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30. 00:08ㆍ들꽃다회
임나신론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일본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요즘 우리나라 역사에 왜 이렇게 딴지를 건답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서..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 역사왜곡이 요즘 문제가 된다면서 임나신론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요..
임나신론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어떤것을 보고 그렇게 지칭하는거죠?
익명 2008.09.20 04:19 수정됨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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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
답변
임나는 가야를 뜻한다고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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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것을 배운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배운 기억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임나신론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임나신론이란 단어를 가지고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일본측에 따르면 임나에 일본의 식민지통치기관인 임나일본부를 두어 통치를 했다고 해요.
우리나라와 합의가 없이 자신들만이 펼치는 아주 터무니 없는 주장이죠.
일본학자들도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김해지방을 여러번 답사했었는데요.
특별한 자료를 못 찾았다고 해요~
울릉도도 그렇고, 다시는 이런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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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신론>이란 김인배.김문배 선생이 저자인 책의 서명입니다.
그동안 일본인들이 잘못된 발음만으로 근거삼아 한반도에서 임나일본부를 찾으려다 실패했는데
그런 일본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아 아직도 강단 사학계 일부 인사 중에 일본의 잘못된 주장을 추종하고 되풀이하고 있어 그런 식민사관에 따른 학설이 아닌 새롭게 밝히는 임나라는 뜻의 제목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수로왕의 후인 허와후의 딸이 일본 구주(쿠슈)로 건너가 세운 일본 최초의 고대왕국이 '야마이'왕국이 됩니다.
'오래오래 데라이다'라는 것이 그 지역의 전승되는 축제 구호인데 갓파도래비(가야파도래비)에도 새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쉽게 '왓쇼이' 축제 구호와 같습니다. 그들은 그 내용과 뜻을 모르나 우리는 알수 있는 말이 오래도록 전승되어 온 것이죠.
이러한 가야의 일본 열도 개척사는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부장품들을 남기며 열도의 왕들이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 후 백제 세력이 또다시 도래하게 되지만 5세기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이 일본을 정벌하다시피 휩쓸 무렵부터 일본에 고구려식 묘제가 남게 되며 점차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기마민족 유래설은 이런 묘제가 나타남을 들어 한반도의 영향을 인정치 않고 건너뛰어 대륙의 기마민족에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전반적으로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백제나 고구려를 대외적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일본 구주에는 삼국의 소왕국을 비롯한 여러개의 나라들이 세워지게 되는데 광개토왕비의 '백잔'이란 본토의 백제가 아닌 구주 열도의 백제 분국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토 백제는 고구려에게 신속한 역사가 없습니다.
광개토왕비는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제는 많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일본이 건너와 신라와 백제를 신하로 삼은 것이 아니죠.
그리고 열도에는 3세기 말엽까지 말(馬)이 없었음을 코벨을 위시한 많은 학자들이 밝혔습니다.
그들은 청동기없이 바로 철기 갑옷으로 넘어가게 된 이유가 바로 가야와 백제에 의한 문화 전래에 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왕들의 무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다가 발굴만 하면 대외비로 하는 경우가 일본에는 굉장히 많았습니다.
모두 한반도의 가야나 백제 식의 유물이 나오기 때문이었죠.
그러다가 지진으로 고분 하나가 외국인에게까지 피치못하게 노출된 것이 후지노키고분입니다.
아주 백제의 것을 약간 등급 낮게 그대로 빼다 박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일본 천왕이라는 무덤이었죠.
대략 상황이 이러할진대 한반도로 당시에 출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에도 구야한국(구주)과 변진구야국(가야)을
혼동하고 구주의 다라국을 합천에서 나온 유적지로 오인하고 함안의 아라가야와 구주의 안라국을 혼동하는 것으로 인해 임나가 반도에 있다고 하는 일본의 그릇된 사관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현지 조사를 거쳐 관련 지명과 지방사를 비교해 확인한 사항들이나 아직도 일부 사학자(전 동아대 김연학교수와 추종자들)이 일본의 잘못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의견을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들은 삼국사기에 나온 사대주의 표현에 의한 문구들을 그대로 믿기 때문에 왜라는 것이 크게 인식되는 탓도 있겠지만 요즘 밝혀지는 조공 사례의 이면을 보면 상호 혼인 교류가 있고 이런 행사에 따른 사신 교류도 모두 사대적인 조공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삼국의 멸망 후에도 삼국의 사신들이 한 날 한 시에 모여 기내지방에 조공을 왔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기록도 수십차례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내 세력을 아군으로 삼기 위해 구주의 삼국의 분국들이 사신을 보낸 것들로써 오히려 역으로 조공을 왔다라고 표현했음을 [임나신론] 분만 아니라 다른 학자의 연구에서도 밝히고 있는 사항이며, 특히 가공의 신공왕후대에는 기발한 착상으로 역사사실을 '분식'하여 교묘히 고이왕의 일본정벌 자체를 지우고 있음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백제에게 정벌한 한지들을 다시 다 하사해주었는데 왜 또 왔느냐하며 곧 신하들의 곡소리로 연결되는 기사들이 암시하는 바는 기내 왕조조차 목숨이 날아가는 형국을 묘사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초창기 고조선때부터 넘어가 자리잡은 세력을 바탕으로 초기의 가야세력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본'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구주에 많은 분국과 왕국들이 있어 한반도나 대륙과 직접 연결도 못하는 상황이 이어져 오게 된 것입니다.
이에 이 기내세력(본 왜세력)이 구주의 일부 교역항을 중심으로한 지역, 즉 임나를 고이왕 열도 정벌 이후 힘을 키워 정벌한 것을 두고 반도의 가야나 신라 지역을 정벌했다고 오인한 내용이 여지껏 내려오게 되는 임나의 진실이자 실체인 것입니다.
거기에 일제의 존선식민지화 정책에 따라 임나일본부를 정략적으로 더 확대시켜 이용한 것이 오늘날까지 논란을 일으키게하는 배경입니다.
7세기 후반까지 기록된 일본의 향가나 일본서기는 모두 우리말로 풀이가 가능함을 우리학자가 보여 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에 있어 피진과 크레올현상으로 이전 고조선어가 깔린 가운데 또다른 지배세력의 언어가 계속 중첩됨으로써 반도와는 다른 발음현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고 일부 수사등에선 오히려 일본어가 고구려어와 더 유사한 말들이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해석이 않되는 만엽집의 시가 나오면 뭐든지 침사(미구라 고토바)라해서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이고 고어라 해석이 어렵다고 넘어가고 있으나 실은 한국의 지방언어(사투리)가 곧 만엽집을 이루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고도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며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특히 젊은 일본인들이 많지만 일각의 깨달음이 있는 출판계나 학자들은 한국의 해석자(김인배.김문배 선생)에게 해석을 의뢰해 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언어에 대해선 일본의 시미즈 교수와 한국의 박영미 교수도 반도 한어가 넘어가 열도한어로 되었음을 증명한 연구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많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칠지도 역시 백제가 구주의 7개 소국을 통일할 즈음에 열도 백제 분국왕에게 하사한 것이기에 일곱개의 가지가 달린 검이 되었던 것입니다.
대륙에서 찾아지는 여러 삼국의 흔적들이 있지만 아직 증명된 것은 아니고 또 대륙과의 관계에 상관없이 한반도와 열도와의 관계는 이처럼 수많은 유물과 유적, 그리고 유전자분석, 언어학에서 그리고 문화예술품을 다루는 문화인류학에서조차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국사교과서 하나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식민사관에서 못벗어나는 우리의 선대 학자들 이후로 국수주의가 아닌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역사학자들이 나올 시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칸무 천황이라고 하면 백제 멸망 후 백제 삼서를 모두 불태우고 그 뿌리를 없애고 열도에서 새롭게 출발하고자 서기를 만든 왕입니다. 그가 교토로 천도하며 세운 신사가 히라노신사이며 얼마전 현재의 일본천황 아버지까지 가서 식수하고 푯말을 남겼던 신사입니다. 그곳에 모시는 4대신이 있는데 이마키신으로 시작하는 그 4대왕이 바로 백제 성왕, 구태왕(온조라 그곳 신사는 알고 있음), 비류왕, 그리고 칸무 천왕 생모인 히메신 화씨부인임을 일본인 학자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의 우익에 묻히고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에 묻혀 제대로 알고 있는 양국의 국민들은 거의 없는 것이 현재의 한일간의 실정이자 꼬인 역사의 타래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여러 정책적 이유가 배경에 있지만 예전에는 동이의 오랑캐 지역으로 치부했다가 홍산문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유물 유적이 쏟아져 나오자 자신들의 조상을 동이에서 찾는 그런 해프닝을 벌이고 있으며 오로지 5천년의 역사를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로서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전자학으로 밝혀진 연구에 상관없이 우리의 고조선 역사가 필요한 상황이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과 사대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논리 개발에 쓰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팔아먹는 이들을 같은 국민으로 둔 희한한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모든 사학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며 사학자가 아니더라도 일각에서 부지런히 진실을 캐는 이들이 있기에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보며 무리한 왜곡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젊은이들도 주지하고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 봅니다.
역사 개념이 없으면 간도문제를 등한시하는 국회의원이 계속 양산되고 독도같은 문제에 대처못하는 국가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사실대로 보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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