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저총 ㅡ 집안 5세기초~말

2013. 5. 29. 17:03우리 역사 바로알기

 

 

 

 

각저총

 

 

 

 

 

각저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입니다.

일본인 이케우치 등에 의해 1935년에 조사되었구요.

분구는 방대형으로 밑둘레 한 변의 길이가 약 15m정도 됩니다.

널방은 네 벽위에 두 단의 평행굄돌을 놓고 다시 그 위에 네 단의 삼각굄돌을 올려놓은

모줄임천장입니다. 벽화는 앞방과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 인물풍속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배치상태를 보면 앞방과 통로에는 나무와 맹견이 있고

널방 네 벽 가운데 북벽에는 주인의 실내생활도가 있으며 동벽에는 씨름 그림과 부엌 그림이 있고

서벽에는 수레와 나무가 있으며 남벽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각저총의 별자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벽화고분을 각저총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널방 동벽 중앙으로부터 약간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씨름 그림에 의거한 것인데요.

벽화내용에 있어서도 주인공의 실내생활도가 서쪽 벽에 있는 인물풍속도 벽화고분보다

늦은 시기의 것이므로 5세기 말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분의 벽화에는 사신도가 없는 만큼 감 또한 곁칸이 있는 벽화고분에 비해서 연대가

그다지 늦을수는 없습니다.

 

 

 

 

 

 

각저총

 

 

 

 

 

 

 

 

각저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이다

1935년에 발견되어 일본인 이케우치 등에 의해 조사되었다 분구는 방대형으로 밑둘레 한변의

길이가 약 15m이다 묘실은 널길 장방형의 앞방

통로,방형의 널방으로 이루어졌다 천장구조는 앞방은 단면 아치형 천장이고

널방은 네 벽위에 두단의 평행굄돌을 놓고 다시 그 이에

네 단의 삼각굄돌을 올려놓은 모줄임천장이다 벽화는 앞방과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 인물풍속도가 그려져 있다 배치상태를 보면

앞방과 통로에는 나무와 맹견이 널방 네벽 가운데

북벽에는 주인의 실내생활도가 동벽에는 씨름 그림과

부엌 그림이 서벽에는 수레와 나무가 남벽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고분을 각저층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동벽 중앙으로부터 약간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씨름 그림에 의거한 것이다.

 

 

 

무용총(舞踊塚) vs 각저총(角抵塚)



 

    무용총, 각저총 이들 두 무덤의 축조 시기는 무용총은 400년 무렵에 축조된 무덤으로 보고,각저총은 5세기 전반에 이른 시기, 즉 410~420년대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무용총과 각저총이 이름을 갖게 유래는 1935년 일본인 이케우치 히로시와 우메하라가 조사할 당시 동남쪽 벽화 속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춤추는 모습에 착안하여 무용총이란 이름이 주어졌고, 우리의 전통적인 씨름꾼을 표현한 벽화가 무덤이어서 각저총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각저총과 무용총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山上王) 13년(서기 209년)부터 수도이었던 환도산성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 광개토왕릉 북서쪽 약 1km 거리에 무용총과 각저총이 있다.

 


    1966년 중국이 집안분지 주변 통구고분군을 일제히 재조사하면서 여산(如山) 남쪽 끝자락에 있는 두 고분의 명칭을 우산묘구(禹山墓區) 또는 우산하고분군(禹山下古墳群)으로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무용총은 458호호, 각저총은 우산묘구 457호로 지정되었다.

 


    각저총은 한국의 씨름꾼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어서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씨름무덤이라고 부르고 있다. 반면 무용총 천정의 두 장사는 수박희를 하는 씨름꾼이라고 얘기해 오고 있다. 하지만 머리 모양새나 복장 및 두 사람이 취한 동작과 몸짓으로 볼 때 무용총의 두 장사는 스모 선수이고, 벽화의 내용은 스모의 한 장면이다(서동인, 2011).

 


    문헌상 오늘날의 체계와 비슷한 수박(手搏)이 행해진 것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 13년(서기 209년)부터 환도산성(丸都山城)에 있는 무용총현실의 벽화에서 자유대련의 장면과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48)에 「선비(先人 또는 仙人)를 신수두 단전(壇前)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을 힘쓰며 수박, 격검, 사예, 기마, 덕견이, 씰흠(씨름)등 각종 기예를 하며…」라고 한 것으로 이미 삼한시대부터 제례행사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할 것은 각저총의 벽화라 하여 일방적으로 씨름의 어떤 동작이라고만 판단하기 쉬우나 고대에 있어서는 수박이니 각저니 한 것은 오늘날과 같이 수박(권법, 당수), 씨름(상박, 각저 각력)이니 하여 분류된 것이 아니고 「겨름 즉 자기의 힘을 기울려 맞대고 다툰다」는 뜻, 다시 말하면 투기라는 “총칭”의 의미로 불러졌다는 것이다.(신채호, 1948)

 


    이와 관련 유술(柔術)이란 말은 일본 고래의 용어로 수박, 권법, 백타, 상박 등의 투기 즉 무예의 “총칭”으로서 쓰인 것이다. 그 용어가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구한말 즉 광무 10년 이재완(李載完 또는 完順君)의 일본시찰 귀국보고(高宗實錄)에서 인 것이다.

 


   B 일본에서는 유술의 한 분야에 속하는 수박, 권법, 상박, 백타 등이 한 유파적인 투기에서 유도로서 체계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羅絢成, 1976)

 

라현성(1976)은 수박의 기원을 논하면서 무용총현실 벽화에서 오늘날의 태권(수박)과 같이 체계된 방식의 자유대련 장면이 고분벽화에 나타난 것을 보아 우리의 조상들이 수박을 얼마나 즐겼던가를 짐작 수 있다고 한다.「韓國 手搏(跆拳)攷」의 논문을 통해 태권도계에서는 태권도의 역사에서 무용총 벽화를 수박=태권이라고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헌데 그는 같은 책 「유술 · 유도 어원에 대한 고찰」에서 “그와 같은 투기가 오늘날의 방식같은 체계 밑에 手搏(卞, 권법, 당수, 공수)이나 角抵(角觝, 각력, 상박, 졸교, 질교, 쟁교)가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행해졌음을 고구려시기인 제10대 산상왕 13년(209)부터 고구려의 수도이었던 환도산성에 있는 각저총현실의 벼화에서 각저와 수박(자유대련)의 장면을 엿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수박(태권)이라는 언급이 없다.

 


    手搏은 卞(변)이라 하고 힘을 다투므로 무희라 하니 또는 무술을 講(강)하는 소기(小技)이다. 중국은 물론 조선 정조 14년(1790) 4월 무예도보통지 권4 권법 조(條)에, 「博은 곧 권박인데 卞이라고 쓴다.」같은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무용총 벽화를 두고 무용(舞踊) 즉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춤추는 모습을 수박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일본 스모라고도 단정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라현성(1976)은 수박(태권) 즉 태권=수박이라고 썼으니 논리의 비약뿐이 아니라 역사의 비약을 두고 오늘날 우리는 혼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용 체육교과서의 유술, 유도 조를 보면 「유술은 고려 숙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이름을 수박, 권법, 혹은 권박, 태껸이라고 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또 유도계의 인사들 가운데서도 수박을 유도의 시초라 하여 고려 숙종 때부터 라고 보는 분이 많은 듯하다.(라현성, 1976)

 


    유술=수박, 권법, 태껸이라고 볼 때 유도(1908)는 유술에서 나왔으니 유도의 원조는 수박, 권법, 태껸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그리고 手搏(卞, 권법, 당수, 공수) 곧 수박=공수, 권법, 당수라고 할 때 태권도는 당수, 권법, 공수 등 명칭의 개명에서 출발하고 있다.

 

무용총을 해석하는 다양한 사관에 따라 무예계는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 여산(如山)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각저총 측면도와 평면도
1935년 이케우치[池內宏] 등이 조사했다. 각저(角抵)는 고구려의 씨름인데, 고분에 그려 있는 씨름 그림 때문에 각저총이라 이름했다.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方臺形)이고, 밑둘레 한 변의 길이는 약 15m이다. 널길[羨道], 직4각형의 앞방[前室], 통로, 정4각형의 널방[玄室]이 있는 두방무덤[二室墳]이다. 천장은 앞방의 경우 단면 아치형이고, 널방의 것은 2단의 평행굄돌과 4단의 3각굄돌을 올려놓은 8각형 모줄임천장이다. 벽화는 앞방과 널방의 회칠한 네 벽과 천장에 그렸는데, 묵선·적·황·적갈·녹청색 등을 썼다. 그 내용은 인물풍속도인데 앞방에는 나무, 통로에는 맹견도, 널방 북벽에는 주인의 실내생활도, 동벽에는 씨름도와 주방, 서벽에는 수레와 나무, 남벽에는 나무를 그렸다. 그밖에 불꽃무늬 기둥과 창방 등 목조건물 의장을 그렸으며, 천장에는 해·달·별과 불꽃·초롱 무늬를 장식했다. 사신도가 없고, 앞방이 장방형이며 감(龕)이 없는 점, 인물풍속도를 그린 점 등으로 미루어 이 벽화고분의 연대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초로 추정된다. 이 벽화고분은 고구려의 풍속·건축·복식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각저총

 

▲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모습.

 

 

 

▲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전형적 옷차림의 고구려여인 모습.

 

 

▲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의 벽화. 쪽구들에 앉은 부인들과 맨바닥에 의자를 놓고 걸터앉은 남편이 상위에 차린 음식을 즐기며 담소하고 있다.

 

 

 

▲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묘실 왼족 벽면의 말과 마부. 말의 등에는 안장이 놓여있고 마부의 손엔 채찍이 들려있다.

 

 

▲ 서역인과 고구려인이 씨름하는 모습을 그린 각저총 벽화.

 

 

 

무용총과 각저총

 

 

    만주 집안(集安)에 가면 우산(禹山)의 산자락에 고구려 무덤떼들이 있다.

이곳에 무용총과 각저총이 있다. 무용총은 수렵도와 무용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분이고 각저총에는 씨름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비공식적이지만 볼 수 있는 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금은 보호 차원에서 전혀 공개를 하지 않는다.

 

 

 

무용총 무용도(1910년대 사진)

춤과 음악이 있는 연회가 벌어졌다.

한쪽 뜰에서는 남녀 혼성의 춤사위가 벌어졌다.

고구려 인들의 남녀 의상과

가무를 즐겼다는 고구려인들의 멋스런 풍류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무용총 무용도이다.

 

 

 

무용총 무용도의 현재 사진(화보에서)

무용총은 벽면에 회를 여러 차례 발라 바탕을 평평하게 만든 후 벽화를 그렸다.

이런 경우 회벽에 안료가 쉽게 스며들어 제작에는 용이하나

문제는 습기에 약해 외부와의 온도차로 습기가 차면 회벽이 떨어나가는 박락(剝落)현상이 심하다.

무용총은 개봉후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이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다.

 

 

 

 각저총 씨름도(1910년대 사진)

사진의 왼편에는 비껴 자란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옆에서 두 장정이 쌑바를 잡고 씨름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한 노인이 지팡이를 빞고 구부정한 자세로 심판을 보고 있으며

나무가지 위의 새들도 목을 빼고 씨름을 구경하고 있다.

이 한폭의 벽화를 통해 우리의 전통경기인 씨름이 이미 고구려때에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각저총 씨름도의 현재 사진(화보에서)

씨름도의 현재 사진을 보면 역시 벽화가 많이 훼손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당국이 녹슨 철문에 자물통 채워 출입을 막아놓기는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회손 상태가 더해가고 있다.

더구나 보존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쉽게 미칠 수 없은  만주땅에 있기에 더욱 안타깝다.

 


 

 

 

***  신과 사람을 잇는 하늘 사다리, 각저총 벽화의 나무

    집안의 각저총은 널방 오른벽에 묘사된 씨름 장면으로 잘 알려진 벽화고분이다.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이지만, 중심 화제는 나무이다. 1935년 발견, 조사될 때에 무덤 안으로 들어간 조사자들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앞방 네 벽을 가득 채운 나무들이었다. 널방 역시 벽면의 일부, 또는 전부가 거대한 나무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씨름 장면이나 음식 나르는 장면이 오히려 배경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나무가 등장하지 않은 벽면은 무덤주인부부가 자리잡은 널방 안벽뿐이었다. 씨름 장면이 주는 특별한 이미지가 아니었으면 각저총의 이름은 나무그림무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덤 안 화면의 대부분을 이렇듯 나무 그림으로 채운 이유는 무엇일까.

    각저총 벽화 씨름 장면 바로 곁의 나무는 단군신화의 신단수나 커다란 나무에 해당하는 존재인 듯하다.(그림) 줄기는 밑둥 근처에 곰과 호랑이가 등을 기댈 수 있을 정도로 굵고, 가지와 잎은 우거져 새들이 깃들기에 적당하다. 새는 주몽과 유화를 잇던 비둘기를 떠오르게 하고, 곰과 호랑이는 사람되기를 빌던 단군신화의 두 짐승을 생각나게 한다.

    중국 한대 화상석이나 고분벽화, 帛 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나무, 우주나무, 하늘 전령으로서의 새는 고구려 고분벽화 뿐 아니라 삼한 및 삼국의 관습이나 유물을 통해서도 존재를 드러낸다.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 청동기에 새겨진 나무와 새는 유물을 통해 확인되는 나무와 새에 관안 신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관 위에 커다란 새 깃을 놓아 영혼의 내세로의 여행을 도왔다는 진한 사람들의 장송의례에 관한 『삼국지』기사는 관습으로 알게 하는 종교신앙의 예라고 하겠다. 신라의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생이 鷄林에서 이루어졌다는 시조설화는 고구려의 주몽이 오곡의 종자를 건네 받던 커다란 나무와 전령 비둘기에 대한 이야기와 그대로 대비되는 경우이다. 고구려 장천1호분 앞방 오른벽 오른쪽 위 부분에 그려진 커다란 나무와 그 나무를 향하여 날아오는 아름다운 새, 오른벽 왼쪽 아래 부분에 그려진 구릉 위의 나무와 나무 밑둥의 동굴 같은 공간에 숨은 검은 곰은 각각 백희기악도의 일부, 사냥도의 한 부분으로 그려졌지만 단군신화와 주몽설화, 알지설화에 배인 신화적 인식의 흔적을 담은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서양인을 빼닮은 고구려 씨름꾼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 두 장사가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그래서 그 무덤을 각저총이라 부른다. 그 벽화에는 씨름 외에도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신단수와 신단수 아래에 앉아 있는 곰과 호랑이다. 누가 보아도 단군신화를 떠올릴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 벽화로 단군신화가 5세기 초의 고구려에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널방 동편에 그려진 이 그림은 어떤 염원을 담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무덤 주인공이 신단수를 통해서 저승으로 잘 갈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에 나오지 않는 씨름하는 장면은 왜 그렸을까?

    먼저 씨름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자. 씨름하는 인물상을 주제로 한 향로(기원전 2500년께)가 수메르가 있던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이로 보아 씨름은 수메르 지역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수메르지역에서 발굴된 씨름유적을 보면 현재 우리의 씨름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향로로 사용됐다는 것은 그 용기가 제사용으로 사용됐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씨름은 축제나 제사 의식을 거행할 때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씨름 경기의 제의적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미지의 세계 혹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의 투쟁과 관련 있을 듯하다. 수메르의 신화전설에 보면 영웅들이 자연과 투쟁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들이 자연의 폭력을 극복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황소의 모습을 한 수메르 영웅이 야생의 황소나 사자와 대결하는 인장을 보면 씨름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씨름은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과의 대결에서 이기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하는 경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각저총 씨름도는 사자가 저승이라는 두려운 미지의 세계로 갈 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각저총 인물 중 한 사람은 서역인이라는 설이다. 씨름도의 나무쪽에 위치한 인물은 크고 길게 째진 눈과 큼직한 매부리코를 가졌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서역인(西域人)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중앙대학 의과대학 연구팀이 아시아 각 지역의 인골 2000여 점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현재의 몽골 전역을 삼등분 할 때 서쪽에서는 유럽인종, 중앙에는 몽골인종, 동쪽에는 유럽인종의 특징을 보이는 인골이 발굴된다.

    이를 문헌과 비교해보자. 문헌에 보면 중국 동북 지역에는 전국시대 이후 동호(東胡)라는 세력이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한다. 일반적으로 흉노를 호(胡)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사람들을 동호라 한다. 그런데 흉노의 주도 세력도 투르크계였다. 이들도 천산의 서쪽에서 이주한 서역인과 몽골리언의 혼혈이었다. 그런데 2세기 말의 응소 고구려를 '구려호(句麗胡)'라고 칭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을 종합해 볼 때, 각저총 씨름도에 보이는 서역인은 호인(胡人)의 모습을 가진 고구려 주민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저자

 

 

 

 

                                                         5~6세기 고구려 각저총 씨름벽화.

 

 

    고구려인과 씨름하는 인물은 선비족 또는 돌궐족으로 보인다. 콧수염에 오독한 콧날로 봐서 전형적인 아리안 인종의 특성을 하고 있어서, 선비족이나 돌궐족이 서구학자들의 연구처럼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백인계설을 입증하고 있다.

 

    북송때 대륙의 북반부를 장악했던 선비의 후예인 거란족의 요나라인들의 생활상을 그려논 그림들도 그들이 백인계에 가까운 종족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흉노족중 일부가 경상도로 들어와서 신라를 건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나 금관문화는 북방 유목민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도 중앙아시아 인들(투르크계)의 일부 언어와 경상도 방언이 거의 일치하는 것이 남아 있으며, 왕을 칸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고구려나 백제같은 부여계 민족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칸은 전형적인 북방민족의 호칭이었다.

 

 

 

 

생명의 나무  /   안칸 왼쪽 벽화 

 

 

 

 

묘주 부부 배치도  /   안칸 안쪽 벽화

 

 

 

 

말몰이꾼과 말   /    안칸 왼쪽 벽화 

 

 

 

 

묘주 부부 벽화 

 

 

 

 

월상(月像) 두꺼비      /  널방 천장부 고임 오른쪽 벽화 (세부도)

 

 

 

 

해당초무늬 ㅡ불꽃무늬 ㅡ 삼족오     /   안칸 천정 동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