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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3. 15:09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진해루(鎭海樓) 갑곶포(甲串浦) 조선국 대한국 역사
2014/11/23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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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진해루(鎭海樓) 갑곶포(甲串浦)
1627년 1월 29일 장만(張晩)이 치계(馳啓)하기를 “권진(權璡)이 오랑캐 천총(千揔) 한 명과 수행원 한 명을 대동하고 임금의 거둥 중에 임시로 정한 도읍인 행도(行都)로 향해 가려 하는데 그 떠날 채비를 몹시 서두른다 합니다.”하였다. 밤 5경(五更)에 인조가 대신(大臣)·비국(備局)·양사(兩司)를 인견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청국의 사신인 호차(胡差)가 만일 성을 내는 생노(生怒)하고 가버린다면 다시 해볼 방도가 없습니다. 행재소의 문밖에서 접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말투나 안색을 살펴서 처리토록 하라.”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저들이 친히 올리는 친정(親呈)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일전에 우리의 사신이 저들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노추(奴酋)도 직접 접견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간은 ‘적의 차인을 우리 강도에 들어오게 하여 그 허실을 다 보도록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접대를 하는 것도 편치는 않을 듯하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강홍립이 저 곳에 있으니 무슨 일인들 모르겠습니까.”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이 곳에서나 저 곳에서나 접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만일 들어주기 어려운 요청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이귀에게 계획이 있을 것이니 불러서 물어 보라. 그리고 저들이 반드시 친히 올리고자 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국가의 위망이 이 번의 일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친히 올리고자 한다 하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목이 아뢰기를 “어찌 차마 친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그 것이 비록 정론(正論)이기는 하나 저들이 만약 성을 내어 가버린다면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화친을 안 하려면 그만이지만 화친을 하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친히 호서(胡書)를 받아야 한다면 이 곳에서 접견할 수는 없다.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의 진해루(鎭海樓)만한 데가 없다.”하였다.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친수(親受)’ 두 글자를 신은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천자의 존귀한 몸으로도 호사(胡使)를 접견하였다.”하였다. 인조가 이르기를 “마땅히 호차를 데리고 샛길로 오도록 하라.”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경기 풍덕(豐德)에서 뱃길을 따라 강화도(江華島) 승천포(昇天浦)로 가서 갑곶포(甲串浦)에 도달한다면 반드시 형세의 위험을 알 것입니다.”하였다.
2월 3일 접대 재신(接待 宰臣)이 아뢰기를 “호차가 ‘국왕을 만나 뵙고 결단하는 말씀을 직접 받는 문제는 바로 장수의 명령이므로 끝내 감히 어길 수 없다. 명나라와 영영 끊으라는 한 사항에 대해서 어떻게 하답하셨는가.’ 하기에, 신들이 ‘다만 두 나라의 우호만 논할 따름이지 어찌 말하지 않아야 할 말을 제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떠날 때에 진해루(鎭海樓)에 술자리를 베풀고 이어서 하사하는 물건을 증정하니, 자못 기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를 행하여 은혜에 사례하게 하니, 바로 평상에서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면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호차가 또 ‘국서는 당연히 귀 국 사람이 가지고 가야 한다.’ 하기에, 신들이 ‘이것은 바로 그대들이 가지고 온 글에 답장한 것이므로 그대들이 받아가지고 가야 한다.’ 하니, 네 호차가 일제히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서서 국서를 받아가지고 갔습니다.”하였는데, 그 답서에 “성대한 사신이 잇따라 이르러 후한 뜻을 거듭 알리므로 정중함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지금 중신을 특별히 보내어 다시 정성을 펴보이겠으니, 부디 아직은 기다려 주십시오. 차사(差使)로 온 사람이 풍랑에 막혀 지체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미안스럽게 여깁니다. 자세한 것은 후일의 서신으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많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하였다.
1866년 10월 6일 순무사(巡撫司)의 임시 군영(軍營)인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선봉 중군(先鋒 中軍) 이용희(李容熙)가, ‘이 달 5일 해시(亥時)에 강화도(江華島)에 검열하러 나갔던 별군관(別軍官) 박정화(朴鼎和)와 신석범(申錫範)이 돌아와서 보고한 데 의하면 놈들에 의해 약탈과 파괴를 당한 참혹한 정상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고 합니다. 강화도(江華島) 내성(內城)에서는 장녕전(長寧殿)과 만령전(萬寧殿), 객사(客舍)와 공해(公廨)가 다 불에 타 없어지고 아정당(衙政堂)은 단지 세 칸만 남았으며 아전(衙前)들이 일보는 건물은 온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향교(鄕校), 충렬사(忠烈祠), 열무당(閱武堂), 중영(中營)과 포청(捕廳)은 온전하였으며 민가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불에 타서 없어진 호(戶)의 수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은 온전하였고 남문(南門)은 문짝과 편액, 여성(女城)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성 위의 좌우에 우리나라 창 12병(十二柄)을 나누어 벌려놓았다고 합니다.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에는 진해루(鎭海樓) 안의 민가 한 집이 불에 타고 진해사(鎭海寺)와 전 금위영(禁衛營) 창고는 온전하였으며 훈련원(訓練院)과 어영청(御營廳)의 두 창고는 불에 타 없어졌고 인정 종(人定 鍾)은 외성 안 길 위에 운반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완구포(大碗口砲) 6좌(六座)를 갑곶포 나룻가에 비치하고 우리나라의 총통(銃筒) 4좌(四座)는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안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전 날 운반해가다가 놈들에게 빼앗겼던 쌀로써 갑곶포(甲串浦)의 민가에 보관해두고 있던 쌀을 어림짐작하니 약 400여 석(石) 되었습니다. 운반선 1척에 실어서 언덕 위에 가져다 놓았으며, 또 남아있는 200석에 대해서는 인가들도 텅텅 비어 있고 날도 또한 저물었기 때문에 미처 수량을 따져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군 초관(領軍 哨官) 추정욱(秋正旭)으로 하여금 즉시 수습해 가지고 수직(守直)을 서도록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600여 석의 쌀은 세미(稅米)와 관계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고조(高祖:1863-1897)가 윤허하였다.
[출처] 강화도(江華島) 외성(外城) 진해루(鎭海樓) 갑곶포(甲串浦)|작성자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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