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 [ 補閑集 ]

2014. 10. 22. 01:19들꽃다회






       

[휘(諱) 최자(崔滋)]선조님은 (휘)온(溫)-충(충)-유선(惟善)-사제(思齊)-약(약)-윤인(允仁)-민(敏)-자(滋, 8세)로 史學의 한 부분을 장식하신 우리 집안의 직계선조님으로 저서로서는 보한집(補閑集)이 있습니다.

보한집 [ 補閑集 ]

    고려 후기에 최자(崔滋)가 엮은 시화집(詩話集). 3권 1책. 목판본. 초간본은 최자가 서문을 쓴 1254년(고종 41)

경에 간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전해지는 것이 없다. ≪성종실록≫의 기록에 이극돈(李克墩)·이종준(李宗準)

등이 다른 시화류와 함께 간행한 사실이 나와 있다. 이 책도 전하는 것이 없다.

    다음으로 1659년(효종 10)에 엄정구(嚴鼎耉)가 간행한 각본(刻本)이 있고, 활판본으로는 1911년에 조선고서간행

회에서 ≪파한집 破閑集≫ 등과 합철하여 낸 것이 있다. 그 뒤에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보한집≫은 본래 이인로(李仁老)가 엮은 ≪파한집≫을 보충하는 입장에서 저술한 것이다. 그래서 ‘속파한집’

이라고도 하였다.

    최자는 자서(自序)에서 이인로가 고금의 여러 명현의 좋은 문장을 모아서 책으로 엮어 ≪파한집≫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실권자인 최이(崔怡)가 ≪파한집≫이 너무 소략하니 보완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서 산일된 나머지의 그들을 모아 이 책을 만들었다고 편집경위를 밝히고 있다. 최이의 속보(續補)지시는

당시의 문인·문학 우대책의 일환에서 나온 것이다. ≪보한집≫은 양에서 ≪파한집≫의 배가 되고 내용도 더 다채롭다.


   권상에는 고려 태조의 문장을 비롯한 역대의 명신들의 언행과 누정(樓亭)·역원(驛院)을 소재로 한 시 등 52화(話),

권중에는 이인로·이규보 등의 선배 문인들의 일화와 시문평 46화, 권 하에는 21품(品)에 걸친 모범적 시구의 예시와

함께 자신의 시문론과 승려·기생의 작품 등 49화가 수록되어 있다.


    ≪보한집≫은 다른 어느 시화문헌에서보다도 문학론이 풍요하다. 당시 고려의 한시단(漢詩壇)은 소식(蘇軾)을

배우려는 기풍이 지배적이다. 작시법에 있어서는 어묘(語妙)를 중시한 이인로 계열과 신의(新意)를 보다 중시한

이규보(李奎報)계열의 주장이 있었다.


     ≪보한집≫에서는 그 같은 대립적 경향 중에서 사어(辭語)·성률(聲律)의 표현미에 치중한 이인로 쪽보다는

기골(氣骨)과 의경(意境)을 더욱 중시한 이규보 쪽의 입장을 지지, 옹호하고 그의 이론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시문은 기(氣)를 주로 삼는데 기는 성(性)에서 나오고 의(意)는 기에 의지하며, 말은 정(情)에서 나오니 정이 곧

의이다’라고 하여 이규보의 기론을 발전시켜 의(意)를 정(情)으로 풀이하였다.


    ≪보한집≫의 문장은 도(道)의 입문이므로 도에 어긋나는 말은 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

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글의 기(氣)를 살리고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다소 도에 어긋나는 험하고 이상한

표현도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문장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였다. 문장은 기(氣)·골(骨)·의(意)·사 (辭)·체(體) 등의 여러 가지 요소를

구비하였을 때에 훌륭한 문장이 되며 그렇지 못하면 문장의 병폐가 된다고 하였다.


    ≪보한집≫은 시의 품평 기준을 상(上)·차(次)·병(病) 3등급으로 설정하였다. 상에는 신기(新奇 : 새롭고 기이함.)

를 비롯한 10품, 하에는 생졸(生拙 : 설고 서○.) 등 8품으로 34품을 예시하였다.

이와 같이 품격의 우열을 셋으로 구분하여 기상(氣象)이 잘 나타난 작품을 상품으로 평하고, 사어와 성률의 수사기교

가 우수한 시를 버금으로 하고, 그 어느 쪽도 갖추지 못하여 거친 것을 병들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제시는 당나라 종영(鍾嶸)의 시 3품이나 사공도(司空圖)의 24품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비평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보한집≫의 전권에 나타난 평어를 검토하여 보면 ‘청(淸)’자 계열(예 : 淸新, 淸婉, 淸? 등)이 상품의 평어로

가장 많이 쓰였다. 다음으로 ‘정(精)’자 계열, ‘호(豪)’자 계열이 많다.

    기(奇)·장(壯)·화(華)·준(俊)·신(新)·경(警)·고(高)·화(和)·유(幽)·우(優)·주(?)·간(簡)·경(勁)·굉(宏)·웅(雄)·표(飄)·

완(婉)·부(富)·원(圓)·호(浩)·심(深)자 계열도 우수한 시를 일컫는 평어로 쓰이고 있다.

   ≪보한집≫의 병품(病品)은 생(生)·소(疏)·야(野)·졸(拙)·천(淺)·잡(雜)·비(鄙)·미(靡)자 등의 계열을 들고 있다.

≪보한집≫에서는 병품 중에서도 용졸한 것을 가장 낮게 보았다. 그래서 이르기를 용렬한 말과 옹졸한 글귀는 얕고

쉬워 말할 것조차 못된다고 단언하였다.


   ≪보한집≫에서는 시와 그림 양자가 일치한다는 관점을 보였다.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시와 그림은

한가지이다. 상외(象外:속된 것에서 초연한 상태)의 세계까지 포착하는 점에서도 양자는 같다고 하였다.

   ≪보한집≫은 시론이나 시평 외에도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문제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각 문체(文體)의

발달과정과 특징 등을 설명하고 변려문(騈儷文)의 병폐에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시와 문을 나누어 기술하고 시대

순으로 서술하여 약하나마 문학사 기술 의지도 엿볼 수 있다.


    최자는 자기 나름의 시문관과 비평관을 가지고 비평기준과 시품(詩品)을 제시하는 한편, 그에 입각하여 비평을

전개하였다. 그럼으로써 고려시대의 비평문학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당대 최고의 비평가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다만 ≪보한집≫이 ≪파한집≫의 속보(續補)를 표방했지만, 이인로보다도 이규보에게 너무 치우친 평가를 하고

있는 점이 하나의 흠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최자가 이규보의 후광에 크게 힘입어 출세한 것과 관련이 있다.

 

보한집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麗朝詩學硏究」(全鎣大, 『서울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74)
「韓國古典詩品硏究」(李圭虎, 『서울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79)
「崔滋의 評論硏究」(金周漢, 『高麗時代의 言語와 文學』, 螢雪出版社, 1975)
「崔滋의 詩評」(車柱環, 『東亞文化』9, 1970)
「補閑集」
「編纂動機에 대하여」(申用浩, 『圓光漢文學』2, 1985)
「崔滋論」(朴性奎, 『韓國文學作家論』2, 螢雪出版社, 1986)
「崔滋의 補閑集 著述動機」(金塘澤, 『震檀學報』65, 1988)
「高麗中期文學論硏究」(沈浩澤, 『高麗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8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한집 [ 補閑集 ]

저자

최자(崔滋, 1188-1260)

국가

한국

분야

비평

해설자

이화형(경희대 한국어학과 교수)

   ≪보한집≫의 저자인 최자(崔滋, 1188〜1260)는 강종 1년(1212)에 과거에 급제하고 상주(尙州)의 사록(司錄)을

거쳐 종9품에 해당하는 국자감(國子監) 학유(學諭)가 되었다. 그러나 국자감 학유가 된 지 10년이 지났어도, 당시

최충헌(崔忠獻)의 뒤를 이어 실권을 쥔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에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사≫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최이는 조정의 선비의 등급을 매김에, 학문이나 문장에 능하면서 관리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자를 제일로, 학문이나

문장은 능하지만 실무 능력이 떨어지는 자를 둘째로, 실무에는 능하나 문에는 능하지 못한 자를 셋째로, 문과 실무에

모두 능하지 못한 자를 최하로 삼아, 전부 자기 손으로 병풍에 써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참고해 차례로 등용했는데,

최자의 이름이 하등에 있어 10년이 지났어도 승진하지 못했다.

   이러한 최자가 다행히 <우미인초가(虞美人草歌)>와 <수정배시(水精杯詩)>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가

이규보(李奎報)의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마침 집권자 최이가 문병(文柄)을 맡을 사람을 묻자, 이규보가

최자를 제일인자로 천거했던 것이다. 추천받은 사람들 간의 시험에서 다섯 번 장원을 하고, 다섯 번 차석을 했으며,

이어 실무 능력 시험을 위해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에 임명되었는데, 민첩하고 근면하게 업무를 처리해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일거에 문에도 능력이 있고 일에도 능력이 있는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인물로 바뀌는 전기를

맞았다.

    최자의 사회 진출에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그의 처(妻)가 임효순(任孝順)의 딸이었다는 점이다. 정안(定安)

임씨는 고려 전기로부터 대표적 귀족 가문의 하나였으며 무신의 난 이후에 더욱 가세(家勢)를 떨친 집안이다.

임효순은 수상(首相)을 지낸 임원애(任元敱)의 손자요, 평장사를 지낸 임유(任濡)의 아들이었으며, 자신은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까지 올랐고, 또 최충헌의 딸을 아내로 맞았던 사람이다. 최자는 임효순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안 임씨와는 물론 최충헌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최자가 무인 정권 아래서 크게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과 함께 이규보와의 만남이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이러한 인척 관계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는 최자를 이인로(李仁老)ㆍ이규보ㆍ임춘(林椿)과 나란히

‘문장에 더욱 뛰어난 자’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최자의 문학적 역량, 그리고 명문가 출신에다 문명을 날렸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방대한 양의 시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실제 남은 작품이 적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집으로는 ≪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 열 권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아서 개인의

문집인지 가문의 문집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최충(崔沖)의 후손이었던 점으로 보아, 한 가문의 문집이었던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최자는 ≪보한집≫에 자신의 증조부인 상서(尙書) 최약(崔瀹)이 윤각(綸閣)에 드나들면서 예종이 군신과 어울려

경박하게 문학에만 종사하는 것에 대해 간언을 했다가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던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문학에 능하면서도 문학에 심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시문을 많이 남기지 않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겠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 한 편이, ≪동문선

(東文選)≫에 부(賦) 두 편, 시 열 편 등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최자의 창작 능력에 비추어 본다면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작품들이 틀림없이 유실되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특히 ≪보한집≫은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을 보충하면서 이규보의 문학관을 수용한 비평서다. 우선 그

이름에서부터 ≪파한집≫의 속편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고려사≫에는 ≪속(續)파한집≫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한집≫의 간행으로 자칫하면 소멸되기 쉬운 작품을 모아놓은 것은 다행이지만, 수록된 범위가 넓지 않으니

보완하라는 당시의 집권자 최이의 명을 받고 책을 짓는다고 했다. 과연 ≪보한집≫은 ≪파한집≫에 없는 자료를

적지 않게 수록하고, 이인로 이후 최자 시대에 이르기까지 새로 나온 시도 다수 포괄해 취급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보한집≫은 단순 자료집이라기보다 일정한 문학관을 반영하고 있는데, 최자는 이인로와 이규보의 논쟁을 의식하면

서 이규보의 노선을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개인의 저술은 전하지 않고, 그가 죽기 7년 전인 66세에 시화집(詩話集)인 ≪보한집≫을 남겼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보한집≫의 초간본은 최자가 서문을 쓴 고종 41년(1254)경에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나 전해지는 것은 없다.

≪성종실록≫의 기록에 이극돈(李克墩)ㆍ이종준(李宗準) 등이 다른 시화류와 함께 간행한 사실이 나와 있으나, 이

책도 전하는 것이 없다. 다음으로 효종 10년(1659)에 엄정구(嚴鼎耉)가 간행한 판각본이 있다. 활판본으로는

1911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파한집≫ 등과 합철해 낸 것이 있으며, 그 뒤에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보한집≫은 상ㆍ중ㆍ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上卷)에는 고려 태조의 문장을 비롯한 역대 이름 있는

학자들의 언행과 누각ㆍ정자ㆍ역사(驛舍) 등을 소재로 한 시 등 52화(話), 중권(中卷)에는 이인로ㆍ이규보 등의

선배 문인들의 일화와 시문 평론 46화, 하권(下卷)에는 21품(品)에 걸친 모범적 시구와 함께 자신의 문학론과 승려ㆍ

기생의 작품 등 49화가 수록되어 있다.

    ≪보한집≫은 다른 어느 시화보다 문학론이 풍부하다. 당시 고려의 시단은 송나라의 소식(蘇軾)을 배우려는

풍조가 지배적이었고, 작시법에 있어서는 적절한 고사 사용 등 언어의 묘미를 강조한 이인로 계열과 새로운 뜻[新意]

의 창출을 역설한 이규보 계열의 주장이 있었다. 상반되는 주장은 아니지만 ≪보한집≫에서는 언어적 표현미를 강조

한 이인로 쪽보다는 참신한 의미를 내세우는 이규보 쪽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의 이론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고려 시인의 작품으로서 시문집에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설화나 고사 내지 평설과 더불어 보존된 것이 적지 않아

≪보한집≫은 ≪파한집≫, ≪백운소설(白雲小說)≫, ≪역옹패설(櫟翁稗說)≫과 함께 시화로서뿐만 아니라 시(詩)의

보존이라는 의미에서도 귀중한 문헌이다. 그리고 여러 문인들의 시론ㆍ시평이 산발적으로 소개되어 있어 고려 시단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보한집≫에서 최자는 작품과 그에 따르는 일화를 실제로 다루면서 역시 이규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이규보

의 시나 시론이 어째서 우수한가를 여러 모로 해명하고자 했다. 이인로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송나라 문인들의 문집

을 익혀 시를 짓는 요령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규보는 옛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뜻을 지어내고자 했기에

서로 대조가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서, 실제 작품에서 그런 차이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풍부한 예증을 들어서 구체적

으로 고찰했다. 그러나 최자는 이규보조차도 여러 사람의 글을 읽고 나서 자기 것을 이룰 수 있었음을 지적하는 통찰

력을 보였다.

    ≪보한집≫은 문학의 여러 문제를 다양하게 고찰한 것을 장점으로 삼을 수 있다. 문학 원론, 문학사, 문학의 갈래,

문체론, 품격론 등을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품격론이다. 이규보는 어느 한 가지에 쏠리지 않고

여러 품격을 두루 갖추는 것이 좋다고 하는 정도에 머물렀는데, 최자는 21종의 품격을 들어 예가 되는 시를 열거해

보이기도 하고, 품격의 등급을 나누기도 했다. 최자는 시의 품격을 상(上)ㆍ차(次)ㆍ병(病) 3등급으로 설정했다.

가령 상에는 신기(新奇)를 비롯한 10품, 병에는 생졸(生拙) 등 8품으로 34품을 예시했다. 이러한 것은 당나라

종영(鍾嶸)의 3품이나 사공도(司空圖)의 24품에 비견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비평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시문학 비평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어떤 시가 어디에 속하는가는 생각하는

것만큼 쉽사리 판별될 수 없으며, 품격을 너무 많이 나눈 나머지 도무지 번거롭기만 하다는 불만도 가질 수 있다.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 비평을 객관화하며 가치의 등급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은 뜻하는 바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비평도 전문화되면 형식은 구차해지고 내용은 빈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최자가 일찍 보여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출처

고전해설ZIP,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지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