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 31대 국왕 공민왕실록
2014. 10. 28. 21:33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려국 31대 국왕 공민왕실록
http://blog.naver.com/msk7613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 ....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고려국 충숙왕(忠肅王) 4년(1335) 을해 10월 11일 기미에 조선국의 영흥부(永興府)인 화령부(和寧府) 사저(私邸)인 사제(私第)에서 탄강(誕降)하였으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채(神彩)는 영특(英特)하고 준수(俊秀)하며 지략이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나고 용맹스러웠다. 아버지는 환조(桓祖),어머니는 의비(懿妃) 최씨(崔氏)이니, 증문하 시중(贈門下 侍中)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시호(諡號)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어릴 때에 화령(和寧)과 함주(咸州) 사이에서 노니 매를 구하는 북방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뛰어나게 걸출(傑出)한 매를 얻고 싶다.”하였다. 이성계가 젊을 때,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가 담 모퉁이에 5마리의 까마귀가 있음을 보고 쏘기를 청하므로, 단 한 번 쏘니 5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 김씨는 이를 이상히 여겨 이성계에게 이르기를, “절대로 이 일을 누설하지 마라.”하였다. 김씨는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천첩(賤妾)이니, 곧 얼자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어머니다.
이성계가 일찍이 한더위에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난 후에 냇가 근방의 큰 숲에 앉아 있는데, 1마리의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급히 박두(樸頭)를 뽑아 쏘니, 맞아서 쓰러졌다. 또 1마리의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쇠살를 뽑아 쏘니, 이에 잇달아 나왔다. 무릇 20번 쏘아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도망하는 놈이 없었으니, 그 활쏘는 것의 신묘(神妙)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소시(少時)에 산기슭에서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인 산저 1마리를 쫓아 화살을 시위에 대어 쏘려고 했으나, 갑자기 백 길의 낭떠러지에 다다르니, 그 사이가 능히 한 자도 되지 않았다. 말 뒤로 몸을 빼어 섰고, 멧돼지와 말은 모두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다. 어느 사람이 고(告)하기를,“큰 범이 아무 숲 속에 있습니다.”하니, 활과 화살을 쥐고, 또 화살 1개는 허리 사이에 꽂고 가서 숲 뒤의 고개에 오르고, 사람을 시켜 아래에서 몰이하게 하였다. 갑자기 보니, 범이 자기 곁에 있는데 매우 가까운지라, 즉시 말을 달려서 피하였다. 범이 이성계를 쫓아와서 말 궁둥이에 올라 움켜채려고 하므로, 오른손으로 휘둘러 이를 치니, 범은 고개를 쳐들고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말을 돌이켜서 이를 쏘아 죽였다.
또 일찍이 강음(江陰) 산수(酸水)의 땅에서 사냥했는데, 한 떼의 5마리 노루를 쫓아서 다섯 번 쏘아 다 죽였다. 평상시에도 3, 4마리의 노루를 연달아 쏘아 죽인 것은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며, 숨어 엎드린 꿩을 쏠 적에는 반드시 놀래켜서 두서너 길 높이 날게 한 다음에 쳐다보고 쏘아 번번이 맞히었다.이성계는 대초명적(大哨鳴鏑)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 살대를 만들고, 학(鶴)의 깃으로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馴鹿)의 뿔로써 깍지를 만드니, 크기가 배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사람의 쓸 것이 못된다.”하면서, 이를 땅에 던지니 이를 주워 화살통에 꽂고 앞에 섰는데, 노루 1마리가 나오므로, 달려가서 쏘니 화살 한 개에 죽었다. 또 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이같이 한 것이 일곱 번이나 되니, 환조가 크게 기뻐하면서 웃었다. 환조를 따라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짐승을 보고 빙판의 비탈길에 말을 달려서 쏘면, 번번이 맞히어 1마리도 빠져 도망가지 못하였다. 야인(野人)이 놀라 탄식하기를, “사인(舍人)께서는 세상에서 당적할 사람이 없겠습니다.”하였다. 또 들에서 사냥하는데 큰 표범이 갈대 속에 엎드렸다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달려들려고 하니,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말고삐를 돌리지 못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피해 가는데, 깊은 못의 얼음이 처음 얼어서 굳지 않았으므로, 사람도 오히려 건너 갈 수 없었으나, 말이 얼음을 밟고 달아나매 발자취가 뚫어져서 물이 솟구쳐도 마침내 빠지지 않았다.
공을 치는 법은 먼저 구장(毬場)에 말을 달려 나와서 장(杖)의 비(匕) 안으로써 공을 일으키면, 이를 배지(排之)라 하고, 장(杖)의 비(匕) 등으로써 공을 움직이면, 이를 지피(持皮)라 하고, 세 번의 형세를 마치면, 그제야 말을 달려 쳐서 공을 운행(運行)하게 된다. 공을 운행하는 처음에는 세로 치지 않는데, 이를 비이(比耳)라 하니, 장(杖)을 잡고 가로 바로 서서 말귀와 가지런함을 말함이다. 비이(比耳)한 후에 손을 들어 세로 치는데, 이를 수양(垂揚)이라 하니, 손은 높이 들고 장(杖)은 아래로 드리워져 휘청휘청함을 말함이다. 공이 문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적고, 문에 지나가는 사람은 10명에 2, 3명 정도이고, 하던 중간에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으며, 만약 문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같은 대열(隊列)의 사람들이 즉시 모두 말에서 내려 전전(殿前)에 나아가서 두 번 절하고 사례(謝禮)하게 된다. 이성계도 또한 그 선발(選拔)에 참여하여 공을 운행할 때에, 말을 달림이 너무 빨라서 벌써 수양(垂揚)이 되었는지라, 공이 문득 돌에 부딪쳐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즉시 위를 쳐다보고 누워 몸을 돌려서 말 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공이 도로 말 앞 두 발 사이로 나오므로, 다시 쳐서 문 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 때 사람이 이를 방미(防尾)라 하였다. 또 공을 운행해 칠 때는 또한 벌써 수양(垂揚)이 되어 공이 다리 기둥에 부딪쳐 말의 왼쪽에 나가므로 오른쪽 등자를 벗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 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 때 사람이 이를 횡방(橫防)이라 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라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이라 하였다.
나하추가 속여 말하기를, “내가 처음 올 적에는 본디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이고, 귀국(貴國)의 경계를 침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하여 군사 만여 명을 죽이고 비장(裨將) 몇 사람을 죽였으므로, 형세가 매우 궁지(窮地)에 몰렸으니,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합니다.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하였다. 이 때 적의 병세(兵勢)가 매우 강성하므로, 이성계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그들로 하여금 항복하도록 하였다. 한 장수가 나하추의 곁에 서 있으므로 이를 쏘니,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또 나하추의 말을 쏘아서 죽이니 바꾸어 타므로, 또 쏘아서 죽였다.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승부(勝負)가 있었다. 나하추를 몰아 쫓으니, 나하추가 급히 말하기를,“이 만호(李萬戶)여, 두 장수끼리 어찌 서로 핍박할 필요가 있습니까?”하면서 이에 말을 돌리니 또 그 말을 쏘아 죽였다. 나하추의 휘하(麾下) 군사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드디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해가 또한 저물었으므로, 이성계는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는데, 자신이 맨 뒤에 서서 적의 추격을 막았다. 영(嶺)의 길이 몇 층으로 꼬불꼬불한데, 환자(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맨 아랫층에 있다가 급히 부르기를, “영공(令公), 사람을 구원해 주시오. 영공, 사람을 구원해 주시오.”하매, 윗층에서 이를 보니, 은갑옷을 입은 두 적장(賊將)이 파라실을 쫓아 창을 겨누어 거의 미치게 되었는지라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모두 죽이고, 즉시 20여 인을 연달아 죽이고는, 이에 다시 군사를 돌려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였다. 한 적병이 이성계를 쫓아 창을 들어 찌르려고 하므로, 이성계는 갑자기 몸을 한쪽으로 돌려 떨어지는 것처럼 하면서 그 겨드랑을 쳐다보고 쏘고는 즉시 다시 말을 탔다. 또 한 적병이 앞으로 나와서 보고 쏘므로 즉시 말 위에서 일어나 서니, 화살이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 나가는지라 이에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적병을 쏘아 그 무릎을 맞혔다. 또 내 가운데서 한 적장(賊將)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둘러싼 갑옷이며, 또 별도로 턱의 갑을 만들어 입을 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두루 감싼 것이 매우 튼튼하여 쏠 만한 틈이 없었다. 짐짓 그 말을 쏘니, 말이 기운을 내어 뛰게 되므로, 적장이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매, 입이 이에 열리는지라, 이성계가 그 입을 쏘아 맞혔다. 이미 세 사람을 죽이니 이에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용감한 기병으로써 이를 짓밟으니, 적병이 저희들끼리 서로 밟았으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돌아와서 정주(定州)에 둔치고 수일(數日) 동안 머물면서 사졸을 휴식시켰다. 먼저 요충지(要衝地)에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서 이에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左軍)은 성곶(城串)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군(右軍)은 도련포(都連浦)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송두(松豆) 등에 나아가서 나하추와 함흥(咸興) 들판에서 만났다. 이성계가 단기(單騎)로 용기를 내어 돌진(突進)하면서 적을 시험해 보니, 적의 날랜 장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 곧바로 전진하는지라,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면서 그 고삐를 당겨 그 말을 채찍직하여 말을 재촉하는 형상을 하니, 세 장수가 다투어 뒤쫓아 가까이 왔다. 갑자기 또 나가니, 세 장수의 말이 노(怒)하여, 미처 고삐를 당기기 전에 바로 앞으로 나오는지라, 뒤에서 그들을 쏘니, 모두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유인하여 요충지(要衝地)에 이르러, 좌우(左右)의 복병이 함께 일어나서 합력해 쳐서 이를 크게 부수니, 나하추는 당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도망해 갔다.은패(銀牌)와 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얻어서 왕에게 바치고, 그 나머지 얻은 물건들은 이루 다 셀 수도 없었다. 이에 동북 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후에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어 화호(和好)를 통하여 왕에게 말을 바치고, 또 적을 공격할 때 두드리는 말 위에 메운 북인 비고(鞞鼓)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이성계에게 주어 예의(禮意)를 차렸으니, 대개 마음속으로 복종한 때문이었다. 나하추의 누이가 군중(軍中)에 있다가 뛰어난 무용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또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하였다. 환조(桓祖)가 일찍이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 조회할 때에 도중에 나하추에게 지나가면서 이성계의 재주를 칭찬하여 말하였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나하추가 패전하여 돌아가서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지난 날에 ‘내가 재주 있는 아들이 있노라.’고 하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다.”하였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9년(1376) 병진 겨울에 이르러 우왕인 신우(辛禑)가 개성 윤(開城 尹) 황숙경(黃淑卿)을 보내어 가서 교빙(交聘)하니, 나하추가 말하였다.“내가 본디 고려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닌데, 백안첩목아왕(伯顔帖木兒王:공민왕)이 나이 젊은 이 장군(李將軍)을 보내어 나를 쳐서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소. 이 장군께서 평안하신가? 나이 젊으면서도 용병(用兵)함이 신(神)과 같으니 참으로 천재(天才)이오! 장차 그대 나라에서 큰일을 맡을 것이오.”
공민왕 13년(1364) 갑진, 처음에 여러 기씨(奇氏)들이 참형(斬刑)을 당하니, 기 황후(奇 皇后)가 공민왕에게 감정(憾情)이 있었다. 고려의 최유(崔濡)가 원(元)나라에 있으면서 장작동지(將作同知)가 되었는데, 여러 불량배(不良輩)들과 더불어 기 황후를 달래어 왕을 구함(構陷)하여 폐위(廢位)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인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세워 왕을 삼으려고 하여, 요양성(遼陽省)의 군사를 내어 정월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왔다. 왕은 찬성사(贊成事) 안우경(安遇慶) 등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여 물러와서 안주(安州)를 지켰다. 왕은 찬성사(贊成事)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날랜 군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안주(安州)로 빨리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指揮)하게 하고, 이성계에게 명하여 동북면으로부터 날랜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밀직 부사(密直 副使) 이구수(李龜壽)·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지용수(池龍壽)·판도 판서(版圖 判書) 나세(羅世)와 안우경(安遇慶)은 좌익(左翼)이 되고, 판개성(判開城) 이순(李珣)·3사 좌사(三司 左使) 우제(禹磾)·밀직사(密直使) 박춘(朴椿)과 이성계는 우익(右翼)이 되고, 최영은 중군(中軍)이 되어 행군하여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이 패전하여 물러나온 것을 보고 그들이 겁내고 나약하여 힘써 싸우지 않은 것을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를 꺼리었다. 이 때 적병이 이미 수주(隨州)의 달천(㺚川)에 둔쳤는데, 여러 장수들이 이성계에게 이르기를, “내일의 싸움에는 그대가 혼자 이를 맡으시오.”하니,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이 자기를 꺼림을 알고 조금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튿날 적병은 3대(隊)로 나누어 오매, 이성계는 가운데 있고, 수하(手下)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을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으로 삼아, 각기 그 1대(隊)를 대적하게 하여 용기를 내어 적을 쳤다. 이성계의 탄 말이 진창에 빠져서 심히 위태로왔는데, 말이 힘을 떨쳐 뛰어서 나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이성계가 적장 두서너 사람을 쏘고 드디어 적병을 크게 부수었다. 이성계가 늙은 장수 두 사람을 바라보니, 두 사람이 칼을 빼어 함부로 적병을 치고 있었다. 적병은 이미 패하여 달아났는데, 다만 먼지가 공중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공민왕 18년(1369) 기유 홍무(洪武) 2년, 처음에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는 기철(奇轍)의 아들인데, 원(元)나라를 섬겨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원나라가 망하자 분사요심 관리(分司遼瀋 官吏)인 평장(平章) 김백안(金伯顔) 등과 더불어 망한 원나라의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아 동녕부(東寧府)를 점거하고, 그 아버지가 참형(斬刑)을 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북쪽 변방에 쳐들어와서 반드시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왕은 명(明)나라를 섬긴 이유로써 요령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북원(北元)과의 관계를 끊고자 하여 12월에 태조를 동북면 원수(東北面 元帥)로 삼고, 지용수(池龍壽)와 양백연(楊伯淵)을 서북면 원수(西北面 元帥)로 삼았다.공민왕 19년(1370) 경술 정월, 이성계는 기병 5천 명과 보병(步兵)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里)를 행진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고, 또 7백여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 날 저녁에 개경의 서북방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차고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뻗쳤는데,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용감한 장수의 기상입니다.”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李成桂)를 북방에 보냈으니 반드시 그 감응(感應)일 것이다.”하였다. 이 때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는 이성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 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가서 지켜 대로(大路)에 웅거하여 막고자 하였다. 이성계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니, 이원경(李原景:오로첩목아(吾魯帖木兒))이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조금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하고,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그를 포위하였다. 이 때 이성계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隨從)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들에게 쏘았다. 무릇 70여 번이나 쏘았는데 모두 그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城) 안 사람들이 겁이 나서 기운이 쑥 빠졌다. 안위(安慰)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서 밤에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山城)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호(萬餘戶)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歸順)한 사람이 저자와 같았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城)이다. 이성계는 원(元)나라 추밀 부사(樞密 副使) 배주(拜住)와 동녕부(東寧府)의 이원경(李原景)·이백안(李伯顔)·이장수(李長壽)·이천우(李天祐)·현다사(玄多士)·김아(金阿)·노정(魯丁) 등 3백여 호(戶)가 와서 왕에게 바쳤다. 이성계가 우라(亐羅)에 들어갈 적에 무너진 담안에서 곡성(哭聲)이 있음을 듣고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했더니, 한 사람이 벌거벗고 서서 울며 말하기를, “나는 원(元)나라 조정에서 장원 급제(壯元 及第)한 배주(拜住)인데, 귀국(貴國)의 이인복(李仁復)도 나와 동년(同年)입니다.”하였다. 이성계는 장원(壯元)의 이름을 한번 듣고는 곧 옷을 벗어서 그를 입히고, 말을 주어서 그를 타게 하여 마침내 그와 함께 오니, 왕이 배주(拜住)에게 한복(韓復)이란 성명(姓名)을 내려 주었다. 한복이 이성계를 섬기되 매우 조심성 있게 하였다.
8월 이성계와 서북면 원수 지용수(池龍壽)·부원수(副元帥) 양백연(楊伯淵)에게 명하여 가서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게 하였다.12월, 이성계는 친병(親兵) 1천 6백 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너는데, 사졸(士卒)이 3일 만에야 다 건넜다.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 요성(遼城)과의 거리가 2일 길이었다. 군대의 짐은 그냥 남겨 두고 7일 양식만 가지고 행진하였다. 비장(裨將) 홍인계(洪仁桂)·최공철(崔公哲) 등을 시켜 빠른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요성을 습격하게 했는데, 저들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이를 얕보아 싸웠으나, 많은 군사들이 잇달이 이르니 성중(城中) 사람이 바라보고는 간담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 장수 처명(處明)이 날래고 용감함을 믿고 그래도 항거해 싸우므로, 이성계는 이원경(李原景)을 시켜 타이르기를, “너를 죽이기는 매우 쉽지만, 다만 너를 살려서 쓰고자 하니 빨리 항복하라.”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원경(原景)이 또 말하기를, “네가 우리 장군님의 재주를 알지 못하는구나.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한 번에 쏘아서 네 몸을 꿰뚫을 것이다.”하였으나, 그래도 항복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짐짓 그 투구를 쏘아 벗기고는 또 원경을 시켜 그에게 타일렀으나, 또 따르지 않으므로, 이성계는 또 그 다리를 쏘니, 처명(處明)이 화살에 맞아 물러가 달아나더니, 조금 후에 다시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이성계는 또 원경을 시켜 그에게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즉시 네 얼굴을 쏘겠다.”고 하니, 처명은 마침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였다.
한 사람이 성(城)에 올라 외치기를, “우리 무리들은 대군(大軍)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투항(投降)하고자 하였으나 관원(官員)이 강제로 항거해 싸우게 했으니, 만약 힘을 써서 성을 공격한다면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성은 매우 높고 가파르며, 화살이 빗발처럼 내려오며 또 나무와 돌까지 섞여서 내려오는데, 우리의 보병(步兵)들이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것을 무릅쓰고 성에 가까이 가서 급히 공격하여 마침내 성을 함락시켰다.새인첩목아(賽因帖木兒)는 도망하므로 백안(伯顔)을 사로잡아 군사를 성 동쪽에 물리치고, 나하추(納哈出)와 야산불화(也山不花) 등지에 방문(榜文)을 포고하기를, “기새인첩목아(奇賽仁帖木兒)는 본국(本國)의 미천한 신하로서 황제의 조정에 친근(親近)하여 별다른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관위(官位)가 1품(品)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나라와 함께 기쁨과 근심을 같이해야 될 것이며, 천자(天子)가 밖에 피난(避亂)했으니, 의리상 마땅히 전후 좌우에서 보좌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고 가버리지 않아야 될 것인데, 그는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잊고서 동녕부(東寧府)에 몸을 도망쳐 와서, 본국(本國)에 원수를 가지고 몰래 모반(謀反)을 도모하고 있다. 두서너 해 전에 국가에서 군사를 보내어 뒤쫓아 습격했으나, 도망하여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는데, 또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물러와 동녕성(東寧城)을 지키면서, 김백안(金伯顔) 평장(平章) 등과 결탁하여 심복(心腹)이 되어 송보리(松甫里)·법독하(法禿河)·아상개(阿尙介) 등지에서 군사와 말을 단결(團結)시켜 또 본국을 침해하고자 하니,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 의병(義兵)을 일으켜 문죄(問罪)하니, 그 새인첩목아(賽仁帖木兒)와 김백안(金伯顔) 등은 소민(小民)들을 유혹 협박하고 성벽을 굳게 지켜 명령을 거역하는 역명(逆命)하므로, 초마(哨馬) 전봉(前鋒)이 김백안 외에 합라파두(哈剌波豆)·덕좌불화고(德左不花高)의 다루가치(達魯花赤)와 대도 총관(大都 摠管) 등 대소 두목(大小 頭目)을 모두 잡아 죽였으나, 새인첩목아는 또 다시 도망 중에 있으니, 새인첩목아가 가서 접(接)하는 각채(各寨)에서는 즉시 잡아서 빨리 보고할 것이며, 만약 이를 숨기고 자수(自首)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감계(鑑戒)가 동녕부(東寧府)에 있을 것이다.”하였다.
또 금주(金州)와 복주(復州) 등지에 방문(榜文)을 포고하기를, “본국은 요제(堯帝)와 같이 건국(建國)했으며,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후(封侯)하여 영토(領土)를 주어 서쪽으로 요하(遼河)에 이르렀으며 대대로 강토를 지켰는데, 원(元)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공주(公主)에게 요동(遼東)·심양(瀋陽)의 땅을 내려 주어 탕목읍(湯沐邑)으로 삼게 하고, 그로 인하여 분성(分省)을 설치하였다. 말세(末世)에 와서 덕망(德望)을 잃고 천자가 밖에서 피란(避亂)했는데도, 요동·심양의 두목관(頭目官) 등이 들은 체하지 않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또 본국(本國)에도 예의(禮儀)를 닦지 않고서, 곧 본국의 죄인 기새인첩목아와 결탁하여 복심(服心)이 되어 무리를 모아 백성들을 침해했으니, 불충(不忠)의 죄는 모면할 수가 없다. 지금 의병(義兵)을 일으켜 문죄(問罪)하는데 새인첩목아 등이 동녕성(東寧城)에 웅거하여 강성함을 믿고 명령을 거역하므로, 초마(哨馬) 전봉(前鋒)이 이를 모두 잡아 죽일 것이므로,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같이 재액(災厄)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개 요하(遼河) 이동(以東)의 본국 강토내의 백성과 대소(大小) 두목관(頭目官) 등은 속히 와서 조회하여 작록(爵祿)을 함께 누릴 것이며, 만약 조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감계(鑑界)가 동경(東京)에 있을 것이다.”하였다. 이튿날 군대가 성 서쪽 10리(里)에 유숙했는데, 이 날 밤에 붉은 기운이 군영(軍營)을 내리쏘는데 성하기가 불길과 같았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내리쏘니 옮겨서 둔치면 크게 좋을 것입니다.”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돌려 들에서 유숙하고, 사졸(士卒)들로 하여금 각기 변소(便所)와 마구(馬廐)를 만들도록 하였다. 나하추가 뒤를 쫓아 온 지 2일 만에 말하기를, “변소와 마굿간을 만들었으니 군대의 행진이 정제(整齊)할 것이므로 습격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만 돌아갔다. 이 때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성(城)을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게 됨은 고려와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신해 7월, 이성계를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삼고, 이색(李穡)을 정당 문학(政堂 文學)으로 삼았다. 왕이 근신(近臣)에게 묻기를, “문신(文臣)인 이색과 무신(武臣)인 이성계(李成桂)가 같은 날에 문하성(門下省)에 들어왔는데 조정의 의논이 어떻다 하는가.”하였으니, 대개 인재 얻은 것을 스스로 장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처음에 환조(桓祖)가 세상을 떠나시니, 이성계가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를 맞이하여 개경의 제택(第宅)으로 와서 그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고, 매양 나아가 뵈올 적엔 항상 섬돌 아래에 꿇어앉았다. 공민왕이 이성계를 존경하는 까닭에, 김씨의 아들 이화(李和)를 사랑하여 우대해서 항상 금중(禁中)에 모시게 하고, 자주 연회 자리를 만들어 이화에게 음식물을 내려 어머니에게 드리게 하고, 또 교방(敎坊)의 음악을 내려 주어 우대하고 총애함을 보였다. 이성계도 임금의 내려 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겨 전두(纏頭)를 많이 주고, 또 이화(李和)와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와 더불어 항상 같이 거처하며, 우애가 더욱 지극하여 그 어머니의 천안(賤案)을 모두 불살라 없애 버렸다.
이성계가 이두란(李豆蘭)과 더불어 사슴 1마리를 함께 쫓는데 갑자기 쓰러진 나무가 앞에 가로막아 있고 사슴은 나무 밑으로 빠져 달아나니, 두란(豆蘭)은 말고삐를 잡아 돌아갔다. 이성계는 나무 위로 뛰어넘고, 말은 나무 밑으로 빠져 나갔는데, 즉시 잡아타고 뒤쫓아 사슴을 쏘아 잡으니, 두란이 놀라 탄복하면서 말하였다. “공(公)은 천재(天才)이므로 인력(人力)으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공민왕이 경대부(卿大夫)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고 친히 이를 구경하는데, 이성계가 백 번 쏘아 백 번 다 맞히니, 왕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하였다.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활 잘 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순제(順帝)가 친히 그 팔을 당겨서 이를 관찰하였다. 이성계가 동렬(同列)들을 모아 덕암(德巖)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 과녁을 1백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도 이성계는 쏠 때마다 다 맞히었다. 해가 이미 정오(正午)가 되어 황상(黃裳)이 이르니, 여러 재상(宰相)들이 이성계에게 홀로 황상과 더불어 쏘기를 청하였다. 무릇 수백 번 쏘았는데 황상은 연달아 50번을 맞힌 후에도 혹은 맞히기도 하고 혹은 맞히지 못하기도 했으나, 이성계는 한 번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왕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는 진실로 비상한 사람이다.”하였다. 또 일찍이 내부(內府)의 은(銀)으로 만든 거울 10개를 내어 80보(步) 밖에 두고, 공경(公卿)에게 명하여 이를 쏘게 하되, 맞힌 사람에게는 이 거울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성계가 열 번 쏘아 열 번 다 맞히니, 왕이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이성계는 항상 겸손(謙遜)으로 자처(自處)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있고자 아니하여, 매양 과녁에 활을 쏠 때마다 다만 그 상대자의 잘하고 못함과 맞힌 살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겨우 상대자와 서로 비등하게 할 뿐이고, 이기고 지고 한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비록 구경하기를 원하여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살 한 개만 더 맞히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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