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사(衍慶寺)

2014. 11. 23. 15:03우리 역사 바로알기

 

 

 

 

 

      

연경사(衍慶寺) 조선국 대한국 역사

2014/11/23 12:46

복사 http://blog.naver.com/msk7613/220189375437

전용뷰어 보기

연경사(衍慶寺)

 

 

http://blog.naver.com/msk7613

 

1399년 1월 3일 정종 연경사(衍慶寺)에 법석(法席)을 베풀었으니 새로 이룩한 금자(金字) 화엄경(華嚴經)을 운반하기 때문이었다. 1408년 7월 29일 연경사(衍慶寺)의 원속(元屬) 노비(奴婢)가 80구(口)인데 이 번에 20구를 더 정속(定屬)시켰다.1409년 6월 9일 태종이 연경사(衍慶寺)에 전지 1백 결(結)을 하사하였다. 8월 9일 사간원(司諫院)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 권우(權遇) 등이 상소하기를 “황고(皇考)·황비(皇妣)를 위하여 명복(冥福)을 빌고자 한다 하더라도 이미 건원릉(健元陵)개경사(開慶寺)를 창건하고 제릉(齊陵)연경사(衍慶寺)를 창건하였으니 어찌 또 반드시 왕궁(王宮) 안에 별전(別殿)을 지어서 받들 필요가 있습니까?"하였다. 8월 12일 제릉(齊陵)의 연경사(衍慶寺)를 고쳐 짓게 하고, 우희열(禹希烈)을 시켜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1410년 3월 18일 친히 제릉(齊陵)에 제사하고 비정(碑亭)을 지으라 명하고, 연경사(衍慶寺)를 고루 둘러보았다. 4월 6일 연경사(衍慶寺)가 이루어졌다. 태종이 모후(母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사재(私財)로 법의(法衣)와 법발(法鉢)을 갖추어 연화경 법회(蓮華經法會)를 베풀어 낙성(落成)하였다.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으로 헌향사(獻香使)를 삼고, 또 부역(赴役)한 대부(隊副)에게 쌀 각각 1석(一石)씩을 주었다.

1412년 6월 1일 대언 등에게 이르기를 “나라 사람들이 박자청을 미워하는 것은 토목(土木)의 역사 때문이다. 개성인 송도(松都)경덕궁(敬德宮)과 한성인 신도(新都)의 창덕궁(昌德宮)은 내가 거처하는 곳이요, 모화루(慕華樓)경회루(慶會樓)는 사신을 위한 곳이요, 개경사(開慶寺)연경사(衍慶寺)는 돌아가신 부모님인 고비(考妣)를 위한 곳이요, 성균관(成均館)을 짓고 행랑(行廊)을 세우는 것또한 국가의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느냐? 이러한 역사(役事)는 비록 다른 재상(宰相)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더라도 명령에 따르지 않겠느냐? 박자청이 부지런하고 삼가서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남에게 미움을 받으니 불가한 일이 아니겠느냐? 조성 제조(造成 提調)를 마땅히 다시 사람을 택하여서 아뢰어라.”하였다. 1796년 8월 30일 정조가 전교하기를 “제릉(齊陵)의 석물을 고쳐 수리하는 것은 곧 선조(先朝) 병진년에 하려고 했던 일인데, 마침 태어난 해로부터 60년째 되는 해인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오는 해에 이렇게 수리하여 고치게 되었으니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하다. 어찌 뜻을 표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수리하여 고칠 때 일을 거행하였던 수복(守僕)과 능군(陵軍) 등에게 도신으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도록 하고, 연경사(衍慶寺)의 승려들에게도 헤아려 지급하도록 하라.”하였다.

 

 

[출처] 연경사(衍慶寺)|작성자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