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 추사 김정희 선생과의 가상 대담

2014. 9. 24. 11:27들꽃다회






       길 위의 인문학

 

 

    추사 김정희 선생과의 가상 대담 

                                                                                                                             한승원 

 꽃 지면 열매 있고

달 지면 흔적 없어라

이 꽃의 있음을 들어

저 달의 없음을 증명하리

있음이면서 없음인 그 무렵의

그것이 실제 그 사람의 참모습인데

탐욕과 미망 속에 허덕이는 자는

자취에만 집착하네

내가 만약 그 사람의 자취라면

왜 세간에 남아 있겠는가

오묘하고 상서로운 모습이 휘날리면서

진리의 빛살이 나부끼고 산봉우리는 짙푸르구나.


*이 시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금강산 여행 중 마하연암에서 하룻밤 머물며 이승을 떠난 한 율사를 위해 읊은 것인데, 깊이 읽으면 마치 추사 자신의 모습을 읊은 듯싶다.

 

    나는 천재를 싫어한다.

 천재들의 눈을 마주 보고 있으면, 내 눈동자가 뚫리는 것처럼 아리고 정수리와 가슴이 시리다. 천재들의 형형한 눈빛은 방사선이나 레이저 광선 같은 파장이고, 그 파장은 순식간에 내 몸과 마음 이 구석 저 구석을 속속들이 누비고 다니면서 아프게 탐색해버린다. 그들의 눈빛에 의해 누벼진 내 몸과 마음은 한겨울 숭숭 뚫린 창구멍처럼 황소 같은 찬바람을 들랑거리게 한다.

 내가 만난 추사 김정희의 눈빛도 그러했다.

 

하늘의 이치를 따라 흘러가는 것(天理流行 천리유행)

 

    천재의 형형한 눈빛이 지겹지만, 그러나 나는 추사와 깊은 인연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전에 들은 적이 있다. 지나가다가 옷자락을 한 번 스치게 되는 것은, 전생에 오백 매듭 이상의 인연이 있었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추사와 나와의 인연은 보통으로 두터운 것이 아니다. 추사에 관한 기록들을 구해서 읽고, 그의 발걸음 닿는 곳을 쫓아다니고, 추사의 삶을 소설로 형상화시키느라고 두 해 동안을 내내 나부댔다.

 

추사와의 만남

 

   그런 어느 날 한낮에 잠을 자다가 선잠을 깨어 밖으로 나갔는데, 토굴 마당가의 감나무 숲 그늘 아래 평상에 연한 회갈색의 삿갓에다 잿빛의 도포차림에다 갈색의 나막신을 신은 조선조의 70대 초반 늙은 선비 한 사람이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동파와 추사 김정희의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모습 그림'을 연상시키는 오동통한 체구의 늙은이.

 "아니, 추사선생께서……?"

 "이 토굴 주인이 오래전부터 '추사'에 미쳐 있다고 해서 왔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렇듯 멀리 사라지고 없는 나에게 집착하는가?"

 "산이 거기에 있으므로 그 산을 올라, 눈앞에  피어 있는 꽃의 있음을 들어, 지고 없는 달의 없음을 증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나는 산에 미친 사람들이 두고 쓰는 이 말과 추사가 어디에서인가 읊은 시 한 구절을 편집해서 대답했다.

 "하아, 그렇다면, 추사라는 산은 자네라는 바다가 여기 있어 이리로 흘러들어온 셈이네."

 

 "나, 추사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잠깐 과천 청계산 밑의 초당에서 머물렀는데, 항상 짙푸르면서도 텅 빈 하늘(太虛)의 이치를 따라 흘러가고(天理流行), 구름 속을 노닐었네."

 

추사는 땅의 모든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

 

     "나는 내 벗들이 나에게 보낸 편지나 나의 저서나, 중국에서 들여온 경전들을 깡그리 태워버린 바 있네."

 "추사 선생이 분서(焚書)를 하시다니요?"

 "사람은 가시적인 것만으로 판단하는 미욱한 동물이야. 나는 그것들을 태움으로써, 나를 미친 듯이 탄핵하는 자들의 눈에 내 사랑하는 친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고 싶었네."

 

    "입으로 뱉는 '말'은 타고 다니는 말(馬)이란 짐승하고 같은 것이고, 글씨나 그림은 몸의 율동이니까."

 "글씨나 그림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주도에서 말 다루는 태우리한테서 들었는데, 말이란 짐승에게는 쓸개가 없다고 하더군. 그런 까닭으로 말은 사람을 태운 채 깊은 강이나 가시밭길이나 화살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도 무서워하지 않고 줄달음질친다더군. 그런데 밤에 헛것을 보면 등에 탄 주인을 떨어뜨려버리고 저 혼자서만 살려고 달아나버린다고."


     "말(言)이나, 말(馬)이나 마찬가지로 주인을 배반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추사선생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로 된 경전 공부를 등한시하게 하고, 침묵을 앞세운 참선만을 가르친다고 백파 스님을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말과 말 아닌 것은 둘이 아니네."

 "왜 경전들만 태우고 글씨나 그림은 태우지 않았습니까?"

 "학문보다는 예술이 영원하네."


 

사람은 가시적인 것만으로 판단하는 미욱한 동물이야

 

    "추사선생께서 저에게 미욱하다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추사에 대한 기록들을 가지고 추사를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섯살 되시던 해, 한양 월성위군의 종손으로 양자로 가신 선생께서는 양아버지 김노영의 명을 따라 입춘 날 대문에 '입춘대길(入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을 써서 붙이셨는데, 영의정이던 채제공이 지나가다가 그 글씨를 보고, 선생의 양아버지에게 '저 글씨로 보아 글씨 쓴 아이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 같소이다. 글씨를 쓰게 하기보다는 시문 짓기를 가르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하고 예언을 했다는데, 그때 대문간에 붙인 그 글씨가 대관절 어떤 모양새였나요?"

 

    "혹시, 서울 봉은사의 경전 판각 저장하는 전각의 현판 '판전(版殿)'을 보았겠지?"

 "네, 물론 가보았습니다. 추사 최고 최후 명품이라는 그 '판전' 글씨, 해서나 예서라고도 할 수 없고, 행서라고도 할 수 없고, 전서라고도 할 수 없고, 그 모든 서체를 아울러놓은 듯싶은 모양새의 글씨 말입니다."

 "아마 그와 비슷했을 거야."

 "그렇다면, 71세의 추사가 쓴 글씨가 여섯 살 때 쓴 글씨와 비슷하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은 되돌아가네."


 

강남 봉은사 판전 편액 -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썼다. 




'오만한 천재'였다는 평가에 대하여

 

     나는 어떤 한 사람의 속마음을 깊이 읽고 싶으면, 그의 아픈 구석을 이 방법 저 방법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대개 이 시대 사람들은, 추사 선생이 오만한 천재인 까닭으로 말년을 불행하게 보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삶과 예술을 다룬 어떤 평전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모 할머니뻘(김정희의 조부와 십촌 간)인 정순왕후가 영조 임금의 두 번째 아내이고, 증조모가 그 영조 임금의 따님이고, 증조부가 부마(사위) 월성위이다. 그 월성위의 종손인 추사 김정희는 임금과 안팍으로 친척인데다가 태어나기를 대단한 천재로 태어났고, 24세에는 동지부사인 생부 김노경을 따라 중국의 연경을 다녀온 당대의 기린아로서, 젊은 날을 내내 부귀의 화려한 삶을 누린 까닭으로, 오만하고 타협할 줄 몰라 세상으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아 제주도 유배 9년, 북청 유배 2년의 신산한 삶을 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추사는 어처구니없어 하며 말했다.

 "내가 '오만한 천재'였다는 그 시각은 하나만 알고 열을 모르는 유치한 시각일세. 천재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닐세. 흔히 추사를 명필이라 말하고, 추사의 글씨를 천재의 글씨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실없고 허랑한 소리네. 이 세상에는 하늘에서 타고난 천재는 없네, 내 평생, 붓글씨 쓰기 위해 먹을 갈고 또 간 까닭으로 닳아져서 밑구멍이 뚫어진 벼루가 몇 번째인 줄 아는가. 추사라는 한 남자가 평생 글씨를 써오면서 닳아져 못 쓰게 되어 버린 몽당붓이 몇백 자루나 되는 줄 아는가? 천재는 없고 신을 향한 도전이 있을 뿐이네. 사람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내 손으로 세상을 바꾸어놓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가져야 하는 법일세.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물의 흐름, 바람의 흐름을 바꾼다는 것이고, 세상을 비추는 햇살의 색깔을 바꾼다는 것이네. 검게 보이던 세상을 밝고 희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고, 무지갯살을 일어나게 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네. 그 짓을 나는 경전 읽기와 글씨 쓰기로 해온 것이네."


 

오만한 탓으로 말년 고생을 했다는 시각에 대하여

 

    "그리고 오만하고 타협할 줄 몰르기 때문에 말년에 들어 신산한 삶을 살았다는 견해에 대해 말하겠네. 역사를 읽되 문자에 걸리지 말고, 행간에 숨어 있는 것들을 확실하게 깊이 읽을 줄 알아야만, 내 말년의 삶을 분명히 읽을 수 있을 것이네. 내가 살던 당시의, 조선후기 사회는 이기(理氣) 논쟁을 벌이던 성리학파가 제값을 다 하지 못하고, 임금의 친척들이 되어 세도를 부리는 쪽으로 흘러갔네. 그들 보수 세력에 반발해, 실사구시와 온고지신, 이용후생으로 세상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북학파(개혁 세력)가 생겨났네. 당시의 보수 세력을 대표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임금의 외척인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일파로서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정권을 좌지우지했으므로 세상은 속속들이 썩어갔네. 개혁 세력을 이끌어가려 하는 사람들은 홍대용·박지원·박제가·김정희·조인영·권돈인 등의 북학파들로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청나라를 통해서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네. 그들을 요즘 사람들은 '실학파'라고 부르더군."



    "정조 임금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다음,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순조 임금은 안동김씨 일파들에게 주눅이 들어, 장인인 김조순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렸었지. 그런데 그 아들인 덕인(효명) 세자가 아주 영민했네. 덕인 세자는 할아버지 정조 임금이 못한 일을 이룩하려고 왕권을 강화하고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북학파와 가까이했네. 덕인 세자는 정조 임금 못지않게 영민하고 현명하고 당찬 인물로서, 당시 조선 사회의 새 희망이었네. 덕인 세자는 밤에 미복차림으로 여항을 돌면서 뜻있는 젊은 서얼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 가운데 씩씩한 젊은 무인들을 휘하에 거느렸네. 그 젊은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였네. 박규수 밑에는 여항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다 모여들었지. 덕인을 범상치 않게 본 순조 임금은 19세인 덕인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했는데, 왕권을 손에 쥔 세자는 당시 규장각 대교인 나에게서 조언을 들으며, 안동김씨 중심의 세도정치를 무력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켜가기 시작했네. 그러자 안동김씨 일파는 나를 눈엣가시로 생각했네. 덕인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데도 그러한데, 만일 장차 임금이 되어 친정을 하게 되면 추사가 중책을 맡게 될 것이고, 추사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모두 도태되고 죽게 되리라는 것을 걱정하며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네. 그런데 그때에 덕인 세자가 22세에 급사를 했고, 안동김씨 일파는 일차적으로 덕인 세자의 병을 돌본 내의원의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내고 나서 덕인 세자의 대리청정 시절에 중용된 대신들을 공격해 유배 보내거나 죽였으므로, 덕인 세자를 따르던 의식 뚜렷한 젊은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네. 안동김씨 일파는 그때에, 덕인 세자를 올바르게 이끌어가는 일(보도, 輔導)과 시강(侍講, 세자에게 하는 강의)를 맡았던 추사의 생부 김노경을 제거하기 위해 김우명을 사주해 탄핵 상소를 하게 했네. 그 김우명과 나는 보통의 악연이 아니었네. 내가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비인현감을 지내고 있는 김우명의 실책과 비리를 파헤쳐, 봉고 파직시킨 바 있었네. 순조 임금은 자기 할아버지인 영조 임금의 따님 후손인 김노경을 보호하고 나섰네. 그러자 안동김씨 일파는 순조 임금을 협박했는데, 그것이 부사과 윤상도의 '박종훈 신위 유상량에 대해 탄핵 상소'로 불거졌네. 그 윤상도를 사주한 것은 대사헌을 지낸 김양순이었는데, 그 김양순은 안동김씨 일파의 우두머리인 김조순(순조의 장인)의 사주를 받은 것이지."



 

왕권 강화와 외척 세도 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출세에 눈이 먼 윤상도의 상소문은 사실상 순조 임금에 대한 협박용이었네. 그 상소문 가운데 '임금을 정당한 도리로 인도하게 하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인데도, 박종훈, 그는 바로 그것을 뒤집었다'는 대목이 그것일세. 순조 임금은 발끈 화를 냈지. 임금의 도리를 제대로 다하지 못한 자기를 몰아내고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역모의 기도)으로 받아들인 것이지. 그러나 순조 임금은 '그렇지만 윤상도의 뒤를 캐려 들면 더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으므로, 그냥 추자도로 유배를 보내라'하고 일을 끝내려고 들었지. 그러자 안동김씨 일파는 순조 임금의 말에 밑이 저려, 윤상도의 배후를 캐서 발본색원하자고 억지를 쓰며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과 역적 윤상도를 함께 끌어다가 국청을 열자고 들이댔네. 자기들이 사주한 윤상도와 함께 김노경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겠다는 것이지. 김노경이 국청에 끌려 들어가 고문을 당하다가 역적으로 몰린다면, 그 자식인 나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순조 임금은 김노경을 더 보호해줄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먼 데 섬 고금도로 유배시키라는 명을 내렸네. "



 

광기(狂氣) 어린 탄핵 정국

 

    "순조 임금이 돌아가시고, 어린 헌종 임금이 뒤를 잇자, 안동김씨의 수장인 김조순(순조의 장인)의 아들 김좌근은 자기 일가 형인 김조근의 딸을 어린 헌종 임금의 왕비로 삼았네. 순조의 아내이자, 김좌근의 누님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세상은 더욱 확실하게 안동김씨 일파의 것이 되어버렸네. 그런데 추사의 오랜 벗인 조인영(시호가 효명인, 덕인 세자 장인의 동생)이 어린 헌종 임금을 올바르게 이끄는 보도의 책임과 시강을 맡았는데, 그는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다음 헌종 임금이 친정을 하게 되려면, 임금의 보도와 시강을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북학파인 추사 김정희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을 했네. 그리고 조인영은 내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나를 청나라 연경에 사은사로 보내려고 동지부사로 임명하게 했네."


   "내가 청나라 연경의 친구들을 머지않아 만나게 된다는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안동김씨 일파가 나를 확실하게 죽여 없애려고 나섰네. 대사헌 김홍근이 '역적 윤상도와 김노경의 국청을 열어야 한다'하고 탄핵 상소를 했네. 윤상도가 추자도에 유배된 지 10년 뒤이고, 내 아버지 김노경이 유배에서 풀려 돌와와서 돌아가신 지 3년 뒤의 일이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추자도의 윤상도를 끌어다가 국청을 열고, 문초를 하기 시작했네. 임금을 협박하는 그 상소문을 누가 써주면서 상소하라고 하더냐고 고문하자, 윤상도는 '허성'을 댔고, 허성을 고문하자 대사헌을 지낸 바 있는 '김양순'을 댔네. 김양순을 고문하던 자들은, 김양순의 입장에서 안동김씨 우두머리인 김조순·김좌근·김조근의 이름이 나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만일 그 상소문을 김정희가 써주었다고 불면 살려주겠다'고 귀띔을 했네, 김양순은 살아나려고 '그 상소문을 추사 김정희가 써주었다'말을 하기는 했지만 곤장을 맞고 죽어버렸네."


    추사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광기를 아는가. 사람들의 작은 광기는 사냥을 하고, 큰 광기는 전쟁을 일으키네.

 내가 살았던 조선조 후기의 그 정국은 광기 어린 탄핵열풍으로 들끓고 있었고, 마침내 의금부는 나를 국청으로 끌어들였네. 국청으로 끌려 들어간 내가 살아나서 제주도로 유배된 것은 두 사람의 벗 권돈인 조인영 덕분이었어.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추사가 오만한 까닭으로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유배되는 불행을 당했다고만 말했다는 것인가?"



 

잘 나가는 선배 물 먹이고 깨부수는 천둥벌거숭이

 

    "흔히 말하기를, 추사 김정희는 24살 때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근대의 신문물을 대하고 온 다음부터, 요즘 세상에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젊은이들이 국내파를 깔보듯이 '그것이 원산지에서는 전혀 그런 모양새가 아니야, 너는 굴절되어 들어온 것을 잘못 알고 잇는 것이야'하고 국내파들을 거만스럽게 폄하하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특히, 추사선생께서는 동국진체를 완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명필로 알려진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무시하고 폄하했습니다. 또, 국내에서 대단한 선승으로 알려진 당시 50대의 해붕 스님을 찾아가 그의 공(空) 사상을 공박하고 깨부수려 들었고, 국내의 스님들이 참선을 배우려고 구름같이 몰려들곤 하는 백파 스님에게 달려가, 경전을 도외시한 참선 수련의 실없음을 공박한 바 있습니다. 훗날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에는 백파와 편지로써 논전을 벌인 바도 있습니다. 당시에 백파는 추사의 행실을 두고, '저 사람 반딧불로 온 산을 태우려고 드는군'하고 빈정거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선생께서 30대 초반 천둥벌거숭이의 오만방자한 행위이지 않았습니까?"



    나의 물음에 추사가 말했다. 

"그것은 당시 청나라를 통해 조선 땅으로 들어온 실사구시의 북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일세. 원교 이광사의 글씨는 술집 작부가 요조숙녀 차림을 하고 다소곳한 체하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속고 있었네. 그의 글씨는 한나라, 당나라 때의 왕희지·미우인·저수량 등의 글씨들이 저렇게 굴절되어 들어온 것을 굴절된 줄을 모르고 임모(臨摸, 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림)해 익힌 결과물이므로, 그것이 순 조선식의 명필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내가 바로잡으려 한 것이네."

 "불교에는 경전을 읽고 또 읽음으로써 점차로 깨달음을 얻어가는(점수, 漸修) 수행 방법이 있고, 화두를 머리에 굴리며 면벽참선을 함으로써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돈오, 頓悟) 수행 방법이 있네. 내가 생각하기로, 경전 공부를 통한 수행을 부지런히 하다가 앞이 막히면, 그때에 가서 해야 하는 수행이 단박 깨달음의 방법일세. 그런데 선승이란 자들이 제자들에게 경전 공부는 시키지 않고, 면벽 좌선부터 시킴으로써 경전 무식쟁이를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야. 나는 그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었네."



 

중국 다녀온 뒤, 신 모화사상을 가지게 된 것 아닌가

 

    "임금의 친척들을 중심으로 한 족벌이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를 부렸으므로, 조선후기 사회는 일종의 세도정치 암흑기였네. 중국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성리학'은 명목상의 지도 이념으로 전락했고, 현실과 유리되었네. 그리하여 학문은 텅 빈 껍데기가 되었고, 정치 지도의 근간인 예(禮)라는 것도 형식만 있는 허례가 되어버렸고, 타당 싸움의 도구로 전락했었네. 그때 뜻을 가진 젊은이들 사이에 공허한 성리학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청나라에서 일어난 고증학을 받아들여 현실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네. 그것이 '북학'이네. 역대 임금들 가운데서 가장 영명하고 지혜로운 임금 정조는 북학파들을 대거 기용했는데 박제가·유득공 등의 북학파들과 뜻을 함께했으므로, 어린 나의 교육을 바로 그 서얼 출신인 박제가에게 맡겼던 것이네. 내가 서얼인 박제가의 제자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나를 신 모화사상에 젖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네. 나는 북한산의 '무학대사 비석이라고 알려진 것'을 답사 결과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힌 바도 있고,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온 침계 윤정현에게 부탁해 '함경도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를 강계에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움으로써 후세들로 하여금 중국과의 국경을 분명하게' 한 바도 있고, 또한 대조영의 발해 나라를 찬양하는 시도 쓴 바 있네."



 

추사 글씨의 기과함과 고졸함에 대하여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기괴하게 글씨를 쓰면 '추사체 같다'고 말해버립니다. 선생 글씨의 특징을 기괴함과 고졸(古拙, 예스러우면서 못나 보이고 서투름)함에 있다고 말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선생께서 창안해 남기신 '추사체'라는 것은 일부러 남과 달리 독특하게, 기괴하게 고졸하게 쓴 글씨라는 것입니까?"


    추사가 대답했다. 

"억지로 기괴하고 고졸하게 쓰려고 하는 것, 그것은 진실로 기괴함과 고졸함이 아니네. 사실 기괴함과 고졸함이란 것은 내 몸의 우주 속에 들어 있네. 가령 금강산의 기괴함과 고졸함은 우주라는 자연 속에 들어 있는 기괴한 모습, 고졸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네. 글씨는 붓이 쓰는 것이지만, 사실은 붓이 쓰는 것이 아니네. 원래 먹물 속에 그 글씨가 들어 있었지. 붓은 먹물을 묻혀 종이 위를 지나갈 뿐이지만, 종이에 영원히 남은 것은 먹물이네. 나는 먹물 속에 들어 있는 글씨를, 물 흐르듯이 꽃 피듯이 종이 위에 꺼내 건져놓고 있을 뿐이야."

 "말씀이 어렵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해주십시오."


    "오천 권 이상의 책을 읽음으로써 내 머릿속에 형성된 서권기(書券氣)와 문자향(文字香), 하늘과 땅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가지고,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드는 미치광이 같이 꾸준하게 연습을 한 사람만이 먹물 속에 숨어 있는 글씨를 꺼내놓을 수 있는 법이네. 말하자면, 머리에 들어간 수많은 책 기운이 글씨로 나타난 것이야."

 "내가 살던 조선조 후기의 내로라하는 서예가들 대부분은,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왕희지·왕헌지 등의 글씨본(서첩)들이 모두 굴절된 것인데, 굴절된 줄을 모르고 임모함으로써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었네. 그런데 나는 중국의 옹방강 선생의 거처인 석묵서루(石墨書樓)에서 실제 한나라와 당나라의 비석 탁본한 글씨들을 보고 나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모든 서첩들이 다 어처구니없이 굴절된 채로 흘러들어온 가짜들임을 알아차렸네. 귀국한 다음 우리나라에 산재한 신라시대 비석들을 찾아다니면서 탁본을 했는데, 그것들은 제대로 된 글씨의 원류(저수량의 글씨)였네. 나는 중국에서 보고, 그려 가지고 들어온 제대로 된 비첩과 우리나라에 산재한 비석 글씨들을 바탕으로 잘못 흘러가고 있는 조선 땅의 글씨 경향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야."




 

명작 세한도(歲寒圖)에 대하여

 

완당세한도 한도

 

    "줄기가 없지만 칼 같은 잎사귀와, 봉이나 흰 코끼리의 눈 같은 꽃으로 기품을 드러내는 난초가 도학자풍이라면, 줄기가 튼실하고 헌걸찬 소나무는 유학자풍입니다. 세한도는 대단한 명품입니다. 그 그림을 그리게 된 내력을 말씀해주십시오."

 "소나무가 지맥 속에 뿌리를 깊이 뻗고 짙푸른 하늘을 푸른 가지로 떠받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드리우고 있는 거무스레한 그림자를 먼저 보고 짙푸른 하늘에 우듬지를 묻고 시유하고 있는 자세를 보면 석가모니의 모습이네. 하늘과 달과 별과 구름과 안개와 바람과 새들과 소통하는 소나무의 몸은 신화로 가득차 있네. 나는 문득 겨울 한파와 적막과 침잠 속에서 다사로운 몸피를 둥그렇게 키우고 있는 우주의 신원을 형상화시켜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네."


    내가 물었다.

 "유배된 다음에도 변함없이 잘해주는 역관이나 제자인 이상적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그려준 것이라고 알려졌는데요?"

 "그렇다 할지라도 세한도 속에는 당시의 내 처지(실존, 實存)가 다 함축되어 있네. 그 그림을 잘 들여다보시게. 설 전후의 고추맛보다 더 매운 찬바람이 몰아치자, 모든 짐승과 새들은 모습을 감추고 푸나무들은 죽은 듯 말라져 적막하건만, 건장한 소나무만 푸른 가지를 뻗은 채 우뚝 서서 제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 하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부축하고 있네. 그 부축으로 말미암아 늙은 소나무는 간신히 푸른 잎사귀 몇 개를 내밀고 있네. 그 두 나무 옆에 집 한 채가 있는데, 그 집은 마음을 하얗게 비운 채 유마거사(유마경 속의 주인공)처럼 사는 한 외로운 사람의 집이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앓고 있는데, 어찌 깨달은 자가 앓지 않을 수 있겠느냐'하며 칭병(稱病, 병이 있다고 핑계함)하고 누운 채 문병 오는 사람들에게 불가사의 해탈의 진리를 설하는 유마거사, 그는 문병 온 손님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줄 심산으로 거실을 텅 비워놓았네. 세한 속에서 얻은 불가사의 해찰의 무한 광대하고 둥근 깨달음(원각, 圓覺)은 텅 빈 하늘을 흡수지처럼 빨아들인 신묘한 힘일세.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고, 세상의 모든 바닷물과 강물들을 한 개의 털구멍 속에 다 쑤셔 넣을지라도, 수미산과 겨자씨와 사해의 물과 털구멍들이 모두 끄떡도 안 하는 그 신묘한 힘은 공자와 맹자의 어짊과 안빈낙도와 노장의 무위와 다르지 않네. 그 힘은 그 집의 주인으로 하여금 장차 병에서 일어난 중생들과 더불어 살게 할 터이네."


    가슴이 뜨겁게 부풀어 오른 내가 말했다.

 "아, 그래서 저는 그 세한도를 보고, 시 한 편을 썼는데, 읊어 보겠습니다. '나무 / 인도의 한 왕자가 / 푸른 우듬지를 하늘로 쳐들고 있는 나무를 보며 / '나무(南無, 그곳에 이르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라고 가르쳤지만 / 나는, 그곳에 이르려면 / '나(我) 무(없음, 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어디에 이르게 해달라는 나무인가 / 그곳은 내가 나를 텅 비운 채 돌아갈 태허 / 그 푸른 하늘의 시공이다.'"

 추사는 코를 찡긋했다.


    나는 추사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세한도에 그려진 소나무 네 그루가 사실은, 추사선생이 유년 시절을 보내신 예산 향저 근처에 서 있던 소나무들 아닙니까?"

 추사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불이선란(不二禪蘭)에 대하여

 

 불이선란

 

 

    "추사 선생의 또 하나의 명품인 '불이선란'에 대해 한 말씀해주십시오."

 "상여도 덮지 않은 한 어부의 널이 쓸쓸하게 청계산 기슭으로 가는 것을 보고 온 이튿날 나는 문득 난을 치고 싶어졌네. 하얀 종이를 펼쳐놓고, 먹을 갈고 붓을 들었네. 한동안 흰 종이만 들여다보았네. 머리와 가슴 속에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고 오직 하얀 텅 빈 시공만 있었네. 그 시공은 하얗게 눈덮인 신들의 세상 같았네. 내가 걸어 나온 태초의 시원의 태허만 있었네. 그 속에서 난초 한 촉이 솟아나왔네. 그것은 분명 난초인 듯싶은데 난초가 아니었어. 그 난초가 말했네. '그대는 나를 그리되 나를 그리지 말고 그대의 태허 같은 텅 빈 마음을 그리시게.' 나는 '아, 그렇다'하고 속으로 부르짖었지. 가슴이 가라앉았네. 고요 속에서 붓을 들고 태허의 텅 빈 시공 속에다 마음 한 자락을 그어갔지. 마음은 오른쪽으로 뻗어가는 숨결이었네. 그 숨결은 한번 굽이치고 다시 굽이치고 또다시 굽이치다가 태허 속을 비수처럼 찔렀네. 다음 잎사귀는 첫 번째의 마음을 싸고돌면서 마찬가지로 세번 굽이치며, 첫 잎사귀의 모가지 근처까지 뻗어 가다가 몸을 틀어 먼 데 산의 가슴을 찔렀네. 그 다음 잎사귀들은 줄줄이 굽이치며 뻗어 오르다가 땅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렸네. 그리고 호리호리한 꽃대를 그렸지. 잎사귀들과 상반되게 왼쪽을 향해 뻗어간 꽃대 끝에 봉의 눈도 아니고 흰 코끼리의 눈도 아니고, 메뚜기의 주둥이와 활짝 핀 날개 모양새도 아닌 꽃 한 송이가 향기를 토해냈네. 그것을 쳐놓고 나서 탄성을 질렀네. 내가 친 것이지만 내가 친 것이 아니었어. '신이 나의 손을 빌려 친 것이다. 신명이 난초를 쳤지만 그것은 난초가 아니고, 난초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 난초는 하나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었네. 자기만 하는 어떤 속병인가를 앓고 난 듯 가냘프지만 가냘프지 않고, 외롭지만 외롭지 않고, 어떤 세계를 통달한 듯했네. 유마거사의 불가사의 해탈의 경지, 이것이 '불이선란'이네. 태허 속에서 영근, 보이지 않은 어떤 생각의 알맹이와 보람과 희한한 세계의 발견으로 인한 환희가 들끓고 있었네. 난생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소년의 가슴처럼."



 

 사랑에 대하여

 

    "선생께서는 서얼 자식 상우를 두셨습니다. 과거시험도 치를 수 없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슬프고 천한 자식을 왜 두셨습니까? 당시 양반으로서 너무 잔인한 일 아니셨습니까?"

 추사는 난처해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한 여인을 사랑한 결과일세."

 "부인을 두고 어찌 다른 여인을 또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난초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수선화를 사랑할 수도 있네."



 

요즘 사람들의 자식 교육의 문제점과 추사의 생각

 

    "요즘 사람들이 자식 교육시키는 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내가 쓴 '인재설(人才說)'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네. '모든 사람이 아이였을 적에는 대개 총명한데, 이름을 기록할 줄 알만 하면 아비와 스승이 '경전의 주석'과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들을 위해 모아놓은 어려운 어구풀이' 들만을 읽힘으로써 그 아이를 미혹시키는 바람에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읽지 못하고 혼탁한 흙먼지를 퍼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넓디 넓은 세상 속에서, 우리 후세들의 영혼이 너무 가볍게 단세포화 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네."



 

이 시대에 나는 왜 추사에 집착하는가

 

     뜻밖에 추사가 나에게 물었다.

 "자네는 이 시대에 왜 추사에 집착하는가."

내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추사와 그의 시대를 읽어보면, 아주 슬프고 절망적인 현실과 광기 어린 삶을 만나게 됩니다. 청나라로부터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개혁하려는 북학파인 추사를, 지긋지긋하게 탄핵하고 공격해 죽이려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의 어떤 거대한 보수집단하고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저는 '추사와 그의 시대 이야기'를 통해 그 반복되는 슬픈 일을 나 스스로 각성하고 경계하고 싶었습니다. "

 

흘러가는 흰 구름 한 장

 

   추사는 시들해진 얼굴로, 마당 가장자리에 피어 있는 연보라색의 초롱꽃 한 송이를 보고 있었다. 그가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내가 물었다.

"여기 오신 김에 오탁악세(五濁惡世)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을 해주십시오."

 추사는 말없이 턱으로 먼 하늘을 가리켯다. 나는 추사의 턱이 향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은 텅 비어 있었다. '저 하늘이 어떻다는 것인가'하고 생각하다가, 그의 시 한 대목 '꽃의 있음을 들어 달의 없음을 증명하리'가 떠올라 앞에 앉아 있는 추사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추사가 앉아 있던 평상은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가셨을까,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추사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재빨리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끝없이 깊고 짙푸르렀다. 추사가 하늘이 되어 있었다.

 

 

 한승원 : 서라벌예술대햑교 문예창작과 졸업했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목선(木船)>이 당선됐다. 저서로는《앞산도 첩첩하고》,《안개바다》,《미망하는 새》, 《폐촌》,《포구의 달》,《내 고향 남쪽바다》,《새터말 사람들》,《해변의 길손》,《희망사진관》등과 장편소설《아제아제 바라아제》,《해일》,《동학제》,《아버지를 위하여》,《까마》,《시인의 잠》,《우리들의 돌탑》,《연꽃바다》,《해산 가는 길》,《꿈》,《사랑》, 《화사》,《멍텅구리배》,《초의》,《흑산도 하늘길》,《추사》,《다산》,《원효》,《보리 닷 되》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도서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