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진해루(鎭海樓) 갑곶포(甲串浦)

2014. 11. 23. 15:09우리 역사 바로알기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진해루(鎭海樓) 갑곶포(甲串浦) 조선국 대한국 역사

2014/11/23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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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진해루(鎭海樓) 갑곶포(甲串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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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129일 장만(張晩)이 치계(馳啓)하기를 권진(權璡)이 오랑캐 천총(千揔) 한 명과 수행원 한 명을 대동하고 임금의 거둥 중에 임시로 정한 도읍인 행도(行都)로 향해 가려 하는데 그 떠날 채비를 몹시 서두른다 합니다.”하였다. 5(五更)에 인조가 대신(大臣비국(備局양사(兩司)를 인견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청국의 사신인 호차(胡差)가 만일 성을 내는 생노(生怒)하고 가버린다면 다시 해볼 방도가 없습니다. 행재소의 문밖에서 접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말투나 안색을 살펴서 처리토록 하라.”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저들이 친히 올리는 친정(親呈)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일전에 우리의 사신이 저들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노추(奴酋)도 직접 접견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간은 적의 차인을 우리 강도에 들어오게 하여 그 허실을 다 보도록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접대를 하는 것도 편치는 않을 듯하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강홍립이 저 곳에 있으니 무슨 일인들 모르겠습니까.”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이 곳에서나 저 곳에서나 접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만일 들어주기 어려운 요청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이귀에게 계획이 있을 것이니 불러서 물어 보라. 그리고 저들이 반드시 친히 올리고자 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국가의 위망이 이 번의 일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친히 올리고자 한다 하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목이 아뢰기를 어찌 차마 친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그 것이 비록 정론(正論)이기는 하나 저들이 만약 성을 내어 가버린다면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화친을 안 하려면 그만이지만 화친을 하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친히 호서(胡書)를 받아야 한다면 이 곳에서 접견할 수는 없다.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의 진해루(鎭海樓)만한 데가 없다.”하였다.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친수(親受)’ 두 글자를 신은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천자의 존귀한 몸으로도 호사(胡使)를 접견하였다.”하였다. 인조가 이르기를 마땅히 호차를 데리고 샛길로 오도록 하라.”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경기 풍덕(豐德)에서 뱃길을 따라 강화도(江華島) 승천포(昇天浦)로 가서 갑곶포(甲串浦)에 도달한다면 반드시 형세의 위험을 알 것입니다.”하였다.

    23접대 재신(接待 宰臣)이 아뢰기를 호차가 국왕을 만나 뵙고 결단하는 말씀을 직접 받는 문제는 바로 장수의 명령이므로 끝내 감히 어길 수 없다. 명나라와 영영 끊으라는 한 사항에 대해서 어떻게 하답하셨는가.’ 하기에, 신들이 다만 두 나라의 우호만 논할 따름이지 어찌 말하지 않아야 할 말을 제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떠날 때에 진해루(鎭海樓)에 술자리를 베풀고 이어서 하사하는 물건을 증정하니, 자못 기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를 행하여 은혜에 사례하게 하니, 바로 평상에서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면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호차가 또 국서는 당연히 귀 국 사람이 가지고 가야 한다.’ 하기에, 신들이 이것은 바로 그대들이 가지고 온 글에 답장한 것이므로 그대들이 받아가지고 가야 한다.’ 하니, 네 호차가 일제히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서서 국서를 받아가지고 갔습니다.”하였는데, 그 답서에 성대한 사신이 잇따라 이르러 후한 뜻을 거듭 알리므로 정중함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지금 중신을 특별히 보내어 다시 정성을 펴보이겠으니, 부디 아직은 기다려 주십시오. 차사(差使)로 온 사람이 풍랑에 막혀 지체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미안스럽게 여깁니다. 자세한 것은 후일의 서신으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많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하였다.

1866106일 순무사(巡撫司)의 임시 군영(軍營)인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선봉 중군(先鋒 中軍) 이용희(李容熙), ‘이 달 5일 해시(亥時)에 강화도(江華島)에 검열하러 나갔던 별군관(別軍官) 박정화(朴鼎和)와 신석범(申錫範)이 돌아와서 보고한 데 의하면 놈들에 의해 약탈과 파괴를 당한 참혹한 정상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고 합니다. 강화도(江華島) 내성(內城)에서는 장녕전(長寧殿)과 만령전(萬寧殿), 객사(客舍)와 공해(公廨)가 다 불에 타 없어지고 아정당(衙政堂)은 단지 세 칸만 남았으며 아전(衙前)들이 일보는 건물은 온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향교(鄕校), 충렬사(忠烈祠), 열무당(閱武堂), 중영(中營)과 포청(捕廳)은 온전하였으며 민가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불에 타서 없어진 호(戶)의 수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은 온전하였고 남문(南門)은 문짝과 편액, 여성(女城)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성 위의 좌우에 우리나라 창 12(十二)을 나누어 벌려놓았다고 합니다.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에는 진해루(鎭海樓) 안의 민가 한 집이 불에 타고 진해사(鎭海寺)와 전 금위영(禁衛營) 창고는 온전하였으며 훈련원(訓練院)과 어영청(御營廳)의 두 창고는 불에 타 없어졌고 인정 종(人定 鍾)은 외성 안 길 위에 운반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완구포(大碗口砲) 6(六)를 갑곶포 나룻가에 비치하고 우리나라의 총통(銃筒) 4좌(四座)는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안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전 날 운반해가다가 놈들에게 빼앗겼던 쌀로써 갑곶포(甲串浦)의 민가에 보관해두고 있던 쌀을 어림짐작하니 약 400여 석() 되었습니다. 운반선 1척에 실어서 언덕 위에 가져다 놓았으며, 또 남아있는 200석에 대해서는 인가들도 텅텅 비어 있고 날도 또한 저물었기 때문에 미처 수량을 따져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군 초관(領軍 哨官) 추정욱(秋正旭)으로 하여금 즉시 수습해 가지고 수직(守直)을 서도록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600여 석의 쌀은 세미(稅米)와 관계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고조(高祖:1863-1897)가 윤허하였다.

 

[출처]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진해루(鎭海樓) 갑곶포(甲串浦)|작성자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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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기미년(1619, 광해군 11) 대동야승 / 고전문집

2011/12/27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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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천장(天將 중국의 장수)양호(楊鎬)가 여러 장수들과 북벌(北伐) 계책을 의정하여 각 진(各鎭)에 분부하였다. 강홍립(姜弘立) 등이 창성(昌城)에 있다가 12일에 모든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건너가 이틀 만에 탄현(炭峴)에 이르러 천병(天兵)과 만났다.
때마침 눈이 지독하게 얼어 붙어 산길이 막혔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상의하기를, ‘지금 이 요동 변두리에 눈이 이처럼 쌓였는데, 더구나 깊이 들어가서는 단연 군사를 출동하여 전투할 도리가 없을 것이니, 우선 후퇴하여 차차 눈이 녹는 시기를 기다려 다시 기일을 정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곧 대군을 후퇴하였다.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탄현(炭峴)으로부터 바로 창성(昌城)에 와서, 대포 쏘는 기술을 시험하여 각각 은(銀)으로 상을 주고, 하루를 머물렀다가 요양(遼陽)으로 돌아갔다.
3월 4일에, 제독 유정이 강홍립(姜弘立)을 거느리고 되놈과 싸우다가 유정이 전사하니 강홍립의 군사가 항복하고, 좌영장(左營將)인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김응하가 끝까지 힘껏 싸웠는데 나무 밑에 의지하여 수검(手劍)으로 적을 무수히 죽였다. 두터운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화살이 구더기 모이듯 하여도 끝까지 부상하지 않다가 적이 창으로 찌르자 대도(大刀)를 손에 잡은 채 쓰러지면서도 끝내 칼을 놓지 않고……. 본조(本朝)에서는 호조 판서를 증직(贈職)하였고, 천조(天朝)에서는 요동 백(遼東伯)을 증직하였다.
평안 감사의 장계(狀啓)는 ‘도원수(都元帥) 강홍립등이 이미 신하의 절개를 잃었으므로, 각각 그 가족을 도내에 나누어 가두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장만(張晚)을 도원수로, 우치적(禹致績)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강홍립 등이 오랑캐에게 도착하자, 만주(滿住)의 유첩(諭帖)에 이르기를,

“한(汗)은 조선 장수에게 선유하여 알게 한다. 지금 너희들은 생각하라. 네 나라 임금이 결국 너희들을 버리겠는가. 아니면 너희들을 찾아가겠는가. 네 나라 국왕이 또다시 남조(南朝)를 도울 것인가. 이 일이 장래에 어찌될 것이며, 너희들이 지금 빨리 집에 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여기에 있으면서 날짜나 보내기를 원하는가. 너희들은 명백하게 말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선유……”

하였는데, 강홍립이 답하기를,

“유첩(諭帖)을 받아 보고 후의에 감사합니다. 수천 명의 사람을 우리 본국이 어찌 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번 군사 출동은 부득이한 것입니다. 무슨 병력이 있어 다시 또 도울 수 있겠습니까. 집에 빨리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다 같은 것이지만, 오직 한(汗)의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감히 다 말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4월

강홍립이 오랑캐에게 있으면서 장계하기를,

“신들이 모두 변변치 못한 자질로,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지난 2월 21일에 강을 건너, 26일에 유 도독(劉都督)을 진자두(榛子頭)에서 만나 보고 조용히 담화하였는데, 본국 군량이 오기를 기다려 전진하려 한다 하였더니, 도독(都督)의 대답이, 출동 기일이 이미 확정되어 결코 지체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3월 4일에 행군(行軍)하는데, 교 유격(喬游擊)ㆍ강 부총(江副總)ㆍ조 참장(祖叅將)이 앞서 가고, 유 도독(劉都督)이 그 다음에 가고, 장 도사(張都司)가 그 다음에 가고, 아군의 좌영(左營)ㆍ중영(中營)ㆍ우영(右營)이 뒤따라서 부차지(富車地)에 당도하였는데, 호병(胡兵)이 돌진해 오니 명 나라 군사가 크게 무너지자, 오랑캐의 기마병이 진중에 들어와 좌우에서 마구 죽여 잠깐 사이에 좌영장인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 천총인 영유 현령(永柔縣令) 이유(李有), 우영 천총인 운산 군수(雲山郡守) 이계종(李繼宗)이 모두 피살되고, 우영장인 순천 군수(順川郡守) 이일원(李一元)이 탈출하여 중영으로 들어오자 오랑캐 기마병이 뒤따라 와서 중영을 포위하였습니다.
신 등이 사졸들을 격려하여 사방으로 방비하였으나, 사졸들이 좌영과 우영이 무너진 것을 눈으로 보고 당황하여 겁내지 않는 자가 없어,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물도 없고 식량도 없고 또한 구원병도 없어서, 신이 부득이 화해를 청하여 호장(胡將)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와 귀국이 조금도 혐의나 원한이 없고, 이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 나라 의사가 아니라, 반드시 서로 싸우기로 한다면 우리 군사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으니, 귀국에 무슨 이득될 것 있겠는가. 강화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더니, 호장(胡將)이 승낙하고, 말하기를, ‘성중(城中)에 가서 만주를 본 뒤에 집에 돌아가게 하겠다.’ 하고, 이어 철기(鐵騎)로 사방을 포위하고 가니 부득이 오랑캐의 성으로 갔는데, 지나가는 지역의 도독(都督)과 모든 장수들이 전패한 곳 30여 리에, 쓰러진 시체가 삼대와 같이 흩어져 있었는데,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신 등이 성에 도착하자 곧 뜰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좌우에 수은빛 갑옷을 입은 호위병이 세 줄로 서 있었습니다. 신 등이 계단에 올라가 두 번 읍(揖)하였더니, 만주(滿住)가 분노하여 무례하다고 책망하기에, 신 등이 부득이 두 번 절을 하였더니, 신 등을 인도하여 한 집에 머물게 하고 군사를 시켜 둘러싸 지키게 하였습니다. 소위 유대해(劉大海)란 자가 국서를 가지고 와서 신 등에게 보였는데, 그 뜻이 전적으로 상통하여 화친하는 데에 있었고, 허다한 말은 별로 따르기 어려운 청이 없었습니다.
삼가 안여눌(安汝訥)ㆍ이장배(李長培), 창성 부사(昌城府使) 박난영(朴蘭英), 오차 만호(吾叉萬戶) 김득진(金得振)을 차출하여 호차(胡差)와 함께 보내니, 바라옵건대, 묘당에서 안여눌등에게 자세하게 물어 보시고, 시급하게 차관(差官)을 정하여 호서(胡書)와 함께 보내 주시면, 강화가 이루어질 것이요, 피차의 전투 정지도 오로지 이 일에 달려 있으며, 억류된 장졸들도 생환될 수 있고, 신 등도 장차 이역의 귀신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해를 바라다보니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강홍립의 무종사(武從事) 정응정(鄭應井)과 김경서(金景瑞)의 아들 김득진(金得振) 등이 호서(胡書)를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금 나라의 한(汗)은 조선 국왕에게 글을 올립니다.……지금 내가 생각해 보니, 조선이 남조(南朝)에 병력을 도와 주는 것이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조에서 왜란을 구원해 준 공으로 독촉을 심하게 당하는 까닭에 부득이 도운 것이라 여깁니다. 지금 내가 또한 우리 양국이 전부터 화합하게 지내던 정을 생각하기 때문에, 조선 장수 10여 명을 생포하여 여기에 와 있고, 국왕의 정의를 살펴보아 아직 억류하고 있으니, 지금 이후의 일은 전적으로 국왕이 결정하는 데 달렸습니다.”

하였다.
호서(胡書)의 답서 지으라고 명하였으나,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이 상소하여, 강화를 반대하며 답서 짓기를 극력 사피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이 한 장의 상소로써 마구 몰고 오는 적을 막아내겠는가.”

하였다.
답서에 이르기를,

“조선국 평안도 관찰사 박엽(朴燁)은 건주위(建州衛) 마족하(馬足下)에게 글을 올립니다.
우리 두 나라가 국경이 접속되었고, 다 같이 황제(皇帝)의 신하로서, 같이 천조(天朝)를 섬긴 지가 2백 년이 되었으되, 오늘날까지 조금이라도 혐오하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뜻밖에도 근자에 건주(建州)가 천조(天朝)와 더불어 틈이 생겨 군사가 연달아 화란이 이어,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사방 들판에는 진지가 많으니, 어찌 다만 이웃 나라의 불행뿐이겠습니까. 귀국에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대하여 천조는 자식에게 있어서의 아버지와 같으니, 아버지가 명령하는 것을 자식이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대의(大義)에 관련되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기왕 지난일은 지금 새삼스럽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정응정(鄭應井)등을 먼저 보내 주시니, 관곡한 뜻을 또한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웃 나라끼리 좋게 지내는 정이 또한 어찌 없겠습니까.
보내신 글에 ‘내가 처음 온 사람으로 만일 대국 황상(大國皇上)을 침범할 마음이 있다면 하늘이 어찌 내려다보지 않으리오.’ 하였는데, 이 마음이야말로 세업(世業)을 보전하여 길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게 되는 마음입니다. 앞으로 좋은 뜻을 품고 함께 대도(大道)를 간다면, 천조에서 사랑하여 편하게 하여 주는 은전이 가까운 시일에 내려올 것이니, 우리 양국이 각기 강토를 지키며, 옛날같이 좋게 지내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 뜻을 전달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6월

오랑캐 사신이 또 국서를 가지고 왔다. 그 글에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은 다른 수가 없습니다. 남조(南朝)를 섬기지 않기로 자자손손이 길이 맹세하는 국서에 답인(踏印)하여, 고관을 보내 주시면 그 사람은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하고, 우리도 사람을 바로 귀국 서울의 대궐 문 아래 보내어, 귀국 정승과 담판하고 와서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사례하고 검은 소를 잡아 땅에 제사 지내며, 피를 마시고 맹세한 뒤에는, 원수 이하 군사들을 모두 돌려보낼 것입니다. 그렇게 한 연후에 쌍방이 모두 무기를 버리고, 오직 채찍 하나만으로 서로 왕래하면서 예전과 같이 시장을 열어 통상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11월

강홍립 등이 장계하기를,

“지난 8월 11일 밤중에, 신 등 남아 있는 원역(員役) 19명을 협박하여, 노성(老城)을 떠나 편성(片城)에 도착한 뒤에, 목책으로 에워싸고 감시가 엄밀한데, 하루에 좁쌀 두어 되를 얻을 뿐, 나무와 물도 얻기 어려워 얼고 굶주려 고생하는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이 모두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기에, 그르치고 실패한 뒤에도 혀를 놀려 병화를 완화시켜 결초보은하려 하고, 또한 견제하는 계획이 혹 성공되면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될까 하여 고통을 참고 구차하게 살아온 지가 아홉 달이 되었습니다. 이곳 사정을 비록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때때로 파다하게 장차 우리 나라를 침입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만, 신 등이 화해를 재촉하여 살아 돌아오려고 이런 말을 지어냈다고 할까 두려워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근자에 이 적(賊)의 상황을 살펴보면, 국경 지방에 걱정이 극도에 달하였기에 부득이 들은대로 아룁니다. 금번에 다시 오랑캐 사신을 보내어 만포(滿浦)에 가서 화해 여부를 적실하게 알고 즉시 돌아온다는 것은 음흉한 수작이어서 추측할 수 없으나, 묘당에서 기회를 보아 대책을 세워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당초에 신 등이 진중에서 강화하기로 약속한 것은 변방 걱정을 완화시키려던 것인데, 오늘날 사세가 이렇게 급박하고 보니, 오직 원통하고 분할 뿐입니다. 따라서 생각건대, 견제할 대책을 묘당에서 반드시 난숙하게 토의하였을 터인데, 지금까지 결정을 짓지 못한 것은 요동에서 힐난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 오랑캐가 우리 나라와 강화하려는 것은 다시 병력을 도와주지 말고 각기 국토만 지켜 영원히 침범할 뜻이 없기를 바라는 데 불과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기왕 군사를 출동하여 요(遼)를 구원하기가 다시는 어렵다고 여긴다면, 그 실정에 따라 견제하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물며 병교사(兵交使)가 그 중간에 있으니, 일시적인 강화를 언약하면 초미의 급박한 화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요, 대국을 섬기는 성의에도 조금도 결함이 없을 것이니, 요동에서도 또한 힐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망령되게 소회를 진술하여 말을 억제하지 못하고 보니, 더욱 죽을 죄가 더하였습니다.
신들의 실낱 같은 남은 목숨이 차츰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으니, 오랑캐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는 날이 곧 신들의 목숨이 다하는 때입니다. 마음에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맹세하여 내려주신 밀부(密符)ㆍ인신(印信)을 조금도 실수 없이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죽게 될 때에 함께 부서지더라도 결코 감히 들판에 내던져 국가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합니다. 차례로 다 아룁니다.”

하였다.
비밀 비망기에,

“어제 강홍립의 글을 보니, 저 적(賊)이 우리에게 침범할 계획을 환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전후에 여러 차례 전교하였는데, 하루 이틀 날만 보내고 끝내 잘 처리하지 아니하여, 앉아서 종묘 사직을 위태하고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니, 경(卿)들이 과연 안심되는가. 급히 잘 처리하라. 속히 강홍립의 어미ㆍ처ㆍ숙부ㆍ아우에게 사사롭게 일을 비밀리 통하게 하되, 사적인 편지에는 비록 기묘한 꾀를 부리더라도 그다지 해로울 것 없을 것이다. 여진 족속은 탐심이 많아 보화와 뇌물이 아니고서는 꾀를 쓰기가 어려우니, 강홍립의 집에서 준비하여 보내게 하는 것이 무방하리라. 강홍립 등의 죄가 중하지마는, 만일 군사를 멈추게 하여 병화를 완화시킨다면, 또한 가련하게 여길 만하다. 옛날에 석중룡(石仲龍)이 죄를 면하게 된 것이 혹은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또 비망기에,

“이시발(李時發)에게 무슨 사(使)라는 칭호를 주어 서쪽 국경에 내려보내어, 장만(張晚)의 지휘를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사수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 비국에서 상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전교를 받아 보니 지극히 타당합니다. 이시발은 찬획사(贊劃使)라는 칭호로 체부(體府)에 예속시켜 속히 내려보내어 장만의 지휘를 받게 하되, 혹은 군사 사무를 참모하거나 혹은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크게 무과를 실시하였다. 이때 국경 사정이 날로 급하여 모두 서울에 모이기에는 사세가 급박하기 때문에, 승지를 8도(道)에 나누어 보내 과거 장소를 설치하고, 만여 명을 뽑아 급제시켰는데, 방(榜) 이름을 만과(萬科)라 하였다.

 

 

[출처]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기미년(1619, 광해군 11)|

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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