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방(元曉房) 행다법

2014. 10. 23. 12:14들꽃다회






       원효방(元曉房) 행다법| 韓國皇宮茶禮會


氣坤大禪師|조회 19|추천 0|2013.06.15. 08:06

大師의 和諍之和

 

  신라에 있어 茶와 佛敎와는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충담사와 기파랑, 월명대사, 혜소, 진감국사 등의

고승이 있었으며 이들과 다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크게 불교계 영향을 미친 것은 원효대사이다.

원효대사와 다에 관한 것은 사포와의 일화 및 감천전설 등을 비롯하여 원효방 다론 등 많다.

 

   정상구의 [한국 다문화학]에서는 원효가 불교계의 해동보살일 뿐 아니라 우리의 다도정신을 그의 自得道通한

견지에서 승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논하고 있다.

신라통일 조를 전후하여 많은 고승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당나라 유학을 갔다와 당나라 불교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당나라 영향을 받은 스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당나라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았던 원효는 스승없이 자득달통한 사람이다. 이에 관해 삼국유사는

[원효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스스로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또 고려의 대표적인 고승인 의천대각국사는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불교를 생각하여 선대 선지식들의 학덕을 두루 배우고 익혀 관찰해 왔으나 원효성사

위에 지나가는 이는 없다.]라고 하여 원효를 聖師라 칭했으며 또 海東菩薩이라고 칭했다.

 

   이런 점에서 더욱 茶와 불교와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茶道정신에 있어 화합은 막연한 화합 정신에만 그치지

않고 원효의 위대한 和諍사상과 자연 결합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백가이쟁(百家異諍)의

실마리를 풀어서 진리의 바다에 되돌려 보냄으로 하여 한국적 화쟁사상 곧 원융회득하는 정신을 이룩했다.

즉, 화는 원효의 <반야경종요서(般若經宗要序)>에 나오는 화쟁지화 사상은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백가의 서로 다른 다툼을 회통시켜서 드디어 요란한 四生의 중생들로 하여금 둘도 없는 참다운 본성에 들어가게

하여 꿈꾸는 생사의 긴 잠을 깨워서 큰 깨달음의 지극한 果에 이르게 하며 지극한 과의 큰 깨달음을 이르게 한다.

 

   그리고 諍사상은 원효의 <해동기신론별기>의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즉, [불도가 진리의 길이 되는 것은

텅 비고 고요하고 말숙하면서 깊고도 그윽하기 때문이다. 그윽하고 그윽하지만 만가지 형상밖에 벗어나지 않으며

고요하고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의 이론 속에 있도다.]

 

   여기에서 원효가 제일 중요시하는 사상은 「寂之寂」 사상이다. 적지적 사상이란 무엇인가. 寂은 고요할 적 즉,

諍也, 安也가 주격이다. 적지적 사상은 즉 極寂을 말함으로 극적이란 적의 근원에 돌아감을 말함인데 적의 근원은

바로 淸寂 즉 諍이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의 다음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체 모든 물은 운운하지만 각각 그 근원에돌아가는 것을 정이라 한다.'

 

  노자는 여기에서 무위자연 곧 적지적함을 두텁게 지키면 천지만물이 모두 일어나는데 그것이 諍에 돌아간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와같이 근본 뿌리에 돌아가는 것을 즉, 諍이라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이치를 통해 볼 때 寂의

본질은 諍인 것이다.

 

   원효의 적지적 사상도 바로 노자의 그것과 상통한다고 본다. 寂은 고요할 적, 바로 諍也다. 적을 강조하여

적지적이라 함은 바로 적의 근원인 諍, 바로 깨달음을 일컬음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원효의 불교사상은

바로 和諍이라 하겠고, 茶禪一體觀을 가진 원효의 다도정신 역시 和諍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원효에 있어 차를 마시는 경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원효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당정산

고총에서 어느날 밤에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그 맛이 감로수 같았던 것이 날이 밝아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라

구토를 느꼈다. 여기에서 그는 깨달음을 가져 왔다. 다 같은 물인데 어느 때는 감로수 같고 어느때는 구토를 느끼고

그는 三界가 모두 허위이며 三界唯心의 진리를 깨우쳤다. [마음 그것은 내가 없는 무아경에 이를 때 眞性이며 陽을

나타날 때 和가 된다. 고로 화(和)는 교의 근본이다.]라고 그는 교의를 세웠으리라.

 

   이상과 같이 원효는 그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스스로 因心自得하여 후일 고려왕조에서는 그의 위대한

화정사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화정국사라는 칭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화정국사 원효의 화정정신이 바로

한국다도정신의 근원이라고 하겠다.

 

    원효대사에 얽힌 차얘기는 고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튿날 부령현재인 이군 및 다른 손님 6-7인과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길의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발을

포개고 매우 조심하여 걸어서 도달하였더니, 뜨락의 층계와 창문이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자니 가끔 범과 표범이

있는데 아직은 당겨서 올라온 놈이 없다고 한다. 곁에서 한 암자가 있는데, 속말로 사포성인이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가 와서 살았기에 사포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서 효공에게 올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그 물이 문득 바위 틈에서 솟아나고, 맛이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점다를 시험하였다.

 

   이 글에 나오는 원효방터는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의 뒷산인 우금암 밑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원효대사가 그 곳에 간 시기는 백제가 멸망한 뒤 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원효대사와 사포스님에 대한 설화는

[삼국유사]의 [말하지 않은 사복] 조에 적혀 있다.

 



<원효와 설총>


    신라의 차이야기를 하면서 원효대사(617~689)와 그의 아들 설총(薛聰)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원효는 스스로 말하기를 ‘스승을 모시지 않고 배웠으며, 마음에 의지하여 저절로 깨닫는다.’라 하였다. 

독자적으로 해동종(海東宗)을 창시하는 한편, 차의 공적을 수양의 방편으로 삼고자 원효방(元曉房)을 차렸다. 

화정국사 원효의 화정정신이 바로 한국다도정신의 근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설총은 그 아비의 훈도(訓導)에 의해서 출중한 다인(茶人)이 되어

신문왕(681~691)께 화왕계설화(花王戒設話)를 강론하였다.


 


효방(元曉房) 행다법 - (육우 다경에서 점다법과 동일, 10번항만 다름) - ***첨가함***


1. 먼저 다실 밖에서 탕관에 물을 끓일 준비를 한다. 불을 피울 숯이나 마른 나무를 가져 온다.

2. 다실 밖에서 불을 피워 찻물을 끓일 차비를 해 놓고 샘에서 물을 길어 온다.

3. 화로에 차솥을 올려 놓고 물을 끓인다. 물 끓이는 일은 밖에서 한다.

4. 차 달일 다구를 챙겨서 다실로 가지고 들어가 배열을 마친다.

5. 밖에서 물이 다 끓으면 삼발이나 화로를 준비해서 차솥을 가지고 들어와 다실에 놓는다.

6. 떡차를 다연에 넣고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놓는다. 가루차는 거친 가루이다.

7. 차솥의 탕수를 한 바가지 떠서 잔을 데운다. 그리고 가루차를 차솥에 넣는다.

8. 또는 가루차를 찻잔에 넣고 탕수를 한 바가지 떠서 그 위에 붓는다.

9. 차솥에 넣은 차는 잘 끓여진 후에 찻잔에 떠내서 따로 만나지만

10. 찻잔에 가루차를 넣고 그 위에 탕수를 부어서 만든 차는 다선으로 저어서 거품을 낸다.

11. 적당하게 물과 차가 섞여지고 거품이 나면 찻잔을 찻상으로 옮긴다.

12. 찻상에 받들어 가지고 가서 원효대사께 드린다. 차를 다 마시면 찻잔을 물린다.

13. 찻상에 찻잔을 받아 가지고 물러나 다구를 챙겨서 치운다.


 



원효(元曉, 617년~686년)는 신라 고승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은 설(薛), 속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이며, 호는 화정(和淨)이다. 설총의 아버지이다.


생애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마 담날의 아들로 상주(湘州)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그 어머니가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으며 만삭(滿朔)이 된 몸으로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 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沙羅樹) 아래 이르러 갑자기 낳았는데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한다.

어려서 서당 또는 신당으로 불렸으며, 15세 때 또는 28세 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黃龍寺)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沙羅寺)라 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의 낭지(郎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資質)과 총명이 드러났다.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遼東)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았다가 풀려났다.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唐項城)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戒)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

라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 그 뒤 분황사(芬皇寺)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원효방(元曉房)

 

고려조 이규보(1168-1241)는 '남행월일기'에서 원효방(元曉房)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산 따라 위태로운 사다리 지나고, 발 포개어 좁은 길을 간다.

위에는 100길 산마루 있는데, 효성(曉聖 : 원효대사)이 일찍 집을 얽었네.

신령한 발자취 어딘지 아득하고, 남은 그림자 거위 둥지에 머무는구나.

다천(茶泉 : 원효방 앞의 바위틈에 있는 샘. 이 물로 끓인 차를 원효가

마셨다는데서 붙인 이름)은 찬 구슬처럼 고였는데,

한 웅큼 마셔보니 맛이 젖과 같구나.

이곳에 예전에는 물이 없어서,불자들이 깃들이기 어려웠더니,

효공이 와서 머문 뒤로, 단물이 바위틈에서 솟았다네.

우리스님 높은 자취 따라, 짧은 갈옷에 여기 와 붙어 섰네.

여덟자 방을 둘러보니, 오직 한 켤레의 신발 뿐이로다.

곁에 모시는 이도 없이 홀로 앉아 아침 저녁 보내는구나.

소성(小性 : 원효대사의 호)이 세상에 다시 나신다면,

어쩌면 허리 굽혀 절하지 않을 것인가."

 

주류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3,917 m 이르러 있으며

그 아래에 개암사 라는 선운사의 말사로  634년(무왕 35)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 있습니다

개암사 뒤로 산행을 오르면 정상부인 울금바위에는 세 개의 굴실이 있는데 울금바위 좌측으로 한 사람이 지날수있는 조리대 입구를 지나면 탁트인 공간에 넓은 복신굴이 있다 울금바위를 끼고 계속 조그마한 산길을 따라가며 100미터 근방에 한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베틀굴이 있다

원효방은 울금바위 정상부에서 좌측으로 100미터 근방에 바위 20미터 위쯤에 원효방이 있다 원효방의 입구는 다른 곳과 달이 벼랑사이 비좁은 길이 있는데 바위에 바짝 붙어야 갈

수 있는 길로 밑은 절벽으로 되어 옛날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 왔다고 한다.


  **** 여기서 주류성은 우금산성의 별칭인 듯함...(이 行을 첨가함)


                                          <베틀굴>                                               <복신굴>                                             



<원효방 >

 원효방 입구 가는 벼랑길     원효방에서 바라본 변산        원효방 내부 불상이 있었던 흔적과  바로 옆에 원효방의 작은 굴실

 

           <무너진 주류산성의 흔적> 

 

 


      - 다음 카페 < 세계비로자나불교 > 기곤대선사 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