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 말씀의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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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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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의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을 용서하며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단을 거슬러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하였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훗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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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몸은 하나이지만 그 지체는 여럿이며,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이듯이 모든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한 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무엇보다 다양한 은사를 받은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되 각자는 지체임을 알아야 한다(제1독서).
나인이라는 고을로 들어가시던 예수님께서는 죽은 외아들의
장사를 지내러 가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예수님께서는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그 외아들을 살려 주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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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12-14.27-31ㄱ
형제 여러분,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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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17
그 무렵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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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나인이라는 고을로 들어가시려는데,
마침 사람들이 죽은 젊은이의 관을 메고 그 어머니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한 성서학자가 잘 지적한 대로, 오늘 복음의 사건은 이처럼
‘삶의 행렬’과 ‘죽음의 행렬’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이 ‘삶과 죽음’이 만나는 자리의 중심이십니다.
다른 기적 이야기와는 달리 여기서는 사람 편에서의 간구와 신앙이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주도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관에 ‘손을 대시어’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신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에게는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 죽은 젊은이에게는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살아난 아들은 삶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삶과 죽음의 세계 모두의 주인이시며
죽음의 권세도 그분께는 복종한다는 것이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주권과 권능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
죽음을 이기시는 부활과 생명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봅니다.
다른 한편,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사용하신 것은 전적으로
그분께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와 연민이
죽은 외아들과 그 어머니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관점에 대한 가장
분명한 기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신
동시에 인간의 운명에 마음을 쓰시는 연민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하느님이 침묵하시고 무력하신 분,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단지 ‘철학자의 신’인 것처럼 느껴지는 유혹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기적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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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주님은 나의빛이요 생명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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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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