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증언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마침내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자리하신 식탁에 죄인인 한 여자가 다가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어 발랐다.
이를 속으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사이에게 예수님께서는 빚을
탕감받은 이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시며, 많은 죄를
용서받는 곳에 큰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여인을 용서하신다(복음).
| |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1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50
그때에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
오늘 복음 말씀에는 그 어떤 설명이나 해설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 안에 깊이 머무르며 우리 스스로를
똑똑히 비추어 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여인처럼 용서받은 이로서 눈물을 흘릴 만큼
깊이 감사하며 주님 가까이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집주인인 바리사이처럼 속으로 여인과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판단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바리사이에게서
자신과의 더 큰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잖은’ 바리사이는 예수님에 대한 호감으로 자신의 집에
초대했겠지만, 그의 속내는 아직 그분께 가까이 가려는 갈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깊이 감사할 것도, 가장 낮은 자세에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고 입을 맞추는 순종의 모습을 보일 의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렇게 남아 있기 쉬울 것입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 자신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애써 예수님께 매달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을 ‘교만’이라고 부른다면 너무 야박할까요?
교만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은총’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하고 경건해 보이는
삶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은 교만에 물들었다면,
가장 중요한 것, 곧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순간’들을
붙잡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현대의 출중한 그리스도교 작가 가운데 하나인 영국의 루이스는
왜 교만이 신앙의 가장 큰 장애인지를 그의
『순전한 그리스도교』에서 이렇게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항상 눈 아래로 사물과 사람을 보며,
그러는 한 그는 자기보다 높이 있는 존재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
-출처 매일 미사-
♬ 내게 있는 향유 옥합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