은 2세때에 세자로 책봉되어 32년간을 세자신분으로 지냈다.
 2] 죽어서 왕이 된 인물은
     조선조에는 죽은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 다섯명인데
     * 덕종은 세조[수양대군]의 아들로서 세조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인수대비의 남편이며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성종, 명숙공주 등 3명을 두었다.
     * 원종은 선조의 5남으로 1627년에 왕으로 추존됨. 인조 등 4남을 둠.
     * 진종은 영조의 아들로 사도세자와 4촌. 6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으로 추존.
     * 장조는 유명한 사도세자로서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
        부인은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음. 1899년 장조로 추존됨.
     * 익종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
        4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19세때[순조27년]대리청정으로 참정하였으나 4년만에 죽고
        뒤에 익종으로 추존됨.
 3]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은?
     세종대왕이 18명으로 가장많고, 다음이 성종 16명, 2대정종이 15명 순이다      
     딸은 태종[이방원]이 17명이며, 성종이 12명, 중종과 선조가 11명 이었다.
 4] 왕비를 가장많이 배출한 가문은?
     *청주한씨가 1위[태조비:신의왕후],[덕종비:소혜왕후],[예종비:장순왕후],[성종비:공혜왕후]
       [예종비:안순왕후], [인조비:인열왕후]로 가장많고
     * 파평윤씨와 여흥민씨가 4명, 청송심씨와 안동김씨가 3명이다.
 5] 왕비중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비는?
     *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8남2녀를 낳았다.
        성종의 제9비 숙의홍씨도 7남3녀로 공동1위이다.
 6] 가장 짧은기간 재위한 임금은
     12대 인종이며 재임기간 9개월이었다.
 7]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은
     21대 영조로서 51년 7개월로서 반세기동안 왕좌를 지켰다.
 8] 가장 단명한 임금은  : [단종애사의 주인공 6대 단종으로서 17세에 사약을받고 죽음]
 9] 가장 장수한 임금은  : [21대 영조로서 83세까지 장수했다]
 10]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임금은
       3대태종과  9대성종으로서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세종대왕은 6명이었다.
 
각종 최장기 기록들
 
 1] 가장 오랫동안 벼슬에 있었던 인물은 ?
     조선말엽의 정원용 으로서 20세에 급제하여 마지막 영의정을 지낼 때까지 72년간을 관직
     있었으며  그는 지극히 검소하여 청백리에 올라있기도 하다.
 2] 호조판서를 최장기간 지냈던 인물은?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인 정홍순으로 무려 11년간을 호조판서로 재임한 유일무이한 인물.
     그는 재정문제에 대한 당대 제일인자의 명성을 날렸다.
 3] 벼슬의 꽃인 홍문관 대제학을 최장기간 역임한 인물은?
     당대의 대문장가 서거정[달성서씨]로 23년간을 재임했다.  
 4] 가장 여러대의 임금을 보좌한  사람은?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7대의 임금을 보좌한 김세민[경주김씨]으로
     70년동안 봉직하면서 7대의 임금을 보좌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5] 조선시대 역사 인물중 가장 장수한 인물은?
     여중추부사 권황[안동]과  죽림칠현의 한사람인 홍유손으로 모두 99세까지 살았다.
 6] 가장 귀양살이를 오래한 사람은 누구일까?
     다산 정약용으로 28세때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종교문제로 19년간 강진에 유배됨.
 7] 예조판서에 최장기간 봉직한 사람은?
     범옹 신숙주로 무려 15년간 예조판서에 재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뛰어난 어문학자로서 7개국어에 능통했으며 외교문서는 거의 신숙주의 손을 거쳤다.
 8]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가장 오래 재임한 인물은?
     유명한 재상 황희정승으로 지속적으로 18년간을 재임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조선 제일의 청백리 관료이자  가장 대표적인 신하이다.
 
조선왕조 최다수의 기록들
 
 1] 영의정을 가장 여러번 지낸 인물은?
     최석정[전주최씨]으로 서 56세에 영의정이 된후 8번을 지냈다. 그는 소론의 영수이었다.
 2] 이조판서를 가장 많이 역임한 사람은?
     42세에  이조판서가 된 박종덕[반남박씨]으로서 무려 18번이나 이조판서에 올랐다.
     관료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관직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어야 하는만큼 그는
     공평한 인사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3] 당시 수도의 총책임자인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최다 역임한 인물은?
     이가우[연안이씨]로서 34세에 급제한후 열번을  한성판윤에 올랐다.
 4] 판서[장관]직을 통털어 가장 많이 지낸 인물은?
     박종래로서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5조판서를 돌아가며 총 15회 지냈다.
 5] 사법기관의 장이었던 사헌부 수장을 최다 지냈던 인물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된 권상하[안동권씨]이며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6] 책을 가장 많이 저술한 인물은 누구일까?
     지봉유설의 저자 이민구[전주이씨] 24세에 장원급제한 사람으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저술을 좋아해서 무려 40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7] 선비의 표상이자 관리들의 자존심인 호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은?
     유명한 추사체의 창시자  김정희.   그는 약 200개의 호를 지어썼다. 완당,추사,노과,등등...
 8] 임금에게 벼슬을 그만두겠다고하는 사직상소를 가장많이 올린 사람은?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는 37번이나 사직상소[사직서]를 올려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  최연소 기록들
 
 1] 조선시대 통털어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15세의 이건창으로  1866년[고종3] 강화도 별시문과에 합격했다.[김종서는 16세에 합격]
 2] 최연소 장원급제자는 ?
     17세의 박호[밀양박씨]는 1584년[선조17]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임진왜란때 전사]
 3] 무과출신 급제자중 최연소 인물은?
     17세의 남이[의령남씨]1457년[세조3] 무과에 장원급제.[유자광의 모함으로 주살됨]
 4] 최연소로 세자에 책봉된 인물은?
     영조의아들 사도세자는 2세에 세자책봉 되었으나 그만 뒤주속에 갖혀죽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도세자는 10세에 결혼하여 최연소 결혼기록도 가지고 있다.
 5] 최연소로 영의정이 된 인물은?
     세종대왕의 손자인 이준[임영대군의아들]으로서  28세때 영의정에 특서됨.
 6] 병조판서를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은?
     권람의 사위인 남이 27세에 병조판서가 됨.
 7]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을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은?
     만인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벼슬의꽃 홍문관 대제학에 한음 이덕형이 31세에 올랐다
 
조선왕조  최초의 기록들
 
 1]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최초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은?
     평북 의주 출신인 이성하로서 고종11년에 영국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2]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은 누구인가?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3] 조선조  최초로  정승이 된 사람은?
     조선개국 일등공신 배극렴이다.  그는 이성계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개국후 처음으로
     좌정승[문하 좌시중]이 되었다.
 4] 조선왕조 도읍지 한성의 최초 한성판윤[서울시장]이 된 사람은?
     성석린이 1395년에  초대 한성판윤부사로 임명되는 기록의 보유자가 됐다.
 5] 과거급제를 하지 않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은?
     황희정승의 아들 황수신이다.   그는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6] 조선시대 최초로 일본에 대하여 상세하게 저술된 책은?
     신숙주가  일본방문을 한후 저술한 [해동제국기]이다.   일본내막을 상세하게 적은 책으로
     최초의 일본안내서가 되었다.
 7] 족보는 고려시대에 이미 등장했으나,  현존하는 족보는 조선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