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8. 19:20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려국 33대 국왕 창왕실록
http://blog.naver.com/msk7613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 ....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왕씨(王氏)의 후손을 골라 왕으로 세우고자 하니, 조민수(曺敏修)가 우왕의 장인(丈人) 이임(李琳)의 인척(姻戚)인 관계로써 우왕의 아들 창(昌)을 세우고자 하여, 이색(李穡)에게 묻고 마침내 의논을 정하여 창을 세웠다. 처음에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의 전장(田莊)에 있고, 강비(康妃)는 포천의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었는데, 이방원이 전리 정랑(典理 正郞)이 되어 개경에 있으면서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사제(私第)에 들어가지 않고서 곧 말을 달려 포천에 이르니, 간사(幹事)하는 노복(奴僕)들이 이미 다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방원이 왕후(王后)와 강비(康妃)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하여 가면서, 말을 탈 때든지 말에서 내릴 때든지 전하께서 모두 친히 부축해 주고, 스스로 허리춤에 불에 익힌 음식을 싸가지고 봉양하였다. 경신공주(慶愼公主)·경선공주(慶善公主)·무안군(撫安君)·소도군(昭悼君)이 모두 나이 어렸으나 또한 따라왔으므로, 이방원이 자기가 안아서 말에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이방원이 또한 말을 이끌기도 하였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양식이 모자라서 길가의 민가(民家)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철원관(鐵原關)을 지나다가 관리들이 잡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밤을 이용하여 몰래 가면서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판에 유숙하는 차(次)하였다.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 가까운 마을의 장정(壯丁) 백여 명을 모아 항오(行伍)를 나누어 변고를 대비(待備)하면서 말하기를, “최영은 일을 환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나를 뒤쫓지는 못할 것이다.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7일 동안을 머물다가 일이 안정된 것을 듣고 돌아왔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려 정벌에 나간 여러 장수들의 처자(妻子)를 가두고자 하였으나, 조금 후에 일이 급박하여 과연 시행하지 못하였다.
창왕(昌王)이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를 동북면 삭방 강릉도 도통사(朔方江陵道 都統使)로 삼고 충근 양절 선위 동덕 안사 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병으로 사직(辭職)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창왕이 교지(敎旨)를 내리니, 그 대략은 “수 문하 시중(守門下 侍中) 이성계(李成桂)는 문무(文武)의 계략(計略)과 장상(將相)의 재간(才幹)으로서 들어와서는 3공(三公)에 참예하고 나가서는 많은 군사를 거느려서, 기해년에 용병(用兵)한 이후로 30년 동안 크고 작은 몇 번의 싸움에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이기었다. 그 전쟁이 큰 것은, 신축년에 관적(關賊)이 개경을 침범하여 국가가 파천(播遷)하니, 경(卿)이 대상(大相)을 도와 능히 흉악한 무리를 죽이고 개경을 수복시켰으며,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가 우리의 동북 변방을 침범하니 여러 장수들이 패하여 달아났다. 적군은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문득 고주(高州)의 경계에 이르니, 경(卿)이 갑옷을 거두어서 밤낮으로 행군하여 국경 밖으로 쫓아내었으며, 계묘년에는 서얼(庶孽) 덕흥군(德興君)이 군사를 일으켜 서쪽 변방에 들어오니, 경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날랜 기세를 꺾었으며, 정사년에는 왜놈이 해주(海州)에 침구(侵寇)하니 여러 재상들이 패하여 도망했는데도,경이 홀로 몸소 사졸(士卒)들에 앞장서서 이를 쳐서 거의 없앴으며, 경신년에는 왜놈이 진포(鎭浦)에서 육지에 내려 양광(楊廣)·경상(慶尙)·전라(全羅)의 경계를 마음대로 다니면서 군읍(郡邑)을 분탕하고 남자와 여자를 죽이고 노략질하여 3도(道)가 소연(騷然)하였는데, 원수(元帥) 배언(裵彦)·박수경(朴修敬) 등이 패하여 죽었다. 경은 죽기를 각오하고 삶을 돌보지 않는 계책을 내어 그 휘하를 거느리고 인월역(引月驛)에서 최후까지 싸워 적군을 남김없이 포획하였으니, 백성들이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다. 그 행군(行軍)할 적엔 행동은 기율(紀律)을 준수(遵守)하여 작은 물건도 범하지 아니하니 백성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그 덕을 사모하였으니, 비록 옛 날의 명장(名將)일지라도 어찌 나을 수 있었겠는가? 경의 위대한 공로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이같이 빛나는데도 스스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겸연히 물러나니, 나라 사람들이 더욱 깊이 의지하였다.”하였다.
8월, 창왕이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로써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軍事)를 통솔하게 하였다.10월,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무하게 하였다.공민왕이 세상을 떠난 후로부터 천자(天子)가 매양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부를 때마다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 못하였다. 문하 시중(門下 侍中) 이색(李穡)이 창왕에게 친히 조회하도록 하고, 또 왕관(王官)으로 국사(國事)를 감독하려고 하여 들어가 조회하기를 자청하니, 창왕이 이색과 첨서밀직(僉書密直) 이숭인(李崇仁)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또 왕관(王官)으로 국사(國事) 감독하기를 청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이색을 칭찬하면서 말하기를,“이 노인은 의기가 있다.”하였다. 이색은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조정과 민간에서 마음이 그에게 돌아감으로써,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의 아들 하나를 같이 가기를 청하니, 이방원으로써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들어가 조회할 적에 관인(官人) 한 사람을 여관(旅館)에서 만났는데, 그 관인이 이색에게 말하기를,“너희 나라 최영은 정병(精兵) 10만 명을 거느리고 있으니 이성계(李成桂)를 잡기는 파리를 잡는 것처럼 쉬울 것이지만, 너희 나라의 백성은 이성계의 한없는 덕을 무엇으로 갚겠는가?”하였다.
천자(天子)의 도읍인 경사(京師)에 이르니 천자가 평소부터 이색의 명망을 듣고 있었으므로 조용히 말하기를,“그대가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한림(翰林)이 되었었으니 응당 중국말을 알 것이다.”하니, 이색이 갑자기 중국말로써 대답하기를,“왕이 친히 조회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천자가 이해하지 못하여 말하기를,“무슨 말을 하였느냐?”하므로, 예부(禮部)의 관원이 전(傳)하여 이 말을 아뢰었다. 이색이 오랫동안 중국에 들어와 조회하지 않았으므로 말이 자못 어려워 통하지 아니하니, 천자는 웃으면서 말하기를,“그대의 중국말 하는 것은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다.”하였다. 돌아오다가 발해(渤海)에 이르러 두 객선(客船)과 동행(同行)했는데, 반양산(半洋山)에 이르러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두 객선(客船)은 모두 침몰하였다. 이방원이 탄 배도 또한 거의 구원되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넘어졌으나, 이방원은 신색(神色)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여 마침내 보전되어 돌아왔다. 이색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지금 이 황제는 마음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다. 내 생각에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을 것이라 여겼으나, 황제는 묻지 아니하고, 황제의 묻는 것은 모두 내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하니, 당시의 논의로 실없는 말로 시시덕거리는 기롱(譏弄)하기를,“대성인(大聖人)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평론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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