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 고구려 연구 현황과 고구려연구회

2013. 5. 29. 09:41우리 역사 바로알기

 

 

 

 

Ⅰ. 머리말


    2003년 12월 9일, 한국사 관련 17개 학회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 학술발표회」(주관 : 한국고대사학회, 후언 : 교육인적자원부)를 열고 4개 항목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회에서 「‘동북공정’의 배경과 내용 및 대응방안」을 발표한 최광식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경우 수 십억 원 규모의 연구비를 책정하고 있으나 우리의 경우 내년 예산에 수억 원 정도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다고 들었다. 중국의 경우 수 백 명의 연구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 고구려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와 고구려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연구자 모두 해도 수십 명의 연구자를 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 및 발해 연구자가 이 문제에 대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이 부분에 대한 예산을 늘리고, 학문후속 세대들이 고구려와 발해 및 고조선사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1. 중국은 엄청난 예산을 지원하여 고구려 연구를 하고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2. 중국은 수 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한국은 수 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 달 뒤, 한국고대사학회 2004년도 기획발표회 「중국의 고구려 유적 정비 현황과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대응방안」(1월 30일, 대우재단빌딩)의 2부 종합토론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대응방안」(여호규)에서도 같은 내용이 발표되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학문적 동기가 아니라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정제변화에 대하려는 정치적 목적 아래 진행되고 있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는 이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만한 역량과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함. 무엇보다 고구려사 전문 연구자가 너무 적고, 기초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초보적인 연구기관조차 없는 상태임.

    결국 우리나라는 고구려사 전문 연구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메스컴을 타고 전국에 알려졌고, 국민들은 걱정을 넘어서 최근에는 “결국 해 보았자 중국은 못 당한다”는 자조의 말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의 결과로 설립된 「고구려연구재단」의 이사장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고구려 역사, 고구려 문화, 벽화·고분과 관련해서 지정 과제로 응모하게 했는데 지정과제 둘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사람 수가 적기 때문에 다섯 사람이 한 팀이 되어서 들어와야 되는데 고구려연구재단에 사람이 있다 보니까 구성하기가 매우 어려운 입장입니다. 그 정도로 맨 파워가 약하다 …  
해방 후에 고구려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14명 있습니다. 해방후 지금까지 14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연구하고 대처하는 과정에 맨파워가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것을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은 한·중 고구려 연구자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해 보지 않고 피상적으로 한 주장들이 가져온 결과이며, 그것은 결국 전 국민을 패배주의적 포기상태로 빠트리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고구려연구 단체를 만들고 지원을 받기 위해 한 방편처럼 보이지만  국민들에게 주는 역효과는 엄청나게 크고, 이미 10년 이상 고구려 연구를 전문으로 해온 단체나 학자들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본 고대사 연구자들이나 고구려연구재단의 주장은 잘 못 된 것이라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바로 이 점을 실증적 분석을 통해서 밝히고 그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Ⅱ. 중국의 고구려 연구 현황

1. 고구려 전문 연구인력

1) 고구려 연구 관계 석,박사 학위 취득 현황

    중국의 고구려 연구와 연구 학자를 분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앞으로 많은 시간과 인력을 들여 조사 분석해야 하겠지만 이번 논문은 한국과의 비교가 주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까지 조사가 가능한 한도 내에서 보기로 한다.
중국에서 학위 취득자나 논문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가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알음알이를 통해서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고구려에 관계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4명이다.


    모두 연변대에서 나왔는데 4명 가운데 3명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 3명은 현재 중국에서 학술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나머지 한 명인 박찬규 박사는 조선족이다. 한편 한국에서 박사를 받은 연변대의 서일범 교수(「북한 고구려 산성 연구」, 2000년, 단국대)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에 박사 학위를 가지고 고구려 연구활동을 하는 학자는 2명이다고 할 수 있다. 연구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연구 주제도 문헌연구, 관제, 신앙으로 한정되어 있다. 2000년 이후에는 연변대에서 한국 사람이 고구려사로 학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이미 학위과정을 마친 사람은 신라사로 바꾸거나 학교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박사학위에 비해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 수가 많지만 10명 남짓한 인원으로 고구려를 전공으로 하려는 젊은 학자들은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구려 관계 석사학위 소지자는 주로 길림성의 장춘에 있는 길림대(고고학과 4명, 역사학과 1명)와 동북사범대(1명),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에 있는 연변대(3명)에서 배출되었고, 요령성에서는 심양에 있는 요령대학(2명)과 요령사범대(1명)에서 나왔다.  우신수(于新水)와  한국인 임찬경 씨를 빼놓고 보면 거의가 1999년 이후 최근에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표 1> 중국의 고구려사 관계 학위 취득자
    학위대학학위취득자총인원비고박사학위연변대4명총 4명한국인 3명석사학위길림대 고고학과4명연변대 역사학과3명길림대 역사학계1명동북사대 역사학과1명요령대 역사학과2명요령사범대 역사학과1명총 12명한국인 1명

    중국에서 대학원이 활성화 된 것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학위 취득자가 적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정규적인 학위과정을 밟아 고구려를 전공하는 학자가 뜻밖에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주요 고구려 연구 학자 분석

    현재 고구려연구회에서 수집 분석하고 있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논문 1000편을 논문 편수에 따라 표를 만들어 보았다(표 3 참조). 아직은 자료를 수집중이라 정확한 통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연구자의 현황을 파악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고구려에 관한 논문을 6편 이상 쓴 학자는 모두 26명이다.

표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국에는 대학이나 학술기관 보다는 국가나 지방정부에서 출연한 기관의 연구자가 더 많다.  연구인원을 가장 많이 배출한 기관은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6명)이고 이어서 사회과학원(중국 2, 길림성 2), 박물관(요령성 1, 집안시 2, 본계시 1) 등에서 8명이 나와 공공기관모두 14명으로 전체의 54%에 가까운 연구인원을 배출하고 있다. 다음이 대학인데 주로 길림대, 연변대, 통화사범대, 동북사대, 요령대에 재직하는 교수들이다. 민간연구단체인 동아연구중심의 활략도 특기할 만하다.  

2) 26명 가운데 절반인 13명이 이미 정년퇴직을 하거나 작고(2명)하여 사실상 활동을 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90년대 들어와서 고구려 연구를 시작한 유자민(연변대), 양춘길(통화사범대), 마대정(중국사회과학원) 같은 학자들은 주로 고구려사 귀속문제에 초첨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하기 어렵다. 활동하고 있는 학자들도 전체적으로 연령이 높아 고령화 현상을 보이고 있고, 이에 따른 젊은 학자들의 참여는 둔화되고 있다. 옛날처럼 국가에서 직장을 배정해 주지 않고 경제발전에 따라 젊은 사람들이 학문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3) 한 두 사람을 빼놓고는 대부분 80년대에 들어와 고구려 연구를 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고구려 연구가 늦게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중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26명의 학자들 가운데 61.5%인 16명이 (사)고구려연구회에서 주최하는 국내,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표 3>을 작성할 때 사용한 상당한 데이터가 이런 국제적인 교류의 결과로 가능했다.  

<표 3>            중국의 주요 고구려 연구 학자


성명논문 편수


(공저)성별연령근무지현재 상태첫 논문고구려연구회 대회1耿鐵華54.5(15)남1947통화사범대 고구려연구소재직19816회2孫進己52(12) 남1931심양동아연구중심재직19847회3李殿福40.5(3)남1934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정년퇴직19623회, 5회, 6회 참가4劉子敏21남1938연변대학 역사학과정년퇴직19945劉永智20남1931길림성사회과학원정년퇴직19812회 참가6朴眞奭19.5(3)남1926연변대학 역사학과정년퇴직19812회 참가7魏存成19남1945길림대학 고고학과재직19862회, 4회, 7회 참가8王綿厚17.5(1)남1945요령성박물관정년퇴직19844회, 7회9方起東17(4)남1939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정년퇴직19809회10李建才17남1920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정년퇴직1982고구려남진정책 참가11孫仁杰16(4)남1952집안시박물관재직19857회12王建群15남192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작고19832회 참가13楊春吉13.5(14)남통화사범대 고구려연구소재직199614姜孟山11(2)남작고연변대학 역사학과작고1981국내 2회15張雪巖10.5(5)여1946집안시 박물관재직19857회16張博泉10(2)남길림대학 역사학과정년퇴직198117陳大爲10남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정년퇴직196018徐德源9남요령대학 역사학과정년퇴직197719範犁8.5(1)남집안시박물관, 통화사범대 고구려연구소정년퇴직198620楊昭全8(4)남1933길림성사회과학원
조선한국 연구소재직(소장)198421孫玉良8(2)남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정년퇴직199322徐日範7남1962연변대 역사학과재직19994회, 5회 참가23梁志龍6.5(1)남본계시 박물관재직199124馬大正6남1938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재직199825徐建新6남1953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재직19932회 참가26孫泓6여1970심양동아연구중심재직19988회 참가




3) 고구려 연구자들의 동북공정 참여 현황

   2002년부터 시작한 동북공정에는 고구려 연구 학자들이 크게 참여하고 있지 않다.
1차(2002)년도에는 번역과제 7과제 가운데 1과제, 연구과제 26과제 가운데 3과제가 고구려에 관한 것으로 전체 과제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2003년도 15과제 가운데서는 1과제뿐이며, 2004년도에는 고구려에 관한 과제가 하나도 없다.


    이처럼 고구려사에 관한 과제가 많지 않은 것은 동북공정을 시작할 때는 이미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는 이미 1996년 현재 동북공정을 이끌어가는 마대정을 팀장으로 해서 『고구려 역사 연구』가 사회과학원 중점과제(重點項目)로 선정되어 1997년까지 연구를 마쳤다. 그 결과가 2001년 발행된 『고대 중국 고구려사 총론(古代中國高句麗史叢論』이다. 동북공정은 그 다음 해인 2002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 못 판단한 것이다. 우리가 동북공정의 과제를 자세히 보면 동북공정은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넘어서 명청시대와 간도 같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사의 왜곡은 이미 1995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각종 연구소와 여러 번 열렸던 고구려 학술대회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런 연구 성과들을 사회과학원이 모아서 공식적으로 『고대 중국 고구려사 총론(古代中國高句麗史叢論』펴내므로 해서 1차 사업은 일단락 된 것이다.    

‘동북공정’ 제1차년(2002)도 프로젝트 일람표

1. 번역과제
1) 《朝鮮韓國史學系的古朝鮮, 夫餘硏究論著選編》, 孫啓林
2) 《朝韓學界高句麗的硏究文獻》, 權赫秀
3) 《國外渤海史硏究資料彙編》, 鄭永振
4) 《朝文相關重要著作和資料飜譯》, 張璉
5) 《中朝邊界史》- 白山資料院叢書選擇, 高敬洙
6) 《朝鮮半島現況硏究》, 張英
7) 《韓國和朝鮮的經濟, 社會狀況比較》, 吳建華

2. 연구과제
1) 《黑龍江通史》, 步平, 흑룡강성사회과학원
2) 《二十世紀中國東北邊疆文化硏究課題》, 黃定天, 흑룡강성사회과학원
3) 《好太王碑1580年》, 耿鐵華, 길림성통화사범학원
4) 《箕子 箕子朝鮮硏究》, 張碧波, 흑룡강성사회과학원
5) 《渤海國史》, 魏國忠, 흑룡강성사회과학원
6) 《渤海史論》, 朱國 , 흑룡강성考古硏究所
7) 《中國東北古民族發展史》, 李德山, 길림성동북사범대학
8) 《中韓相關姓氏族源考論》, 王雅軒, 요녕대학
9) 《民國時期東北地方政府治邊硏究》, 胡玉海, 요녕대학
10) 《東北民族區域設置硏究》, 程 娜, 길림대학
11) 《歷朝東北治邊硏究》1-7권, 徐德源, 鄭川水, 요녕대학
12) 《國際法 中朝邊界爭議問題》, 焦潤明, 요녕대학
13) 《簡明高句麗史》, 孫玉良, 길림성사회과학원
14) 《淸代邊疆城鎭硏究》, 李治亭, 길림성사회과학원
15) 《長白山地區歷史 文化及其歸屬問題硏究》, 劉厚生, 동북사범대학
16) 《東北漢族人口史硏究課題》, 孟廣耀, 흑룡강성사회과학원
17) 《中國歷代治理東北邊疆思想硏究》, 劉信君, 길림성사회과학원
18) 《渤海移民的治理 歸屬問題》, 武玉環, 길림대학
19) 《淸代鴨綠江流域的封禁 開發硏究》, 張杰, 요녕대학
20) 《鴨綠江以南的高句麗遺跡調査硏究》, 徐日范, 연변대학
21) 《東北邊疆多民族文化交流 融合硏究》, 正, 길림성사회과학원
22) 《僞滿時期東北邊界衝突 界務交涉硏究》, 王慶祥, 길림성사회과학원
23) 《中國東北 俄國經濟關係史》, 張鳳鳴, 흑룡강성사회과학원
24) 《俄國東部移民開發問題硏究》, 王曉菊, 흑룡강성사회과학원
25) 《“三國史記”詳注及硏究》, 劉子敏, 朴燦奎, 연변대학
26) 《俄羅斯遠東地區的中國人》, 張宗海, 흑룡강성사회과학원


‘동북공정’ 제2차년(2003)도 프로젝트 일람표

編号課題 名稱責任者職業 場所1근대 이후, 러시아 · 일본이 중국동북역사지리에 대한 조사연구 보평(步平)黑龍江省社會科學院
遼寧省社會科學院2고구려 민족과 국가의 연변양군(楊軍)吉林大學3청나라 말기 동북변강의 조선족 移民과 “間島”문제 연구의보중(衣保中)吉林大學4조선반도의 민족, 국가의 기원 및 발전이덕산(李德山)東北師範大學5말갈, 발해와 동북아시아 각 나라, 각 민족 관계사 연구마일홍(馬一虹)中國社會科學院6명나라 동북강역연구양양(楊暘)吉林省社會科學院7명나라시기 동북邊民이 조선에 이주한데 관한 연구사조화(謝肇華)遼寧省社會科學院8고구려의 族源 및 강역왕면후(王綿厚)遼寧省博物館9동북변강강역문제 연구풍계창(馮季昌)遼寧大學10발해유적지 현황 조사연구팽선국(彭善國)吉林大學11러시아와 중국 동쪽 변경연혁 및 界務문제 연구이전훈(李傳勛)黑龍江大學12변강의 이해 및 이해의 변강: 서양변강 이론에 대한 지식고고학 고찰장세명(張世明)中國人民大學淸史所13러시아 亞太정책의 추세 및 중국 · 러시아 구역협력조립지(趙立枝)黑龍江省社會科學院 14연변지역 국제결혼문제 연구전상화(田相華)吉林省社會科學院15동북변강지역 社會安定문제 연구정신철(鄭信哲)中國社會科學院

‘동북공정’ 제3차년(2004)도 프로젝트 일람표
課題名称主持人工作單位唐代渤海國五京硏究楊雨舒吉林省社科院歷史所元朝与高麗關系硏究烏云高娃中國社科院歷史所朝鮮李朝"北進"政策与"間島"問題硏究孫春日延邊大學民族硏究院淸代東北的交通与邊政劉文鵬中國人民大學淸史所淸代東北移民政策硏究張士尊鞍山師范學院政史系俄羅斯學界渤海史迹硏究成果之學術史与歷史文獻學硏究胡凡黑龍江大學歷史系

2. 고구려 전문 연구 단체

1) 심양동아연구중심(沈陽東亞硏究中心)

   설립 : 1991년 심양시동아문화연구소(沈陽市東亞文化硏究所)
         1992년 심양동아연구중심(沈陽東亞硏究中心)으로 개명
   주임 : 손진기(孫進己)
        현재  직원 30명 남짓, 겸직연구원 100명 남짓
   주된 사업 :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 고고학 연구.
   산하 연구소 : 동아역사연구소, 동아민족연구소, 동아고고연구소, 동아문고 편집부
   주요 저작 : 『東北亞硏究』 26권, {中國考古集成』東北편, 華北편 등 총135권, 『高句麗 渤海硏究集成』6권, 『北方歷代人物傳』 7권, 『東北地方史硏究系列』4권,『遼寧省市縣文物志』5권,『高句麗硏究系列』5권.) 현재 출판 준비중인 책 : 『中國考古集成·華南卷』,『契丹 女眞硏究集成』,『烏桓 鮮卑硏究集成』,『高句麗民族史』,『渤海民族史』,『遼代民族史』

2) 통화사범대학(通化師範學院) 고구려연구소

  설립 : 1995년 7월, 소장 : 耿鐵華 교수/현재 소장 - 楊春吉 교수
  부소장 : 黃甲元 교수(長白山區地方史 전문가)
  설립목적 : 고구려 역사와 고고 연구, 인재와 地緣 우세함을 발휘. 고구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및 族源, 族屬, 고구려와 중원왕조·백제·신사·일본·발해와의 관계 문제 연구
성과 :
    통화사범대학의 고구려연구소는 몇 가지 면에서 다른 연구기관보다 우수한 바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바로 고구려 705년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국내성이 바로 통화시에 있으며, 첫 수도인 환인 오녀산성도 국내성과 같이 짧은 거리 안에 있어 현장에서 직접 고구려 유물을 발굴하고 유적을 답사할 수가 있다. 둘째, 가장 먼저 생긴 고구려 전문연구소이기 때문에 각 기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중국학자 고구려연구 문헌목록}이나 고구려자료집인 {고구려사적회요(高句麗史籍 要)} 같은 기본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셋째, 고구려사 연구 전문가가 있다. 그리고 집안 박물관의 연구자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어 연구인력 확보가 쉽다. 넷째,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있는 큰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비해 이 대학은 고구려 연구를 특화하여 전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고구려연구소는 다른 어떤 단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이런 연구성과는 다분히 경철화 교수 한 명의 활약에 힙입은 바 크다.) 연구 책임자 耿鐵華·倪軍民·楊春吉의 연구성과

3) 길림성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

  설립 : 1997년, 소장 : 孫文範(정년퇴직),

    길림성사회과학원의 고구려연구중심은 고구려 연구의 중심이 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으나 아직 그렇다 할만한 연구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 국제학술대회 같은 중요한 행사를 중국변강사연구중심과 함께 공동주최하는 등 힘을 쓰는 듯 하지만 괄목할만한 연구성과가 없는 것은 고구려를 전문으로 하는 연구인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4) 동북사범대학 동북민족강역연구중심(東北民族與彊域硏究中心)

  구성 학자 : 劉厚生, 孫啓林, 李德山
  성과 :  {黑土地的古代文明},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高句麗史話}, {渤海國史話},  
  동북사범대학은 동북지방에서 가장 우수한 역사학과를 두고 있다. 길림대학이 고고학이면 동북사범대학은 역사학인 것이다. 동북민족강역연구중심에서 제1차 전국 동북 민족과 강역에 관한 학술토론회(東北民族與彊域學術硏討會)를 주관하였다. 이 회의에서 고구려에 관한 논문이 여러 편 발표되었다. 유후생 교수는 중국변강지구 역사사회연구(中國邊疆地區歷史與社會硏究) 동북공작참(東北工作站) 부참장 일을 맡고 있으며, 동북공정에서도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고구려 문제는 주로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내고 있다.  

5)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중국변강지구 역사사회연구(中國邊疆地區歷史與社會硏究) 동북공작참(東北工作站)

* 1995년 -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주임 마대정 '제1차 전국고구려학술대회' 참석
* 1996년 하반기 - 고구려 문제를 중국사회과학원 중점연구 과제로 정식 입안
* 1997년 - 연구참가자들 길림성 고구려 유적 고찰, 길림, 요령, 흑룡강성 고구려사 동북지방사 연구 학자들과 교류 및 연구
* 1997년 연말 - 과제 초고 완성
* 2001년 - 邊疆史地叢書 {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 (黑龍江敎育出版社, 1998년12월)
* 2003년 - 古代中國高句麗歷史續論


<표 2>                 중국의 고구려 연구단체

연구단체설립연도학자연구 분야주요 연구실적비고1심양동아연구중심
1991孫進己
孫泓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 고고학 『高句麗 渤海硏究集成』민간 연구단체2통화사범대
고구려연구소1995耿鐵華
楊春吉 고구려 역사와 고고 {高句麗歷史與文化硏究}
고구려연구 문헌목록
高句麗史籍滙要
{高句麗歸屬問題硏究대학 연구소3길림성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1997孫文範
劉炬주로 행사 주최1차, 2차, 3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 주최지방정부
출연
연구기관4동북사범대학
동북민족강역연구중심1997(?)劉厚生, 孫啓林, 李德山쉬운 읽을거리高句麗史話, 渤海史話대학 연구소5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1996년 고구려문제馬大正
厲聲동북공정
담당?고대고구려역사논총?
?고대고구려역사속론?국가 출연
연구기관

중국에서는 민간 연구소, 대학연구소, 지방정부 출연 연구소, 국가 출연연구소가 서로 할 일을 나누어 효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3. 고구려 전문 학술대회와 학술지

1) 고구려 전문 학술대회

(1) 1993년 제1차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토론회
   곳 : 집안시
   때 : 8월 11∼14일 
  주최 : 해외한민족연구소, 중국조선사연구회, 조선일보사
  협찬 : 롯데그룹    

    이 토론회에는 중국, 한국, 북한, 일본, 대만, 홍콩에서 많은 학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토론회에서는 원래 귀속문제에 대한 논의는 전혀 기획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첫날 종합토론이  진행되는 도중 발표자가 아닌 방청석에서 당시 북경대학 청화대학에서 근무하는 정인갑 교수가 고구려의 귀속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당시 집안박물관 부관장이었던 경철화(耿鐵華)가 "나 개인의 학설이자 중국 동북지방 역사 및 고고학의 성과인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서기 427년부터는 고구려가 조선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 문화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 지방의 용(龍)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 김일성대학의 역사학계 원로인 박시형(당시 84세) 교수가 "한 나라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법이다. 과거의 고조선·고구려 땅이 지금 중국 영토가 되었다고 해서 그 역사를 어떻게 중국사에 갖다 붙여 중국 소수민족 운운하는가 이해할 수가 없다. 고구려야 옛날부터 고조선·부여와 함께 중국인들 스스로가 역사책에서 '동이족'이라고 독립해 지칭했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란 서술은 역대 어느 사서에도 없다."고 반박하였다) 김태익 [고구려는 누구의 역사인가], {아! 고구려}, 조선일보사, 1994, 82쪽.


      중국 학자들이 오늘날의 국경을 가지고 역사상 고구려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측 손진기는 "우리들이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중앙 황조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후예는 조선족이라고 할 수 없고 대부분은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이 되었다"고 되받았다.
    이 당시 회의에 참가한 한국의 학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번도 고구려 역사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한국 학자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논의는 있었지만 그 주장이 주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인 학자들에게도 큰 놀라움이었다.


    이 국제학술대회가 끝난 뒤 한국과 중국 양국에는 갑자기 고구려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1994년 이후 갑자기 고구려 연구열이 달아오른 것은 당시 연구의 흐름이 '고구려=중국사'로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대회에서의 있었던 뜨거운 논쟁은 많은 중국 학자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이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이나 당시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도 그 동안 그에 대응을 하지 않은 정부와 학계의 반성이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2) '제1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

때 : 1998년 6월 26일∼28일(3일간)
곳 : 통화시
공동주최 : 길림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
통화사범학원 고구려연구소


(3) '제2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第二屆東北邊疆歷史與現狀 高句麗學術硏討會)

때 : 2002년 7월 9일∼13일(5일간)
곳 : 장춘시, 통화시
주최 : 中國社會科學院 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吉林省社會科學院
후원 : 遼寧省社會科學院, 黑龍江省社會科學院, 吉林大學, 東北師範大, 遼寧大學,
延邊大學, 北華大學, 吉林師範大學, 長春師範學院, 通化師範學院
참가 : 100명 남짓, 논문 70편.
          
(4) 고구려·발해문제학술토론회(高句麗渤海問題學術討論會)

  
때 : 2003년 8월 23∼24일(2일간)
곳 : 길림성 延吉市
공동주최 : "동북공정" 사무실·연변대학 中朝韓日文化比較硏究中心(교육부 文科基地)
주관 : 연변대학 中朝韓日文化比較硏究所
참가 : 25명(흑룡강사회과학원,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통화사범학원, 연변대학, 요령성박물관, 요령대학, 심양동아연구소, 정주대학 및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5) 제3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第三屆全國高句麗學術硏討會)

-고구려 학술연구, 고구려유적 세계문화유산 지정 촉진, 고구려 국내성 천도2000주년 기념 -

때 : 2003년 10월 9∼11일(3일간)
곳 : 길림성 집안시 집안호텔
주최 : 길림성사회과학원·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 9일 오전에는 집안시 정부 주최 고구려 국내성 천도2000주년 기념축전과 상징건축물 제막식에 참가
* 대회 참가 논문은 중국사회과학출판사에서 {紀念高句麗遷都國內城2000周年學術論文集}으로 출판될 예정

2) 고구려 전문 학술지

    중국에는 고구려만을 주제로 하는 정규 전문 학술지는 없다. 다만 학술대회를 마치고 그 대회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묶어서 책으로 낸 것이 있다.



Ⅲ. 한국의 고구려 연구와 연구자

1. 고구려 전문 연구 인력

    한국에 고구려를 연구한 학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은 지금까지 나온 고구려 논문을 모두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분석해야 한다. 이 문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고구려를 주제로 석,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들을 분석하려고 한다.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동안 학위 취득자를 분석하는 것만 가지고도 이 논문에서 목표로 하는 한중간의 연구자 비교가 뚜렷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1) 박사학위 취득자 현황(총 32명)

    현재까지 고구려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인은 모두 32명이다.

서울대(8) - 여호규, 전호태, 최종책, 노태돈, 김일권, 강현숙, 이애주, 정완진
경희대(3) - 박성봉, 박종대, 임기환
고려대(2) - 금경숙, 박경철
단국대(2) - 서일범, 이인영
숙명여대(2) - 김정호, 강선
연세대(2) - 김광수, 김문경
경북대(1) - 김현숙, 동국대(1) - 서영수, 서강대(1) - 이성제, 성균관대(1) - 윤명철,
세종대(1) - 전혜숙, 이화여대(1) - 진홍섭, 전북대(1) -박노석, 중앙대(1) - 신지현,
충남대(1) - 공석구
외국(4) : 연변대(3) - 한상호, 고재휘, 임찬경 ; 펜실바니아대(1) - 박아림

    박사학위의 주제를 보면, 정치사(9명) 영토나 대회관계사(6명)가 전체의 거의 50%를 차지하고, 이어서 벽화가 7명으로 그 뒤를 잇는다. 벽화는 복식사나 미술사 전공자들이 많이 전공을 해 역사학계가 아닌 다른 학과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고학 분야(3명)에서도 토기, 고분, 산성 같은 여러 분야에서 논문이 나왔고,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연구도 2명이었다. 그 밖에 종교와 사상(2명), 언어(1명), 해양사(1명) 등 아주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별첨 학위 수여자 명단 참조)  

2) 석사학위 취득자 현황(총 198명)

    현재까지 각 대학원에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198명이다. 이 내용은 국회도서관에 데이터베이스와 고구려연구회 소장 논문을 합한 것인데 빠진 논문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 학위취득자 198명 가운데 60% 남짓한 119명이 일반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고, 33%남짓한 66명이 교육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국사학계에서는 교육대학원이나 산업대학원 같은 소위 특수대학원의 논문을 크게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연구자들과 비교하는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특수대학원 논문이 갖는 의의가 훨씬 커진다.


첫째, 논문에 따라 다르지만 특수대학원의 논문들로 중국 학자들의 논문에 비하면 그 완성도가 비할 바 없이 높다는 것이다.  중국의 논문들은 (1) 확실한 전거를 대지 않은 것들이 많다. 주를 확실히 달지 않기 때문에 누구 논문이 원본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2) 저명한 논문집에도 논문 형식을 취하지 않고 마치 수필처럼 쓴 것들이 많다. (3) 같은 논문을 여기저기 중복해서 싣는 경우도 상당 수 있다. 귀속문제만 보더라도 새로운 연구성과가 아니고 똑 같은 내용이 여러 책에 수도 없이 반복해서 나온다. 중국 학자들의 논문 가운데 가장 큰 맹점은 외국의 논문을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 학자들, 심지어는 미국의 학자들도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중국어와 일본어를 해독하고 자료를 섭렵하여 자신의 연구에 반영한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극히 일부 번역본을 빼놓고는 외국의(특히 한국어 자료) 연구 성과를 거의 도외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는 수준 높고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교육대학원에서 받은 66명은 대부분 학교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국사나 사회과 교사들이다. 이것은 바로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과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기 역사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중국의 학교에서 우리처럼 자국의 역사로 가르치지 않고 더구나 담당 교사들이 이처럼 수준높은 석사학위를 취득한다는 것은 앞으로 백년이 가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66명의 석사학위 취득자는 고구려사가 한국사라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디자인대학원이나 산업대학원에서 받은 학위는 대부분 벽화를 디자인에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 문화를 직접 생활에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실용학문 분야에서조차 고구려 문화를 채용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고구려가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중국에서 벽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한 두 사람 있지만 그것을 다자인에 직접 응용하기 위해 석사학위까지 받은 학자는 아직 없다. 디자인대학원이나 산업대학원에서 받은 석사학위는 고구려 문화가 한국의 문화라는 것을 수준 높은 학문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반대학원(119명)

서울대 대학원(12), 이화여대 대학원(9), 고려대 대학원(7), 동국대 대학원(6), 숙명여대 대학원(6), 홍익대 대학원(6), 국민대 대학원(5), 단국대 대학원(5), 동아대 대학원(4), 부산대 대학원(4), 성균관대 대학원(4), 경북대 대학원(3), 경주대 대학원(3), 연세대 대학원(3), 중앙대 대학원(3), 경상대학 대학원(2), 대구대 대학원(2), 대구효성가톨릭대 대학원(2), 명지대 대학원(2), 서강대 대학원(2), 성신여대 대학원(2), 세종대 대학원(2), 원광대 대학원(2), 인하대 대학원(2), 강원대 대학원(1), 건국대 대학원(1), 경기대 대학원(1), 경원대 대학원(1), 경주대학교 대학원(1), 경희대 대학원(1), 계명대 대학원(1), 덕여대 대학원(1), 서울시립대 대학원(1), 서울여대 대학원(1), 영남대 대학원(1), 전남대 대학원(1), 전대 대학원(1), 조선대 대학원(1), 창원대 대학원(1), 청주대 대학원(1), 충남대 대학원(1), 충북대 대학(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속대학원(1), 한남대 대학원(1), 한양대 대학원(1)

교육대학원(66명)

고려대 교육대학원(5), 인하대 교육대학원(5), 동국대 교육대학원(4), 경희대 교육대학원(3),  영남대 교육대학원(3), 이화여대 교육대학원(3), 충남대 교육대학원(3), 한국교원대 교육대학원(3),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3), 경기대 교육대학원(2), 경북대 교육대학원(2), 경성대 교육대학원(2), 단국대 교육대학원(2), 부산대 교육대학원(2), 인천대 교육대학원(2), 한남대 교육대학원(2), 한양대 교육대학원(2), 경남대 교육대학원(1), 경상대 교육대학원(1), 공주대 교육대학원(1), 관동대 교육대학원(1), 국민대 교육대학원(1), 대구가톨릭대 교육대학원(1), 동아대 교육대학원(1), 명지대 교육대학원(1), 상명대 교육대학원(1), 성균관대 교육대학원(1), 성신여대 교육대학원(1), 세종대 교육대학원(1), 숙명여대 교육대학원(1), 전북대 교육대학원, (1), 전주대 교육대학원(1), 조선대 교육대학원(1), 중앙대 교육대학원(1), 홍익대 교육대학원(1)

기타 대학원(13명)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4), 성균관대 디자인대학원(2), 숙명여대 디자인대학원(1), 성균관대 생활과학대학원(2), 광주대 경상대학원(1), 광주대 산업대학원(1), 서울산업대 산업대학원(1), 연세대 산업대학원(1)

2. 고구려 전문 연구단체

    한국에 있는 고구려 전문 연구단체는 둘 밖에 없다. 고구려연구회와 고구려연구재단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은 출범한지 6개월 밖에 안 되 아직 학술적 연구 성과가 없어 여기서는 고구려연구회만 다룬다.  
* 자세한 내용은 김용은 박사 박찬규 박사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3. 고구려 전문 학술대회와 학술지

고구려에 대한 국내학술대회, 고구려 국제학술대회 그리고 고구려 전문 학술대회도 김용은 박사와 박찬규 박사의 논문을 참조해 주기 바란다.



4. 중국이 보는 한국의 고구려 연구 평가.

1. 楊春吉·耿鐵華, ?고구려 귀속문제 연구?(길림문사출판사, 2000)

1) 孫啓林, 「2차대전 후 한국 사학계 고구려 연구 개황」, 405-413(8쪽)

이 책에서는 한국 사학계의 고구려 연구를 다음과 같은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큰 성과가 없는 고구려 연구(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2) 고구려 연구 전문화의 시작(70년대)
3) 고구려 연구 "붐"과 학술적 불협화음(80년대)
4) 고구려 연구의 "最高潮" 시대의 출현(90년대)

2) 孫金花, 「한국 고구려연구회와 그 연구 상황」, 405-423(18쪽)

    이 책에서는 고구려연구회를 한 장을 설치하여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고구려연구회의 설립과 구성원을 자세히 소개하였으며, 국제학술대회(6차까지)와 기관지 ?고구려연구」(10집까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한국 단체로는 유일하게 고구려연구회를 분석한 것은 한국에서 유일한 고구려 연구단체이고 가장 활동적인 단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90년대에 와서 한국의 사학계에는 고구려를 연구하는 붐이 일어났다. 중국과 북한 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대량 번역하여 출판하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고구려에 관한 각종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고구려의 역사문화재, 고고자료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대현 도록들을 출판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이다.  

2. 馬大正 외,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 총론?(흑룡강교육출판사, 2001)

   權赫秀, ?한국사학계의고구려 연구?, 363-389(26쪽)

    이 책에서도 ?고구려 귀속문제 연구」와 똑같은 연구사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다만 이 책에서는 특별히 재야사학자들에게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국수주의저인 재야사학자들이 당시 군사정권과 결탁하여 만주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문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보았으며, 특히 육군 정훈교육 지침서에 ‘만주회복’을 넣어 군대를 교육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90년대 이후 고구려 연구 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시기(1990년대) ‘고구려 연구 붐’이 나타나게 된 또하나의 지표가 1994년 6월 일부 연구학자들이 설립한 “고구려연구소”인데, 2년 뒤인 1996년 “사단법인 고굴여여누회”가 된다. 이 연구회는 고구려 연구와 조사활동을 기획하고,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학술지 ?고구려연구?를 발행하는 활동을 벌이는 등, 현재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있는 고구려 연구 단체이다.


3. 馬大正 외,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 속론?(중국사회과학출판사, 2003)

    이 속론은 동북공정 초기의 성과를 집약한 것으로 눈여겨 볼만 하다. 특히 중국 변강사지 연구중심은 “한국의 고구려사 연구는 북한 학계의 성과를 초과 달성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 학계의 고구려 연구는 다소 늦은 198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90년대에 더욱 고조되어 점차적으로 사회, 정치, 문화 각 방면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학계의 연구 조건과 환경(자유롭게 조선과 중국 학계의 연구 성과를 이용할 수 있고 직접 조선, 중국 학계와 교류하고 심지어 직접 조선을 방문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에는 커다란 개선이 있었고 한국사회 내에 ‘고구려 붐’이 한창이다.  
한국 학계의 고구려 연구는 이미 꾸준히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더 세찬 발전추세를 보일 것이다. 일찍이 한국 사회에서 일었던 ‘재야사학’ 풍파의 국수주의 사학 세력들도 한국 사회의 ‘고구려 붐’을 더욱 고조시킬 수 있는 무시하지 못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
    사회 전 범위에서 ‘고구려 붐’을 일으키고 있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놓고 말할 때, 한국 학계의 고구려사 연구는 조선 학계의 성과를 이미 초과 달성하였다. 그리고 정계를 포함하여 한국 사회 각계에서 고구려사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며 참여하고 있다. 비록 형식적으로 조선과는 다른 것 같지만 그 목적(고구려사의 한반도 역사성의 강조, 중국 역사성의 부정)과 작용(정치화, 사회화에 이어 국제화에 이르기까지)들은 크게 다르지 않은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그 강도는 오히려 조선보다 강하다.

    한편 한국의 대표적인 고구려 연구 단체로 백산학회와 고구려연구회를 집중분석하고 있다.

(1) 백산학회의 연혁 및 그 주요 학술활동
(2) 최근 백산학회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주요 연구성과
(3) 고구려연구회의 현혁 및 그 주요 학술활동
(4) 고구려연구회 간 ?고구려연구? 1-11집에 수록된 주요 논문 평가.

    백산학회는 주로 『고구려 남진 경영사의 연구』(1995년), 『고구려사 연구』(1995년), 『고구려 산성과 해양 방어체제 연구』(2000.8)에 대한 평가를 자세하게 하였다. 고구려연구회에 대해서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있는 고구려 연구단체이다”고 평가하고 무려 45쪽을 할애하여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고구려연구회에 대한 중국의 평가를 보기 위해 중요한 부분만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1980년대 이후 한국 학계 및 사회 각계에서의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와 관심의 열기는 나날이 증대되었고, 학계를 포함한 사회 각계가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일대 고구려연구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9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는데 1994년 고구려연구소(후에 고구려연구회로 개칭)의 성립과 그 활동은 이와 같은 고조된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서길수가 직접 이사장과 회장을 겸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연구회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 이외에도 고구려연구회는 한국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 중국 등에서 수십 명의 학술 자문위원을 초빙하여 그 전문성과 연구 역량을 증대시켰다.

    고구려연구소는 비전문 인사가 발기하고 주도한 연구단체였으나 1948년 한국 건국이후 최초로 첫머리에 직접 ‘고구려’라는 명칭이 붙은 연구단체로서 이때부터 한국 국내외에서 매우 활발한 조사와 연구 활동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연구회의 학술 발표 활동은 이 연구회의 범위에 국한되고 규모와 영향 또한 상대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 연구 수준과 깊이는 분명히 진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광범위하게 젊은 연구자들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더욱 발전 추세가 드러난다. 고구려연구회에 관한 최근의 현황은 이 연구회의 홈페이지(http://www. koguryo. org)를 통해서 상세히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 학계 및 사회 각계에서 광범위한 주목을 받는 것은 고구려연구회에서 주최하는 여러 차례의 국제 학술 토론회 때문이었다.

    1999년 11월 8일 고구려연구회와 이천문화원 및 이천 서씨 대종회는 서울시에서 가장 큰 규모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서희 서거 10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연합 개최하였다. 한국 대통령 김대중 역시 축하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 책은 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수록한 것으로 모두 9편의 논문, 총 284쪽에 이른다. 이 논문들의 제목과 그 저자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  소위 고구려 계승의식은 한국 학계가 고구려와 한국 고대 역사의 상관성을 주장하는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서희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제기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로 인해 고구려연구회는 이와 같은 역사 인물을 기념하는데 참여한 것이며 실제로 그들의 고구려 역사 인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한국 학계 및 사회 각계의 고구려사 인식을 반영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다.

    고구려연구회와 『고구려연구』학술지가 그들의 연구 계층과 경향을 대표하며 대체로 아래와 같은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고구려연구회에 소속되어 있거나『고구려연구』에 논문을 발표하는 주요 저자들은 한국학계에서 중요한 영향력이 있거나 그러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원로학자가 아닌 소장파 학자들이다. 여기에는 정식 교수 직위를 취득하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도 포함된다. 즉, 박사학위를 취득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고구려 연구의 전문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젊은 학자들인 것이다. 한편『고구려연구』는 심지어 그들의 아직 성숙하지 않은 연구 논문들도 비교적 쉽게 발표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 진지(陣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연구회와 『고구려연구』학술지는 주로 이와 같은 젊은 연구자들로 인해서 연구 방법에서나 연구 영역에서 모두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과학을 응용하거나 각종 실질적인 고찰 등의 방법을 포함한 여러 학과의 종합적인 연구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국가를 뛰어넘는 협력과 공동 연구를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서 고구려연구회는 한국 학계에서 이미 고구려사를 가장 활발히 연구하는 단체가 되었고, 『고구려연구』역시 한국 학계에서 고구려연구에 관한 최신의 연구 성과와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는 중요한 학술적 진지(陣地)가 되었다.  

    중국 측이 깊이 있게 분석하고 있는 고구려 전문단체는 중국이 그 만큼 연구성과에 주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단체들이 최근 들어 위기를 맞고 있다. 국가에서 50억, 60억이란 비용을 투자하여 「고구려연구재단」을 설립하면서부터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첫째, 사회나 단체에서 연구비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다. 지금까지도 고구려연구회는 학술진흥재단이나 사회단체에서 모집하는 연구비 지원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고구려연구회를 후원하는 개인이나 기업에서 행사비를 지원 받는 형식을 취했는데 “국가에서 100억을 내놨는데(사회에서는 국무총리가 매년 100억을 출연한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다) 또 지원해 달라고 하느냐?”며 후원을 하지 않는다.

    둘째, 독점적 거대 기업이 하나 탄생하면 중소기업이 힘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구려연구회의 활동을 보면 거대 기업 못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재정적 규모로 보면 소기업도 되지 못한다.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계열화를 추진해야 하는데 현재까지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앞으로 연구자들 연구비를 많이 주는 고구려연구재단에 열심히 연구계획서를 제출하여 논문을 발표하지, 연구비를 주지 못하는 고구려연구회는 외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재정적으로 어려운 단체는 퇴조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연구회가 지금까지 해온 연구방향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10년 이상 계속 해 온 고구려연구의 연속이라는 점도 있지만 고구려연구재단 같은 국책기관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학문적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구려연구재단」 같은 국책 기관과 함께 강력한 순수 민간단체의 육성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1) 학술진흥재단 같은 재단이 특별과제로 선정하여 장기간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의 10분의 1 정도의 재정적 지원을 가지고도 그 이상의 효과를 볼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재정지원 없이 이룩한 고구려연구회의 성과를 보면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관료적으로 흐를 수 있는 고구려연구재단에 대한 경쟁을 유도하여 효율적 연구진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순수 민간자본이 후원하여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이 많은 자본을 한꺼번에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렵다. 더구나 최근 자본의 과실금으로 운영하는 기관들이 이자율이 낮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2) 이미 설립된 민간 문화재단에서 고구려연구회를 전적으로 후원하는 방법이다. 인수하여 운영하는 방법이 있다. 현재 수많은 단체들이 장학금이나 연구비를 후원하고 있다. 이런 단체들이 고구려연구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면 일이 아주 쉬워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단체들이 사단법인체인 고구려를 인수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Ⅳ. 맺는말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사 연구는 중국에 비해서 한국이 월등하게 앞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 한·중 양국의 고구려사 학위 취득 현황

박사학위 석사학위합계한국   32  198 230중국    2   12  14

    고구려사를 전공으로 하는 박사학위 취득자가 단 2명(1명은 한국에서 학위 취득)이고 석사학위 취득자도 12명에 불과하다. 한국의 박사 32명과 석사 198명에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되는 숫자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학위 취득자도 중국의 사회적 특성상 크게 활동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특히 두 명의 박사는 모두 조선족이고, 석사 12명은 대부분 최근에 학위를 취득한 젊은 사람들이라 연구 성과도 많지 않고 중국 사학계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논문 6편 이상을 쓴 중국의 주요 고구려사 연구자들도 절반 정도는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학자들이고, 고구려 연구자들 가운데 동북공정에 직접 참여하는 학자들도 사실상 몇 명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고구려가 지난 10년동안 활동한 국제학술대회, 고구려 전문 학술지 ?고구려연구? 같은 연구성과는 동북공정에서 주도하는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도 크게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는 수 백명의 학자들이 동북공정에 참가하는데 우리는 박사가 14명밖에 안 된다고 자조하고 두려움을 가져야 했는가? 사실 메스컴이나 국민들은 한중간의 고구려사 연구 성과를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는 전적으로 고대사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책임이다.
사실 동북공정이 사회문제가 되고 한중역사전쟁으로까지 비화될 때 가장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고대사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본론에서 보았지만 고구려사 왜곡문제는 이미 1993년 집안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고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공 학자들은 “한국의 열악한 연구 환경 …”을 핑계 삼아 이에 대한 반론 개발에 게을리 하였다.


    그러나 사회에서 크게 이슈화가 되자 그들의 행동은 매우 민첩했다. 성명서를 발표하고 학술대회를 열면서 중국에 비해 우리 학계가 얼마나 연구자가 없는지를 열심히 강조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 한 번도 두 나라간의 고구려 연구의 성과를 제대로 평가한 적이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의 사보타지에 대한 면죄부를 받기 위한 거처럼 ‘중국은 많고 한국은 적다’는 발표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런 발표는 그대로 메스컴을 타고 국민에게 전달되어 “결국 중국에는 안 된다”는 패배의식을 심어 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에서 100억을 내놓는다는 설이 나오자 그 연구비를 고대사가 아닌 다른 학자나 단체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고대사나 고구려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기 위해서는 우선 ‘고구려 연구는 되어 있지 않다’고 그간의 연구를 완전히 무시해야 했고, 여러 발표에서 새로 발족될 단체는 고구려사와 고대사 연구에 국한해야 하고, 어느 단체에 속하지 않는 독립단체여야 하고, 명칭은 ‘고구려’가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게 해서 발족한 것이 「고구려연구재단」이다. 물론 여기에는 국민들의 성화를 잠재울 수 있는 단체를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교육인적자원부의 바람과 일치하였다. 즉, 학술연구는 물론 시민단체, 재야단체의 모든 요구를 다 잠재울 수 있는 이상한 학술단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학술단체가 이런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으며 이런 단체가 어떻게 순수 학술단체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당시 상태로 대안은 없었을까? 말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상황을 보면 어떨까?


    “우리나라도 고구려 연구자가 많고 연구 결과도 탄탄합니다. 다만 중국은 고구려사가 중국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귀속문제」에 중점을 둔 논문이 많은 반면, 한국에서 순수 학술적인 연구가 중국의 몇 배 이상 많습니다. 한국의 학자들은 고구려사가 당연히 한국사이기 때문에 고구려사가 우리 것이라는 연구를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역량과 기초연구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정체성을 연구한다면 쉽게 중국의 논리를 누를 수 있습니다. 다만 중국은 사회과학원이라는 거대 국가 연구기관에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준하는 막강한 연구재단을 세워 이에 맞서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발상을 가지고 연구기관을 세웠다면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나 연구자들을 모두 포옹하고 힘을 합하여 1, 2년이면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를 부정하며 출발한 단체에서는 그 기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기존 연구 단체나 성과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장래를 위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하며 앞으로 올바른 고구려사 발전을 위해 다음과 같이 재안한다.

1. 앞으로 중구의 역사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보다 학술적으로 더 앞선 기존 연구를 적극 활용하고 기존 연구단체나 연구인력을 적극 후원하여 연구를 도와야 한다.
2.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출연기관이 아닌 순수 민간학술단체의 적극적 육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구려의 연구 인력이 많지 않는 현실에서는 고구려연구회를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힘을 합해야 하고, 국가나 각종 사회단체에서도 재정적 후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고구려 전공 박사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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