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8. 22:02ㆍ집짓기
한국 목조건축의 흐름 문화유산일반상식
우리 민족의 건축문화는 신석기시대의 수형주거(움집)으로부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타 민족과의 문화교류와 생활자체의 다변화로 점차 기술이 혁신되고 건축재료의 변혁에 의해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건축이란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이건 그 건축이 놓여지는 지세와 기후,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산출되는 재료 등의 자연적 조건과 인문적인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유동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더욱이 그 민족의 풍습, 신앙, 취미 등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또한 건축문화는 다른 문화의 요소들처럼 인접한 다른 민족의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주면서 서로간의 연계성을 가지고 동질의 문화요소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북방민족의 문화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에서 받아들여진 내용과 요소는 마음과 피부에 적응될 수 있는 것으로 소화시켜 조형으로 표출되었다. 이와같은 현상은 비단 건축문화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고, 조각, 회화, 공예 등의 미술분야에도 나타나고 있어 우리 민족 고유의 미적 의식을 뚜렷하게 하였다. 그러나, 민족고유의 미적 의식은 시간성과 공간성에 따라 그때 그때의 특성을 나타냈으며, 그 특징적 요소는 한 분야의 조형미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반적인 문화유산에 반영되었다.
우리 건축문화의 역사적 흐름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서의 본격적인 건축활동 시기는 기원전 108년 이후 한사군이 설치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아직 삼국이 왕권을 확립하지 못하고 부족국가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시기여서 중국대륙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여 모방적 건축활동이 이루어진 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한문화는 이 시기 이전의 우리 고유의 건축문화를 중국형으로 크게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이 자극적 영향은 후일의 건축문화 창조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고구려가 한사군을 멸망시키고 기원 후 4세기에 들어서서 왕권이 확립되어 국가다운 국가로서 체제를 정비하였고 특히 372년(소수림왕 2년)에는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다시 한번 건축 활동상 큰 변혁기를 맞게 되었다.
그 구체적인 예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385년 고구려 땅에 이불란사와 초문사가 세워지고 392년(광개토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사찰이 창건되고, 연이어 많은 불사활동이 전개되었음을 통해 당시의 건축활동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남한 땅의 백제나 신라에서도 고구려에 뒤이어 불교를 받아들여 불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한반도 전역은 유사이래 가장 활발한 건축활동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와 같은 종교적 건축할동은 건축기술의 숙련도 향상과 건축경제의 발전에 크나큰 추진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 바탕 위에 기타 건축의 건설과 건축재 개발에도 공헌한 바 컸으리라 생각된다.
고구려의 경우, 정치적 목적의 궁궐을 비롯해 군사 목적의 성곽, 그 외에 당시의 사회상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벽화고분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고분벽화에서 밝혀진 일반적인 건축술은 목조가 주된 형식이고 거기에 그려진 공포의 양식은 실제의 목조건축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삼실총을 비롯하여 산연화총, 환문총 등에서는 기둥과 공포의 윤곽만을 선화로 간단히 그렸으나, 구신총, 용강대묘, 안악1,2,3 호분 등에서는 구체적으로 공포의 구성을 상세하게 나타내었고 구조도 세부까지 치밀하게 그렸다. 여기에 나타나있는 가구부재중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공포의 여러 가지 형태이다. 공포는 동양건축에서만 보이는 특색있는 기법으로 그 위치는 기둥과 지붕의 중간에 놓여 지붕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구조상의 기능이 원래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기능적인 역할은 차차 의장적 기능으로도 크게 발전되어 그 형태에 적지않은 신경을 썼던 부분이며 그 결과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과정을 예민하기 나타내는 요소가 되었다. 공포의 구성부재는 기둥 바로 위에 놓은 주두와 전후좌우로 전개되는 각종 첨차, 그리고 첨차와 첨차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소로, 첨차 위에 놓이는 장혀로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같은 시기의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석굴 세부에 나타난 요소와 공통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백제의 경우 6세기 초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뒤이어 6세기 말 승려를 비롯해 조사공, 노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이 도일하여 나라에 있던 비조사를 세우고 그 밖에 일본 건축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사찰배치 형식은 중국 육조에서 시작되었던 일탑일당으로 남북일직선의 축으로 된 배치형식이 일반적인 플랜이었다. 백제의 정림사, 금강사의 배치도 남으로부터 중문, 탑, 금강, 강당의 순으로 남북일직선상에 놓이고 중문에서 강당까지를 장방형의 회랑으로 둘러 막았다. 이와같은 사찰배치는 일본의 사천왕사9593_에도 보이며, 그 근원은 백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안에서 가장 중요하였던 건축은 탑이었다. 13세기에 타버린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에 건립된 거탑으로 맨 아래층의 한변이 약 22m, 탑의 층고가 약 80여m에 달했던 목조거탑으로 가구수법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백제의 목조건축은 남아있는 유구가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목조건축을 충실하게 모방한 익산 미륵사지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석탑들에서 목조건축의 기법 내용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더욱이 백제시대 유구에서 나타난 우수한 와당이나 초석들이 당시의 기술 수준을 말하여 준다.
신라는 뒤늦게 불교를 공인(527)하였으나, 불교는 고구려 못지 않게 국가형성과정에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하여 널리 보급되고 신봉되어 국도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조성되었으며 각개 건물도 뛰어난 기법에 의해 건립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목조유구가 단 하나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라시대의 건축자료는 역사 사찰유지가 압도적으로 가장 많으며 그 대표적인 사지는 경주의 황룡사지라 할 수 있다. 황룡사는 553년 창건되고 그 후 645년에 신라 삼보의 하나인 9층목탑이 완성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중엽 이후 통일신라는 당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불교예술은 한충 더 고조되었다. 특히 경덕왕대에 이르러서는 각종 예술분야가 가장 원숙하였던 황금기로 건축 활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력이 팽배해지고 태평성대를 누렸던 까닭에 있다고 보인다. 건축에서는 기법이나 조형의식, 실용수학의 응용 등이 치고도에 달하였음은 현재 유지에서 보이는 정리된 기단이라든가, 정연한 초석군, 그리고 세련된 와당의 조각기법 등에서 찬란하였던 당시의 건축면모를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족이하 일반민가에까지 건축제한을 하여 신분에 맞는 집을 짓도록 하고 와당이나 겹처마의 사용제한 및 공포, 단청, 금은제 장식품 등의 사용 여부를 규제하였던 사실들을 보면 제한받지 않았던 건축의 호사스러움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가람배치도 일금탕일탑식이나 삼금당일탑식의 통식에서 일금당쌍탑식으로 바뀌고 있다. 8세기 중엽에 중창된 불국사만 보더라도 평지사찰과는 달리 산록을 효과있게 이용하여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무리없이 융화시키려는 전통적 한국건축의 근본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당시 목조건축의 세부가 어떠하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석조물인 석탑, 부도 등에 나타난 세부와 금동제의 소품, 그리고 안압지 출토의 첨차, 금구 등을 통해 대략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하면 기둥에는 알맞은 엔타시스(배흘림)가 있고 주두는 굽받침이 없는 곡면의 하단을 갖는 것이고, 첨차형은 하단곡선이 원호로 되고, 상면 양측에는 공안을 두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건물내부의 가구기법은 확실하지 않으나 유적에 남아 있는 초석의 배열로 보아 대략 알 수 있는데 내진과 외진이 분리되었던 것 같다. 지붕의 형식도 맞배지붕은 물론,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등이 모두 실존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현종이 고려시대 건물들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왕조에 들어와서도 초기에서 중기까지에는 건축의 양식이 크게 변화되지 않고 통일신라시대의 양식 그대로가 전승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초기나 중기에 건립된 확실한 절대연대가 밝혀진 건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안항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고려시대 궁궐지로서 개성 만월대에 남아 있는 초석과 석재 유구에 의해 궁궐배치 형식을 알 수 잇고, 기록으로서는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 의 자료로서 일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목조건추긍로서 현재까지 전해 오는 건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황주 성불사 응진전, 연탄 심원사 보고나전 등 여러 동이 남아잇다. 이들 건물 중에서 고려 중기 정도에 건립된 것은 봉정사 극락전이다. 이 건물은 1972년 해체조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1363년9공민왕 12년) 옥개부분을 보수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건립연대는 1363년보다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앞선다고 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 같다. 이 건물은 연대보다도 건물의 세부양식을 분석해 보면 중국건축 등 현존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산서성 오대산의 남선사대전이 보여주는 가구기법과 공통된 요소가 많아 신라와 당나랑에서 8세기 경 유행하던 건축양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에 나타나는 주두형식도 봉정사 극락전의 주두형식과 일치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이 고려 중기까지는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봉정사 극락전 이후의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 고려말기 건물들의 세부양식 역시 봉정사의 그것과 약간씩 밖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 않아 이들이 고려적인 건축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이 해체조사되기 이전에 한국 현존 최고의 건물로 공인되었던 건물로 유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수리된 바 있는 이 건물은 그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1358년에 소실되어 1376년에 개창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같은 경내에 있는 조사당이 1377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져 같은 시기 건물로서는 너무나 시대적인 양식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조사당보다는 무량수전이 100년 내지 150년 정도 먼저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학계에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이 설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설이 있다. 즉,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목조건축의 양식적인 계통에서 볼 때 서로 다른 계통의 양식이라는 설 때문이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일제 강점기 수리 때인 1308년에 건립되었다는 상량문의 발견으로 건립 절대연대가 가장 오랜 건물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묵서명이 발견된 건물들은 개개의 건축 비교에 의해 완성된 양식연대를 절대연대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건축의 연구 제 1단계는 시대구분이라는 양식상의 문제해결에 있고 이 문제는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개개 건축의 특징을 비교, 정리하여 분류하는데 있다. 특히 목조건축에 있어서는 고려 말 조선 초에 걸쳐 더욱 그러한 작업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건축양식들이 그대로 전승되다가 고려 말 북방의 원나라 영향을 받아 차츰 그 인기를 얻게 된 다포식 건축물이 조선기에 들어와 급속히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사찰의 정전이나 궁궐의 주요 건물들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유학을 국교로 삼게 된 조선왕조는 모든 면에서 형식위주로 치우쳐 건축에서도 주심초양식의 건물을 지양하고 장려웅대한 다포식 양식을 선호하였던 것 같다.
이 다포식 건축은 주심포식 건축양식과 달리 공포구성이 상부 구조체의 집중하중을 분산시기기 위한 아이디어에서 창안된 결구법으로서, 주심포식에서 기둥에만 놓여졌던 공포를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주상공포와 똑같은 공포를 올려 주심으로만 하중이 집중되었던 주심포식에서 발전적으로 개량된 공포 배치의 형식이다. 다포식 건물은 이러한 역학적인 장점 외에도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내부공간을 시원스럽게 처리할 수 있는 가구형식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14세기 유구로는 서울 숭례문이 대표적인 것이며 15세기 건물로는 개심사 대웅전 등이 있다. 이들 건물들은 주심포식의 경쾌하고 간결한 기법에 대응하는 장중하면서도 강한 힘읗 내뿜는 듯한 기백을 표출해 조선왕종의 새로운 건축상을 보여 주고 잇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늦어도 16세기 중엽까지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말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그 늠름했던 14~16세기간의 건물들은 소실된 것이 많아 오늘날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인조 이후 건축활동은 물론, 건축의식에까지도 침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건축양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와 전반적으로 작풍은 섬약해지고 세부적으로는 정돈이 흩어진 복잡성을 띠게 되었고, 결국에는 익공계 양식의 유행풍조로 돌입해 들어가게까지 되었다. 이 익공계 양식은 주심포계 공포양식이 간략화되어 첨차가 마침내 상하 각 1매의 판재로 겹쳐져 짜여진ㄴ 것으로 윤곽의 조각은 장식 위주로 변화된 공포를 갖고 있는 건축이 분명하다. 그것은 고종 때 재건된 경복궁의 경회루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초인 1605년 건립된 완주 화암사 극락전과 같이 하앙식 기법도 보인다. 이 건물은 공포에 하앙이 삽입된 건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건물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중국이나 일본건축에서는 많이 사용되는 건축양식이지만 우리나라 건축에서에서는 흔치 않다. 그러나 삼국기에는 유행하였던 건축양식으로 추정되는 것이므로비록 17세기 초에 나타나지만 그 뿌리는 오래된 것이며, 그러한 흔적은 금산사 미륵전 등에서도 보이므로 특정시기, 특정지역에서 한 때 유행하였던 건축양식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의 건물들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장식적 요소만이 짙고 구조상 불합리한 낭비성향이 두드러진다고들 말하지만 가장 가깝게 우리에게 와닿는 전통건축의 종착역이며 또 시발점이 될 수 있는 큰 뜻이 담겨진 건축유산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출처_『문화재대관 - 국보 편』, 문화재청
- 다음카페 <평창공예관> 자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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