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1) - 노나라 三宦세력의 기원

2014. 11. 17. 16:57우리 이웃의 역사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


        (1) 도덕과 정치 - 노(魯)나라 삼환(三宦) 세력의 기원 

 

 

 

문리스 (남산 강학원)

 


1. 명실이 상부하지 않는 춘추 시대

 

계강자(季康子)가 공자(孔子)에게 정치(政治)에 관해 물었다. 공자께서 응하여 대답하셨다.

 

정치란 바름(正)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른 길로 이끈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논어』, <안연>

 

  공자(孔子)는 기원전 551년 태어나 기원전 479년 사망했다. 공자는 노(魯)나라 추(鄒)땅 사람이었다. 노나라는 강대국 진(晉)나라와 제(齊)나라와 인접한 약소국이지만, 춘추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나라다. 

 

 

 

노나라 사람, 공자가 본 춘추 시대 이야기

 


   잘 알다시피 노나라는 주(周)나라의 위대한 정치가 주공(周公)의 봉국(封國)으로 시작된 나라다. 비록 주공이 나이 어린 조카 성왕을 보좌해 주나라의 정치를 담당하느라 직접 노나라에 부임하지 못하고 아들 백금으로 뜻을 펴게 하였지만, 노나라는 자신들이 주공의 나라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춘추시대는 대의와 명분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공자가 살던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무렵의 노나라는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 가문이 실권을 나눠 갖는 사실상의 권력 해체의 시기였다. 이들 세가문을 보통 삼환(三宦)이라고 하는데, 삼환 가문은 본래 노나라 장공(壯公)의 형제들이었다.
   삼환 중에서도 공자의 시대에는 특히 계손씨의 세력이 강력했다. 글머리에 인용한 『논어』 <안연>편의 한 대목은 이런 배경 위에서 읽어야 한다. 계강자(季康子)라는 정치 실세와 공자가 나눈 대화라는 사실 하나, 공자의 대답이 갖는 은근하지만 엄중한 경고(!) 둘. 그나마 계강자는 공자에게 이것저것 지혜를 구했고, 공자의 제자들을 자신의 가신으로 기용했으며, 공자 또한 계강자에게는 이러저러한 말들을 꽤 쎄게 충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이미 빠르게 문란해지는 시대였다는 것.
   공자는 계강자에게 정치란 바름을 행하는 데 있다고 충고했다. 무슨 뜻일까. 왜 계씨 집안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는가. 『논어』 <팔일>편에 보면, 노나라 정공이 공자에게 이렇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노나라)정공(定公)이 물었다.

 

 “군주란 신하를 부리는 사람이고, 신하는 군주를 섬기는 사람이오. 내 말이 어떻소?”

 

공자께서 응하여 말씀하셨다.

 

“군주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것이고, 신하는 마음을 다해 군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논어』, <팔일>)

 

  노나라 정공(定公)은 형인 소공(昭公)에 이어 노나라의 군주가 된 인물이다. 소공은 삼환 세력과 전쟁을 벌이다 패해 제나라로 피했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물론 소공 자체도 인물이 그다지 변변했던 것은 아니다.)
   정공은 소공의 동생으로 소공을 이어 임금이 되었지만 이미 삼환씨에게 넘어간 권력을 되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정공이 공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넬 때 그 말은 질문이라기보단 하나의 하소연이고 푸념이었을 것이다. ‘공자 당신이 맨날 강조하는 그 명분과 질서라는 것. 그 말대로라면 지금 우리 노나라의 상황은 잘못된 것 아니오?’라는 것. 군주와 신하, 이들의 이름(名)과 실제(實)가 서로 대응하지 않는 시대. 한 마디로 춘추시대란 그런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명실이 상부하지 않게 된 시대.

 


2. 며느리를 사랑한 시아버지 노혜공

 

   삼환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공자가 태어난 기원전 551년은 노나라 양공 재위 22년째의 해이다. 양공으로부터 소공-정공-애공-도공으로 이어지며 노나라를 결국 망국의 길로 나아간다. 한편 양공의 선왕으로는 선공-성공-문공-희공-장공-환공-은공-혜공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환의 기원을 보기 위해서는 혜공 시절까지 거슬러 가야한다.

혜공-은공-환공-장공-희공-문공-성공-선공-양공-소공-정공-애공-도공 …

   노나라 혜공(惠公)은 46년간 재위했을 만큼 나름 안정적인 권력을 누린 임금이었다. 하지만 긴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혜공은 본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다. 대신 계급이 낮은 첩 성자(聲子)에게서 식(息)이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이 인물이 노 은공(隱公)이다.
   사실 노은공 식과 노혜공 사이에는 구원(舊怨)이 있었다. 일찍이 식이 성년이 되었을 때, 노나라는 송(宋)나라에서 식의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 그런데 막상 송나라에서 온 여자가 매우 아름다웠다. 이를 본 혜공은 송나라 여인을 빼앗아 자기 부인으로 삼고, 아들 윤(允)을 낳았을 뿐 아니라, 끝내 윤을 태자로 삼았다. 혜공이 죽었을 때, 태자인 윤이 너무 나이가 어려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섭정을 요구했다. 노 은공 식은 이런 배경에서 이복 동생이자, 어쩌면 자신의 부인이 되었을지도 모른 송나라 여인의 아들 윤을 대신해 노나라를 섭정하게 된다.
   사실 송나라 여인을 둘러싸고 노혜공과 노은공 사이에 벌어진 사건은 진실 여부가 불명확하다.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좌전』에 따르면 송나라 여인과 노혜공의 결혼은 정상적인 관계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편의상 혜공과 송나라 여인과의 관계를 며느리-시아버지 관계로 보는 『사기』의 관점을 택했지만, 이 외에도 『사기』 안에는 이와 같은 ‘잘못된 관계’로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일례로 며느리-시아버지 이야기는 위(衛)나라 선공과 초(楚)나라 평왕에서도 발견된다. 위나라는 이 일로 인해 끝내 태자가 살해되며 위나라가 기우는 계기가 되었고, 초나라 평왕은 그 유명한 오자서의 복수 이야기로 귀결된다.

 

 

 

 

초나라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한 오자서

 


   문제는 그것이 선의였든 혹은 아니었든, 혹은 은공 식과 장공 윤의 인품이나 본마음이 어떠했든간에, 이 둘의 관계는 끝내 한 사람 밖에는 허락될 수 없는 최고 권력에 대한 경쟁의 관계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한 번 비틀리고 꼬인 관계로부터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마침내 노나라는 삼환에게 국정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노은공 11년 겨울의 일이다. 노나라 대신인 공자 휘(揮)가 은공에게 아첨하며 식(은공)과 윤(장공) 사이를 이간질했다.

 

백성들이 당신을 받들었기에, 당신께서 마침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을 위해 윤을 죽이려고 하니, 일이 성사되면 저를 재상으로 삼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은공은 생각이 달랐다. 은공 자신은 선왕인 혜공의 명으로 잠시 어린 동생 윤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을 뿐이며, 이제 곧 윤에게 권력을 넘기고 자신을 은퇴해 낙향할 것이라는 것.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휘는 나중에 윤이 권력을 잡게 되면 자신이 위태해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번에는 윤에게 가서 둘 사이를 이간질했다.

 

은공이 왕의 자리를 노리고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은공을 살해할 수 있습니다.

 

 

 

   윤은 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국 은공은 11월 겨울 국가의 제사를 위해 사포(社圃) 동산에서 재계하고 대부 위(蔿)씨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날밤 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윤은 은공이 살해된 이후 왕위에 올랐고, 이 인물이 노환공이다. 노환공은 재위 3년째 되는 해에 제나라에서 부인을 맞았고, 6년째 되는 해에 자신과 생일이 같은 아들을 얻었다.(생일이 같아서 노환공 아들의 이름은 동(同)이다). 하지만 노환공 윤은 흐리멍텅하고 어리바리한 군주였다. 그는 자신을 보살펴준 이복형 노은공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던 것 뿐 아니라, 이웃나라로부터 받은 뇌물을 성스러운 주공의 제사에 올릴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한 노은공

 

moving-vision.tistory.com/473   Moving Vision Quest   자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