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9. 12:24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쌍영총>
조사. 작성자 : 임애경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안성리에 위치한 고구려의 벽화고분.
분구는 간신히 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널방의 구조는 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널길(길이 2.72m), 방형의 앞방(동서 2.35m, 남북 2.72m), 앞방과 널방 사이의 통로, 방형에 가까운 널방(동서 2.77m, 남북 2.85m)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二室墳〕이다.
특히 통로의 좌우에는 8각 돌기둥이 하나씩 세워져 있으므로 이 벽화고분을 쌍영총이라고 이름지었다. 천장 가구는 전실·현실 모두 평행3각굄 천장이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이며, 그 배치 상태는 동벽에 수레 2대, 갑옷을 입은 개마무사(鎧馬武士) 1명, 기마무사 2명, 남녀입상 약 30명 등과 북을 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널길의 서벽에는 수레, 기마인물과 남녀 등 30여명 및 북을 치는 인물, 창을 쥐고 춤추는 인물 등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널길에서 앞방으로 들어가는 좌우 두 벽에는 장사상을 그렸고, 앞방의 벽화는 동·서벽에 청룡과 백호를 그리고 남벽에는 인물 입상을 그린 것 같으나 분명하지 않고, 네 벽에는 기둥과 두공을 그렸다.
천장의 제1단 굄돌에는 당초문, 제2단 굄돌에는 봉황과 구름무늬, 제3단 굄돌에는 당초문, 3각 굄돌에는 괴상한 무늬, 그리고 천장의 뚜껑돌〔蓋石〕에는 연화문을 배치하였다.
통로의 좌우에 세운 8각돌기둥에는 반룡을 그렸다. 널방의 벽화는 네 벽에 기둥·두공·도리를 그리고, 도리 위에는 ‘ㅅ’형의 솟을을 그렸으며, 천장부의 제1단 굄돌에는 사격자 무늬 속에 동심원이 있는 무늬, 제2단으로부터 위의 굄돌에는 연화문을 배합한 무늬를 그렸다.
북벽에는 화려한 장방(帳房) 안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도가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9명의 인물이 행진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공양도(供養圖)를 보고 있다. 서벽에도 장방이 그려져 있으나 내부는 분명하지 않다.
12호-쌍기둥무덤 (쌍영총)
안칸에서 본 8각 쌍기둥
쌍기둥무덤은 평남 용강군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두 칸 무덤이다. 무덤 칸은 반 지하에 돌로 쌓았는데 안길, 앞칸, 안칸으로 이루어졌다. 앞칸과 안칸 사이에는 2개의 8각기둥을 세웠는데 이 때문에 이 무덤을 쌍기둥무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벽화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인해 매우 우아한 느낌을 주는데 특히 인물들의 그림이 우수하며 고구려 사람들의 남녀 옷차림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무덤은 고구려의 우수한 건축술과 회화술, 그리고 아름다운 옷차림을 비롯한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생생한 화폭으로 실감 있게 보여 준다. 5세기 말의 유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활과 화살을 갖고 말을 타고 있는 고구려 무사의 모습이 그려진 돌 조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 돌 조각은 1910년 평남 남포시 용강군에서 발견된 쌍영총의 널길 동벽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발견 당시 쌍영총은 이미 도굴범에 의해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이 돌 조각도 그렇게 깨뜨려진 것 가운데 하나로 박물관까지 옮겨 왔습니다.
- 다른 고분 벽화에 비해 깔끔하고 세련된 그림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쌍영총은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에 비해 100 년 정도 늦습니다. 그런 만큼 앞선 시기의 고분 벽화에 나오는 인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된 인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쌍영총 널길 행렬도. 화려한 수레와 중장기병 그리고 시녀들을 볼 수 있다.
이 쌍영총은 널길ㆍ앞방ㆍ이음길ㆍ널방을 모두 갖춘 무덤입니다.
널길 왼쪽ㆍ오른쪽 벽에는 행렬도가 있습니다. 무사 외에도 멋진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중장기병과 아름다운 수레, 주름치마를 입은 3 명의 미녀, 그리고 미녀들과 이야기하는 남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행차는 무덤 안으로 향합니다.
수레에 탄 사람이 무덤의 여주인공이라면, 중장기병은 무덤의 남자 주인공이고, 세 미녀는 이 부부의 딸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무덤의 남녀 주인공이 그들의 영혼이 머물 공간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영혼 말고 다른 이는 함부로 무덤으로 들어오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널길 좌우 벽에는 창칼을 든 무사, 앞방 남벽의 좌우 벽에는 문지기, 앞방 동벽ㆍ서벽에는 청룡과 백호를 각각 그려 놓았지요. 이들은 모두 무덤을 나쁜 기운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무덤 안에 있는 2 개의 8각 기둥
쌍영총 앞방과 널방의 천정에는 연꽃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과 앞방 사이 이음길에 있는 2 개의 8각 기둥입니다. 8 마리의 용이 휘감고 있는 이 기둥의 머리 부분에 연꽃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2 개의 기둥이 무덤 안에 있는 것은 쌍영총뿐입니다.
기둥을 멋지게 만들고, 화려한 그림을 그린 고구려인의 수준이 돋보입니다.
널방 동벽에서는 9 명의 사람들이 무덤 북벽을 향해 가는 행렬도가 보입니다. 그 맨 앞에 향로를 머리에 인 시종이 있고, 그 뒤에는 스님과 시종, 4 번째에 유달리 크게 그려진 귀부인이 있습니다. 주름치마와 붉은색 깃과 문양을 수놓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그녀는 수산리 벽화의 여주인공과도 매우 닮았습니다.
3 개의 건물 안 중심에 자리한 주인공 부부의 모습.
귀한 사람이라서 신성한 공간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널방 북벽에는 주인공 부부가 낮은 좌상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기와 집 안에서 시종의 시중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머무는 건물 전체는 다시 장막을 걷어올린 큰 건물 안에 있습니다.
또 이 건물은 다시 널방 북벽 좌우에 있는 건물 기둥과 위에 놓인 대들보로 구성된 건물의 한 부분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 부부는 3 개의 건물 안 가장 중심에 자리했습니다.
이는 주인공 부부가 귀한 사람이기에 이처럼 첩첩이 둘러싸인 신성한 공간에 자리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쌍영총은 고구려인의 미의식과 죽은 이에 대한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구려인들이 무덤에 그림을 그린이유
고구려인들은 죽음 너머에도 새로운 삶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이가 사용하던 일상용품들을 넣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부터 무덤 속에 벽화를 그려넣기 시작했습니다. 사후세계를 믿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 겠지요.
다음 정치적 이유로 권력자나 후손이 권력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 하기도 했을 겁니다. 고분 벽화에 보면 외국의 사신이 조공을 바치는 모습, 악기를 든 악공들의 행렬, 춤추는 시녀들, 그리고 하인들은 작게 권력자는 크게 그려 넣은 벽화에서 자신의 영광을 사후세계에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엿봅니다.
또한 고구려 인들은 벽화로 고구려의 영광을 후세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어했을 겁니다.
벽화속의 고구려인
삼국의 그림은 크게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나뉠 수 있다. 당시의 그림은 순수한 감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무덤의 내부나 사찰의 벽면에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많이 남겨져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꽤 많은 고분 벽화를 남겼다. 고분 벽화는 다루어진 주제에 따라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평양 근교의 덕흥리 고분이나 안악 3호분과 같이 초기 고구려 고분(4∼5세기)에는 주로 인물 풍속도가 그려져 있는데, 고분 내부의 벽면에 당시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음으로써 마치 무덤 주인이 죽어서도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기를 바랬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중기(5∼6세기)에 만들어진 쌍영총, 무용총, 안악 1호분 등의 고분 내부를 보면 인물 풍속도와 더불어 천장에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의 사신도가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종교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즉 죽은 후의 세계를 그림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강서대묘와 같이 후기(6∼7세기)로 가면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면서 무덤의 구조도 단순해지고 벽화도 사신도 위주로 그려지게 된다.
1. 고구려 사람들의 집
초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의 인물 풍속도는 우리에게 당시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구려 귀족의 집은 크게 사랑채와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 사랑채에서 중문을 지나 안채로 가면 안채에 부속된 다양한 시설들을 만날 수 있는데, 부엌, 고깃간, 방앗간, 외양간, 마구간, 차고, 창고는 물론 연못도 있다. 이러한 건물들이 모두 기와 지붕을 얹고 있는 것으로 봐서 고분에 그려진 귀족의 생활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의 생활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조선시대와 달리 입식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무용총 벽화를 보면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다. 또한, 신분과 지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다르게 그린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2. 고구려 사람들의 의복
다음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옷차림을 살펴보자. 삼국시대 사람들의 기본 옷차림은 남녀를 불문하고 저고리와 바지였는데, 이는 내륙 아시아 기마 민족의 관습과 유사하다. 옷에서도 신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났는데, 지배 계급일수록 남녀 모두 바지통이 넓어 비활동적이어 보인다. 또한, 남녀 공히 띠(帶)를 매어 멋과 활동성을 높였으며, 소매 끝이나 아래 단에 바탕 천과 다른 천을 덧대어 실용성과 미를 강조하고 있다. 신분이 낮아도 무용도의 무용수처럼 특정 직종에 있던 사람들은 바지통이 넓은 옷을 입었다.
벽화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여자들의 복식이다. 여자들은 저고리와 바지 위에 치마와 두루마기를 더 입었는데, 무용도에서 처럼 대부분 치마단에 다른 천을 덧대었을 뿐만 아니라, 주름치마나 색동치마를 입었다. 또한 안악 3호분의 여주인은 화려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벽화를 살펴보면 당시 여인들이 올린머리, 내린머리, 고리모양머리 등 다양한 머리모양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벽화의 남성상은 무용총의 수렵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말을 달리는 상무적이고 호전적인 모습이 중심이 된다. 특히 굵은 선으로 율동적으로 처리된 수렵도의 사냥하는 모습은 고구려인의 활발한 기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들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고 머리에는 신분을 나타내는 관모를 쓰고 있다.
3. 고구려 사람들의 음식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은 조와 콩을 비롯하여 밀, 보리, 수수, 기장 등의 곡식을 주식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곡물을 가루내어 시루에 쩌 먹었는데, 안악 3호분의 부엌 벽화를 보면 당시 사용하던 시루가 그려져 있다. 또한, 무용총 벽화(앞에서 언급-무용총 접객도)를 보면 주인과 손님이 각각 따로 상에다 음식을 놓고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세계
5∼6세기 고분벽화들을 보면 주로 벽면에 주인공의 일상 생활이 그림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천장 부분에는 일월성신과 같이 당시의 내세관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무용총의 천장에도 다양한 동식물과 신선이 그려져 있다. 무덤의 벽면이 현실세계를 의미한다면 천장은 당시 생각했던 사후세계를 형상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주와 같은 삶의 일면은 물론 당시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가 담겨져 있다.
고분벽화로 살펴본 고구려 복식
우리나라 복식의 기본구조는 여자의 경우 치마와 저고리처럼 상하가 분리된 형이며 상의는 앞에서 여미는 전개형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기본 구조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의류문화에 있어 그 최고형이 바로 고구려 벽화이기 때문이다.
그림1) 고구려 쌍영총(雙楹塚) 기마상(騎馬像)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림에 나타난 저고리는 남녀 공히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로 띠를 묶어 고정시켰음을 알 수 있으며 기마상의 그림처럼 바지의 폭은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신발의 그림을 살펴보자, 신발의 앞날 끝이 뾰족하게 위로 약간 솟아오른 형태이며 오늘날 부츠처럼 발목까지 덮은 형태이다.
상의의 형태는 여성복장 (좌 아래그림)과 다를바 없다.
그림상에서는 우임형태인 듯 보이기도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림2) 고구려 쌍영총 인물상(車馬人物像)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림에 나타난 저고리는 남,녀공히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로 띠를 묶어 고정시켰으며, 남자와는 달리 치마를 입었으며, 여성은 앞의 중앙에서 살짝 여미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저고리의 길이가 허리 정도까지로 짧아졌고 우임(右 )하여 고름으로 묶는 형태가 되었다.
그림3)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무용도(舞踊圖)
여기서 보면 남자와 여자의 복식은 그 형태나 문양에 있어 완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를,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 시대에도 이와 같은 기본 형태에는 변함이 없으나 고구려 복식과 비교했을 때 부분적으로 그 크기나 길이, 또는 장식적인 요소가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반인과 지배 계급등의 신분은 옷감의 색깔로 뚜렷하게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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