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8. 19:44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려국 32대 국왕 우왕실록
http://blog.naver.com/msk7613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 ....
우왕인 신우(辛禑) 원년(1375) 9월, 왜적(倭賊)의 배가 덕적도(德積島)·자연도(紫燕島) 두 섬에 많이 모이니, 우왕(禑王)은 여러 도(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성계와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崔瑩)으로 이를 거느리게 하고,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군대의 위엄을 보여서 적을 방비하게 하였다.10월, 이성계는 나가 사냥하다가 범을 쏘아 잡아서 우왕에게 바치니, 우왕은 의복을 내려 주면서 이내 유시(諭示)하였다. “흉악한 짐승은 마땅히 잡아야 되겠지마는, 그러나 또 위태한 일이니 후에는 그 일을 조심하오.”처음에 환조(桓祖)가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李天桂)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이성계를 꺼리었다. 이성계의 종이 양민(良民)임을 하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계는 그 누이인 강우(康祐)의 아내와 모여 모의(謀議)하고 양민(良民)임을 하소한 사람과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이성계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을 처음과 같이 대접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管下)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성계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겨 여러 고아(孤兒)들을 어루만져 양육하고 무릇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주관(主管)하였다. 강우(康祐)의 아내는 집이 가난하니, 이성계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어 그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다. 개국(開國) 후에 천계의 아들을 모두 높은 관작에 임명하였다.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
이성계는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하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부서(部署)를 정하여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하고 동(東)으로 갔다. 운봉(雲峰)을 넘으니 적군과 떨어지기가 수십 리(里)였다. 황산(黃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서 이성계가 큰 길 오른쪽의 소로(小路)를 보고서 말하기를,“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하면서, 마침내 자기가 빨리 갔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바라보고서는 싸우지 않고 물러갔으니, 이 때 해가 벌써 기울었다. 이성계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갔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과연 돌출(突出)하는지라, 이성계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류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쏘았는데, 50여 개를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었으되, 시윗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무릇 세 번이나 만났는데 힘을 다하여 최후까지 싸워 이를 죽였다. 땅이 또 진창이 되어 적군과 우리 군사가 함께 빠져 서로 넘어졌으나, 뒤미처 나오자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이에 적군이 산을 의거하여 스스로 방어하므로, 이성계는 사졸들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분거(分據)하고, 휘하의 이대중(李大中)·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하였다. 이성계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衝突)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내려왔다. 이성계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하였다. 조금 후에 이성계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賊陣)에 부딪쳤다. 적의 장수가 창을 가지고 바로 이성계의 후면(後面)으로 달려와서 심히 위급하니,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뛰게 하여 큰소리로 부르짖기를,“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하였다. 이성계가 미처 보지 못하여, 두란이 드디어 적장을 쏘아 죽였다. 이성계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 다리를 맞혔다. 이성계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기세가 더욱 용감하여, 싸우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사들은 이성계의 상처 입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적군이 이성계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이성계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군이 또 이성계의 앞에 부딪치므로 이성계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이성계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좌우에게 지휘하기를,“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하니, 장수와 군사가 감동 격려되어 용기백배로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군이 나무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이성계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말하기를,“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이성계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이성계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하였다.
이성계는 말하기를,“적군의 용감한 사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하면서, 마침내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이내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적군을 공격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다.”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나희(儺戱)를 베풀고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적군의 머리를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면서 살려주기를 원하니, 이성계는 말하기를,“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하였다. 이 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군의 진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아기발도(阿其拔都)가 이성계의 진을 설치함이 정제(整齊)한 것을 바라보고는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했습니다.”하였다. 처음에 아기발도가 그 섬에 있으면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러 적군이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에 복종하여 굳이 청하여 왔으므로, 여러 적의 괴수들이 매양 진현(進見)할 적마다 반드시 빨리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았으며, 군중(軍中)의 호령을 모두 그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 번 행군(行軍)에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써 바꾸고자 하니, 이성계가 이르기를,“대나무가 일반 나무보다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그러나 대나무는 또한 민가(民家)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니, 그 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간다면 족(足)할 것이다.”하였다. 이성계는 이르는 곳마다 민간의 물건은 털끝만한 것도 범(犯)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올라(兀羅)의 전쟁에 이성계가 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으므로 처명이 은혜에 감동하여 매양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보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종신토록 이성계의 곁을 따라다니며 모시었다. 이 싸움에서 처명이 이성계의 말 앞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우니, 이 때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이성계가 승전(勝戰)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니, 판3사(判三司) 최영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채붕(綵棚)과 잡희(雜戲)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이성계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나아가서 재배(再拜)하니, 최영도 또한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하니, 이성계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謝禮)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3한(三韓:고례,백제,신라)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하니, 이성계는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우왕이 금(金) 50냥을 내려 주니 이성계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臣)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 치하(致賀)하기를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3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충성은 백일(白日)처럼 빛나니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위엄은 청구(靑丘)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출목연(出牧筵)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하였다. 전(前) 3사 좌사(三司 左使) 김구용(金九容)은 이를 화답하기를 “적의 기세 꺾기를 우레처럼 하니 군사의 지휘가 모두 공(公)에게서 나왔네.상서로운 안개 퍼져 나가 독한 안개를 없애고,서리 바람 매서워서 위엄 바람 도왔도다.섬 오랑캐 간담이 떨어지매 군용(軍容)이 성대하고,이웃나라가 마음이 선뜩하니 사기(士氣)가 웅장하네.온 나라 의관(衣冠)이 다투어 배하(拜賀)하니,삼한 만세에 태평의 공이네.”라 하였다. 성균 좨주(成均 祭酒) 권근(權近)이 이를 화답하기를, 3천 신하 마음과 덕이 모두 다 같은데 군율(軍律)은 지금에 와서 모두 공에게 있도다.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동궁(彤弓)은 빛나서 은영(恩榮)이 무겁고,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한 번 개선(凱旋)하니 종사(宗社)가 안정되니,마상(馬上)에서 기공(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하였다.
고려의 말기에 관(官)에서 군사를 등록시키지 아니하고 여러 장수들이 각기 점모(占募)하여 군사를 삼으니, 이를 패기(牌記)라 명칭하였다. 대장(大將) 중에 최영(崔瑩)·변안열(邊安烈)·지용수(池龍壽)·우인열(禹仁烈) 등은 막료(幕僚)와 사졸(士卒)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욕설로 꾸짖어 못하는 말이 없었고,혹은 매질을 가하여 죽는 사람까지 있게 되니, 휘하의 군사가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성품이 엄중하고 말이 적었으며, 평상시에는 항상 눈을 감고 앉았었는데, 바라보기에는 위엄이 있으나 사람을 접견할 적에는 혼연(渾然)히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뿐인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사랑하였다. 그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홀로 휘하의 사람들은 예절로써 대접했으며 평생에 꾸짖는 말이 없었으므로, 여러 장수들과 휘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였다.신우(辛禑) 8년(1382) 임술 가을 7월,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를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 都指揮使)로 삼았다. 이 때 여진(女眞) 사람 호발도(胡拔都)가 동북면의 인민을 사로잡아 가니 그 도(道)의 군무(軍務)를 대대로 관장하여 위신(威信)이 본디부터 나타난 이유로써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게 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 전송했는데 그 시에 “송헌(松軒)의 담기(膽氣)가 무신(武臣)을 뒤덮으니 만리장성(萬里長城)이 한몸에 맡겨졌네.분주하면서 몇 번이나 다사(多事)한 시기를 지냈던고.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날을 즐길 것이네.지금은 대세(大勢)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는데 하물며 이 선봉(先鋒)은 귀신 같음에랴.양조(兩朝)에 같이 벼슬하니 정(情)이 얕지 않으니 다만 시율(詩律)을 지어 가는 것을 전송한다.”하였다.
신우(辛禑) 9년(1383) 계해 8월, 호발도(胡拔都)가 또 와서 단주(端州)를 침구(侵寇)하니, 부만호(副萬戶)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외적(外敵)과 내응(內應)하여 재화(財貨)를 다 가지고 고의로 뒤에 있다가 짐짓 적에게 잡히었다. 상만호(上萬戶)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靑州 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였다. 이 때 이두란(李豆蘭)이 모상(母喪)으로 인하여 청주(靑州)에 있었는데,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사람을 시켜 불러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喪服)을 입고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하니, 이두란이 이에 상복을 벗고 절하고 울면서 하늘에 고(告)하고 활과 화살을 차고 따라갔다. 호발도(胡拔都)와 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났는데, 이두란이 선봉(先鋒)이 되어 먼저 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조금 후에 이르렀는데,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이나 입고 붉은 털옷을 껴입었으며, 흑색 암말을 타고 진(陣)을 가로막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깔보아 그 군사는 남겨 두고 칼을 빼어 앞장서서 달려나오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도 또한 단기(單騎)로 칼을 빼어 달려나가서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득이면서 지나쳐 능히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급히 말을 돌려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곧 또 그의 말을 쏘아 꿰뚫으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또 그를 쏘려고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들도 또한 이르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발도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이로 인하여 변방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올렸는데, 그 계책은 “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 그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양 저들과 무역하여 날로 서로 가까워져서 혼인까지 맺게 되었으나, 그 족속(族屬)이 저쪽에 있으므로 유인해 가기도 하고, 또는 향도(嚮導)가 되어 들어와 침구(侵寇)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되므로, 동북면 한 방면의 근심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또 전쟁의 이기고 이기지 못한 것은 지리(地利)의 득실에 달려 있는데, 저들 군사의 점거한 바가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도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아니하니, 이에 중한 이익을 가지고 멀리 우리의 오읍초(吾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의 백성들에게 주어서 그들을 유인해 가기도 하고, 지금 단주(端州)·독로올(禿魯兀)의 땅에 뛰어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을 노략질해 가니, 이로써 본다면 우리 요해지의 지리·형세는 저들도 진실로 이를 알고 있습니다. 신(臣)이 방면(方面)에 임무를 받고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삼가 변방의 계책을 계획하여 아뢰옵니다. 외적(外敵)을 방어하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하여 일제히 적군을 공격하는 데 있는데, 지금은 교련(敎鍊)하지 않은 군사로써 먼 땅에 흩어져 있다가 도적이 이르러서야 창황(倉皇)히 불러 모으게 되므로, 군사가 이르렀을 때는 도적은 이미 노략질하고 물러가 버렸으니, 비록 뒤따라 가서 싸워도, 그들이 기와 북을 익히지 않았으며 치고 찌르는 것도 연습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군사를 훈련하는 데에 있어 약속(約束)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號令)을 거듭 밝혀서, 변고를 기다려 군사를 일으켜 일의 기회를 잃지 마옵소서.
군사의 생명은 군량에 매여 있으니, 비록 백만의 군사라도 하루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하루의 군사가 되고, 한 달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한 달의 군사가 되니, 이는 하루라도 식량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도(道)의 군사는 예전에는 경상도(慶尙道)·강릉도(江陵道)·교주도(交州道)의 곡식을 운반하여 공급하였으나, 지금은 도내(道內)의 지세(地稅)로써 이를 대체시켰는데, 근년에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인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고갈되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승려와 무뢰인(無賴人)이 불사(佛事)를 핑계하고서 함부로 권세 있는 사람의 서장(書狀)을 받아서 주군(州郡)에 청탁하여 백성들의 한 말의 쌀과 한 자의 베를 빌린다고 하고는 섬이나 심장(尋丈)으로써 거둬들이면서 이를 반동(反同)이라 명칭하며 바치지 아니한 빚처럼 징수하여 백성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게 되었으며, 또 여러 아문(衙門)과 여러 원수(元帥)들의 보낸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며 기식(寄食)하여 백성의 피부를 벗기고 골수를 쳐부수니, 백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처소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십상팔구(十常八九)이니, 군량(軍糧)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모두 이를 금단(禁斷)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소서. 또 도내(道內)의 주군(州郡)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여서 땅이 좁고도 척박한데, 지금 그 지세(地稅)를 징수하는 것이 경지(耕地)의 많고 적은 것은 묻지고 않고 다만 호(戶)의 크고 작은 것만 보게 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道內)에서도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모두 이민(吏民)의 지록(地祿)인데도, 그 지세(地稅)는 관청에서 거둘 수가 없게 되어,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균등하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이 넉넉하지 못하니, 금후(今後)로는 도내(道內)의 여러 주(州)와 화령(和寧)에 한결같이 경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세(稅)를 부과하여 관청과 민간에 편리하게 하소서.
군사와 백성이 통속(統屬)되는 곳이 없으면 위급한 경우에 서로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로써 선왕(先王)의 병신년의 교지(敎旨)에 3가(家)로써 1호(戶)로 삼아 백호(百戶)로써 통솔하고, 통주(統主)를 수영(帥營)에 예속시켜, 사변이 없으면 3가(家)가 상번(上番)하고, 사변이 있으면 다 함께 나오고, 사변이 급하면 가정(家丁)을 모두 출동시키게 하였으니, 진실로 좋은 법이었습니다. 근래에는 법이 폐지되어 통속된 곳이 없으므로, 매양 군사를 징발할 적엔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으므로 불러모으기가 어려우며, 지금 또 가물어 흉년이 들어서 민심이 더욱 이산(離散)되었는데, 저들은 금전과 곡식으로써 미끼를 삼아 불러 들이고, 군사를 몰래 거느리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니, 한 지방의 곤궁한 백성이 이미 항심(恒心)도 없는데다가, 또 모두가 잡류(雜類)이므로, 저쪽과 이쪽을 관망하다가 다만 이익만을 따르게 되니, 실로 보전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원컨대, 병신년의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통속(統屬)이 있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단단히 매게 하소서.백성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매여 있고, 군사의 용감함과 겁내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의 군현(郡縣)을 다스리는 사람은 권세있는 가문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세력만 믿고 그 직무는 근신하지 아니하여, 군대는 그 물자(物資)가 모자라게 되고, 백성은 그 직업을 잃게 되어, 호구(戶口)가 소모되고 부고(府庫)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청렴하고 근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공정하게 선출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여 홀아비와 홀어미를 사랑하고 어루만져 주게 하며, 또 능히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서 국가를 방어하게 하소서.”하였다.
9월,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동북면으로부터 이르렀다. 이 번 행차에 돌아오다가 안변(安邊)에 이르니, 비둘기 두 마리가 밭 한가운데의 뽕나무에 모여 있는지라,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이를 쏘니 한 번에 비둘기 두 마리가 함께 떨어졌다. 길가에서 두 사람이 김을 매고 있었으니 한 사람은 한충(韓忠)이요,한 사람은 김인찬(金仁贊)인데, 이를 보고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잘도 쏩니다. 도령(都領)의 활솜씨여!”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웃으면서 말하기를,“나는 벌써 도령(都領)은 지났다.”하고는, 이내 두 사람에게 명하여 비둘기를 가져다가 먹게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조밥을 준비하여 바치니 그 성의를 보아 조밥을 먹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따라가 떠나지 않고서 모두 개국 공신(開國 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의 활달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도량과 인후(仁厚)하여 생명을 아끼는 덕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므로, 공훈(功勳)이 크게 빛났으나 더욱더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또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했으므로 일찍이 가문(家門)에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이 없음을 불만히 여겨,이방원으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아가서 학문을 배우게 하니, 이방원도 날마다 부지런하여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일찍이 이르기를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하였다. 비(妃) 강씨(康氏)가 매양 이방원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어찌 내가 낳은 아들이 되지 않았는가?”하였다. 이 해에 이방원이 과거(科擧)에 급제하니, 이성계가 대궐 뜰에 절하고는 매우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후에 제학(提學)에 임명되니 매우 기뻐하여, 사람을 시켜 관교(官敎)를 읽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매양 빈객(賓客)과 연회할 적에 이방원으로 하여금 연귀(聯句)를 하게 하고 문득 이르기를 “내가 손님과 함께 즐김에는 네 힘이 많이 있었다.”하였다. 이방원이 성덕(聖德)을 성취(成就)한 것은 비록 천성(天性)에서 출발하였지만, 실은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학문을 권장함이 부지런하였기 때문이었다.
신우(辛禑) 11년(1384) 을축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우왕을 따라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화살 만든 장인(匠人)이 새 화살을 바치니 지환(紙丸)을 쌓아 놓은 벼 위에 질서 없이 꽂아 놓게 하고 이를 쏘아 모두 맞히고는 좌우(左右)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짐승을 쏘면 마땅히 모두 등골을 맞힐 것이다.”하였다. 평상시에는 짐승을 쏘면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었는데, 이 날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그 등골을 바로 맞히니, 사람들이 그 신묘한 기술을 탄복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짐승을 쏠 적에,짐승의 왼쪽에 있으면 짐승의 오른쪽을 쏘아서, 짐승이 오른쪽으로부터 가로질러 달아나서 왼쪽으로 나오면, 짐승의 왼쪽을 쏘는데,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짐승을 쫓아서 짐승이 비록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나오더라도 즉시 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의 말을 돌려 꺾어서 채찍질하여 짐승으로 하여금 왼쪽에서 바로 달아나게 하고서, 그제야 이를 쏘는데 또한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히니, 이 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온갖 짐승을 쏘되, 반드시 쏠 때마다 그 오른쪽을 맞힌다.”하였다. 우왕이 일찍이 행궁(行宮)에서 여러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는데, 과녁은 황색 종이로써 정곡(正鵠)을 만들어 크기가 주발만 하게 하고, 은(銀)으로써 작은 과녁을 만들어 그 복판에 붙였는데, 직경(直徑)이 겨우2치 정도이었다.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이를 쏘았으나 은과녁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우왕은 즐거이 구경하기를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하였으며 좋은 말 3필을 내려 주었다. 이두란(李豆蘭)이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에게 말하기를 “세상에 드문 재주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장단(長湍)에서 사냥하는데 오명적마(五明赤馬)를 타고 높은 고개 위로 가니,고개 밑에 절벽(絶壁)이 있는데 노루 두 마리가 왼쪽으로 달려 내려오는지라 바로 달려 내려가면서 말을 채찍질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따라간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앞의 노루를 쏘아 바로 맞혀서 죽이고, 급히 말을 돌려서 멈추니, 절벽과 거리가 수보(數步)이므로,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탄복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웃으며 좌우(左右)의 사람에게 이르기를“내가 아니면 능히 멈추게 할 수 없다.” 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최영(崔瑩)과 친밀한 정(情)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로 성하니, 사람들 중에서 우왕에게 무함(誣陷)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으니, 만약 하루아침에 위급하면 마땅히 누구를 시키겠는가?”하였다. 매양 빈객(賓客)을 연회하려 할 적엔 최영(崔瑩)이 반드시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에게 이르기를 “나는 면찬(麪饌)을 준비할 것이니 공은 육찬(肉饌)을 준비하시오.”하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말하기를,“좋습니다.”하였다. 어느날 이 일 때문에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하는데, 노루 한 마리가 높은 고개에서 뛰어 내려왔으나, 지세(地勢)가 가파르고 낭떠러지인지라, 여러 군사들이 모두 내려갈 수가 없으므로, 산밑으로 비스듬히 따라 돌아서 달려가 모였는데, 갑자기 대초명적(大哨鳴鏑)의 소리가 위에서 내려옴을 듣고 위로 쳐다보니 고개 위에서 바로 달려 내려오는데,그 기세가 빠른 번개와 같았다. 노루와의 거리가 매우 먼데도 이를 쏘아 바로 맞혀서 죽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곧 말고삐를 당기면서 웃으며 말하기를,“이 사람의 주먹을 보라.”하였다. 최영의 휘하 군사인 현귀명(玄貴命)이 또한 군사들 가운데서 있다가 친히 이를 보고, 그 사실을 최영에게 말하니, 최영이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한참 동안이나 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일찍이 송도(松都)의 교외(郊外)에서 사냥하다가 엎드린 꿩을 보고, 사람을 시켜 이를 놀래어 날게 하고는 박두(樸頭)로써 쳐다보고 쏘니 맞아서 떨어졌다. 이 때 왕복명(王福命)이 고려의 종친(宗親) 한 사람과 함께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의 뒤에 섰다가,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하례(賀禮)하였다. 복명(福命)이 이내 그 화살을 청하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이를 주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화살이 스스로 맞히는 것인가? 다만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평상시에 나무공을 만드니 크기가 배만 하였다. 사람을 시켜 5, 60보(步) 밖에서 위로 던지게 하고는 박두(樸頭)로 이를 쏘았는데 바로 맞혔다.
9월, 명(明)나라 사신 장부(張溥)·주탁(周倬) 등이 국경에 이르러서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와 이색(李穡)의 안부를 물었다. 이 때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와 최영은 위명(威名)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므로,장부 등에게 이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 밖에 나가 있었는데, 최영은 교외(郊外)에 나가 둔치고 있었다. 이 때 왜적의 배 1백 50척이 함주(咸州)·홍원(洪原)·북청(北靑)·합란북(哈闌北) 등처에 침구(侵寇)하여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아 거의 다 없어졌다. 원수(元帥) 찬성사(贊成事) 심덕부(沈德符)·지밀직(知密直) 홍징(洪徵)·밀직 부사(密直 副使) 안주(安柱)·청주 상만호(靑州 上萬戶) 황희석(黃希碩)·대호군(大護軍) 정승가(鄭承可) 등이 왜적과 홍원(洪原)의 대문령(大門嶺) 북쪽에서 싸웠는데,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하여 먼저 도망했으나, 다만 심덕부만이 적진을 꿰뚫어 혼자 들어가서 창에 맞아 떨어졌다. 적군이 다시 찌르려고 하니, 휘하의 유가랑합(劉訶郞哈)이 달려 들어가서 적군을 쏘아 연달아 세 사람을 죽이고, 적군의 말을 빼앗아 심덕부에게 주고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적진에서 빠져 나왔다. 이에 심덕부의 군대도 또한 크게 패하였으므로 적의 세력은 더욱 성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가서 치기를 자청하여 함주(咸州) 관아에 이르렀다. 제장들의 영중(營中)에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70보(步) 거리에 있었다. 군사를 불러 이르기를,“내가 소나무의 몇째 가지에 몇 개째 솔방울를 쏠 것이니, 너희들은 이를 보라.”하고는, 즉시 류엽전(柳葉箭)으로 이를 쏘아, 일곱 번 쏘아 일곱 번 다 맞혀 모두 말한 바와 같으니, 군중(軍中)이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환호(歡呼)하였다. 이튿날 바로 적이 주둔한 토아동(兎兒洞)에 이르러서, 동(洞)의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 적의 무리가 먼저 동내(洞內)의 동산(東山)과 서산(西山)을 점거했는데, 멀리서 소라 소리를 듣고는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이 것은 이성계의 차거(硨磲)로 만든 소라 소리다.”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상호군(上護軍) 이두란·산원(散員) 고여(高呂),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조영규(趙英珪)·안종검(安宗儉)·한나해(韓那海)·김천(金天)·최경(崔景)·이현경(李玄景)·하석주(河石柱)·이유(李柔)·전세(全世)·한사우(韓思友)·이도경(李都景) 등 백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고삐를 당기면서 천천히 행군하여 그 사이를 지나가니, 적군은 우리 군사가 적고 행진이 느린 것을 보고는 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어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동쪽에 있던 적군이 서쪽에 있는 적군에게 나아가서 한 진을 만들었다. 동쪽의 적군이 둔친 곳에 올라가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군사들로 하여금 말안장을 벗겨서 말을 쉬게 하였다. 한참 있다가 말을 타려고 할 적에 백 보(步)가량 되는 곳에 마른 풀명자나무가 있는지라 연달아 화살 세 개를 쏘아 모두 바로 맞히니, 적군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고 탄복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왜말 아는 사람을 시켜 큰소리로 이르기를,“지금의 주장(主將)은 곧 이성계(李成桂) 만호(萬戶)이니 너희들은 속히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이다.”하니, 적의 추장(酋長)이 대답하기를,“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하고는, 그 부하와 더불어 항복하기를 의논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말하기를,“마땅히 그들의 게으른 틈을 타서 공격해야 할 것이다.”하고는, 드디어 말에 올라 이두란·고여(高呂)·조영규 등을 시켜 그들을 유인해 오게 하니, 선봉(先鋒) 수백 명이 쫓아오는지라 거짓으로 쫓기는 체하면서 스스로 맨 뒤에 서서 물러가 복병(伏兵) 속으로 들어갔다가, 드디어 군사를 돌이켜서 친히 적군 20여 명을 쏘니 시윗소리에 따라 모두 죽었다. 이두란·종검(宗儉) 등과 함께 달려서 이를 공격하고, 복병(伏兵)이 또한 일어났다. 이에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몸소 사졸들의 선두에 서서 단기(單騎)로 적군의 후면을 충돌하니,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리었다.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것이 서너너덧 번 되는데, 손수 죽인 적군이 계산할 수 없으며, 쏜 화살이 중갑(重甲)을 꿰뚫어 혹은 화살 한 개에 사람과 말이 함께 꿰뚫린 것도 있었다. 적의 무리가 무너지므로 관군(官軍)이 이 기세를 이용하여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내를 막아, 한 사람도 빠져 도망한 자가 없었다. 이 싸움에 여진군(女眞軍)이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함부로 죽이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영을 내리기를,“적군이 궁지에 몰려 불쌍하니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하라.”하였다. 남은 적군은 천불산(千佛山)으로 들어가므로 또한 다 사로잡았다. 우왕이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에게 백금(白金) 50냥, 옷의 겉감과 안찝5벌, 안장 갖춘 말을 내리고, 또 정원십자공신(定遠十字功臣)의 칭호를 더 내렸다.
신우(辛禑) 14년(1388) 무진 정월, 이 때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니, 그의 무리 영3사(領三司) 임견미(林堅味)·좌사(左使) 염흥방(廉興邦)·찬성사(贊成事) 도길부(都吉敷) 등이 요로(要路)에 나누어 점거하여 돈을 받고 관작을 팔며, 남의 전정(田丁)을 빼앗아 그 탐욕과 포학을 자행하여, 관청과 민간이 빈곤하여졌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최영과 더불어 그들의 하는 짓을 분히 여겨,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우왕을 인도해서 이들을 제거하니,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여 길가는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었다. 임견미(堅味) 등이 참형(斬刑)을 당하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로써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삼았다. 2월, 최영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앉아,최영이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이 썼던 사람을 모두 내쫓으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말하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시일이 오래 되었으므로, 무릇 사대부(士大夫)들은 모두 그들의 천거한 사람이니, 지금은 다만 재주의 현부(賢否)만을 물을 것이지, 그들의 이미 지나간 일까지 어찌 허물하겠습니까?”하였으나, 최영은 듣지 아니하였다. 최영이 전 원주 목사(原州 牧使) 서신(徐信)이 곧 이성림(李成林)의 동서(同壻)인 관계로써 함께 참형(斬刑)을 행하고자 하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죄인과 괴수가 이미 멸족(滅族)되고 흉악한 무리도 이미 참형(斬刑)을 당했으니, 지금부터 마땅히 형살(刑殺)을 중지하고 덕음(德音)을 펴야 될 것입니다.”하였으나, 최영이 또한 듣지 아니하였다.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비록 군중(軍中)에 있더라도 매양 창을 던지고 휴식할 동안에는 유사(儒士) 유경(劉敬) 등을 인접(引接)하여 경사(經史)를 토론(討論)하였으며, 더욱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보기를 좋아하여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慨然)히 세상의 도의(道義)를 만회(挽回)할 뜻을 가졌었다.
처음에 명(明)나라 황제가 말하기를,“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타타르족인 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최영이 백관(百官)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명나라에 줄 수 없습니다.”하였다. 우왕은 최영과 비밀히 의논하여 요동(遼東)을 치려고 하니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사제(私第)에 나아가서 옳지 못함을 힘써 말하니, 최영은 자송(子松)이 임견미(林堅味)에게 편당(偏黨)해 붙었다고 핑계하고는 곤장을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시켰다가, 조금 후에 그를 죽였다. 우왕이 서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의 “요동(遼東) 군사가 강계(江界)에 이르러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울면서 말하기를,“여러 신하들이 나의 요동을 공격하려는 계책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하였다. 명(明)나라에서 다시 요동 백호(遼東 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어 철령위(鐵嶺衛)를 세움을 알렸다. 3월, 우왕은 홀로 최영과 요동을 공격하기로 계책을 결정하였으나, 그래도 감히 공공연히 말하지는 못하였다. 사냥한다고 핑계하고는 서쪽으로 해주(海州)에 행차하였다.
4월, 봉주(鳳州)에 머물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에게 이르기를,“과인(寡人)이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卿) 등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하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아뢰기를,“지금에 출사(出師)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함입니다.”하니, 우왕이 자못 옳게 여겼다. 이미 물러나와서 최영에게 이르기를,“내일 마땅히 이 말로써 다시 임금에게 아뢰시오.”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좋습니다.”하였다. 밤에 최영이 들어가서 우왕에게 아뢰기를,“원컨대, 다른 말은 듣지 마소서.”하였다. 이튿날 우왕이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에게 말하기를,“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가 없소.”하니, 고려국35대 국왕 이성계가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큰 계책을 성공시키고자 하신다면 서경(西京)에 어가(御駕)를 머무르셨다가 가을에 출사(出師)하면, 볏곡이 들판을 덮어 많은 군사가 식량이 넉넉하게 되어 북을 치면서 행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출사(出師)할 시기가 아니므로, 비록 요동의 한 성(城)을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리므로 군대가 전진할 수도 없고 퇴각할 수도 없으며, 군대가 피곤하고 군량이 없게 되면 다만 화(禍)를 초래할 뿐입니다.”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경(卿)은 이자송(李子松)의 일을 보지 못했는가.”하니, 아뢰기를,“이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명성이 뒷 세상에 전하지마는 신(臣) 등은 비록 살아 있더라도 이미 계책을 잘못 썼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였으나, 우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물러나와 울고 있는데, 휘하의 군사가 말하기를,“공(公)은 어찌 이다지도 슬퍼하십니까?”하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말하기를,“백성의 재화(災禍)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하였다.
우왕이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道)의 군사를 독려 징발하여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를 만들고, 또 승려들을 징발하여 군사를 만들고, 최영을 8도 도통사(八道 都統使)로 삼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로 삼고,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보냈다.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이 합하여 5만여 명인데, 여러 사람이 10만 명이라 선전하였다. 군사가 출동하려 하는데 우왕은 술에 취하여 해가 늦도록 일어나지 아니하니, 여러 장수들이 하직하지 못하였다. 조금 뒤에 술이 깨니 석포(石浦)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와 여러 장수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였다. 여러 군대가 평양을 출발하는데, 최영이 우왕에게 아뢰기를,“지금 대군(大軍)이 출전하는 도중(途中)에 있는데 만약 열흘이나 한 달 가량 지체한다면 대사(大事)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신(臣)이 가서 이를 감독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우왕이 말하기를,“경(卿)이 간다면 누구와 더불어 정사(政事)를 하겠는가?”하였다. 최영이 굳이 청하니, 우왕이 말하기를,“그렇다면 과인(寡人)도 또한 가겠다.”하였다. 어느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요사이 요동(遼東) 군사가 모두 오랑캐 정벌에 갔기 때문에 성중(城中)에는 다만 한 사람의 지휘관이 있을 뿐이니, 대군(大軍)이 만약 이른다면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하니, 최영이 크게 기뻐하여 그 사람에게 물품을 후히 주었다. 우왕은 홍무(洪武)의 연호(年號)를 정지시키고,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오랑캐 의복을 다시 입게 하고, 상시 대동강(大同江)에 나가서 오랑캐의 음악을 부벽루(浮碧樓)에 베풀어 놓고 자기 스스로 호적(胡笛)을 불면서 즐거워하여 돌아올 줄을 잊고 있었다. 매양 나가서 놀 적에는 문득 오랑캐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창우(倡優)들로 하여금 갖가지 유희(遊戲)를 보이게 하여,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드나들면서 피리를 불고, 임금과 신하가 주색(酒色)에 빠져 사람을 죽임이 날로 심하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우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내려 주었다.
5월, 대군(大軍)이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니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므로,우왕이 소재(所在)에서 목 베도록 명하였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좌우군 도통사(左右軍 都統使)가 상언(上言)하기를,“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洲中)에 머물어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이 곳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는 큰 내가 많이 있으니 잘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일의 실상인 사상(事狀)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황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큰 일을 당하여 말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불충(不忠)이니, 어찌 감히 죽음을 피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국가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이후로 큰 나라 섬기기를 근실히 하여, 현릉(玄陵)께서 홍무(洪武) 2년에 명(明)나라에 복종하여 섬겨 그 올린 표문(表文)에, ‘자손만세(子孫萬世)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뜻을 계승하여 세공(歲貢)의 물품을 한결같이 조지(詔旨)에 의거했으므로, 이에 황제가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玄陵)의 시호(諡號)를 내려 주고 전하의 작(爵)을 책봉하였으니,이 것은 종사(宗社)의 복(福)이요 전하의 성덕(盛德)입니다. 지금 유 지휘(劉 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위(鐵嶺衛)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 제학(密直 提學)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表文)을 받들어 품처를 계획했으니, 대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 아닙니다.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城)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필할 수 없으며 공격하여도 빼앗음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군사를 돌이키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소서.”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아니하고, 환자(宦者) 김완(金完)을 보내어 군사를 전진하도록 독촉하였다. 좌우군 도통사는 김완을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아니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가서 빨리 군사를 돌이킬 것을 허가하도록 청하였으나, 최영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군중(軍中)에서 거짓말이 나기를,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휘하의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는데 벌써 말에 올랐다.”하니, 군중이 떠들썩 하였다. 조민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기(單騎)로 달려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공은 가시는데 우리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하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말하기를,“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공은 이러지 마십시오.”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만약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天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宗社)·생민(生民)의 재화(災禍)가 즉시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또한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卿) 등과 함께 왕을 보고서 친히 화(禍)되고 복(福)되는 일을 진술하여 임금 측근의 악인(惡人)을 제거하여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우리 동방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공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에 이르러 흰 말을 타고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가지고 언덕 위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니, 군중(軍中)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옛부터 지금까지 이 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하였다. 이 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했는데도 물이 넘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가고 난 후에 큰 물이 갑자기 이르러 온 섬이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이 때 동요(童謠)에 “목자(木子: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군인과 민간인, 늙은 이와 젊은 이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를 노래하였다.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대군(大軍)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우왕에게 알렸다. 이 날 밤에 이방과(상왕(上王) 정종)가 그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李豆蘭)의 아들 화상(和尙) 등과 함께 성주(成州)의 우왕의 처소로부터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의 군대 앞으로 도망해 갔으나, 우왕은 해가 정오(正午)가 되어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길에서 대접하는 수령(守令)들을 만나 그들의 말을 다 빼앗아 타고 갔다. 우왕은 대군(大軍)이 돌아와 안주(安州)에 이르렀음을 알고 말을 달려 개경으로 돌아왔다. 군사를 돌이킨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니,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말하기를,“속히 행진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므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될 것이다.”하였다. 매양 군사들을 경계하기를,“너희들이 만약 승여(乘輿)를 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오이 한 개만 빼앗아도 또한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하였다. 연로(沿路)에서 사냥하면서 짐짓 느리게 행군하니, 서경(西京)에서 송도(松都:개성)에 이르는 수백 리 사이에 우왕을 좇던 신료(臣僚)와 개경 사람과 이웃 고을 백성들이 술과 음료(飮料)로써 영접하여 뵙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동북면의 인민과 여진(女眞)으로서 본디 종군(從軍)하지 않던 사람까지도,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군사를 돌이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서 이르게 된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왕은 도망해 돌아와 공민왕이 조성한 2층 팔각전(八角殿)을 짓고 주변에 꽃과 나무를 심은 화원(花園)으로 돌아갔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하여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무기를 가지고 시위(侍衛)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았다.
6월 초1일,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송경(松京)의 동문(東門)인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둔치고 류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송경의 나성 서문(羅城 西門)인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니, 최영이 맞아 싸워서 모두 이를 물리쳤다. 류만수를 보낼 적에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류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膽)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 때 들에 말을 놓아 먹이고 있었는데, 류만수가 도망해 돌아오므로, 좌우(左右)의 사람이 이 일을 아뢰니 대답하지 아니하고 장막 속에서 굳게 누워 있었다. 좌우의 사람이 두세 번이나 이 일을 아뢰니, 그 후에 천천히 일어나서 음식을 들고, 명하여 말에 안장을 얹게 하고 군사를 정돈하여 장차 출동하려 하는데, 키가 작은 소나무 한 주가 백 보(步) 밖에 있는지라 소나무에 활을 쏘아 승리할 것인가 승리하지 못할 것인가를 점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합치고자 하여 마침내 이를 쏘니, 화살 한 개에 소나무 줄기가 곧 끊어졌다. 이에 말하기를,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하니, 군사들이 모두 하례(賀禮)하였다. 진무(鎭撫) 이언(李彦)이 나가서 꿇어앉으며 말하기를,“우리 영공(令公)을 모시고 간다면 어느 곳이든지 가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숭인문으로 입성(入城)하여 좌군(左軍)과 앞뒤에서 협격(挾擊)하면서 전진하니, 도성(都城)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飮料)를 가지고 와서 영접 위로하고 군사들이 수레를 끌어내어 길을 통하게 하였다. 늙은 이와 약한 이는 산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 기뻐서 고함을 지르며 뛰고 있었다. 조민수는 흑색 대기(大旗)를 세우고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황색 대기(大旗)를 세웠다. 흑색 기가 영의서교(永義署橋)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조금 후에 황색 기가 선죽교(善竹橋)로부터 남산(男山)에 오르니, 최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점거했다가 황색기를 바라보고는 도망해 갔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는 마침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소라를 한 번 불었다. 이 때 행군(行軍)하던 여러 군대들은 모두 각(角)을 불었는데도 유독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의 군대만이 소라를 불었다. 도성 사람이 소라소리를 듣고는 모두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의 군사인 것을 알았다. 이에 군사가 공민왕이 조성한 2층 팔각전(八角殿)을 짓고 주변에 꽃과 나무를 심은 화원(花園)을 수백 겹이나 포위하였다. 우왕은 영비(靈妃)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는데, 곽충보(郭忠輔) 등 3, 4인이 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내었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니, 최영은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가 최영에게 말하기를,“이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다만 대의(大義)에만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통한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하면서 서로 마주보고 울었다.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에 유배(流配)시켰다.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판3사(李 判三司)가 모름지기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다.”하니, 최영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노했으나 감히 말하지는 못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말하기를,“이인임의 말이 진실로 옳았다.”하였다. 두 도통사(都統使)와 36명의 원수(元帥)들이 대궐에 나아가서 배사(拜謝)하고,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은 개경에 있는 기로(耆老)와 재신(宰臣)·추신(樞臣)과 함께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를 뵈오니 이색과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하고 전문(殿門) 밖으로 군사를 돌이켰다. 이보다 먼저 잠저(潛邸)에 있을 때 마을에 동요(童謠)가 있었는데, 그 동요에 “서경성(西京城) 밖엔 화색(火色)이요, 안주성(安州城) 밖엔 연광(煙光)이라. 그 사이에 왕래하는 이원수(李元帥)여, 원컨대 창생(蒼生)을 구제하소서.”하더니, 얼마 안 가서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킨 일이 있었다. 우왕이 조민수(曺敏修)를 좌시중(左侍中)으로 삼고,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를 우시중(右侍中)으로 삼았다. 전교 부령(典校 副令)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하여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 보기를 청하여 곽광전(霍光傳)을 가져와서 바치므로,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그 것을 읽게 하고 들었다.조인옥이 다시 왕씨(王氏)를 왕으로 세우자는 의논을 남김없이 진술하였다.우왕이 밤에 환자(宦者) 80여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고려국 35대 국왕 이성계 및 조민수·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달려왔으나, 이들이 모두 전문(殿門) 밖에서 군사를 둔치고 집에 있지 아니한 까닭으로 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우왕이 왕위를 사양하고 강화(江華)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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