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철제갑옷

2013. 6. 4. 09:18우리 역사 바로알기

 

 

 

주몽 송일국 철갑옷과

철갑옷 철갑 비늘옷은

주몽 송일국 철갑옷과

고구려시대 철 갑옷의 우수성, 철갑 비늘옷. 우리 조상님들의  철제 갑옷에 대하여,

 어린이 여러분에게 답을 드립니다

..

 



고구려 철갑옷

1.
우리나라의 철갑옷에 대한 기원은 이미 기원전 수십세기 前으로 올라 갑니다.

우리 "백제, 고구려, 신라 원시(原始) 삼국" 중에서

철제 갑옷 비늘옷을 먼저 개발무장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입니다.

철기문화는 이미 고조선시대부터 전해진 것으로 고조선 족이 맨 처음에,  

철제류의 무기나 농기구등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으로 내려오고,

고구려 철기는 고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철기문화로 가장 앞섰던 문화입니다.

고구려가 중국과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가,

바로 동아에서의 앞선 철문화적인 배경 때문입니다' 동아와 반도의 지배계급이 바로 철기족이며

이철족(鐵族)이 밝족= 쇠족으로, 배달=다물族입니다. 제가 언제인가 토착사회형성과

우리 姓씨족제도의 근원을 연구하던 중에 쇠를 사용한 동이족族이 당시 동아시아와 반도를

지배한 민족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위해 여러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모팔모는 독창적인 초강법 기술로 철제 무기와 철갑 옷을 만들어

주몽군이 부여군과 한나라군을 제압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만드는 초강법의 비밀이 황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황토에 산화철 성분이 들어 있으면 실제로 강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토는 노란 빛을 띠었지만 사실 산화철이 포함된 황토는 붉은색이다. '
"철기방의 대장장이들은 뜨거운 쇠를 연방 두들긴다."

두들겨 얇게 폈다 접어서 다시 두들기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

여러 번 두들기면 철 원자 속에 탄소 원자를 빽빽하게 밀어 넣어 얇고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강철을 만들 수 있다.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로 단단한 철갑옷을 만들고 있다."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 윤용현 연구관은

 “갑옷 전체가 한 통으로 이뤄진 ‘판갑’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쇳조각(소철) 여러 개를

물고기 비늘처럼 붙여 만든 ‘찰갑’이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아마 고구려 건국후의 철갑을 말합니다 

"쇳조각을 두들겨 가볍고 단단하게 만든 다음 작은 쇠못으로 이어 붙인 찰갑은 고조선에서

이어 발전시킨 고구려의 독자적인 갑옷 양식입니다. 철을 식히는 방법도 무기의 단단한 정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삼국시대 조상들은 이를 이용해 칼날과 칼등의 경도가 다른 칼을 만들었습니다

 높은 온도로 달군 쇠를 두들겨 칼 모양으로 만든 다음 칼날 부분만 먼저 물에 넣어 급속히 냉각시킨

다음 전체를 담가 식혔습니다.그러면 칼날이 칼등보다 더 단단해집니다.

상대적으로 무른 칼등은 부닥쳤을 때 충격을 흡수합니다"

고대사에 보면, "서기 4세기 경 고구려軍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대한 남정(南征)을 하는데

철갑으로 무장된 양국 "고구려군과 가야 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는

철제 비늘 갑옷으로 무장한 고구려 개마철기병 軍에게 돌아갔습니다.

가야도 "철 문명과 바다의나라"로

낙동강 유역의 강국인데,고구려 군을 만나 이 전쟁에서 졌습니다.4세기 고구려군은

최강철갑(鐵鉀)군으로 고구려 철갑옷은, 매우 세공 기술이 좋고,

발전된 비늘 철갑이고 무장이 가벼우며,

. [고령 출토, 가야의 철갑옷]

가야 철갑군 옷은 철피와 판금형의 찰갑옷이였습니다,

즉 주몽시대 다물군처럼 찰갑편주 모습도 나옵니다.

.

 

 

 

 

[가야시대 철갑옷 조각]

 

 

그래서 4세기 전쟁에는 고구려 군에게 패했으며 ,

그 정도로 고구려 갑옷의 기술과 철의 제련이 한 발 앞선 것입니다.



.


사진은 우리나라 상고 시대의 갑옷과 같은 모습입니다.

고려.조선시대의 두정갑이나 찰갑형태가 아닌 "판金 형태의 철"갑옷입니다.

즉,서양은 체인 메일류에서==>> 판금형갑옷으로 무장했다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판금金형에서 나중에 스케일 메일(찰갑==>> 비늘철갑옷등)

형으로 바뀌어 왔음을 볼 수 있고. 이 옷은 삼국 전기의 철갑옷 모양입니다

 현재 "드라마에 나오는

주몽의 년대 시기"가 대략  "기원전 83년" 경 정도 입니다,

즉, 고구려 제국의 건국시기라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주몽의 복장은 "판금형의 찰갑, 철갑주 옷"으로 보면 해석이 타당합니다. 

주몽의 보병과 기마병의 철갑이 모두 조각/찰갑형태인데 판금에서 더 발전된 찰갑/편주형의

철갑으로 더 가벼운 기마/步戰 동시에 사용한 것같습니다.

찰갑의 찰札이란 한자 용어에 명찰이듯 붙여다는 "조각이나 표시물"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좌측주몽군처럼 다물軍 대부분이

이 찰갑 편주옷을 입었습니다.

백제시대 철갑옷 (5세기경 추정)  망이산성출토 철갑옷

.



 

고구려시대의  비늘찰갑



고구려 시대의 기마병의 비늘 찰갑의 철갑옷과 같은 모습의 갑옷입니다.

특히 고구려 철鐵기마軍은 당시 주변 나라들이 전부 두려워한 군대였습니다.

이 비늘 철갑옷은
중형 무기 공격시 충격 흡수가 어렵습니다만[철 보병은 주로 방어가 용이한 찰갑형임] 

마상馬上전투에 용이하도록 제작된  "베기 공격이나 화살공격" 등에 대한

방어도가 높은 철갑 비늘 형입니다.

고구려 기마병은 상당히 위협적이였던 강병입니다. "철개마군단"이라 하여

말에도 갑웃을 두른 군대로 삼한과 중원의 중국도 두려워한 군대였습니다.

[비늘 철갑옷]

.

 

 

2. 왜 고구려 철갑옷이  우수할까요

 

우리나라 철갑옷 개요

"출처-백과사전" 쇠갑옷은 제작방법에 따라 판갑옷[板甲]과 미늘갑옷[札甲]으로 구분된다. 철판갑옷은 장방형, 혹은 삼각형의 얇은 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엮어서 상체를 가리도록 고안된 것이다. 유물로는 경주 구정동고분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철판갑옷은 부산 복천동, 함양 상백리, 합천 성산리(옥전), 고령 지산동 등 가야고분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으며 최근 백제 지역인 청주 신봉동유적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미늘 철갑옷은 모가 죽은 장방형의 작은 철판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든 것으로서 하반신까지 가리게 되어 있다. 철판갑옷에 비해 움직임이 훨씬 수월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기능적인 면에서 보다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주로 말탄 기병의 갑옷으로 이용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만 미늘갑옷을 착용한 무사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이러한 선진적인 고구려문화는 백제·신라·가야지역에까지 파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구[胄]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가늘고 긴 여러 개의 쇠판을 끈으로 엮은 형태의 종장판주(縱長板胄)가 있고 이외에도 이마 부분에 챙이 붙은 것, 머리 위에 관모형의 가장식이 붙은 것, 옆모습은 반타원형이며 앞이 뾰족하게 처리된 것 등 다양한 형태의 투구가 존재하였다. 한편 어깨와 목, 팔뚝 등의 부위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판갑옷과 한벌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인용 다음백과사전)"


 

"고구려벽화의 고구려 갑옷은 같은 시기의 중국 및 북방 갑옷과 비교해 보면 중국 삼국양진시대에 군대에서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의 용수개를 입었고,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기병이 군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양당개가 생산되었는데, 고구려벽화에서는 용수개와 양당개 모양의 특징을 지닌 갑옷을 일률적으로 착용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즉 고구려군대는 구성과 역할에 따라 매우 다양한 갑옷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철갑옷 조각 형태와 크기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갑옷의 형식도 매우 다양합니다. 이 같은 현상은 고구려가 중국보다 앞서 뼈 갑옷, 가죽갑옷, 청동갑옷, 철갑옷을 생산했던 고조선의 기술을 계승하여 이미 중국보다 뛰어난 생산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의 철갑군사" 입니다

가운데를 보시면 철갑군이 보입니다.

"집안 고구려 고분 벽화 삼실총 제3실 서쪽 입구 벽의 철갑군사입니다
철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긴 칼을 찬 무장이 묘실무덤 주인을 보호하는 모습"입니다.

 

고구려 갑옷
따라서 고구려의 갑옷은 중국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부여의 갑옷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갑옷"을 계승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임진,한강에서의 신라/백제와 전쟁. 대 가야 정벌.

중원세력과의 전쟁에서 보면 철기병/개마 기병등 다얀한 군사 조직을 발견합니다.

고구려의 갑옷과 중국/ 북방 지역 갑옷과 또 다른 차이는, 중국의 갑옷과 북방지역의 갑옷은 목부분을 처리하지 않았으나, 고구려는 다양한 "여밈새"의 목을 덮는 부분 갑옷으로 귀밑까지 보호하게 되어 있어서 신체방호강도가 우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집안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릉에서는 왕이 입었던 질이 우수한 금동과 철로 만든 "고기비늘" 모양의 갑옷조각이 다량 출토된 바 있습니다. 갑옷조각의 폭은 "약 2. 3쎈티미터" 정도로 아랫부분이 둥근 고기비늘 모양으로 겹쳐져 만들어져 칼이나 창 또는 화살의 공격으로 부터 잘 보호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투구와 말 갑옷"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말 갑옷 (개마)의 경우,

고구려는 중국보다 적어도 "2세기 정도 앞서기" 때문에,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말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입니다. 즉,고구려족의 서토 정벌과 북진 전쟁때 高句麗철갑옷 기술의 전파입니다. 서기 4세기 중엽 무렵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개마"는 중국 북조 초기에 속하는 초장파 1호 고분에서 보이는 개마보다 "그 연대가 훨씬" 앞선 것입니다. 그리고 3호분보다 앞선 서기 3세기경에 속하는 "강원도 철령 유적"에서 개마모형들이 출토되었고. 이 개마모형들은 고구려 개마가 보여주는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개마의 사용시기가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합니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동천왕 20년(서기 246년)에, "왕(동천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 같지 못하다. 관구검은 위의 명장이지만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있구나'하고 곧 철기 5,000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쳤다." 고 하여,

갑옷을 입은 개마기병이 5,000 이었음을 알 수 있고, 서기 3세기 이전에 개마가 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기 3세기 이전 이미 "개마의 출현 사실"은 군사의 몸身을 보호하는 철갑옷인 물고기 비늘  철갑옷의 출현이 이보다 훨씬 앞서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집안 동구 12호 고분벽화와 장천 2호 고분벽화 및 삼실총에 보이는 개마 무사들은 갑옷과 함께 철이나 금동으로 만든 정이 솟은 신을 신고 있습니다.

실제 집안 지역에서 이 같은 신들이 출토되었는데, 관계자들은 이 신들이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했으며. 이 같은 모양의 신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또한 장수산성 유적과 철령 유적에서 출토된 기마모형들 가운데는 간혹 등자(말을 탈때 발을 놓는 발걸이)가 보이고 있어, 고구려의 등자 생산 연대가 주변국 보다 앞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갑옷과 함께 "정이 솟은 스파이크 신발"을 신고

얼굴까지 갑옷을 씌운(마면갑)과 말갑옷을 입은 말을 탄 기마부대가

중국의 군대와 차별화 되고 무사와 말이 모두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가시돋친 모양의 무기를 사용하여 이를 갑옷에 걸어 끌어내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갑옷의 색상도 청동갑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금과 같은 색이 납니다. 철로 만든 갑옷도 철갑편 위에 금색의 칠(황칠수라는 나무에서 금색의 칠이 생산 되었음)을 하기도 했으므로 군청색이나 잿빛/황금색등 다양합니다.

또한 고조선의 갑옷을 그대로 계승한 고구려의 갑옷에는 "장식단추"를 투구나 갑옷에 많이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특징이 수당나라의 갑옷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장식단추는 특히 고조선시대의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에서 골고루 출토되고 있고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기 때문에 "고조선의 문화권과 고조선의 강역"을 확인할 수 있는 한민족 고유의 특징있는 복식 출토품이라 할 수 있으며 .고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입니다. "

상대의 우리 민족의 훌륭한 모습입니다.  

 

다음은 고려.조선시대의 철갑옷의 모습입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위 좌로부터.그림가-고려시대. 그림나-조선전기. 그림다-조선후기. 아래는 조선의 수은갑)

그림가.고려시대의 쇄자갑과 경번갑

(좌)쇄자갑은 서양의 체인메일과 비슷한 형태로 쇠사슬을 엮어만든 갑옷이며
(우)경번갑은 쇄자갑의 약점인 찌르기 공격을 보완하기 위해
그 위에 철판을 덧댄 형태입니다.


그림나.두정갑

조선시대의 두정갑은 두석린 갑옷을 거꾸로 입은 형태라고 보면 됩니다.
실제 방호구가 되는 철鐵편으로 이루어진 방어구를 입고 위에
걸쳐입는 형태의 갑옷입니다.
 철편 방호구를 착용하면 방어도가 더 높습니다.


다. 두석린갑과 라. 수은 갑 (아래그림)

조선시대의 두석린 갑입니다.
미늘 갑옷의 일종으로 두터운 방호복 위에 철편을 이어붙인 형태입니다.
"두석"이란 우리 할머니들이 시집올 때 가져온 농=가구=옷장,목가구를 보면 귀퉁이 가상 부분에

"황금색 쇠조각"을 볼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황동片을 방호복 위에 고기 비늘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인 것입니다.


 

[그림라]의 수은갑은 철갑에 은을 칠한 것입니다.

이는 "근접전투나 마상 전투"에서 상대의 창칼공격에

표면이 매우 미끄러워, 방호에 우수하고, 특히 "햇빛이 나면 반사되는 " 은갑으로  상대의 눈을 흐리게한

매우 우수한 철갑입니다. 이상은 우리민족의 철기술과 철갑옷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상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전국의 어린이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이민영시인  

 

[자료 다음 카페의 글, 연개소문과 주몽사극에 대한 의견 .편저자 개인의 연구자료.기타사료 의거,

이미지제공-mbc의 공개이미지..중앙 박물관 공개 이미지. 연합뉴스의 공개이미지

위내용에 대하여  편저 편집권을 보유하오니, 복사하실때는 촐처 명기 바랍니다.

편저-다음 카페 시사랑사람들의 이민영李旻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