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2) - 제나라 환공과 관중

2014. 11. 17. 17:05우리 이웃의 역사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2)

글로벌/사기 2014/08/04 07:00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
        (2) 춘추 시대 정치의 출발 – 제나라 환공과 관중 


문리스 (남산 강학원)

 

 

3. 여동생을 사랑한 오빠 제양공(齊襄公)

 

   노은공(魯隱公)에 이어 군주의 자리에 오른 노환공 윤(允)에게는 제나라에서 시집온 문강(文姜)이란 부인이 있었다. 문강은 제나라 희공의 딸이자, 양공(襄公)의 배 다른 누이동생이며, 춘추 시대의 첫번째 패주(覇主)가 되는 제환공(齊桓公)의 배 다른 누이이기도 했다. 문강은 제희공 때 노나라 환공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문강은 배다른 오빠(제양공)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는 사이였다. 문강의 결혼과 함께 헤어졌던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재회했다. 재위 18년째에 접어든 노환공이 어느날 갑자기 부인 문강과 함께 부인의 나라인 제나라를 방문하게 되었던 것. 제양공과 노부인(문강)은 다시 정을 통했고, 급기야 노환공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불같이 화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사로이 정을 통한 배 다른 남매 제양공과 문강

 

   제양공은 재빨리 노환공을 위한 큰 연회를 베풀고, 노환공이 술에 취한 틈을 이용해 공자 팽생을 시켜 환공의 늑골을 꺾어버렸다. 자신의 이복형 은공(隱公)을 제거하고 군주의 지위에 오른 노환공은 이렇듯 허무하게 이국땅 제나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자칫 커다란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약소국인 노나라는 이 사건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제나라 양공은 이 사건이 천하로 퍼져나가는 것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을 위해 노환공을 제거한 팽생을 배신해 살해한 후 노환공의 죽음을 팽생의 목숨으로 대체시켰다.(※노환공과 제양공, 그리고 팽생에 얽힌 유일무이한 X파일은 남산강학원 홈페이지 ‘토요강학원’ 114번 글 참조^^ / http://kungfus.net/bbs/board.php?bo_table=0403&wr_id=750&page=3). 노환공 사후 노나라는 태자 동(同)이 자리를 이었다. 이 사람이 노나라 장공(莊公)이다.
   한편 제나라 양공은 대신들을 자주 속이고 여자들에게 음란한 짓을 하는 등 행적이 좋지 않아, 끝내 사촌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공손무지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하게 되면서 제나라는 권력을 둘러싼 한 차례 큰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과거 제양공이 문강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면서 노나라 환공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제양공의 여러 동생들은 이 문제가 자신들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을 염려해 이웃 나라들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예컨대 제양공의 배다른 동생인 둘째 왕자 규(糾)는 노나라에 몸을 숨겼고, 그 다음 동생인 왕자 소백(小白)은 거(莒)나라로 피신중이었다. 그러던 중 제양공의 피살과 공손무지의 어이없는 죽음을 계기로, 이 두 왕자는 제나라 최고 권력 자리를 놓고 싸울 수밖에 없는 정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대결을 통해 춘추 시대 최초의 패권 군주라 일컬어지는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등장한다. 거나라로 피신해 있던 왕자 소백이 바로 제환공이었던 것.

 


4. 찰나멸의 역사 – 관중을 둘러싼 제환공과 노장공의 선택

 

    제환공 소백의 권력 획득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자.
   소백의 어머니는 위나라 군주의 딸이었다. 한편 둘째 왕자인 규의 어머니는 노나라 출신이었다. 그러니까 제양공을 포함해서 왕자 규, 왕자 소백, 공주 문강 등은 모두 제희공의 배다른 형제들이었던 셈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게 그렇다. 멀리서보면 대의(大義)라거나 명분(名分) 등이 근사하게 정권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운 곳에서 보면 대의나 명분을 지켜야할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는 불편한 진실. 동아시아 정치 권력이 고대 요(堯)-순(舜)-우(禹)임금에게서 보듯 아름다운 선양(善讓)의 전통 위에 있다는 설정은 이념적으로는 그럴듯한 소리일지 모르나 현실에서는 한 번도 실현되지 못했다는 사실. 정치 권력 관계에서 가장 강력한 적대자가 이웃 나라의 정복 군주이기 이전에 자기 나라의 2인자 혹은 잠재적 야심가들이었다는 사실은 『사기』 전편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해볼 수 있다.

 

 

 

결국 제나라 권력을 획득한 소백(제환공)

 

   다시 제나라로.
   제양공을 살해한 공손무지까지 허무하게 살해당함으로써, 제나라의 최고 권력 자리는 졸지에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힘의 공백 시기가 결코 오래갈 리는 없었다. 문제는 잠재적 대권 도전자들이 모두 망명중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누구든 먼저 귀국해서 조직을 장악한다면 대의와 명분은 철저히 그 현실적 힘을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컨대 제나라는 한 바탕 큰 파란이 예고된 폭풍 전야의 상황이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세력은 노나라의 후원을 받고 있던 둘째 왕자 규와 거나라로 피해 있던 왕자 소백이었다. 규는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이 돕고 있었고, 소백에게는 포숙(鮑叔)이 있었다. 관중과 포숙은 그 유명한 관포지교(管鮑之交) 고사의 주인공들인데, 최고 우정의 대명사인 이 둘이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주군을 섬기는 사이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관중과 포숙의 우정에 관해서는 훗날을 기약한다)

 

 

 

관포지교의 두 주인공, 관중과 포숙

 

   어쨌든 먼저 작전을 구사한 쪽은 관중이 속한 규(糾)라인이었다. 관중은 노나라의 군사를 지원받아 제나라와 거나라가 통하는 길을 막았다. 나아가 관중은 이동중인 소백(제환공)을 향해 활을 쏘아 쓰러뜨렸다. 하지만 천운은 소백에게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화살이 허리띠의 쇠 부분에 맞았던 것. 이 사건을 틈 타 소백은 사망한 것처럼 위장을 했고, 소백이 죽은 것으로 오인한 관중과 공자 규 일행은 느긋하게 제나라로 입성했다. 하지만 규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소백이 제나라 안에 있던 대부 고혜의 도움으로 임금으로 옹립된 상태였으니,  이 사람이 바로 춘추 시대의 첫 번째 패자 제환공이다.

 

 

 

소백에게 활을 쏘는 관중

 


   제환공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공자 규와 관중 등이 거느리고 온 노나라 군대를 막았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규와 관중‧소홀 등은 노나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환공 소백은 노나라에 편지를 보내 이렇게 선전포고했다.

 

“공자 규(糾)는 나와 같은 형제인지라 차마 내 손으로 주살할 수 없으니 노나라 제후께서 직접 그를 죽여 달라. 또한 소홀과 관중은 나의 원수이니 그들은 반드시 내 손으로 직접 젓갈로 담그는 형벌에 처해 마음을 달래려 하니, 산 채로 보내 달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제나라는 노나라를 공격하겠다.”

(<제태공세가>)

 

   당시 노나라 군주는 제양공에게 비명횡사 당한 노환공의 아들 노장공(魯莊公)이었다. 다급해진 노나라는 공자 규를 살해했다. 그리고 관중과 소홀을 생포하여 제나라로 보내고자 했지만 소홀은 이 과정에서 자살해버렸다. 그렇다면 관중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밀었던 대권 주자가 경쟁력을 잃고 심지어 재기불능의 상황이 되어 버린다면 당연히 그를 따르던 세력들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더불어 장렬히 저항하다 전사(戰死), 같은 모습이라면 깔끔하고 강렬하기라도 할지 모른다. 아니면 자결? 그랬기에 제나라 왕자 규가 소백(제환공)과의 정쟁에서 패배하고 마침내 노나라에서 살해되었을 때, 규와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 이 경우 자결은 최소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그 밖에 다른 길이 없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정적에 의해 더 비참히 죽게 되는 일일 테니깐.)

   하지만 『사기』를 읽다보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죽음들이 나온다. 읽다보면 무덤덤해지기도 하지만, 종종 어떤 죽음들에는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뭘 이정도로 죽기까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최소한 아직은 춘추시대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이천 수백년 전에는 삶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 달라도 참 많이 달랐을 것이란 생각. 어떤 의미에선 이천 수백년 전이 오히려 삶의 양식들에 있어서는 지금보다 더 다양했으며, 비록 매끈하게 길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적극적으로 원하는 한 다른 삶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시대였을 수 있다는 생각. 하여 그곳을 이해하려면 돌연사와 우연사 혹은 자살까지도 자연스런 삶의 한 형식으로 포괄해야만 겨우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야성은 문명에 대하여 미개하다는 뜻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음 혹은 이질적인 삶의 가능성에 대한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소홀과 관중의 선택은 당연히 대조적이다. 규가 살해당하고, 소홀이 자살하자, 관중은 일단 감옥행을 선택했다. 누가 봐도 소홀의 자살이 당연해보이고, 관중의 선택은 비겁한 기회주의적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환공은 관중을 등용함으로써 바닷가의 보잘 것 없는 제나라를 춘추 시대 최고의 국가로 만드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춘추 시대 첫 번째 패주(覇主)가 되었다. 반면 제환공의 겁박에 제환공의 라이벌 규를 살해했던 노나라 장공과 더불어 노나라의 운명은 더욱 사그라든다. 공자가 자신의 고국 노나라의 근심거리로 여겼던 삼환(三宦) 세력이 바로 이 장공대로부터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일단 관중을 둘러싼 제나라와 노나라, 제환공과 노장공의 이야기를 마무리해보자.

 

 

“신이 다행히 주군을 모시게 되었는데 주군께서는 결국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주군께서는 높이 되셨기에 신으로서는 주군을 더 높여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장차 제나라를 다스리려고 한다면 고혜와 저 포숙아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군께서 패왕이 되려고 하신다면 장차 관이오(관중)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관이오가 그 나라에 머물면 그 나라는 강성해질 것이니, 놓치면 안 됩니다.”

(<제태공세가>)

 

   제나라 통수권을 장악한 후, 처음에 제환공은 라이벌 규는 물론 관중과 소홀 모두 참형에 처하려고 마음먹었다. 천만다행으로 쇠로 된 허리띠에 맞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위치가 틀어졌어도 관중의 화살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뻔 했다는 걸 생각하면, 관중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던 제환공이었다. 하지만 포숙은 절대적으로 관중을 살려내어 제나라에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환공이 한 나라의 주군으로서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하는 첫 번째 시험대에 오른 순간이었다. 결과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러니 앞에서 인용했던 관중에 대한 제환공의 적개심, 즉 자신이 직접 관중을 산 채로 젓갈로 만들겠다는 표현은 정치적 수사였던 셈이다. 관중을 산 채로 생환시키기 위한.

 

 

 

포숙아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는 관중


   그런데 바로 이 순간, 관중을 포로로 잡고 있었던 노나라의 장공은 대부 시백(施伯)에게 다음과 같은 제언을 받았다.

 

“제나라가 관중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그를 등용하려는 것인데, 그를 등용하게 되면 노나라의 우환이 됩니다. 산 채로 관중을 넘겨주는 것보다 관중을 죽여서 시체를 제나라에게 넘겨주는 것이 노나라에게 낫습니다.”

(<노주공 세가>)

 

 

   제환공 원년, 그리고 노장공 9년 때의 일이다. 이 한 순간의 선택으로 관중의 운명이, 아니 동아시아 고대 사회의 운명이 바뀌었다. 만일 노장공이 이때 관중을 제거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것은 물론 부질없는 상상이다. 하지만 이 순간의 선택이 작게는 노장공과 제환공의 운명을, 크게는 중국 춘추 시대의 물줄기를 바꾸었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정신이 번쩍 드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란 단지 지나가버린 과거 사건들에 대한 복기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누구나, 수많은 역사적 시공간 및 인연들에 뒤엉킨 찰나멸의 순간들을 통과할 뿐일 테니깐.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나 매순간 환원불가능한 유일한 우주를 펼치고 있다는.

 


 

moving-vision.tistory.com/473   Moving Vision Quest   자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