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가 된 완주 화암사의 하앙식 구조

2015. 2. 20. 21:35집짓기

 

 

 

 

 

     

국보가 된 완주 화암사의 하앙식 구조 | 사찰

 

구룡초부 2011.11.30 12:16
  
 

 

 

11/28일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극락전의 하앙식(下昻式) 구조에 있다고 한다.

 

 

….화암사 극락전은 ….

국내에서 유일한 하앙식(下昻式) 목조 건축물로….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해 지렛대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더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건축 양식

 

중국과 일본에서는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건물이 알려 지기 전까지는

유물 등을 통해서만 존재 가능성을 추정해 왔다……

 

 

 

화암사(花巖寺)

 

완주 화암사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절이다.

 

이 화암사를 한 마디로 뭐라고 정리할까?

 

어느 고대사(古代史)학자 하나가 단군 조선을 둘러 싼 논쟁 끝에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니 뭐니 하며 집중 난타를 당하자 이런 푸념을 하였다.

 

….우리 조상이 고대광실(高臺廣室) 짓고 살았다면 나도 듣기 좋다.

그러나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옹달샘 옆에 초가집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가 우리 조상이 살 던 곳이라면 또한 소중하고 정답지 않은가?

 

한단고기, 대쥬신제국 따위의 논쟁은 화암사와 관계 없지만

이 고대사학자의 표현은 빌리고 싶다.

 

화암사는 바로 옹달샘 옆 초가집같은 절이다.

 

 

 

안도현 시인도 나와 같은 느낌인지

() ‘화암사 내사랑을 지었다.

 

 

화암사 내사랑 (안도현의 시)

 

전략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중략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 주지는 않으렵니다.

 

 

잘 늙은 절,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 주고 싶지 않은 절이 바로 화암사다.

 

 

나는 전에 화암사에 대하여 한 차례 글을 쓴 바 있는데,

http://blog.daum.net/robustus/16887439

 

 

이번에 국보로 승격시킨 주 이유인 하앙식(下昻式)에 대하여

먼저 글 중 해당 부분을 뽑아 아래 옮겨 본다.

 

 

 

하앙(下昻)

 

昻은 훈이 오를 앙이다.

 

집을 지을 때 우리 조상들이 제일 고민했던 문제는

지붕과 기둥을 여하(如何)히 연결하느냐,

지붕의 하중을 기둥에 어떻게 분산시키느냐 이었던 것 같다.

 

보통 기둥 위에 길이 방향으로 도리를 얹고 그 위로 지붕에서

내려오는 서까래를 받친다.

 

그러나 그래서는 낮고 답답한 느낌이 든다.

따라서 규모가 좀 되는 건물은 기둥 위로 구조물을 넣어

서까래를 높이 쳐든다.

 

 

위 사진은 기둥 위로 나무 부재들을 짜 넣은 공포(+共 包) 형식 중 다포식이다.

 

그런데 처음에 지붕과 같이 경사지게 기둥을 넣은 시절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하앙식 구조라고 한다.

 

 

 

사진: 하앙식 구조.

 

중국에서는 이 하앙식 구조가 요(),() 시대 나타나다가 사라지고

일본은 나라(奈良) 시대부터 후대까지 꾸준히 이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에는 하앙식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번에 국보가 된 화암사 극락전이 유일하다.

 

 

 

사진: 화암사 극락전 하앙

 

서까래가 기둥 밖으로 빠져 나온 부분인 처마가 있고

그 밑을 길게 가로질러 처마 도리가 놓였다.

 

처마 도리 밑으로 툭 튀어나온 나무가 하앙(下昻)인데

사진 상 경사를 구별하지 어렵겠지만

땅과 평행이 아니라 지붕, 처마와 같이 사선 방향으로 벋어 있다.

 

하앙의 끝은 용머리고 그 아래는 구름 문양을 조각해 넣었다.

하앙과 하앙 사이는 널판자로 막고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극락전 안으로 들어가 구조를 보려도 천장 반자로 가려져 볼 수 없다.

 

 

 

사진: 화암사 극락전 뒤안.

 

역시 처마 도리 밑에 하앙이 튀어 나왔는데, 앞쪽 보다 조각이 간결하다.

 

 

 

  • 하앙 상앙
  • 2011.12.15 06:53
  • 수정 | 답글 | 삭제 | 신고
  • "앙"이라고 하지 않고, "하앙"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상앙" 이라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죠.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은 특이한게, 다포 위에 하앙을 올렸다는 것이죠.
    다포는 원나라 때 생긴 형태라고 하니, 하앙보다 후대에 생긴 양식이겠죠.

    보통 하앙은 주심포 위에 올리죠.

    다포에 앙서가 이 하앙에 삐져나온 구조물을 흉내낸 장식이죠.

    하앙식이 아닌 걸 하앙식인 거처럼 만들기 위해 고안해낸 장식이죠.

    그래서 조선초기 다포집인 숭례문의 앙서는 하앙 비슷한데, 조선후기 다포집인 흥인지문 앙서는 하앙처럼 안보이죠.

    시대가 지나면서 목수들이 앙서가 하앙을 흉내낸 부재라는 걸 잊어버렸기 때문이죠.
    원글과 댓글 모두 잘 보았습니다.
    두어달 전 완주 화암사를 처음 가 보고는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렇게 다시 글로 보니, 새삼 그때의 반가움이 다시 살아나네요.^^
    좋은 내용 잘 봤습니다. 스크랩 해갈께요 ^^
    우연히 알게된 화암사의 하앙구조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궁금하던 차에 사진과 도면 설명으로 잘 보고 갑니다. 선생님의 열정을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국내 유일의 하앙식 건물‘극락전' 눈부신 자태
    [주말엔-이야기가 있는 전북의 사찰] 아름다운 불명산 화암사<하>
    2014년 10월 01일 (수) 용 시인.금구초중 교장 APSUN@sjbnews.com
       
      ▲ 화암사 전경  
     

     

    물은 아래로 흐른다. 물리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중력 때문이다.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어떨까? 그 역시 마찬가지다. 돈 많은 사람들이 풀어야 없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 문명도 그렇다. 근대 이후 서양의 문물이 우리 삶을 야금야금 지배해왔다. 그렇기에 서구로 문을 열어야만 숨을 쉴 수 있었다.

    과거는 어떤가?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의 경우 누가 뭐라 해도 중국이 중심이었다. 문화적으로 중국은 절대적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 3대 발명인 화약과 종이가 중국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다. 유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 역시 중국을 거쳐 한반도를 지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륙의 바람이 반도를 거쳐 섬으로 향한 것이다.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향했다는 반도 경유설의 통념을 깬 것이 하나 있었다. 건축이다. 하앙식(下昻式) 구조가 중국과 일본에서는 발견이 됐지만 한국에서 찾을 수 없었기에 일본은 중국의 건축 양식이 한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자기나라로 건너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1976년 화암사의 극락전(極樂殿)이 학계에 보고됐다. 해방 이후 우리 목조 건축사의 최대의 발견이라는 평가를 듣는 화암사 극락전의 학계 발견은 일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화암사는 세상에 알려졌다. 찾는 이 없었던 화암사가 세상을 향해 존재감을 드러낸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해 지렛대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더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건축 양식이다. 이 말이 쉽지 않을 것이다. 건축은 무엇인가? 간단히 이야기하면 벽으로 차단되고, 지붕으로 막히고, 문으로 통하는 구조물이다. 내부 공간이야 정해진 바대로 나오는 것이지만, 허공을 가린 처마를 얼마나 넓게 빼내느냐는 고난도의 건축 기술을 요한다. 그 넓이만큼 햇볕도 가리고, 비바람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 오늘날의 과제이기도 하다. 기둥 없이 마냥 처마만 넓혔다가는 붕괴의 위험이 높은 것이다. 더구나 철골도 아닌 목재를 물리적으로 연결시켜 빼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하앙식은 처마를 보다 넓게 확보하려는 기술적 결과이다. 공포를 짜 올리고 도리에서 서까래를 얹는 과정에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부재를 넣어 지렛대의 원리로 처마의 높이와 넓이를 확보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요나라와 금나라 시대에 나타났다 사라졌으나, 일본은 나라(奈良)시대부터 후대까지 이어졌다 한다. 우리의 경우 고대에 일반적 양식이었으나 병란으로 인해 소실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 국내 유일의 하양식 구조인 극락전의 처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하앙식 구조 덕에 극락전은 보물 제663호에서 국보 제316호로 격상되었다. 깊은 산 속 아무도 찾지 않는 화암사가 국보와 보물을 모두 간직한 당당한 가람으로 위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15세기에 만들어진 〈화암사중창기華巖寺重創記〉의 평가는 오늘날도 유효할지 모르겠다.



    “절은 고산현(高山顯)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다. 비록 나무 하는 아이, 사냥하는 남정네라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렵다. 골짜기 어구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 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이른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땅이다.”



    극락전을 다시 찬찬히 보자. 1미터 정도의 막돌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간결한 맞배지붕에 좌우로 풍판을 달아 비바람을 막았다. 특히 이 건물의 기와는 해총 스님의 제자들이 직접 빚은 것으로 6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건재하다 한다. 그리고 가운데가 불룩한 배흘림기둥은 당우를 더욱 탄탄하게 보이게 한다. 현판도 특이하다. 하나 현판이 아니라 어간(御間)에 한자씩 ‘극(極)’ ‘락(樂)’ ‘전(殿)’을 내걸었다. 이런 현판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다.

    이 건물은 단청을 개수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감사에서 이 건물에 단청을 새로 입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계 공무원에 대해 징계를 요구했다. 그때 주지 스님이 나섰다고 한다. 옛날 그 무늬와 그 색깔로 단청을 할 수 있다면 하겠다고…….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나라에는 전통 단청을 입힐 천연 안료가 없다. 모두 일본에서 가져와야 한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색자랜 단청의 모습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 눈부시다. 우물천정의 만다라도 아름답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닫집이다. 닫집은 궁궐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작게 만든 집으로 ‘집안에 따로 지어 놓은 또 하나의 집’을 말한다. 비상하는 용과 비천상이 화려하면서도 균형을 이뤄 안정감을 준다. 주지 방착 스님의 말로는 ‘최근 닫집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닫집만 따로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한다.

    극락전을 나와 왼쪽으로 돌면 작은 건물이 하나 있다. 말을 조심하라는 뜻의 철영재(?榮齋)다. 사육신 성삼문의 할아버지이자 세종 때 전라관찰사였던 성달생(成達生)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어떤 연유로 성달생이 화암사를 찾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재임시 주지였던 해총(海聰)에게 절을 중창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4년간에 걸친 대불사로 화암사가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자,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건물을 짓고 위패를 모신 것이다.

    다시 산문을 나선다. 바람이 서늘하다. 우화루 옆 감나무의 노란 감들이 파란 하늘에 대롱거린다. 대추도 탐스럽게 익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이다. 나오는 길에 들른 가천 천변에 코스모스도 활짝 만개했다. 바람이 불자 꽃 파도가 일렁인다. 마치 화암(花巖)의 무늬를 온 세상에 새기겠다는 일렁이고 또 일렁인다. 저처럼 세상도 좀 더 환해졌으면 좋겠다.

    /김판용 시인.금구초중 교장

     

     ㅡ <새전북신문> 기사 중에서 ..... 


     

     

    [여행] 소박한 산사…고요해지는 마음

    다르면서 같은 듯… 완주 화암사와 금산 진산성지

    관련이슈 : ‘W+‘여행
       대둔산에 올라 설경을 감상한 후에는 여정을 어떻게 짜면 좋을까.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으니 고즈넉한 산사나 성당을 찾아 고요한 마음으로 한 해를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대둔산 인근에는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의 산사와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전북 완주에는 유서 깊은 절집이 여럿이지만 대둔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화암사다. 또 충남 금산 땅으로 넘어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회 순교자인 윤지충이 살던 진산성지가 지척이다. 

     
    화암사가 자리한 불명산의 수려한 눈꽃.
     
       화암사는 대둔산 바로 옆 불명산의 계곡 속에 자리하고 있다. 대둔산에서 완주 화암사까지 실제 주행거리는 꾸불꾸불한 산길을 돌아가니 26㎞가 조금 넘지만, 직선거리는 7㎞ 남짓에 불과하다. 또 대둔산에서 금산 진산성지까지는 8㎞밖에 되지 않는다. 화암사와 진산성지는 전혀 다른 신앙의 공간이지만, 두 곳 모두 소박하고 말간 얼굴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즈음은 하얀 눈으로 덮여 더욱 맑은 기운이 감돈다.

    화암사는 말간 얼굴의 비구니를 연상시키는 소박한 느낌의 절집이다. 우화루 처마 밑으로 보이는 극락전이 하얀 눈으로 쌓여 이 산사는 더욱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암사는 꽃바위에 걸터앉은 절집이라는 뜻이다. 화암사로 드는 길은 운치가 넘친다. 계곡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숲과 물길, 작은 나무다리 등이 어우러진다. 가파른 절벽에 놓인 147개의 철계단을 거쳐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절집 정문 격인 우화루(雨花樓·보물 제662호)에 닿는다. 조선 광해군(1611년) 때 세워진 우화루는 정면은 2층 누문, 후면은 단층인데, 단청이 벗겨진 나뭇결에서 세월의 무게가 오롯이 전해진다. 

    하앙식 구조로 이어진 화암사 극락전.
       절집은 검박하면서도 묵직하다. 우화루 옆 쪽문으로 들면 본전인 극락전이 서 있다. 이 극락전은 국보 제316호로, 국내 유일의 하앙식(下昻式) 구조 지니고 있다. 처마를 좀 더 길게 밖으로 빼기 위해 기둥과 처마 사이에 부재를 끼운 건축양식이다. 극락전과 우화루가 마주 보고 서 있고, 좌우에는 요사채인 적묵당과 불명당이 마주 보고 있다. 이렇게 네 건물이 모여 네모 난 작은 마당을 만들었다. 이 눈 덮인 겨울 산사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낯선 손님을 반기는 것은 한 마리 검은 강아지뿐이다. 

    충남 금산의 진산성지 성당.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의 진산성지는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 형 권상연이 살던 곳이다. 윤지충은 8월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주재했던 시복식에서 복자(福者·성인의 전 단계)로 추대된 124위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던 인물이다. 윤지충은 1791년 모친의 장례를 치르며 유교식 의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사촌 권상연과 함께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된다. 성지가 있는 지방리 일대는 박해를 피해 숨어살던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던 곳이다.

    전북 완주의 특산품인 곶감.

     

       진산성지 일대는 한적한 농촌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진산성지성당은 슬레이트 지붕의 목조 건물로, 시골 마을의 오래된 학교건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소박하고 단출하다. 성당 문은 잠겨 있지만, 빛 바랜 벽과 나무 창틀의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저녁, 이 작은 시골 성당의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다.

    완주·금산=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여행정보=서울에서 출발한다면 대전·통영고속도로의 추부나들목으로 빠져나오면 된다. 대둔산 자락 17번 국도변에 펜션과 무인모텔 몇 곳이 있다. 대둔산도립공원 입구에 식당이 줄지어 서 있다. ‘대전식당’(063-263-3188)은 산채비빔밥 등을 내놓는데 밑반찬이 정갈하다. 완주는 곶감이 특산품이고, 금산은 우리나라 최대 인삼 산지다. 화암사로 가는 길에 곶감을 말리는 농장 여러 곳을 지나게 된다. 대둔산도립공원 입구에 인삼 튀김을 파는 집이 많다. 케이블카 하부역사 바로 밑에 추위에 언 몸을 녹일 만한 온천 사우나(063-263-1260)가 있다. 케이블카(063-263-6621)는 겨울철에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왕복요금은 어른 9000원.

     

     

       ㅡ <세계일보 > 기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