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5. 23:30ㆍ우리 이웃의 역사
- 일본의 역사와 언어..
- | 07.06.12 17:05
- 님의 답변
- 07.06.13 09:29
<메이지진구>
일본의 역사와 언어
첫번째 여행 : 덴노..의 나라 日本
덴노 (天皇)는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자손으로 나라와 국민의 상징이며 일본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합니다.
흔이들 알고있는 군주의 개념이 아니였습니다.
물론 일본의 역사에서 덴노가 실질적인 통치행위 (왕노릇)을 해온 시절도 물론 있었지만
지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었고..
오히려 긴 역사속에서 종교적, 민족적 상징으로 대표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인 스스로가 "일본은 하늘에서 내려준 나라이며 덴노는 신의 후예"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우리나라의 국조인 단군왕검의 종가가 대를 이어 존재하면서 한국민의 기본 뿌리를
상징한다면 적절한 비유가 되겠지요..(몰론 그런 사례가 없어서 아쉽지만...)
기원전 660년경 초대 진무 덴노가 즉위하고 .....쭈욱....대를 이어 아키히토 덴노까지 125대째
이어오고 있답니다.
현재의 아키히토 덴노는 2차대전때의 히로히토 덴노의 아들이며 명치유신을 단행한 메이지 덴노의
증손자 입니다.
그러나 진무 덴노가 즉위했다는 BC 660년경의 경우는 쪼매 신빙성이 떨어지고...
BC12,000년 ~ BC300년 까지를 조몬시대라고 부르는 신석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BC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BC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는등 동아시아의 역사가 요동칠때
일본은 AD 3세기 까지도 국가형태의 조직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시기에 나온 중국의 한서지리지에 일본은 백여개의 나라(부족연맹체)로 나뉘어 있다고 씌여 있지요.
3세기 처음으로 히미꼬란 여성이 야마타이국을 세우고 이 나라가 발전하여
야마토(大和)라는 일본을 상징하는 제대로된 국가가 됩니다.
이때는 덴노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오키미(大王)이라는 호칭을 썻답니다.
AD 690년 41대 부터 오키미란 칭호가 덴노로 바뀝니다.
그후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나름의 중앙집권국가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러나 AD 8세기경 일본 각지의 변방에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조직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덴노는 반란군 토벌을 책임질 세이이다이쇼군이라는 최고책임자를
두게 되는데 이를 줄여서 쇼군(將軍)아라 합니다.
AS 645년에서 ~ AD1192년까지 550년을 조정은 소가가문과 후지와라 가문으로 대표되는 덴노를
둘처싼 외척가문님 귀족들의 세도정치가 이어집니다.
섭정인 셋쇼, 간바쿠, 조우고(上皇)등 덴노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실권권력의 명칭이 등장하고요..
치열한 정권다툼 끝에 고려의 "무신의 난"처럼 무력을 중심으로한 바쿠후(幕府)시대가 1192년에
등장하게 됩니다.
바쿠후정권의 수장인 쇼군은 덴노의 정통성과 국가라는 틀만 유지한체로 실질적인 통치를 하는
현재의 2원 정치체제를 확립한답니다.
그러나 1854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페리제독에 의하여 개항을 하면서 일본의 정국은 큰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10여년에 걸친 다이모들의 내전을 겪은 후 1867년 바쿠후의 권력을 덴노에게 바치는 다이세이호칸으로
일본은 왕정 복고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정복고를 단행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덴노는 1885년 서구의
정치형태를 본딴 내각책임제의 입헌군주군가로 변신을 꽤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덴노는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일본의 상징적 지배자라는 사실입니다.
두번째 여행 : 와(和)의 나라 日本
禾(벼화) + 口(입구) = 和 (화목할 화)
사이좋게 밥을 나누어 먹으니 화목하겠지요...!!
한국의 음식을 韓食 이라 하고 중국음식을 中食이라고 부르는데
일본식 음식은 和食(화식), 일본 스타일은 和風(화풍) 이라고 합니다.
와(和)에서 조금 더 발전하여 平和(평화)와 調和(조화)를 일본의 정신이라고 한답니다.
일본의 건국이념이자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와"를 삼고 있지요..
"와"의 출발을 살펴보면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의 국가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마토(大和) !!
두번째로 일본의 국가틀을 정비한 쇼토쿠(聖悳)태자(AD574 ~622)의 일본 최초 헌법17개조의 첫머리가
"와(和)를 존중하라!" 일 정도입니다.
'와'(和)란 일본 역사를 통틀어 일본을 지배한 이념이자, 일본인의 사고방식의 바탕입니다.
일본인 에게서 '와'란 첫째로 '분수'를 지키는 것 입니다.
스스로 '알맞은 위치'에 적응하는 것이지요..
두번째로 '와'란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하는 것 입니다.
'이치닌 마에'(一人前)란 말은 '한사람 몫' 즉 자신의 제 역할은 기본으로 누구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와'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입니다.
'메이와쿠'를 큰 수치로 여깁니다.
네번째로 '와'란 사회 생활을 '온'(恩)의 관계로 보는 것 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가 지탱되고 있고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빚'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장 높고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에티켓을 아는 국민이고
질서를 존중하는 국민으로 이름 높은 이유가 바로 '와'(和)를 국가 기본 정신으로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여행 : 혼네(本音)와 다테마에(立前)
혼네(本音)란 진짜생각이란 뜻으로 본심으로 보면 되겠구요..
다테마에(立前)란 실제의 발언으로 보면 됩니다.
어찌보면 속마음을 감춘 이중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자체도 일본인의 특질이고 문화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혼네'와 '다테마에'가 상대방을 속이려는 의도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배려(기쿠바리)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부모 자식간에도 '혼네'와 '다테마에'는 존재합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서 노하거나 난처해지지 않도록 하는 화술이 일본 화법의 기본이니까요..
그러니 '알아서' 속마음(혼네)를 미루어 짐작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는 거구요..
더불어서 '기쿠바리'라고 상대방이 말하기 이전에 알아채서 신경을 써주는 눈치 빠름이
일본인의 생활에서 빚어 나오게 됩니다.
네번째 여행 : 온(恩)과 "오카에시"....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한국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일본의 인사말이죠...
그런데 이 인사말의 뜻을 살펴보면 "입장 난처하게도 은혜를 입게 되니 감사합니다." 되겠습니다.
또 죄송합니다.란 뜻의 '스미마셍'은 "은혜를 당신께 입었는데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아직 못했습니다."란 뜻이
됩니다.
일본인들에게 인간관계란 온갖 '온'으로 얽힌 것으로
국가에서의 은혜, 지역사회에서의 은혜, 조상에게서의 은혜, 부모님에게서의 은혜, 회사에서의 은혜....등등
이 은혜들을 당연히 갚아야 하는것이 사람의 기본 도리이고, 염치를 아는 것이고, 나의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은혜를 모르는 자! 는 당연히 '배신자', '쓸모 없는 자'가 되는 것 이지요.
뭐든지 받는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되갚아야한다는 믿음이 '오카에시'(답례)문화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결혼 축의금을 2만엔 받았다면 3~4만엔 이상의 답례품을 보내기도 하고
병문안이나 장례식장을 찾아주어도 답례품을 꼬옥 보내는게 일본인의 문화입니다.
다섯번째 여행 : 일본인이 뽑은 일본의 영웅들......
(1) さかもと りょうま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5-1867)
지금의 고치(高知)縣 출신. 남녀노소·직업·학력을 불문하고 언제나 영웅서열 1위를 차지하는 국민적 영웅이다.
메이지 혁명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에도(江戶)막부를 쓰러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츠마(薩摩)와 쵸슈(長州)의 연합, 이른바 [삿쵸(薩長) 동맹]을 비밀리에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혁명직전인 1867년 33세의 생일날에 막부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교토에서 암살되었다.
동분서주하며 파란만장한 짧은 삶 속에서 아무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낸 혁명가였기에
그를 서열 1위에 올려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료마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기발한 발상, 탁월한 협상력과 실행력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 서구의 서세동점의 시대적 배경하에서 일본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고 국가위기를 구원해준 구세주로 추앙되고 있으며,
오늘날 일본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불신, 경제의 침체 등과 맞물려 료마 같은 정치리더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어
그의 주가는 더욱 치솟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고액권이 발행될 경우 그 사진의 인물로 꼽아 놓고 있다고 한다.
(2) とくがわ いえやす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 전국시대 무장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 ·도토미[遠江] ·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
(3) おだ のぶなが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 전국시대 무장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를 진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 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전제무장(專制武將)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였다.
구체제-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關所: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계승되었다.
(4) たなか かくえ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 角榮)(1918-1993)
중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학벌의 텃세가 드센 일본정계에서 총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록히드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사건으로 감옥살이까지 했음에도 4위에 오른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으나,
탁월한 리더십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킨 정치력을 인정받은 것 같다.
또한 그의 딸이 아버지 못지 않게 장관으로 국회의원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어 부친의 후광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5) よしだ しげる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1878-1967)
태평양전쟁중 상공장관을 역임한 전력으로 전쟁후 전범으로 몰렸으나,
전쟁중 미국과 영국에 대해 호의적인 소위 친영미파였기 때문에 군부와 대립했던 연고로 구제되어 외상을 거쳐 수상을 역임했다.
패전후 7년동안 정권을 담당하면서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하고,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을 성사시키는 등 전후처리에 정치력을 발휘하여 오늘날 대국 일본의 기초를 마련했다.
(6)とよとみ ひでよし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 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전쟁중에 병사하였다.
(7) ふくざわ ゆきち 후꾸자와 유기찌 (福澤諭吉) (1835-1901) 메이지시대 계몽사상가
일본의 지폐 1萬円券 사진의 주인공으로, 지금의 오이타(大分)縣 출신.
영어를 독학으로 배워 1860년 각료의 미국방문시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서구 문화를 체험한 후
[學問のススメ] [西洋事情] 등의 책을 써서 일본국민을 계몽시키고,
일본최초의 대학인 게이오(慶應義塾)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분야에 헌신했다.
그러나 자신이 운영하는 신문 時事新報에 탈아론(脫亞論)이라는 논리를 펴서 조선을 능멸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박영효 등이 망명해 오자 자신의 집에서 기거토록 배려하는 등
간접적으로 조선의 내정에도 간여했다.
자국민에게는 [天は人の上に人をつくらず, 人の下に人をつくらずといえり]
즉,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민권운동가였지만,
아시아국가의 민권은 멸시한 것으로 유명하고, 언제나 일본식 옷을 고집한 국수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청일전쟁을 앞두고 승리에 대한 회의감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에 대해
일본민족의 강인함을 보여주자며 개전 무드로 전환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계몽·교육분야에서 선발한다면 당연히 1위를 차지할 인물이다.
(8)さいごう たかもり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1827-1877) 메이지시대 혁명가
가고시마(鹿兒島)출신으로 메이지 혁명 당시(1868년)에는 막부 토벌군의 참모장으로 야전군을 총지휘했다.
[유신 3걸]의 필두. 초기 메이지 정부의 수반으로 版籍奉還·廢藩置縣 등의 정치적 개혁을 주도했으나,
1873년 조선을 정벌하자는 자신의 정한론(征韓論)이 반대파에 의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정부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했다.
1877년에는 옛 무사들에게 옹립되어 [세이난(西南)전쟁]을 일으켰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에 의해 패퇴하여 할복자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2년후 강화도사건을 거쳐 한일합방으로 이어졌다.
한편 그의 친동생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는 초대 대만총독을 역임했다.
(9) いちかわ ふさえ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江)(1893-1981) 쇼와시대 여성정치가
아이치(愛知)縣 출신의 여권운동가. 교사와 신문기자를 거쳐 부인참정권 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
10위안에 든 것은 최근 여권의 지위향상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배려로 상징적인 의미로 뽑아 준 것 같다.
(10) いとう ひろぶみ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메이지시대 정치가
야마구치(山口)縣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탈취한 주인공이자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으며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했다.
20대에 영국에 유학한 경험으로 영국과의 전쟁시에는 일본에 불려와 영어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일본최초의 내각총리를 역임했으며, 메이지 헌법의 제정을 주도한 인물로 정계의 원로로서 오랫동안 군림했다.
(11) たけだ しんげん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1521-1573) 전국시대 무장
전국시대 일류의 전략·전술가로 지금의 야마나시(山梨) 지방을 지배한 인물이다.
[風林火山]의 깃발을 내건 기마대는 용맹하기로 유명했으며,
호적수 우에스기(上杉 謙信)와의 전투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병으로 죽게되자 3년동안은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가케무샤(影武者)를 내세우도록 유언을 남기고 53세의 생을 마감했다.
작년에 상영되었던 일본영화 影武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2) うえすぎ けんしん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1530-1578) 전국시대 무장
다케다 신겐과 쌍벽을 이루는 전국시대의 무장으로 중북부 일본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
나가오(長尾)가문의 가독(家督)을 이은 겐신은 에치고지방을 평정했다.
전국무장으로서는 유일하게 「정도(正道)를 걸은 인물」 겐신은 의(義)를 중시했고,
결코 도를 벗어나는행동은 하지 않았으면서도 발 빠르게 한 시대를 달려왔던 것이다.
그런 겐신에게는 연중행사 처럼 매년 전투를 즐기는 습관 또한 있었으며,
그 상대가 바로 일본 전국시대상 최고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다께다 신겐과의 전투이다.
신겐 과는 나카카와지마에서 12년간 5차례 대치했다.
신겐의 사망소식이 도달했을 때, 식사중이었던 겐신은 먹던 음식을 모두 토하고
「 아아... 다년의 호적수와 다시 만날 날은 이제 없단 말인가」 라고 한탄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1578년. 다음 목표인 관동지방 출진을 눈 앞에 둔 3월 9일...
겐신은 카스가야마성(春日山城) 에서 쓰러져 의식불명인 상태로 13일에 사망했다.
평소에 술을 좋아했던 것이 원인으로,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죽기 한 달 전에 남긴 한시(漢詩)에
영원토록 영번하는 한잔의 술, 49년은 한순간의 꿈, 생을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르니,
세월 또한 꿈과 같구나』라는 글귀가 있다.
(13) みなもとの よりとも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 가마쿠라 무장
일본 최초의 무가정권인 가마쿠라(鎌倉)막부를 창설하고 초대 쇼군(將軍)이 된 인물.
(14) おおくぼ としみち사이고 다카모리(大久保利通)(1830-78) 메이지시대 정치가
가고시마(鹿兒島)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의 3걸.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한 후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으로 일컬어지는 근대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인물.
사족들의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는 등 독재와 냉혈 인간으로 불려졌는데 결국 불평무사에게 암살당했다.
(15) うえすぎ ようざん우에스기 요오잔(上杉 鷹山)(1751-1822) 에도 후기 요네자와(米澤)의 번주(藩主).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에 [불씨]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의 주인공인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선정을 베푼 명군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우에스기 하루노리(上杉治憲)라고 한다.
(16) みなもとの よしつね미나모토 요시츠네(源 義經)(1159-1189) 가마쿠라 무장
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를 도와 정권을 수립했으나 형과 불화하고 쫓겨다니다가 자살했다.
무예에 출중한 비극의 영웅으로 동정적이고 과장된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가부키의 테마로 곧잘 등장한다. 심지어 칭기스칸으로 부활하여 몽고제국을 세웠다는 속설마저 생겨났다.
(17) いたがき たいすけ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 退助)(1837-1919) 메이지시대 정치가
지금의 고치(高知)縣 출신으로 정한론쟁에서 밀려난 후, 자유민권운동가로 전향했다.
1882년 연설도중 괴한에게 칼을 맞고 쓰러지면서 [이타가키는 죽어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며,
뒤에 내무상을 역임했다.
(18) よしだ しょういん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막부말기 사상혁명가
지금의 야마구치(山口)縣 출신으로 페리함대에 밀항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붙잡혀 투옥되었다.
출옥 후 쇼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학당을 세우고 젊은 인재를 양성했는데
伊藤博文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모두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막부를 타도운동이 발각되어 30세의 나이에 처형되었다.
그가 옥중에서 쓴 幽囚錄에서는 조선을 공략해 영토를 확장할 것을 주장했다.
지금도 일본의 우익주의자들은 매년 10월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19) かつ かいしゅう 카츠 카이슈(勝海舟) (1823-1899) 막부말기 군인정치가
막부의 해군경으로 조약을 비준하기 방미한 후, 문화 충격을 받고 해군력 증강과 개항을 주장했다.
이에 분노를 느낀 사카모토 료마가 그를 죽이러 찾아갔다가 오히려 설복당하고 제자로 받아줄 것을고 간청했으며,
그때까지의 보수적인 사상을 떨치고 혁명가로 변신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가 에도성에 진격해 왔을 때 전면전 일보직전에 자신의 상전인 쇼군과 적장 사이고를 설득하여
성문을 열어 무혈혁명으로 이끌어내고 아울러 쇼군에 대한 신변보장도 받아냈다.
(20) おざき ゆきお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1859-1954) 메이지쇼와 정치가
군부정권에 대항하여 헌정을 수호한 호헌주의자로 [憲政の神樣]으로 불린다.
중의원의원 25회라는 불후의 기록을 남겼다.
일본인 스스로 뽑은 20명의 일본 영웅들을 살펴보며서
특이한 점 몇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번째로 덴노가 한명도 없다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이 당연히 들어가겠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일본에서의 덴노(天皇)의 성격을 또 한번 엿 볼수 있겠지요.
둘째로 전국시대 이전(AD1500년)의 인물이 단 2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고..
그 순위도 20명중에서 한참 뒤라는 사실이지요..
즉 일본인들이 일본 역사 고대사에 대한 선호도가 그만큼 약하다..또는
고대사의 인물에게서 일본혼의 자취를 그리 느끼지 못한다고 여겨지지요..
셋째로 전국시대 3웅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간단히 10위권안에 랭킹이 되었고..
넷째로 현대 일본의 수상이 두명이나 그것도 5위권에 랭킹되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일본 자민당 정부의 장기집권을 설명해주고 있지요..
다섯째로 20명중 거의 절반인 9명이 막부 말기~메이지시대의 일본 근대화의
족적을 남긴 사상가와 정치가란 사실입니다.
같은 시기 조선의 인물들이 (고종황제,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
현재 우리 국민들에게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 대비해보면 시사하는바가 무척 크지요..
여섯번째 여행 : 간단한 日本史 ...
Ⅰ. 原始 古代
1. 古代國家의 起源
(1) 文化의 시작
일본열도는 남북 3000km로 온대기후지역에 해당하며 아한대침엽수림부터 아열대림까지 분포하고 있다.
홍적세의 일본열도는 아시아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10만년전경의 화석인골이 출토되고, 타제석기가 나오고 있어
인류가 계속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열도가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이 된 것은 1만년전의 충적세의 시대부터다.
이때부터 일본열도에 거주한 인류는 일본전국에 패총과 수혈주거를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활과 화살․마제석기․토기등이 발견되었다. 새끼줄무늬(繩文)가 새겨져 있어 죠몬(繩文)토기라 불리우며,
따라서 일본의 신석기시대는 죠몬(繩文)시대라 불리운다.
그러나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 것은 아니어서, 2-3호(1호당 10명이내)가 하나의 집락을 이루어
수렵․어로․채집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장방법은 굴장(屈葬)으로 토우(土偶)를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인골에는 발치(拔齒)의 흔적이 보인다.
(2) 농경의 시작
일본열도에서 본격적으로 농경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로, 수도(水稻)농업이 북부 큐슈(九州)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1세기경에는 동북지방까지 보급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이 시기에 청동기․철기등의 금속기와 야요이(彌生)토기가 일본열도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이를 야요이토기가 가장 먼저 발견된 토쿄(東京) 야요이쵸(彌生町)의 지명을 본따 야요이(彌生)문화라 한다.
이 새로운 문화는 외부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한국남부인들의 이동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야요이시대인의 신장이 한반도남부인과 같이 커진 점,
지석묘와 마제석촉․청동제 무기등에 한반도남부와 같은 것이 나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 시대의 묘제로는 지석묘․상식석관등과 부장(副葬)용이었던 옹관묘등이 있었고 방형주구묘도 보인다.
기원후 1세기이후의 야요이시대후기에 낫․도끼․괭이등 철제농기구가 보급되어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빈부의 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높은 지대에 해자를 둘러친 집락지가 발견되는데, 이는 전쟁이 발생하였음을 말해준다.
관개사업과 공동체 제사 및 방위를 지도하는 수장(首長)이 출현하면서 소국(小國)들이 형성되었음은
ꡔ한서ꡕ․ꡔ후한서ꡕ․ꡔ삼국지ꡕ 등의 중국사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3) 야마토(大和)정권과 고분문화
3세기말부터 4세기초에 걸쳐 일본열도에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발생한다.
전방후원분의 원형은 백제 초기 위례성(한성)의 고분에서 볼 수 있어 야마토정권의 뿌리를 짐쟉하게 한다.
또한 고분의 출현은 야마토정권의 성립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야마토정권이란 야마토(현재의 나라지방)에 있었던 유력 호족들의 연합정권으로,
유력호족들이 각각의 직책을 세습하면서 오오미(大臣)나 오오무라지(大連)로서 대왕과 함께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토모노 미야츠코(伴造)로서 실무를 맡아 보았다.
야마토정권은 지방의 유력 호족들을 쿠니노미야츠코(國造)나 아가타누시(縣主)로 임명하는 형식으로,
4세기후반부터 5세기경에 걸쳐 서부일본을 통일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보이는 「왜(倭)」와 ꡔ宋書ꡕ에 보이는 「왜왕(倭王)」은, 야마토정권과 관련이 있다.
일본고대국가의 발전에는 외부로부터의 들어온 사람에 의한 문화의 전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존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을 통해 4세기후반에 백제가 왜국과 교섭을 개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ꡔ니혼쇼키(日本書紀)ꡕ에 의하면 한자․유교․불교, 의․역(易)․역(曆)학 등이 백제로 부터 전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야마토조정에서는 철기생산․양잠․토기제조․토목분야에 한국남부출신의 기술자집단이 활약하였다.
5세기이후 철제농기구사용으로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일본의 고분문화는 변질하게 된다.
즉 군집분(群集墳)이 생겨나고 추장(追葬)을 할 수 있는 횡혈식석실이 백제로부터 전래되고,
회색의 경질토기인 스에키(須惠器)가 만들어진다. 지방마다 종교적 장소인 사(社)가 만들졌으며,
농사의 풍작을 위해 기년제(祈年祭)․신상제(新嘗祭)등의 종교의례가 만들어졌다.
2. 율령국가와 대륙문화의 섭취
(1) 스이코(推古)조와 아스카(飛鳥)문화
6세기에는 야마토정권의 유력호족들 사이에 항쟁이 일어나,
주도권은 오오토모(大伴)씨에서 모노노베(物部)씨, 다시 소가(蘇我)씨로 옮겨가게 되었다.
6세기말부터 7세기초에 소가씨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를 여제 스이코(推古) 천황의 섭정으로 삼아,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하고 관위12계제․역사 편찬등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의 기술원조로 아스카(飛鳥)지방에 사원건축이 유행하면서 불교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소가씨의 아스카데라(飛鳥寺)와 쇼토쿠태자의 호류지(法隆寺)등이 건립되고,
호류지(法隆寺)의 금동석가삼존상과 목조백제관음상, 코류지(廣隆寺)의 반가사유상등이 만들어졌고,
삼경의소(三經義疏)와 같은 불경주석서도 만들어졌다.
또한 고구려의 담징(曇徵)에 의해 종이․먹․그림도구의 제조법이 전해졌으며,
백제의 관륵(觀勒)은 역(曆)법을 전해 역사서와 기록의 발달을 도왔다.
이와 같이 6세기말부터 7세기전반의 백제의 영향이 강한, 불교중심의 문화를 아스카(飛鳥)문화라 한다.
(2) 율령국가의 형성과 하쿠호(白鳳)문화
640년대에 한반도에서는 권력집중이 일어났으며, 일본에서는 소가씨가 독재권을 확립하고 있었다.
야마토조정에 당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에 의해 수․당의 율령국가체제가 알려지면서,
소아씨독재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645년, 코교쿠(皇極)천황의 장자 나카노오오에(中大兄)황자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蘇我)씨정권을 타도하고, 황태자로서 국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신정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목표로 한 개혁을 추진해 나갔는데, 이를 타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 부른다.
660년 한반도에서는 당과 협력한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의 호족들은 당과 신라에 저항하면서, 일본에 도움을 청하였다.
일본은 이에 응해 원군을 보냈으나, 663년 백촌강(白村江)싸움에서 대패한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676년에는 당의 세력을 몰아내어 한반도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백촌강의 패전후 나카노오오에황자는 요지에 조선식 산성을 축성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고,
668년에는 천황(天智)으로 즉위하여, 영(近江令)과 호적을 만들어 율령국가 체제를 마련하였다.
그후, 임신(壬申)의 난을 통해 즉위한 텐무(天武)천황은, 천황중심의 새로운 신분질서를 만들고,
영(飛鳥淨御原令)을 제정하고 국사편찬을 개시하였다.
701년 몸무(文武)천황때에 일본실정에 맞게 영을 수정한 타이호(大寶)율령이 완성되어 율령정치의 틀이 정비된다.
일본 율령국가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관료제와 중앙집권적인 행정기구를 가진 천황제국가였다.
중앙에는 천황 밑에 2관(太政官․ 神祇官)과 8성을 두었다.
지방은 전국을 기내(畿內)와 7도의 행정구로 나누고 그 밑에 코쿠(國)․군(郡)․리(里)를 두고
코쿠시(國司)․군시(郡司)등을 임명하였다.
관리는 관위에 따라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관위 5위이상은 귀족으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특권이 있었다.
율령국가는 양천제적 신분사회로, 양민의 대부분은 농민으로,
6년마다 6세이상의 남녀 모두가 구분전(口分田)을 지급받는 대신 조세를 부담하였다.
특히 17세에서 65세까지의 남자농민은 조세이외에도 요역에 종사하거나, 병사로 징발되었다.
7세기후반-8세기초 율령국가 형성기에, 백제․고구려의 멸망후 일본에 도래한 유민들의 영향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발달하였다.
텐무천황이후 국가불교의 발달과 함께 불교예술이 발달하여,
코후쿠지(興福寺)불두나 야쿠시지(藥師寺)금당약사여래상․호류지금당벽화등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주는 타카마츠츠카(高松塚)고분벽화등이 만들어졌으며,
한시의 영향을 받아 5음7음을 기본으로 하는 와카(和歌)의 정형이 만들어진다.
이 시기의 문화를 하쿠호(白鳳)문화라고 한다.
(3) 나라시대의 문화
710년 장안성을 모방한 헤이죠쿄(平城京)가 나라(奈良)에 완성되어 천도한 후,
784년 쿄토(京都)의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길 때까지 80여년간을 나라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율령정부는 일본열도의 동북과 남서로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쓰시마(對馬)․무츠(陸奧)에서 황금광산이, 무사시(武藏)에서 동광산이 개발되었다.
양잠․직물기술자를 지방에 파견하여 기술보급에 힘쓴 결과, 지방의 특산품으로서 조정에 헌상되었다.
당을 모방하여 화폐를 만들어 유통을 장려하였으나, 도읍과 기내(畿內)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벼나 포가 계속 사용되었다.
8세기에는 15년 내지 20년에 한번씩 견당사가 파견되어,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이 당의 문물수입에 큰 공헌을 하였다.
통일신라와는 서로 경계하면서도 빈번히 교류하여,
신라와 관계가 재개된 668년부터 양국의 공식관계가 끝난 779년까지 신라는 46회, 일본은 26회 사신을 파견하였다.
8세기후반이후 양국관계가 무역 중심으로 변하여, 9세기에는 사무역이 중심이 된다.
727년 발해의 사신파견으로 시작된 양국관계도 활발하여 8세기에 발해에서 11회, 일본에서 9회 사신이 파견되었다.
율령정부는 722년 100만정보개간계획을 세우고, 723년에는 개간지의 3대사유법을, 743년에는 영구사유법을 발표하였다.
이로서 토지 사유가 가능해져, 장원(莊園)발생의 단서가 마련되었다.
8세기중반이후 잦은 정쟁으로 여러 귀족들이 몰락하였으나,
타이타개신의 공신 카마타리(鎌足)를 시조로 하는 후지와라(藤原)씨는 후히토(不比等)의 두 딸이
몸무천황과 쇼무(聖武)천황의 비가 된 이후, 계속 천황가의 인척으로서 황족에 준하는 지위를 확립하였다.
황족과 귀족의 부유한 생활을 바탕으로 나라중심의 귀족문화가 꽃피었는데,
이 문화를 쇼무(聖武)천황때의 연호를 따서 텐표(天平)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진호국가불교가 발달하여 각 지방마다 코쿠분지(國分寺)를 설립하고,
나라의 토다이지(東大寺)에는 대불을 조영하였다.
나라의 주요 사찰(南都六宗)에서는 불교의 여러 종파의 강의가 있었다.
유교중심의 귀족교육기관(大學)과, 지방호족 교육기관(國學)이 있었고,
역사서(ꡔ古事記ꡕꡔ日本書紀ꡕ)․시가집(ꡔ万葉集ꡕ)․지지(地誌)(ꡔ風土記ꡕ)등의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토다이지법화당과 토쇼다이지(唐招提寺)금당과 같은 당풍(唐風)건축과 소상(塑像)․건칠상(乾漆像)조각이 유행하였다.
(4) 헤이안(平安)전기의 그 문화
8세기 후반부터 중세부담을 피하기 위한 농민의 유랑이 증가하였다.
칸무(桓武)천황은 794년에 헤이안쿄로 천도하고, 율령제 재건을 위해 12년마다 반전(班田)을 시행하고, 잡요를 경감하였다.
또한 농민병사를 폐지하는 대신 호족 자제들로 군대를 편성하고, 동북지방을 점령하였다.
헤이안(平安)천도부터 9세기말까지, 헤이안 전기에는 대학 기숙학교들과, 서민교육기관이 만들어졌으며,
한시문집과 관찬역사서가 계속 편찬되었다.
불교계에도 새로운 풍조가 일어 사이쵸(最澄)가 천태종(天台宗)을, 쿠카이(空海)가 진언종(眞言宗)을 열었으며,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진행되어 신사의 경내에 신궁사(神宮寺)가 만들어졌다.
천태종과 진언종의 영향으로 산악가람이 늘어났으며, 나무하나로 만드는 불상조각이 유행하였고,
부처의 세계를 특이한 구도로 그린 만다라(曼茶羅)가 유행하였다.
3. 귀족정치와 문화의 국풍화
(1) 셋칸(攝關)정치
천황가의 인척 후지와라(藤原)씨는 후히토의 네 아들별로 일가를 이루어, 4가가 있었다.
858년이후 북가(北家)가 미성년 천황을 보좌하는 셋쇼(攝政)와 성년 천황을 보좌하는 칸빠쿠(關白)를 독점하였는데,
이와 같이 셋쇼와 칸빠쿠에 의한 정치를 셋칸정치라 한다.
이 정치는 11세기초에 극성기를 맞이하나 11세기말 인세이(院政)가 시작되면서 약화되었다.
이 시대에는 지방에서 반전수수법이 시행되지 못 하여, 개간지와 구분전을 사유화한 지방 호족과 유력농민은
후지와라씨나 유력한 사원․신사의 보호를 받았다.
지방정치가 문란해지자 호족들은 자체방위를 위해 일족을 조직하여 무사단을 만든다.
이 무사단들은 다시 유력자(棟梁)를 중심으로 결합하게 되는데,
황족의 후예인 미나모토(源)씨와 타이라(平)씨가 가장 유력하였다.
(2) 國風文化
894년에 견당사가 폐지된 후, 일본은 송․고려와 공적인 국제관계를 갖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일본적인 문화가 만들어졌는데 이 헤이안 중기 문화를 코쿠후(國風)문화라 한다.
가나(假名)의 발달로 일본국문학이 발달하여, 와카(和歌)가 공식장소에서 유행하였으며,
일기나 수필(ꡔ枕草子ꡕ), 이야기(ꡔ源氏物語ꡕ)들이 가나로 씌어졌다.
불교의 천태종과 진언종이 귀족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본에 와서 천황가의 조상신(天照大神)이 되었다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말법사상이 유행하면서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바라는 정토교(淨土敎)도
귀족과 서민층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건축에서는 신덴즈쿠리(寢殿造)라는 일본적인 건축양식이 생겨나고,
일본의 풍물을 그린 야마토에(大和繪)가 등장하게 되었다.
정토교의 유행으로 지방에 사원이 건립되고, 불상도 대량생산되었고, 왕생하려는 사람을 부처가 맞으러 오는 그림이 유행하였다.
당시의 귀족의 복장도 일본색이 풍부하였다.
식생활은 비교적 간소하여, 식사는 1일 2회로,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고
조리에 식용유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헤이안쿄의 귀족들의 결혼생활은 처가거주형으로, 아이도 처가에서 양육하였다.
다다미를 깔고 앉아서 생활하였으며, 연중행사가 발달하였고, 미신과 원령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3) 인세이(院政)와 타이라(平)씨의 전성
11세기후반 후지와라((藤原)씨 소생이 아닌 고산죠(後三條)천황이 친정을 실시하면서 셋칸정치는 끝났다.
시라가와(白河)․토바(鳥羽)․고시라가와(後白河)천황등은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서 인(院)에서 정치를 하였는데,
이를 인세이(院政)라 한다. 인세이는 100여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 불사에 의한 낭비와 관직․ 관위의 매매 및 승병의 시위등으로 율령정치는 더욱 붕괴되고, 장원은 확대되었다
인세이기 말기에는 1156년 천황과 상황의 대립을 계기로, 무사단이 중앙에서 활약하게 되어,
1159년 미나모토(源)씨를 누르고 정권을 장악한 타이라(平)씨는 천황의 인척으로 약 20여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인세이기의 문화의 특징은 문화의 지방화․서민화가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정토교사상의 보급으로 지방에도 훌륭한 건축물이 만들어졌으며,
유행가요와 덴가쿠(田樂)와 같은 서민예능이 발달하였다.
설화집 (ꡔ今昔物語集ꡕ)과 무사들의 활약담(ꡔ陸奧話記ꡕ), 일본어 문체의 역사서(ꡔ榮華物語ꡕ․ꡔ大鏡ꡕ)등이 만들어졌으며,
야마토에(大和繪)에 이야기를 넣은 에마키모노(繪卷物)도 유행하였다.
Ⅱ. 中 世
1. 무가사회의 형성
(1) 카마쿠라(鎌倉)막부의 성립
타이라(平)씨 일족정치에 대한 반감이 무사단․귀족․사원사이에서 커지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타이라씨타도의 병을 일으켰다.
요리토모는 1183년 동국의 행정권을 장악, 카마쿠라(鎌倉)를 거점으로 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간다.
1185년 단노우라(壇の浦)의 싸움으로 타이라씨를 멸망시키고,
칙허로 슈고(守護)․지토(地頭)의 설치권을 얻어내어 군사경찰권을 장악하였고,
1192년에는 무사의 통솔자를 의미하는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된다.
이 무가정권을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라 하는데, 이후 약140년간 계속되었다.
카마쿠라막부에는 쇼군(將軍)의 밑에 중앙의 조직으로 사무라이토코로(侍所)와
쿠몬죠(公文所)․만도코로(政所)․몬츄죠(問注所)등이 있었다.
또한 각지의 공령과 장원에는 쇼군의 가신을 슈고․지토로 파견하여, 치안유지와 연공징수를 담당케 하였다.
막부지배의 근본은 토지에 대한 권리(式)을 매개로 한 장군과 가신과의 주종관계에 있었으므로,
카마쿠라막부는 봉건제도에 기초한 일본최초의 정권이었다.
그러나 천황조정의 코쿠시(國司)와 장원영주들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무사들은 토지의 일부권리만을 가졌으므로, 그 지배체제는 무가와 천황조정 귀족의 이원적 지배체제로,
봉건제도는 아직 미숙하였다.
(2) 執權정치
카마쿠라 막부의 실권은 초기에는 쇼군에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의 사후, 부인 마사코(政子)의 부친 호죠 토키마사(北條時政)가
싯켄(執權)으로서 쇼군을 보좌하였으나, 3대장군의 암살로 미나모토씨의 쇼군(將軍)시대는 끝나고,
호죠씨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쿄토조정에서 세력을 만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221년 고토바(後鳥羽)상황이 군대를 일으켰지만,
막부군의 승리로 끝났다(承久의 난).
이후 막부는 황위계승에 개입하고 쿄토조정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으며,
상황측에 가담한 귀족․무사의 영지를 몰수하고 새로 지토를 임명하였다.
그 결과 막부는 전국지배를 확대하여, 천황조정에 대한 막부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승구의 난후 막부는 집권 밑에 랜쇼(連署)와 효죠슈(評定衆)를 두어 합의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무가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무가최초의 체계적 법전인 정영식목(貞永式目) 51개조을 제정하였다.
당시의 무사는 집(館) 주위에 흙으로 소성곽을 쌓고 주변에 해자를 두르고 살면서,
하인이나 농민을 써서 직영지를 경작케 하는 한편, 쇼칸(莊官)이나 지토로서 연공징수를 담당하고 연공의 일부를 받았다.
무사사회에서는 혈족의 결합이 공고하여 일족의 장을 대표로 하여 막부에 봉사하였으며,
여자도 포함한 분할상속이 일반적이었다.
주인에 대한 「봉공」을 위해 무예를 연마하였으며, 검소․무용(武勇)․충성․명예등을 중시하였다.
이 무가의 도덕은 에도시대의 무사도(武士道)로 이어진다.
그러나 지토들 중에서 년공을 횡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자,
장원영주는 장원의 지배권을 지토와 나누어 갖는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 결과 장원의 현지지배는 점차 무사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카마쿠라중기에는 기내와 서일본에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고,
비료가 이용되고 우마의 사용과 농구의 보급이 늘어났으며, 종이․염료․등유등의 원료가 재배되었다.
또한 주물사․옹기장이등의 전문수공업자가 농촌에 등장하였다.
농촌의 생산물의 교역을 위해 정기시가 열려, 지토와 쇼칸은 상인에게 세를 거두고,
년공미등을 여기서 팔아 돈으로 만들어 쿄토나 나라의 장원영주에게 보냈다.
도시에서는 장원영주들을 대상으로 한 양조․고급직물․무기․공예품등 수공업생산이 이루어졌다.
제조와 판매의 독점을 위해 「자(座)」라는 상공업자 동업조합이 있었으며,
원격지간 거래에는 어음(爲替)이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어, 고리대금융업자(「借上」․「土倉」)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당시의 화폐로는 무역을 통해 수입한 송의 화폐가 사용되었다.
(3) 鎌倉문화
막부성립 초기에는 오랜전통을 지닌 공가문화가 우세했으나,
송․원 문화의 영향으로 소박하면서도 힘찬 무가 문화가 생겨났다.
전란과 재해, 귀족세력의 몰락과 타이라(平)씨의 성쇠를 본 사람들은 더욱 더 현실부정의 말법사상을 가지게 되어
종교에 구원을 구하였다. 이러한 때 나타난 것이 카마쿠라신불교(鎌倉新佛敎)다.
신불교는 계율․학문․기진(寄進)등을 중시하는 구불교를 배척하고
염불․선․제목(題目)중에서 한 길을 정진하면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정토교계․선종․니치랜종(日蓮宗)으로 나눌 수 있다.
정토교계통에는, 정토종․정토진종․시종(時宗)이 있는데 모두 염불을 중시하여, 무사․서민층에 퍼졌다.
니치랜종은 니치랜이 창시한 것으로 관동의 무사층에 퍼졌는데,
제목(南無妙法蓮華經 7글자)를 외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송에 유학한 승려에 의해 선종도 전해졌는데, 공안(公案)을 중시하였던 임제종과 좌선을 중시한 조동종이 있었다.
신불교의 등장으로 나라의 구불교계에서도 혁신이 일어나, 빈민․병자를 구제하고, 도로․다리를 건설하였다.
카마쿠라시대의 문학으로는 군기물(ꡔ平家物語ꡕ)․설화집(ꡔ古今著聞集ꡕ)․수필(ꡔ徒然草ꡕ)들이 발전하였다.
학문도 발달하여 공가사회에서는 고전연구(ꡔ釋日本紀ꡕ), 송학(宋學), 역사(ꡔ愚管抄ꡕ)의 편찬이 있었으며,
무가사회에서도 카마쿠라막부의 역사(ꡔ吾妻鏡ꡕ)가 편찬되고, 호죠씨는 카나자와문고(金澤文庫)를 설치하였다.
카마쿠라시대에는 예술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조각은 힘있고 인간미 넘쳤으며, 초상을 조각하기도 하였으며, 그림은 두루말이 그림(繪卷物)과 초상화가 발달하였다.
공예품으로는 도검과 도기․갑주의 생산이 발달하였다.
(4) 원구(元寇)와 막부의 쇠퇴
12세기초 강남의 남송과 일본사이에 국교는 열리지 않았으나, 사무역과 승려․상인의 왕래는 활발하였다.
13세기후반 원의 후비라이의 조공요구를 싯켄 토키무네(時宗)가 거절하자,
원은 고려와 연합군을 만들어 1274년 큐슈북부를 침략하였다.
원군의 화약과 집단전법에 일본군은 고전하였으나, 때마침 폭풍이 불어 원군이 물러갔다.
그후 원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1281년 다시큐슈북부에 침입하였으나, 일본군의 분전과 폭풍우로 다시 패퇴하였다.
이 두차례의 원의 침입을 「겐코(元寇)」라 한다.
「겐코」때에 조정과 사원․신사에서는 신불(神佛)의 가호를 비는 기도가 계속되었는데 원이 퇴각하자,
일본에는 신국사상이 강화되었다. 전시하 막부의 호죠씨는 독재체제를 통해, 전국 지배를 강화하게 되었으나,
전비를 부담하였으면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무사들은 막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분할상속제도로 궁핍해진 무사들은, 영지를 팔든가 빚을 지게 되었다.
막부는 1297년 무사들이 판 영지를 원상회복케 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별로 효과는 없었으며,
기내부근에서 장원영주나 막부․슈고의 지배에 반항하는 무사들의 집단행동이 일어나면서 막부체제는 동요하게 되었다.
2. 무가사회의 성장
(1)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성립
1324년과 1331년에 고다이고(後醍 )천황이 벌인 막부타도운동을 계기로하여, 무사들이 각지에서 거병하였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와 닛타 요시타카(新田義貞)도 막부에 반기를 들고 호죠(北條)씨일족을 공격하여
1333년 카마쿠라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타카우지가 무가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1336년 쿄토조정을 공격하자,
고다이고천황은 남쪽 요시노(吉野)로 도망갔다.
이후 1392년까지 타카우지가 세운 쿄토의 천황(北朝)과 요시노의 천황(南朝)이 병존하여, 전국의 무사들도 둘로 나뉘어 싸웠다.
이 50여년의 쟁란기를 남북조시대라 한다.
북조의 타카우지는 켄무식목(建武式目)을 제정하여 정치의 기본을 정하고
1338년 세이다이쇼군에 임명되어 막부정치가 부활했다.
3대장군 요시미츠(義滿)때에 남북조가 통일되고(1392), 막부기구가 정비되었다.
막부는 장군 밑에 정무를 총괄하는 3인의 칸래이(管領)를 두고,
그 밑에 카마쿠라시대이래의 사무라이도코로(侍所)등의 지배기구를 두었다.
지방에는 슈고를 설치하고 관동에 카마쿠라부(鎌倉府), 구주에 큐슈탐제(九州探題)등을 두었다.
요시미츠는 막부를 쿄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두었으므로, 이 아시카가씨의 막부는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 불리운다.
남북조시대에 막부는 슈고(守護)에게 군사․경비권외에 년공의 반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수호는 장원을 지배하고 무사들을 가신으로 삼아 영주가 되었다.
이렇게 영주로 변한 강력한 수호를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 한다.
유력한 슈고다이묘는 관래이(管領)와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이 되었으므로 이 시대의 막부는 수교다이묘의 연합정권과 같았다.
「겐코」이후 원과 정식국교는 없었으나, 무역은 활발하여 상인․승려들이 왕래하였다.
카마쿠라시대말부터 큐슈북부와 세토(瀨戶)내해연안의 무사와 어민들이 중국과 한국의 연안에 진출하여
무역을 하거나 해적이 되었는데, 이들을 중국과 조선에서는 왜구(倭寇)라 불렀다.
명의 왜구단속 요구를 받아들인 요시미츠(義滿)는, 정식무역선에 도항증명서(勘合)를 발행하였는데,
감합은 점차 슈고다이묘 호소가와(細川)․ 오우치(大內)씨가 발행하게 되었다.
1419년 조선은 쓰시마(對馬)를 공격하고, 왜구 금압을 일본측에 요구하는 한편,
쓰시마의 소(宗)씨에게 도항자의 통제와 특허무역을 허락하였으나, 1510년 삼포의 난이후에는 무역은 쇠퇴하였다.
일본은 조선에 염료와 후추등을 수출하고, 목면․대장경등을 수입하였다.
15세기초 상씨가 등장하여 오키나와를 통일하고, 16세기에는 류큐(琉球)왕국이 건설되어,
중국․조선․일본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상선을 파견하여 향료등의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다.
(2) 막부의 쇠퇴와 서민의 대두
무로마치막부초기에는 쇼군과 유력다이묘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6대 쇼군은 슈고다이묘의 통제를 강화한 「만인공포」정치의 실시로 반발을 사서 결국 살해당하고,
막부의 쇼군의 권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8대쇼군 때에 쇼군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슈고다이묘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호소가와(細川)씨와 야마나(山名)씨의 막부내에서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는데,
여기에 쇼군가와 칸래이가의 상속다툼이 겹쳐
1467년(應仁 원년) 44개국 슈고다이묘의 27만 대군이 동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싸웠다.
이를 응인(應仁)의 난(1467-77)이라 한다.
응인의 난 이후 약 100년간 일본전국의 무사들이 싸우는 센코쿠(戰國)시대가 계속되었다.
센코쿠시대에 하극상의 전란 속에서 새로 세력을 확대한 유력영주를 센코코다이묘(戰國大名)라 한다.
센코쿠다이묘에는 이마가와(今川)․타케다(武田)씨등와 같이 슈고다이묘(守護大名)출신도 있었으나,
오다(織田)․ 모리(毛利)씨등 대부분은 다이묘의 가신 출신이었다.
센코쿠다이묘는 강력한 군대와 독자적인 법을 만들어 장원영주를 무시하고 무사․농민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위해, 경지개발, 관개․치수공사, 금은동산의 개발, 상공업자의 보호에 노력하였다.
센코쿠다이묘는 대개 성을 쌓고 부하와 상공업자를 모여 살게 해 도시(城下町)를 만들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마경․우경․비료등이 널리 보급되고, 관개․배수기술의 발달로 이모작이 전국에 확대되었으며,
16세기에는 면화의 재배도 시작되었다.
유력농민 중에서 무사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 이들 지도하에 농민들은 촌마다 자치조직을 만들어 단결을 꾀하였다.
관개용수와 산야의 공동이용을 위한 규약을 정하고, 장원영주나 슈고다이묘와 연공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무사의 침략과 농민의 자립에 의해 장원영주의 지배는 붕괴하고 장원은 유명무실해졌다.
수공업도 각지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수공업자들은 주문생산 뿐만 아니라 시장생산도 하게 되었다.
견직물․도기․술․도검등의 제조기술이 진보하여 각지방의 특산품이 생겨났으며,
전문적인 직인도 많아져 이들의 동업조합도 발달하였다.
교통의 요지에는 상품거래 중개상이 생겨났으며, 운송업자들이 활약하였다.
수상교통도 발달하여 정기선(廻船)이 있었다.
물자의 유통도 활발해져 무로마치시대 중기이후 정기시는 5일마다 열리게 되었다.
송․원․명의 중국화폐와 과거의 일본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연공도 전납으로 변하고,
토지의 매매에도 화폐가 사용되었으며, 어음도 사용되었다.
화폐경제의 진전은 금융업자․고리대금업자를 부유하게 하였으나,
무사와 농민은 빚때문에 토지를 파는 사람들이 생겼다.
촌과 도시(町)의 자치가 발달하면서 연공감액․부채탕감등을 요구하는 무사․농민․종교단체등의 집단행동이 일어나,
막부와 슈고다이묘가 지배하는 사회를 동요시켰다.
(3) 무로마치(室町)문화
무로마치시대의 문화는 무가세력과 민중의 대두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성격은 카마쿠라시대의 무가문화에 선종을 매개로 하여 전해진 중국문화의 영향이 더해진 것이었다.
3대쇼군이 쿄토의 키타야마(北山)에 세운 킨카쿠(金閣)는
귀족적인 신덴즈쿠리(寢殿造)양식과 선종사원의 양식을 채용한 건물로,
이를 대표로 하는 무로마치초기의 문화를 카타야마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임제종이 막부의 보호로 번영하였고, 선종의 영향으로 수묵화가 유행하고
선종 경전 및 한시문집의 출판이 이루어졌다.
또한 가무연극인 노(能)의 전문예능집단이 등장하여 막부의 보호로 발전하였다.
8대쇼군이 쿄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는 선종사원양식을 무사의 주거양식에 도입한 것으로,
이것으로 대표되는 무로마치 후기의 문화를 히가시야마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응신의 난으로 지방으로 피난간 공가와 승려들에 의해 쿄토문화가 지방에 파급되었으며,
상공업자나 농민중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다.
무로마치시대문화의 특징은 무사와 귀족뿐만 아니라 민중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복수의 사람들이 와카(和歌)를 계속 이어 간 랜가(連歌)라든가,
노(能)의 막간에 상연되었던 쿄겐(狂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었던 봉오도리(盆踊り)등이 그것이다.
또한 이 시대문화에는 다다미․후스마․토코노마 등 일본식 건축과 다도․화도(花道)등의 전통문화에서,
오늘날 일본 생활문화의 원류가 많다.
카마쿠라시대의 신불교도 무사․농민․상공업자들의 신앙에 의해 도시와 농촌에 퍼져 더욱 교세를 확장하였다.
센코쿠(戰國)시대에는 유력한 다이묘들의 죠카마치(城下町)를 중심으로 각지에 문화의 중심이 생겨났다.
유학이 다이묘들의 필수학문이 되었고, 무사자제는 주로 사원에서 교육받았는데,
특히 우에스기(上杉)씨의 아시카가(足利)학교는 전국의 선승과 무사들이 모여들었던 학교로,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도시의 부유한 상공업자나 촌락의 유력자들도 읽고 쓰고 계산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다.
Ⅲ. 近 世
1. 막번(幕藩)체제의 확립
(1) 쇼쿠호(織豊)정권
1543년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포루투갈인이 대포를 전래한 후 포루투갈과 에스파니아의 상선이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였다.
또한 1549년 예수회의 선교사 사비에르를 시초로, 많은 선교사가 일본에서 포교․교육․의료활동을 하여,
신자의 수는 급증하였다.
대포의 전래로 보병 대포부대가 활약하게 되면서,
통일사업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이어진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막부를 멸망시키고, 오우미(近江)의 아즈치(安土)성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통일에 힘썼으나, 부하장수의 배반으로 1582년 자살하였다.
오다의 부하 토요토미는 1583년 오다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하고, 오사카(大坂)성을 축성하여 통일의 거점으로 삼아,
1590년에는 전국통일을 완수하였다. 토요토미정권은 토지조사를 통해 경작자를 연공부담자로 정하고,
농민의 무기를 몰수하여 병농분리를 꾀하였다.
한편 대외정책면에서는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고아․루손․대만의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1592년과 1597년에 조선을 침략하였다.
오다․토요토미시대의 문화는, 신흥다이묘․거상(巨商)들의 기풍을 반영하여 호화롭고 웅장하며 현세적․향락적이었다.
특히 성곽건축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대부터 사탕과 간장이 사용되었고
1일 3회의 식사와 간식이 일반적이 되었으나, 서민들은 여전히 잡곡을 주식으로 하였다.
(2)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성립
히데요시의 사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싸움에서 승리하여 전국지배권을 확립한다.
이에야스는 1603년에는 세이다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에도막부를 열고,
1615년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토요토미씨를 멸망시킨다.
과거의 어떤 무가정권보다도 강력하였던 에도막부는 260여년간 계속된다.
에도막부는 쇼군 밑에 로츄(老中)이하의 관직을 두어 쇼군의 부하무사를 임명하였다.
쇼군의 부하무사는 다이묘(大名)와 하타모토(旗本), 고케닌(御家人)으로 나뉘어,
다이묘는 쇼군으로부터 1만석이상의 영지를 수여받은 무사로, 그 영지를 번(藩)이라 했다.
하타모토과 고케닌은 1만석미만의 영지를 받은 쇼군직속의 2만수천명정도의 가신으로 막부 군사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특히 하타모토는 쇼군을 알현할 수 있었다.
에도막부의 쇼군은 다이묘의 영지내(藩)의 정치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으나,
막부에 대한 반란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여, 다이묘는 처자를 에도에 두고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왕복하면서 살게 하였다.
이 왕복비용과 에도 생활비용 및 막부의 토목공사등의 부담으로 번(藩)의 재정은 궁핍해졌다.
에도시대에 쇼군(將軍)과 다이묘의 영주권에 의해 토지․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체제라 하는데,
이는 농민이 부담하는 연공과 부역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
막부의 경제력은 약 400만석의 직할지(天領)의 연공과 직할도시의 영업세, 주요광산과 도로, 화폐의 주조권등에 있었다.
에도막부는 사농공상․천민으로 나뉜 엄격한 신분제도를 확립하여, 집안대대로 전해온 직업과 가부장의 절대권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막부는 사원을 민중지배에 이용하기 위해, 혼인․여행․취직에 필요한 증서를 절에서 발부하게 하였다.
무사도라는 엄격한 도덕을 요구받았던 무사는, 성의 경비와 영지내의 행정을 맡아보고 봉록으로 토지나 쌀․화폐를 받았으나,
상급무사를 제외하고는 생활에 여유가 없었다.
전 인구의 80%이상이었던 농민은 수확량의 40%-50%의 연공을 바쳐서 무사의 생활을 지탱하였다.
농민은 전답의 매매․분할상속금지, 일상생활등에서 규제를 받고 있었다.
농민에는 자작농과 소작농의 신분계층이 있어, 자작농은 연공․잡세․노역등을 부담하였고,
유력한 자작농은 관리로 촌의 운영에 참가하였다.
(3) 쇄국정책
이에야스는 무역 이익때문에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상선의 내항을 환영하고 크리스트교 포교도 묵인하였으며,
무역선에는 도항허가증(朱印狀)을 주어 보호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신자가 70만명이나 되자, 막부는 이 종교의 인간평등사상과,
부유한 다이묘의 등장에 대해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영국․네델란드가 일본무역 독점을 위해,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영토확장 야심을 막부에 알리자,
막부는 포교를 금지시키고 무역을 단속하였다.
선교사나 신자는 국외에 추방되든가 처형당하였으며, 무역항은 히라토(平戶)와 나가사키(長崎)로 제한되고,
스페인선의 내항은 금지되었다.
또한 일본인의 해외도항과 해외 거주 일본인의 귀국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트교 신자 중심의 시마바라(島原)의 난을 진압한 막부는,
모든 사람들을 절의 신자로 등록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고 1639년 포루투갈선의 내항을 금지한 쇄국령을 발표한다.
이로서 네델란드․명․조선을 제외한 외국과의 통교는 금지되어 이후 200여년간의 쇄국체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무역항 나가사키에서 네델란드․중국과의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이에야스때 국교를 수복한 조선과는 쓰시마의 소(宗)씨를 통해 외교․ 무역이 이루어졌고
쇼군의 교체시마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또한 1년에 한번씩 내항하는 네델란드상선이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막부는 외국의 동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분적인 쇄국정책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서 막번체제가 안정되고 국민문화도 형성되어 갔으나, 세계정세에 뒤지게 되었다.
2. 막번체제의 전개
(1) 막정의 안정과 경제의 발전
3대쇼군때까지는 무단정치였으나, 4대쇼군때부터는 세상이 안정되면서 문치정치로 이행해간다.
4대쇼군 이에츠나(家綱)는 다이묘의 교체를 완화하였고, 순사(殉死)와 인질(人質)을 금지하고,
치수관개․식산흥업․문교진흥등의 번정쇄신을 장려하여 17세기후반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였다.
5대쇼군 츠나요시(綱吉)도 주자학과 불교를 장려하였으나 방만한 운영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6, 7대쇼군때에는 유학자 아라이 학세키(新井白石)가 등용되어 문치정치의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正德의 治) 아라이는 재정악화를 막기 위해 조선사절 접대비를 절약하고 무역액을 제한하여 금은유출을 방지하려 하였다.
또한 번(藩)의 재정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무사의 봉록을 삭감하도록 하여 무사층의 불만을 사게 된다.
상인들은 신전개발․양조업․수공업등으로 축재하는 반면, 농촌에서는 자작농이 몰락하고 기생지주가 성장하였다.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는 정치쇄신과 재정재건을 위해 검약령․다이묘의 쌀 헌납․연공증액․신전개발․식산흥업․쌀값조절등의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쿄호(享保) 개혁이라 한다.
이 결과 막부재정은 회복하였으나, 농민의 궁핍화현상이 심해져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2) 경제발전과 쵸닌의 대두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막부와 번은 재정의 기초가 되는 농업수입의 증가를 꾀하였다.
신전개발로 18세기초에는 16세기의 2배정도로 전답이 늘어났으며, 농서의 보급으로 농업생산에 발전이 있었다.
18세기에 농촌에서도 화폐가 사용되자 농민들은 뽕․마․면화․유채․야채․담배등의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도시의 시장에서 팔았다.
어업도 발달하여 정어리잡이가 활발하였다.
광업에서도 채광․정련기술의 발달로 금은동의 광산이 번성하였다.
도시직인에 의한 수공업은 15세기부터 16세기에 수입된 기술에 의해 철포․직물․야금등을 중심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농촌에서도 직물․칠기․종이등의 수공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재정수입증대를 위해 산업을 장려한 번에서는 여러 특산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농촌가내공업이 전대제(前貸制)가내공업으로 바뀌었으며,
도시에서도 목면․양조․견직․칠기․도자기․제지등의 각종산업이 발달하였다.
막부는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교통망을 만들었으므로, 5가도등의 가도가 정비되고
숙박시설과 긴급통신(飛脚)제도등이 설치되었다.
대량수송을 담당하였던 것은 해상교통으로, 에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연안항로에는 정기배편이 운항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자 가도에 도시가 발달하였다.
도시 중에서도 에토(江戶)․오사카(大阪)․쿄토(京都)는 3도로 불리면서 중시되었다.
쇼군의 도시 에도는, 18세기초에는 인구 100만이상에 무가인구만도 50만에 달하는 정치의 중심지였다.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이라 불리웠던 물자의 집산지였으며,
쿄토(京都)는 전통적 학예․종교도시로서, 공예산업이 발달하였다.
도시의 쵸닌(町人)은 자가를 소유한 사람과 임대한 사람(地借․店借)로 나뉘어져,
전자는 영업세를 부담하고 도시의 행정에 참가하였다.
(3) 에도전기의 문화
18세기전반까지의 에도시대전기에 오사카(大阪)․쿄토(京都)에서 꽃피었던 쵸닌문화를,
그 절정기의 연호를 따서 겐로쿠(元祿)문화라 한다.
이 문화의 특징은 쵸닌의 현실주의적 경향과 인간미를 표현한 도시적이며 세련된 문화라는 점이다.
쵸닌의 생활과 감정을 반영한 문예가 일어나, 연애와 금전욕등 쵸닌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가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에 의해 창시되었다.
또한 렌가(連歌)로부터 독립한 17자의 하이카이(俳諧)에서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가 예술성 높은 작품을 남겼다.
구송예능 죠루리(淨瑠璃)는 인형극과 결합하였는데,
봉건제하의 인간의 의리와 인정을 묘사한 치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대본이 유명하다.
처음에 무용이 중심이었던 카부키(歌舞伎)도 점차 연극화하여
사카다 토쥬로(坂田藤十郞)․ 이치가와 단쥬로(市川團十郞)와 같은 명배우가 등장하였다.
미술에서도 쵸닌 취향의 장식적인 화풍이 나왔으며, 민중 생활을 소재로 한 우키요에(浮世繪)가 등장하였다.
원래는 육필화였던 우키요에는 대량생산의 목판화로 변하면서 쵸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다.
쵸닌이 부유해지면서 도시의 풍속은 화려해져, 화려한 비단 의복이 유행하였다.
식생활에서도 1일 3식이 확대되고 도시에서는 쌀밥을 먹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면직물 의복을 입고 잡곡․ 면류를 먹었으며, 기와사용도 금지되었다.
이 시기에 사원에서는 장례식과 재일행사․불상공개와 복권판매등으로 세속화가 일어났으며,
서민들 사이에서는 사원과 신사순례가 유행하였다.
3. 막번체제의 동요
(1) 막부․제번의 정치개혁
18세기후반이 되자 전국적으로 교통이 발달하고 화폐가 통일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활발한 화폐 유통으로 부를 축적한 금융업자들 중에는 막부나 번의 어용상인으로서
다이묘를 능가하는 재력을 가졌던 미츠이(三井)․코오노이케(鴻池)․수미토모(住友)등의 대상인도 있었다.
오사카나 에도등의 상공업자들은 동업자조합을 만들어,
막부로부터 영업독점권을 얻어 상품가격등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남겼다.
한편 사치스러운 생활로 지출이 늘어난 쇼군과 다이묘는 금융업자로부터 부채를 지게 되었다.
18세기후반 10대쇼군 이에하루(家治)시대의 막부실권자 로츄(老中) 타누마 오키츠구(田沼意次)는
막부의 재정재건을 위해 상품경제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동․철을 전매하고 상공업자조합을 인정하는 대신 세를 납입하게 하고 나가사키 무역을 장려하여 재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의 힘이 커지면서, 뇌물이 횡행하고 정치기강이 문란해졌다.
기근도 겹쳐 농민반란과 약탈이 빈발하여 이에하루의 사후 타누마는 실각하게 되었다.
타누마의 실각 후에 11대 쇼군 이에나리(家齊)를 보좌한 로츄 마츠타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농촌부흥을 위해 농민을 귀향시키고 부업․곡식비축등을 장려하였다.
또한 무사들의 빚을 탕감하고 검약을 장려하는 한편, 주자학이외의 학문을 금지하고 출판을 통제하였다.
이를 칸세이((寬政)개혁(1787-93)이라 하는데,
이 개혁은 당시의 실정에 맞지 않아 반발을 사게 되어 마츠타이라는 해임당한다
번에서도 18세기중엽부터 재정난 타개를 위해 특산물장려, 전매제실시(50여번에서 70품목이상), 번학설립등의 개혁을 하였으나
대부분은 실패하였다.
(2) 막부의 쇠퇴
18세기말 구미제국의 배가 일본연해에 나타나 막부를 불안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락스만(1792)․래자노프(1804)등의 사절을 보내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막부는 거절하고 북방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1808년 페튼호가 나가사키(長崎)에 침입한 이후 영국의 배도 일본근해에 출몰하게 된다.
이에 막부는 1825년 외국선의 일본열도 접근을 막는 명령(異國船打拂令)을 발표하였다.
1837년에는 미국의 모리슨호의 통상요구를 거절하였다.
19세기초 막부와 제번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1830년대에는 각지에서 천재와 기근이 계속되어 농민들의 반란과 약탈이 빈발하였다.
1837년에는 양명학자이며 막부관리였던 오오시오 헤하치로(大鹽平八朗)가 오사카에서 빈민구제를 위해 무장봉기하였다.
이 시대의 국내외 정세는 긴박했으나 쇼군 이에나리는 방만한 정치운영으로 정치의 부패만 가져왔다.
1841년 이에나리의 사후 실권을 장악한 로츄 미즈노 쿠니타다(水野忠邦)는 정치개혁을 하였다(天保改革).
검약령을 내리고 풍속을 단속하였으며,
농민들을 농촌에 돌려보냈고 영업을 독점하던 동업자조합을 해산하여 상품유통을 장악하였다.
또한 막부직할지를 늘려 재정수입을 늘이려 하였으나 다이묘들의 반대에 부딪쳐 2년여만에 실각하였다.
막부의 쇠퇴와는 달리 이 즈음 개혁을 하여 성공한 번도 등장하였다.
사츠마(薩摩)번과 쵸슈(長州)번은 재능있는 하급무사를 중용하여 재정난타개와 군제의 개혁을 하였다.
또한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도시와 농촌의 가공업도 발전하여 19세기에는 공장제수공업이 면직물과 견직물에서 등장하였으며,
막부말기에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한 공장이 제철과 조선등의 분야에서 등장하였다.
(3) 에도후기의 문화
18세기후반이후의 에도후기에는 문화의 중심이 에도로 옮겨져,
특히 19세기초를 정점으로 쵸닌문화가 더욱 성숙하였다.
쵸닌문화는 도시서민과 농촌에까지 파급되었는데, 사회의 동요를 반영하여 퇴폐적․향락적이고 사치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문․사상분야에서 과학적인 사고 방식과 비판적 정신이 눈떠 근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움직임도 보였다.
에도후기에는 교육이 널리 서민층에게까지 보급되었다.
번에는 무사자제를 가르치는 번학과 민중교육을 담당한 향학(鄕學)이 있었다.
그밖에 오사카의 쵸닌이 설립한 회덕당(懷德堂)과 같은 사립 서민교육기관도 있었으나,
가장 일반적인 서민교육은 절의 테라코야(寺子屋)에서 이루어졌다.
이시다 바이안(石田梅岩)이 유교도덕을 평이하게 설명한 심학(心學)은
정직․근면․이윤추구의 정당성등 상업을 긍정하였으므로 쵸닌층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세상을 풍자한 17자의 센류(川柳)와, 31자의 쿄카(狂歌)가 유행하였다.
소설에는 유곽의 쵸닌들의 대화, 서민생활을 코믹하게 묘사한 것, 연애소설과 교훈적 이야기책등이 있었다.
카부키의 양식이 완성되었고, 우키요에(浮世繪)는 아름다운 판화로 제작되어 후에 프랑스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키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 )․카츠시카 혹사이(葛飾北齋)․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등이 유명하다.
문자를 아는 서민이 많아지자 세상 소식지(瓦版)가 널리 읽혔다.
서민의 오락장으로는 공중탕․이발소․극장등이 있었으며, 신사의 제사나 사원의 재일(齋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또한 친목모임(講)을 만들어 절과 신사등을 순례하였는데, 1830년 이세진구(伊勢神宮) 참배자는 약 400만인이었다고 한다.
18세기중엽경 ꡔ고지키(古事記)ꡕ나 ꡔ만요슈(萬葉集)ꡕ등의 일본고전을 통해 일본문화와 민족정신을 연구하는 학문이 활발해진다.
이를 「코쿠가쿠(國學)」라 하는데, 지방의 부농과 쵸닌들 사이에서 천황을 숭배하는 존왕사상으로 발전하여,
막부말기에는 막부를 비판하는 정치사상이 되었다.
또한 18세기 중엽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는 무사가 농민을 수탈하는 봉건제 사회를 비판하였는데,
19세기에는 봉건제의 개량을 통해 중상부국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쇄국하에서 유럽의 말이나 지식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쇼군․로츄․나가사키의 통역뿐이었으나,
8대 쇼군 요시무네때 크리스트교와 관계없는 한역양서의 수입을 허락하여, 18세기에는 양서연구가 활발하게 되었다.
네델란드어본 해부서가 번역되었으며, 네델란드어사전도 만들어졌다.
네델란드어를 통한 서양학문연구를 「란가쿠(蘭學)」라 하는데,
이로서 의학․생물학․지리학․병학등 근대적인 학문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1823년 나가사키의 네델란드 상관 의사였던 독일인 시볼트는 사숙을 열어 많은 난학자를 양성하였다.
19세기 전반 막부는 쇄국정책을 비난하는 학자들을 탄압하는 한편(1839년 蠻社의 獄),
네델란드서적의 번역을 담당하는 관청을 두고,
페리제독의 내항이후에는 외교문서 번역을 위해 양학연구기관 겸 외교문서 번역소(蕃書調所)를 설치하였다.
Ⅳ. 近代文化의 形成과 發展
1. 서구문화의 수입과 메이지유신
(1) 개국과 막말의 동란
1840년대에 청이 영국에 패배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이 완화되던 중,
1853년 6월과 1854년 1월 두차례에 걸쳐 미국동인도함대사령관 페리제독이 내항하여 함대의 위력을 배경으로
막부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하자, 막부는 이 문제를 천황 조정과 다이묘들과 의논하였다.
당시 여론은 개국반대의 양이(攘夷)론이 우세하였으나,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막부는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어 시모다(下田)․하코다테(箱館)의 개항과
미국대표의 일본주재를 인정하였다.
이어 영국․러시아․네델란드등과도 같은 조약을 맺어 일본의 쇄국체제는 끝나게 되었다.
1856년에 총영사로 부임한 해리스는 중국정세를 막부에 설명하여, 1858년 6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은 영사재판권이 인정되고 일본에게는 관세자주권이 없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막부는 이어서 네델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59년 무역이 개시되어, 생사나 차․금등이 수출되고 모직물․면직물․함선․무기등이 수입되었다.
수출품의 격증과 대량의 금의 유출로 인한 경제의 혼란은 하급무사와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였다.
일부 다이묘와 무사들은 외세를 배격하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론을 주장하였다.
막부의 타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반대파를 처벌하여 막부독재를 강화하였으나,
반대파에 살해되고, 막부는 천황 조정과 결합하여 막부정치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1863년이후 영국등의 함대와 전투를 통해 양이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 사츠마(薩摩)번과 쵸슈번(長州藩)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실권을 잡고 영국과 제휴하여 근대적인 군비를 갖추어, 막부를 타도한 후 천황중심의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막부는 프랑스의 원조로 군사개혁을 추진하고 쵸슈정토를 꾀하였으나,
쵸슈번과 동맹을 맺은 사츠마번은 막부의 출병명령에 불응하였고,
물가 상승으로 전국에서 약탈행위와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막부는 쵸슈정토에 실패하여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867년 10월 막부의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는 천황 밑에서 계속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하였으나,
12월 토막파 번과 천황조정은 막부의 폐지와 신정부의 성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를 공표하였다.
(2) 유신정부의 발족
신정부의 영지반환 요구에 반발한 막부측은 1868년 1월 쿄토를 공격하였으나,
사츠마번과 쵸슈번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군은 1869년까지 구막부군을 모두 항복시켰다. 이 싸움을 무진(戊辰)전쟁이라한다.
무진전쟁이 계속되던 1868년 3월 메이지(明治)천황은
천황친정(親政)과 여론의 존중̶
- 네이트 지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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