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무기의 우수성

2013. 6. 4. 09:24우리 역사 바로알기

 

 

 

원본주소 : http://blog.naver.com/tpgnsdl17/30092186344

검월야 님의 블러그

 

개마무사

 

 

고구려 장군

 

고구려 한복

 

고구려 병사

 

<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1  -고조선 갑옷의 종류와 특징 >

 

  고구려의 갑옷은 고조선 갑옷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 생산되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그 모양이나 재료가 다릅니다. 고구려의 갑옷을 설명하기 전에 오늘은 고조선 갑옷의 특징에 대하여 우선 간략히 설명드립니다.

  고조선은 뼈, 가죽, 청동, 철 등을 재료로 하여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시기에 다양한 갑옷을 생산하여 주변나라(중국과 북방 및 일본 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조선시대부터 우리 문화는 해외진출사에서 한류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선 고조선 갑옷의 재료와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조선은 일찍부터 특수한 고급가죽과 일반가죽을 많이 생산했습니다. 특수한 고급가죽들은 중국과의 무역상품이었고 다양한 종류의 일반가죽들은 일반복식과 특수복식인 갑옷의 재료로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한민족이 금속을 갑옷에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요?

 

  근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민족의 청동기문화 시작연대는 서기전 2500년경인데, 서기전 2000년기 전반기의 유적들에서 이미 매우 발달된 청동가공 기술을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출토된 고조선시기의 여러 청동 제품들은 동(Cu), 석(Sn), 연(Pb)등의 3원소 합금으로 제조된 것인데, 각 성분은 기물에 맞게 그 함유량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의 청동기에는 초기부터 많은 량의 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연은 석과 함께 청동합금의 강도를 높여주고 녹이 스는 것을 방지해 주며 주물온도를 낮추어줍니다.

 

  서기 전 2000년기에 속하는 중국의 청동유물과 같은 시기의 고조선의 청동유물을 비교한 결과, 서기 전 2000년기에 중국 청동기는 거의 자연동에 가까운 성분을 보이고 야련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으나, 고조선의 청동기들은 제각기 용도에 맞는 성분으로 석과 연의 함량이 배합되어 있었습니다. 서기 전 16세기부터 서기  전 13세기까지의 중국 청동 유물을 보면, 동과 석 및 연의 합금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나, 연과 석의 비율이 너무 높거나 낮고, 석이나 연이 섞이지 않는 등 합금의 성분이 기물에 용도에 적합치 못했습니다. 고조선 초기의 청동기들은 석과 함께 합금의 기계적 성질과 강도 및 연신율을 제고시키는 아연을 사용했으나 중국에서는 상시대에 아연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서주초기부터 비로소 소량이 사용되기 시작하지만 청동의 질을 높이는 그 밖의 고조선 청동기에서 보이는 성분들, 곧 비소(As), 안티몬(Sb), 비스무트(Bi), 코발트(Co), 은(Ag) 등의 성분은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사정은 진시황 통일정부 멸망이후에 세워진 서한시대에 만들어진 청동갑편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데, 석의 함유량이 부족하고 연 등의 기타 성분도 보이지 않아 청동 주조 수준이 고조선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 같은 청동 가공 기술은 비소를 많이 사용한 시베리아지역이나 독립국가연합지역과도 큰 차이가 있으므로, 고대 한국의 청동 가공 기술은 중국이나 북방지역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청동기와 청동갑옷에 아연이 함유되어있고 중국의 청동기와 청동갑옷에 아연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의 청동기가 스키토-시베리언 계통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도 없으며, 한국 청동기의 기원을 중국 상시대의 청동기에서 찿는 것도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평양지역의 강동군 송석리 1호묘에서 서기 전 12세기경의 강철로 만든 쇠거울이 출토되었는데, 강철은 연철이나 선철의 생산 공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고조선의 철기 생산 시작연대는 이보다 몇 백년 정도 더 앞 설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전국 초기까지 생철이 그대로 생산되어 제철 제강 수준은 거의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생철에서 주철로의 발전은 전국 중 후기에 와서야 보편적으로 나타나지만, 연강 기술은 여전히 초기 단게에 속하여 농기구 등에 강철 제품이 생산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같은 시기인 서기 전 6세기경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철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주철로 부터 연철, 선철, 강철을 만들어 무기와 공구 및 농기구 등에 널리 사용했습니다. 중국은 서한시대에 와서야 주철 생산 기술이 비교적 발달 하지만, 그 수준은 여전히 고조선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철은 탄소 성분의 함유량 정도에 따라 굳기와 세기가 달라지는데, 고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서한에 이르기가지 철기 제품의 탄소 함유량이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철기제품이 용도에 맞게 제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동한 중기에 이르러 제철제강 기술이 비교적 발달하고 위진남북조시대에 와서야 고조선의 수준에 이릅니다. 중국 보다 앞선 이와 같은 고조선의 제철제강 기술은 갑옷의 용품에 그대로 이용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갑옷 등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했으며, 이같은 우수한 갑옷 생산기술은 고구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2  - 고조선 갑옷의 모양 >

 

  고조선 사람들이 청동을 갑옷에 이용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중국학자들은 서기 전 9세기에서 서기 전 11세기에 속하는 상나라 후기와 서주초기의 유적들에서 출토된 청동 장식단추를 전쟁 옷에 달아 방어용 갑옷으로 사용했다고 보고, 이를 중국 갑옷의 기원으로 여기고 있다. 고조선의 영역에서 발굴된 청동 장식단추로 가장 연대가 앞서는 것은 서기 전 25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양 부근 강동군 룡곡리 4호 고인돌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고조선의 청동 장식단추생산연대는 중국보다 적어도 14세기 정도 앞선다. 따라서 중국의 청동 장식단추는 고조선의 영향으로부터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잇는 것이다. 이는 중국 상왕조가의 청동기가 고조선 초기의 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도 상왕조 청동기 주조의 최초의 기원이 고조선 초기의 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있다. 이 같은 견해는 고조선의 청동 장식단추가 갖는 고유한 특징에서 확인된다. 즉, 중국의 경우는 몇개 지역에서만 청동 장식단추가 발견되지만 고조선의 영역이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다양한 크기와 문양의 청동 장식단추들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청동 장식단추에 보이는 문양은 중국의 청동기나 질그릇 및 가락바퀴 등에서 볼 수 있는 상왕조의 특색을 나타내는 문양과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고조선의 청동 장식단추와 같거나 고조선 청동 장식단추의 모양에 가깝다. 고조선의 청동 장식단추는 원형과 타원형의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더욱이 이는 고조선의 영역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신석기시대부터 출현했던 가락바퀴나 질그릇 및 청동기 등에 보이는 것처럼 새김무늬의 모양을 나타내거나 혹은 청동거울이나 비파형동검 검집에 보이는 것처럼 잔줄문양을 나타내기 때문에 고조선의 유물이 갖는 특징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 같은 청동 장식단추를 일반 의복의 화려한 장식으로 이용한 것은 고조선만이 갖는 복식의 특징으로,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찿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고조선의 경우 청동 장식단추는 복식의 여러부분에 다양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장식품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출토된 청동 장식단추가 소량일 때는 장식용으로 사용되었겠지만, 그 수량이 다수일 때는 방어용 전쟁옷의 구성물로서 역활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조선은 청동투구의 경우에도 청동 장식단추를 장식하여, 중국의 짐승얼굴 모양을 특징으로 한 투구와는 크게 구별된다.   

 

  그러면 철갑의 사용은 어떠했을까?

  서기 전 3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고조선 후기의 유적인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묘에서 철로 만든 갑옥조각이 발견되었다. 그 형태는 아래쪽이 둥근 긴 네모 모양과 타원형의 것 그리고 긴 네모 모양의 것으로, 그것을을 꿰어 붙인 상태는 물고기 비늘과 같은 모양의 갑옷이었다. 갑옷 전체의 모양은 알 수 없으나, 이 출토 유물을 통해 고조선에서는 적어도 서기 전 3세기 이전부터 물고기비늘 모양의 철갑옷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조선이 거느렸던 숙신에서 이미 중국보다 앞서 뼈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생산했다는 점과 고조선이 중국 보다 약 4세기 정도 앞선 서기 전 12세기 이전에 철기 생산을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중국은 춘추시대에 철갑을 생산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철갑이 출현하는 것은 전국말기에 와서인데, 둥근네모 모양의 철갑편을 그대로 이어서 만든 투구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진시황 통일정부 시대에는 철갑편이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철갑옷을 생산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진제국시대의 갑옷은 갑옷조각 모두가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주로 앞가슴과 등 뒷부분 및 어깨만을 덮는 것이었다. 중국은 철갑이 서한시대에 와서야 보급되기 시작한다. 서한 초기인 무제 이전까지 군대는 보병 위주였으며 철갑이 크게 보급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제시대에 이르면 흉노와의 전쟁으로 개갑으로 무장한 기병의 수가 크게 증가하며 갑옷조각의 모양도 큰 크기의 철갑에서 비교적 세밀한 물고기비늘 모양으로 발전한다.그러나 여전히 가죽 갑옷이 철 갑옷 보다 많이 사용되었다.

 

  고조선 철갑옷의 전체 모양은 알 수 없으나 고조선 철 갑옷의 갑옷조각 모양과 그 생산 시기를 중국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고조선의 경우 철 장식단추는 철기문화의 시작연대인 서기 전 12세기 경부터 생산되어 갑옷의 구성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는 고조선 갑옷만이 갖는 특징이다.

  2) 고조선의 경우 물고기 비늘 모양의 갑옷조각이 발굴된 정백동유적이 서기 전 3세기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발굴자료에 따르면 고조선에서 물고기비늘 모양의 갑옷이 생산된 시기는 중국에서 물고기 비늘 모양의 갑옷이 생산된 서한 중기보다 훨씬 빨랐음을 알 수 있다.

  3) 고조선의 물고기비늘 모양의 갑옷조각의 형태는 긴네모 모양인 것과 아래쪽이 둥근 긴네모 및 타원형인 것이 특징인데, 중국의 서한 초기 무덤들에서 출토된 철 갑옷조각의 형태는 대체로 고조선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제시기에 오면 비교적 아래쪽이 긴 타원형으로 변화한다.

  4) 고조선의 철갑옷 조각과 중국의 철갑옷 조각은 그 연결 구멍에서 차이를 보인다.

  5) 고조선의 갑옷조각은 연결구멍을 쇠줄로 연결했으나 중국의 갑옷 조각은 비단끈이나 가죽끈으로 연결했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은 뼈갑옷, 가죽갑옷, 청동갑옷, 철갑옷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했음을 알 수 있고 이후 고구려에 그대로 계승된다. 중국은 무제때에 와서야 군대에서 철갑옷을 입은 기마병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3  >

 

  고구려는 <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1,2 >에서 설명했듯이 고조선의 갑옷 생산기술을 계승하여 보다 발달된 철갑옷을 생산했다.

 서기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고구려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갑옷의 특징과 같은 시기의 중국 및 북방의 갑옷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삼국양진시대에 군대에서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의 용수개를 입었고,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기병이 군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양당개가 생산되었다. 고구려벽화에서는 이 같은 중국의 용수개와 양당개에서 보이는 모양의 특징을 지닌 갑옷을 일률적으로 착용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는 군대의 구성과 역할에 따라 매우 다양한 갑옷을 입었다. 따라서 철갑옷 조각의 형태와 크기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갑옷의 형식도 매우 다양하다. 이 같은 현상은 고구려가 중국보다 앞서 뼈 갑옷, 가죽갑옷, 청동갑옷, 철갑옷을 생산했던 고조선의 기술을 계승하여 이미 중국보다 뛰어난 생산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갑옷은 중국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부여의 갑옷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갑옷을 계승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북방의 경우 북위시대에 속하는 맥적산 맥찰 127굴 벽화에 보이는 갑옷과 말갑옷 그리고 돈황 285굴 서위벽화에 보이는 기병의 옷에서 가죽갑옷 위에 철갑옷 조각을 드문드문 박아 넣은 모양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모습들은 고구려의 갑옷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갑옷과 중국 및 북방지역의 갑옷의 또 다른 큰 차이는 목 부분의 처리에 있다.중국의 갑옷과 북방지역의 갑옷은 목부분을 특별하게 처리하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경우는 다양한 여밈새의 목을 덮는 부분 갑옷으로 귀밑까지 보호하게 되어 있어서 매우 우수함을 알 수 있다.

  집안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릉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입었던 질이 우수한 금동과 철로 만든 고기비늘 모양의 갑옷조각이 다량 출토된 바 있다. 갑옷조각의 폭은 약 2.3쎈티미터 정도로 위의 그림에서 보이듯이 아랫부분이 둥근 고기비늘 모양으로 겹쳐져 만들어져 칼이나 창 또는 화살의 공격으로 부터 잘 보호될 수 있도록 하였다. 투구와 말갑옷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말갑옷(개마)의 경우 고구려는 그 생산시기가 중국이나 북방지역 보다 적어도 2세기 정도 앞서기 때문에,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말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클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4세기 중엽에 속하는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개마는 중국의 북조 초기에 속하는 초장파 1호 고분의 도용에서 보이는 개마보다 그 연대가 훨씬 앞선 것이다. 그런데 안악 3호분보다 앞선 서기 3세기경에 속하는 강원도 철령유적에서 개마모형들이 출토되었다. 이 개마모형들은 고구려 개마가 보여주는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개마의 출현시기가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한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동천태왕 20년(서기 246년)에,

 

          "태왕(동천태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 같지 못하다. 관구검은 위의 명장이지만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있구나'하고 곧 철기 5,000을 거느리고 쫒아가서 쳤다."


고 하여, 갑옷을 입은 개마기병이 5,000이었음을 알 수 있고, 서기 3세기 이전에 개마가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기 3세기 이전에 개마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물고기 비늘 모양의 철갑옷의 출현이 이보다 훨씬 앞섯을 것임을 알려준다.     

   집안 동구 12호 고분벽화와 장천 2호 고분벽화 및 삼실총에 보이는 개마무사들은 갑옷과 함께 철이나 금동으로 만든 정이 솟은 신을 신고 있다. 실제로 집안 지역에서 이 같은 신들이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이 신들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 같은 모양의 신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장수산성유적과 철령유적에서 출토된 기마모형들 가운데는 간혹 등자(말을 탈때 발을 놓는 발걸이)가 보이고 있어, 고구려의 등자 생산 연대가 주변국 보다 앞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연개소문 드라마에서는 연개소문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들이 고기비늘 모양의 겹쳐져 이어진 청동 또는 철갑옷조각으로 만들어진 활동성이 편리한 갑옷과 투구를 입은 모양새가 시청자들에게 보여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갑옷과 함께 정이 솟은 스파이크 신발(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2 에서 그림제시)을 신고 얼굴까지 갑옷을 씌운(마면갑 말갑옷) 말을 탄 기마부대가 중국의 군대와 차별화되어 보여져야 할 것이다. 무사와 말이 모두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가시돋친 모양의 무기를 사용하여 이를 갑옷에 걸어 끌어내리기도 하였다.

 

  갑옷과 말갑옷 및 투구들은 벗게되면 이어진 부분들이 접혀져 납작하게 되기때문에 수천벌의 갑옷도 보관하기에 편리하였다. 갑옷의 색상도 청동갑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금과 같은 색이 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철로 만든 갑옷도 철갑편 위에 금색의 칠(황칠수라는 나무에서 금색의 칠이 생산되었음)을 하기도 했으므로 군청색이나 잿빛의 색상으로 만 표현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조선의 갑옷과 이를 그대로 계승한 고구려의 갑옷에는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2) 그림에서 제시한 장식단추를 투구나 갑옷에 많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특징들이 당나라의 갑옷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당나라 군사들의 투구와 갑옷에 둥근 장식단추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장식단추는 특히 고조선시대의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에서 골고루 출토되고 있고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기 때문에 고조선의 문화권과 고조선의 강역을 확인할 수 있는한민족 고유의 특징있는 복식 출토품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고구려의 갑옷에서 엿볼 수 있는 고조선으로 부터의 한민족 고유성의 계승은 그들이 추구했던 다물이념이 단순히 지난날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강역으로 했던 고조선 영토의 병합 만이 아니라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 같은 실천 노력은 일반의복에서 뿐만 아니라 군복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구려 갑옷과 복식 등에 관한 보다 학술적인 상세한 내용은 저의 저서 {한국 고대 복식}-그 원형과 정체, 지식산업사 를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1. 부월수

부월수는 부(斧)와 월(鉞)을 쓰는 병사, 즉 도끼병을 의미합니다. 고대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병종에 속합니다. 부월수의 경우 저로서는 경장부월수와 중장부월수로 나눕니다.

1) 경장부월수 : 우선 경장부월수의 경우 말 그대로 가벼운 갑옷을 입은 병사로서 도끼의 경우도 전투보다는 일을 할 때 쓰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주로 초기형태의 도끼를 쓰던 병사들에 해당합니다. 한반도에서는 주로 3가지 도끼형을 썼는데, 이 중에서 가장 원시적이고, 세계 공통적으로 보이는 도끼를 쓰는 병사를 말합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에서는 이러한 도끼를 가지고 다니는 병사가 보입니다. 그러나 이 도끼는 그리 크게 실용성이나 강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단점이 있기에 초기의 부웘, 즉 경장부월수는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2) 중장부월수 : 중장부월수라고 하는 것은 갑옷으로 무장을 한 병사를 말합니다. 여기서 중장부월수라고 해서 갑옷으로 도배를 한 모습이 아닌, 기본적인 갑옷을 입고 싸우는 병사를 말하죠. 경장부월수의 경우 갑옷을 입지 않은 경우도 허다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중장부월수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개마기병의 등장 때문입니다.

개마기병과의 전투에서는 이기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특한 방법으로 이 개마기병에게 대항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제가 예전에 답변했던 글인 "고구려의 철기병을 신라,백제,가야는 어떻게 상태했나요?"라는 글에 잘 답변되어 있습니다. 그 글의 주소는 아래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철기병을 신라,백제,가야는 어떻게 상태했나요?"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docid=28566

이때 쓰인 도끼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도끼와 비슷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도끼는 그 후에도 널리 쓰이게 되며, 송명시대 정도 즈음에는 '대부'와 구분하기 위하여 '판부'라고 불리게 됩니다.

3) 월형부수 : 월형부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양날도끼입니다. 달처럼 생겼다고해서 월형부죠. 이 도끼의 경우 아차산성에서 발굴됩니다만 구체적으로 쓰였다는 점서는 약간 미심쩍습니다. 그 이유가 뭔고 하니, 이 월형부라는 것이 그리 많이 발굴되지 않으며 게다가 무기로서의 효용성도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에서 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실지로도 쓰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해 봅니다. 당시 제련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일부러 날을 두개로 해서 힘을 잘 쓰는 병사들에게 맡겨서 싸우게 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계속 싸우다 보면 날이 무더질수도 있기 때문이죠.


2. 환도수(도보수)

    여기서 말하는 환도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환도가 아니라 환두대도의 준말입니다. 저나 몇몇 사람들이나 쓰는 말이니 태클 사절입니다.

    환두대도라는 것은 환수도, 환병도라고 불린 중국 한나라시대의 무기와 비슷한 것입니다. 참고로 이 환두대도는 휘어져 있는 곡도가 아니라 곧게 뻗어있는 직도 입니다. 이런 환두대도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다양하게 발달하였는데, 고구려의 삼만문환두대도, 백제의 용봉문환두대도, 신라의 삼엽문환두대도, 그밖에 방두대도, 소환두대도, 규두대도 등 많은 양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환두대도는 지배층의 권력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 다반사이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투상에서 이러한 환두대도를 쓰는 것은 그리 드문일이 아니었으며, 고분벽화에서도 발견되기에 이리 서술해 놓습니다.


3. 중장보병

    고구려의 경우 고분벽화를 보면 중무장을 한 병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은 중장보병이라고 부른데, 온몸에 갑옷을 입고 환두대도를 들고 있으며(물론 무늬가 없는 환두대도를 사용하였습니다.) 순(盾)이라는 방패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참고로 방패에 대해서 몇마디 할 분들이 생길듯 하여서 미리 선수좀 치겠습니다. 당시 방패는 크게 패, 간, 순 이라는 방패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패라는 것은 원형으로 생긴 방패로서 한손으로 들기 편하게 만들어져서 보편적으로 쓰였고, 간은 각이 있는 방패로서 오각형 비스꾸리하게 생겼습니다. 순은 이보다는 좀 더 크기가 큰 방패가 아닌가 하고 추측되는데, 저로서는 이 중에서 순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중장보병은 전쟁에서는 그야말로 주력군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고분벽화 속에서는 단순히 그 그림의 주인공을 호위하지만, 저로서는 아마도 실전에서도 그런 모습으로서 싸우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4. 창병

    삼국시대의 창은 다양하였습니다. 모, 연, 과, 극, 겸, 구, 차, 창, 삭, 장창, 맥도... 이렇게 11가지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1) 모 : 모라는 것은 중국의 무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지방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독특한 궐수문의 모가 만들어지고, 또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모라는 것은 당시에는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창의 등장에도 약간 주춤하였으나, 그래도 언제나 가장 많이 쓰이는 무기였죠. 기병이든 보병이든, 이 모를 자주 썼으며 착용도 편하였기에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됩니다.

2) 연 : 연이라고 하는 것은 약간 어려운 개념으로 다가서겠지만, 모와 많이 흡사합니다. 그러나 모의 날보다는 더 얇고, 자루가 철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자루가 철로되지 않은 것도 있어서 꽤 헤깔리죠.

    제가 육도를 읽어보니 이 연에 대해서 설명이 나오더군요. 이를 보아서 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쓰였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신라쪽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3) 과 : 과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ㄱ'모양으로 생긴 무기입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쓰이던 무기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쓰이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구와 겸의 등장으로 과는 점차 사라졌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또한 극의 유입으로 인해 과의 필요성이 떨어져서 점차 사라졌으리라는 생각또한 듭니다.

4) 극 : 극이라는 것은 모와 과를 합한 것입니다. 이게 후대의 구겸창과 비슷한 모습을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비슷하게 쓰이기도 하였었죠.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많이 쓰였습니다. 가지창이라고도 부르는데, 찰갑의 구멍 사이에다가 넣고 말에서 끄집어 내리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5) 겸 : 겸이라는 것은 낫을 의미합니다. 이 겸은 중장기병의 등장으로 인하여 도끼처럼 강한 힘을 가진 무기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겸도 극처럼 적의 찰갑에다가 날을 넣어서 넘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낫이니, 특유의 날을 이용하여서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6) 구 : 구라는 것은 갈고리입니다. 이또한 찰갑에다가 날을 넣고 잡아 당기는데 사용되었는데, 앞에서 말한 극이나 겸보다 더욱더 전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극이나 겸처럼, 또다른 싸움에서는 그리 잘 쓰이기 어려운 무기였으니 말입니다.

7) 차 : 차라는 것은 서양식으로 말하면 트라이던트입니다. 트라이던트가 뭔고 하니, 바로 작살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차는 후대의 삼지창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날을 약간 휘에 하여서 위의 무기들과 마찬가지로 찰갑을 끌어당기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8) 창 : 창이라는 것은 촉나라의 제갈량이 발명했다는 무기 입니다. 기존의 장병기와는 달리 획기적인 것이었는데, 창날과 자루 사이에 창영이라는 것을 두어서 날이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고, 또 창준이라는 것을 자루 끝에 달아서 땅에 고정시키는 역할도 하였죠.

    이러한 창은 창의 날을 살펴보면 모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의 경우 날 속에 구멍을 내어 이를 자루에 부착하지만, 창의 경우에는 창날의 아래에 약간 돌출시켜서 자루를 거기에다가 꼽고, 끈으로 묶게 만듭니다. 이게 창날의 특징이고, 이로 인해서 창이 후에 보편화가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창은 전역에서 발견되며, 단지 특이하게 한 나라의 무기거나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9) 삭 : 삭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의 렌스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병이 사용하였으며 돌격전술때 활용하였습니다. 적에게 전속력으로 돌격하여서 찌른 후에, 적의 창을 뺏는 마상탈삭이라는 기술에서 쓰이는 창이기도 하죠. 여담입니다만, 이런 마상탈삭의 귀재가 바로 당나라의 위지경덕, 즉 울지경덕이라고 합니다.

    이런 삭은 돌격에는 그만이게 만들어졌습니다. 후의 일입니다만, 후대에 와서는 이에 끈을 묶어서 드는 사람이 편리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0) 장창 : 장창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의 무예도보통지에도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흔히 한 창을 가지고 2명의 사람이 잡는데, 여기서 한 사람은 창날쪽 자루를, 그리고 다른 사람은 자루 끝부분을 잡아서 땅에 고정시키죠. 그래서 기병의 움직임을 저지하였다고합니다.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전투가 매소성전투라고 전해집니다. 제가 위에 올려드린 철기병을 상대하는 전술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장창이죠. 참고로 흔히들 신라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삼국공통으로 존재한 무기였습니다.

11) 맥도 : 맥도는 고구려에서 많이 쓰여서 당으로 전파된 무기였습니다. 넓직한 날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는 등 송명시대의 대도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보면 이러한 맥도를 가지고 있는 수문장이 나오는데, 이를 봄으로 인하여 고구려에도 맥도가 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5. 궁전수

    고구려의 경우에는 맥궁이라고 불리우는 강력한 활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활은 다른 나라의 활과는 달리 휘어진 나무를 반대로 휘어서 만드는데, 이러한 양식을 쓰는 나라는 몽골, 흉노, 그리고 우리나라가 대표적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또한 이러한 활을 썼으리라 추측되며, 기록에서도 그리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궁전수는 전쟁에서도 맹렬한 활약을 하였고, 특히 외국에 수출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고분벽화에 보아도 이 궁전수의 모습은 잘 보여집니다. 그만큼 오랜 옛날부터 필수적인 병종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6. 경장기병

    경장기병은 쉽게 말해서 경기병입니다. 이들은 가벼운 무장을 하고 적진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전투를 임하였는데, 초기의 경우에는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오면서 돌격을 중장기병에게 내주게 되자, 보조적인 위치에서 적을 공격하는데 쓰입니다.

    특히 경장궁기병의 경우 활을 이용한 공격으로 몽골군과 비슷한 양상을 취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이러한 경장궁기병은 그 존재가 확연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충분하기에 이렇게 서술해 놓습니다.


7. 개마기병

    흔히들 중장기병, 또는 철기병이라고도 합니다.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하였고, 심지허 말에게마저 갑옷을 입혔기에 개마기병이라고 부릅니다. 고구려의 경우 이러한 개마기병이 상당히 발달하였습니다.

    개마기병의 주무기는 삭이나 맥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개마기병의 경우 한가지 무기를 소지해야 하는데, 그래서 위지경덕처럼 마상탈삭의 기술을 연마해야 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개마기병의 전성기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시절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이 개마기병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가야를 멸망에까지 몰고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당시로서는 거의 탱크였습니다.

    이 개마기병의 운용비는 굉장히 많이들 뿐더러, 마갑의 먼지 등 이런저런 간수같은 것도 굉장히 어려웠다고들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막강한 파워로 인해 후대에도 아주 널리 사용되는 병종이었습니다.


8. 쇠뇌병

    당시에는 노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노, 즉 이 쇠뇌는 크게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휴대용인 기계식 쇠니였으나, 다른 하나는 큰 쇠뇌였습니다. 서양의 발리스타와 비슷한 놈이죠.

    신라에서는 천보노라는 것이 매우 유명하였습니다. 중국에서도 그 기술이 부러워서 빼어내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한 일화는 그 신비함을 더욱 더해주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당시 삼국에서는 휴대용 노가 쓰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실제로는 그리 많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활 때문이죠. 우리의 활을 쓰는 것이 차라리 이 휴대용 쇠뇌보다도 더 좋기 때문이었습니다.


9. 투석기 및 공성무기

    당시에도 투석이나 공성무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급속도로 발전된 것은 수와 당나라 시대 때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수나라때의 발석차는 고구려에게 그리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정거리가 짧아서 접근하기도 전에 고구려가 손을 써버리니 말이죠.

    그러나 당나라의 그것은 또 달랐습니다. 당은 가공할만한 사정거리를 가진 발석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고구려 또한 실제로 이를 굉장히 두려워 하였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밖에 충차, 누차, 당차 등 수많은 공성무기들이 만들어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