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필사본은 어떤 책인가?

2015. 1. 30. 19:41들꽃다회

 

 

서라벌 이야기 (698)

 
'화랑세기' 필사본은 어떤 책인가? | 서라벌 이야기
솔뫼 2006.11.10 13:19

 

 

      

 '화랑세기' 필사본은 어떤 책인가?

 

 

 

 

   진짜다 가짜다 논쟁이 치열한 순한문「화랑세기 」 필사본은 일제식민통치 말기인 1934~45년경 일본 왕실도서관인 궁내성(宮內省) 서릉부(書陵部)에서 일하던 박창화라는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두 종류가 있다.

필사본이란 글자 그대로 붓이나 펜으로 종이에다 베껴 옮겨적은 것을 말한다.

첫번째 필사본은 89년 2월16일 부산에서 공개된 것으로 모두 32쪽 분량에 김대문이 썼다는 서문과 함께 1세 풍월주,즉 화랑인 위화랑에서부터 15세 풍월주 김유신 의 앞부분 일부까지 모두 화랑 15명의 전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박창화의 또다른 「화랑세기」 필사본이 있다는 사실이 1995년 4월 개최 된 역사학회 월례발표회 토론과정에서 공개됐다.

즉 이 대회에서 89년본 화랑세기가 진짜임이 확실하다는 이종욱 서강대 교수의 논문에 대한 토론자로 나섰던 노태돈 서울대 교수가 "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은 발췌 본이고 원래 필사본을 내가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새로운 필사본이 알려졌다.

노 교수 소장 이 필사본은 책 제목과 서문 등 앞부분의 일부가 훼손돼 없어지긴 했으나 4세 풍월주 이화랑의 중간부분부터 32세 풍월주 신공까지 차례로 화랑의 전 기를 담은 162쪽 분량이다.

32명의 화랑사가 김대문 가문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필사본이 궁내성에 보관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직접 보고 베낀 것인지, 혹은 순전히 박창화 자신의 창작물인 지는 궁내성 서고가 완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다 「화랑세기」 원본이 나오지 않아 아직까지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김대문이 680~690년경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랑세기」는 고려시대에 나온 김부식의 「삼국사기」같은 후대 문헌에는 아주 단편적인 인용만 이뤄지고 있어 이 책이 원래 어떤 체제를 갖췄는지 도대체 추정이 불가능하다.

다만 제목과 삼국사기같은 후대 기록들을 종합할 때 여러 화랑의 전기일 것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고 있다.

어떻든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일하던 시절 그가 작성한 「화랑세기」라는 이름의 필사본이 담고 있는 화랑은 한국인이라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귀에 따갑도록 들었던 충효정신의 표상인 화랑과는 사뭇 다르다.

필사본에 나타난 화랑들은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싸움에 임해서는 후퇴를 모르는 무사 청년집단이 아니라 원래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신관(神官)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또 이 필사본은 화랑의 복잡한 러브스토리라 할 만큼 화랑을 둘러싼 사랑과 질투가 자주 등장한다.

이 필사본에는 각 풍월주마다 가족관계가 자세히 나타나 있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이모나 고모이고 삼촌이며 형제가 되는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신라가 엄격한 골품제 신분사회였고 어머니만 달라도 형제자매끼리도 결혼한 족 내혼(族內婚) 사회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 따위에서도 알 수 있지만 필사본 화랑세 기가 전하는 같은 혈족끼리의 혼인관계는 훨씬 광범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떻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서 단편적으로 전하는 김대문 작「화랑세기」 의 희미한 모습과 화랑세기 필사본은 일반인이나 학자들이 생각하는 화랑의 모습과 너무 다른 것만은 사실이다.

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김대문이 지었다는 「화랑세기」를 진짜 베낀 것인지 는 오직 작성자인 박창화라는 인물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고 없다.

때문에 박창화가 베낀 「화랑세기」가 진짜라면 이것의 원본이 보관돼 있을 것 임에 틀림없는 일본 궁내청 도서관이 완전히 공개되는 길 뿐이다.

그러나 일본왕실은 천황의 뿌리를 뒤흔들 수도 있는 각종 고서가 보관돼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왕실도서관을 완전공개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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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만 남아있던 한권의 책.

 

삼국통일 직후 신라학자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그 책이 1300여년만에 홀연히 나타났다.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 이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화랑세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700년쯤에 신라시대 학자 김대문이 쓴 것입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책이 1300여년만에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신라시대 화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관창.

우리나라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화랑이었던 관창은 어린나이에 삼국통일전쟁에 참가해 백제군과 싸우다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계백장군이 그 기개를 가상히 여겨 그를 놓아주었죠. 그런데 관창은 또다시 적진에 들어가 장열히 전사했고, 이로인해 사기가 높아진 신라군은 마침내 백제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랑 관창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화랑의 상징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관창뿐만 아니라 화랑들의 이런 활약상은 그동안 여러 역사책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화랑의 조직이나 계보등의 구체적인 사실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엔 이런 것들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랑들의 사랑, 알력, 음모등의 개인적인 사생활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선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책이라면 이것을 바탕으로 신라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다시 써야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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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필사본은 부산의 한 가정집에 보관돼 있었다.

취재팀은 필사본의 소장자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필사본의 소장자인 김경자씨.

책은 김씨의 남편이 남긴 유품이라고 했다.
필사본의 표지는 유실된 상태였다. 성수학명이라 쓰여진 지금 표지는 소장자의 남편이 만든 것이다.

한지에 쓰여진 필사본은 모두 16장.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즉 대표화랑들의 이야기이다.

화랑의 기원은 물론 화랑의 계보. 그리고 그들의 출생과 활동 등 사생활까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첫번째 대표화랑을 역임했던 위화랑에서 15번째 김유신까지, 총 15명의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화랑의 족보인 것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충북 청원 출신의 박창화.

박창화는 김씨의 남편 김종진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책은 죽기 전에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

김씨 (화랑세기 필사본 소장자)

화랑세기가 어떤 책인지 알아보니 없어진 걸로 돼 있더라 신라때 김대문이 쓴 것인데 없어진 걸로. 더 소중하게 생각을 하고 만약 진본으로 밝혀진다면 신라사 연구에 많은 도움이 안되겠나 그런 생각에 공개하게 되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 2월, 마침내 세상에 공개됐다.

책 제목만 전하던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1300년만에 필사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학계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필사본을 가장 먼저 검토한 사람은 부산의 한문학자인 이태길 선생이었다.

이태길 (번역자, 광복회 부산지부장)

김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문화재 위원한테 보였다.

부산시 문화재 위원이 보니까 어마어마한 일이거든. 역사가 뒤집히는 일인데, 그래서 내한테 연락해서 갔는데... 그때는 이미 복사를 다 해놨다. 이게 32면 밖에 안되거든. 있는 그대로 신문에 번역을 해서 신문 공간이 허락하는데로 빨리 세상에 알리자 해서...

그런데 그로부터 7년뒤인 지난 95년. 또하나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나타났다.

두 번째 필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청주에 사는 박인규씨. 첫 번째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의 손자였다.

 

필사본은 한지에 싸여 소중하게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책은 많이 헐어 있었고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곳이 많았다.

두 번째 필사본은 총 162장. 4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까지, 총 28명의 대표화랑들의 이야기다. 전체적인 구성은 앞서 발견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기록된 대표화랑들의 숫자가 많고 그 내용이 훨씬 풍부하고 상세하다.

이렇게 두 번째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박창화. 그는 1889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1962년 사망했다. 그는 이 책은 1930,40년대 썼다고 한다.

박인규 (박창화 손자, 前 초등학교 교장)

할아버지는 보통사람하고 좀 틀리신 분이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만 열중하고 사교성이나 명예, 돈이라든지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신경을 안쓰고, 오로지 학문 연구만 했다.

 

그렇다면 박창화가 만든 두권의 필사본은 어떤 관계일까?

 

첫번째 발견된 필사본은 두번째 것을 발췌한 요약본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필사한 시기도 늦다. 서문부터 15번째 대표화랑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고, 뒷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필사한 시기도 빠르고 내용이 자세해 모본으로 추정되는 두번째 필사본은 서문과 앞부분이 없다. 대신 4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 대표화랑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앞부분이 있는 첫번째 필사본과 뒷부분이 있는 두번째 필사본이 합쳐져야 한권의 완전한 화랑세기 필사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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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어떤 내용인지 담겨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사람,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영정입니다.

이들은 형제지간처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중 김유신은 특히 화랑출신으로 그의 용맹성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유신은 물론 김춘추도 화랑이었다는 것입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김유신이 15세 풍월주, 즉 15번째 대표화랑을 역임했고...김춘추는 18세 풍월주, 18번째 대표화랑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김춘추도 화랑이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새로운 사실은 이뿐 아닙니다.

이 책은 김춘추의 결혼에 관한 얘기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매제 사이였습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 위해 가장 애를 쓴 사람은 바로 김유신이었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친분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겁니다. 하지만 왠일인지 김춘추는 한동안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의 결혼을 꺼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화랑세기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김춘추는 '얼굴이 백옥같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고 뜻이 있었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이같은 풍모를 알아본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그는 동생 문희와 김춘추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우선 김춘추를 집으로 초대해 동생과 관계를 맺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임신을 하자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며 동생을 불에 태워죽이려는 연극을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결혼을 망설였는데... 왜, 그랬을까?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그 이유가 명백하게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김춘추에게는 보랑(보라)이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고타소라는 딸까지 낳았다.

이도학 박사 (한양대 강사)

종전에는 초혼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학계에선 김춘추가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문희와 결혼을 하지 않았겠나 추정해 왔다. 그런데 필사본은 김춘추에게 보라공주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바로 이러한 기록과 맞춰보면 김춘추가 성큼 결혼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가 규명이 되지 않겠는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구한 것은 선덕여왕이었다. 때마침 김유신의 집근처를 지나다 이 사실을 알게된 선덕여왕은 김춘추을 책망한다. 그런데, 화랑세기엔 선덕여왕이 선덕공주로 나온다.

이것이 더 정확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문희의 언니인 보희도 김춘추와 결혼한 것으로 돼 있다.

왕비가 되는 길몽을 동생에게 판 보희가 후회하며 처녀로 남자 김춘추가 첩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로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진다. 이것은 두 신흥세력간에 결합을 의미한다.

 

필사본은 화랑의 기원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집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도학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집단에서 기원했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고 처음 여성수령이 남성수령으로 바뀐 것으로 돼 있다. 성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 화랑의 기능이나 성격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종전에는 화랑하면 전사단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집단, 제사집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 도인을 만나 무예를 익혔다는 단석산.

원래 제사집단에서 기원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화랑 김유신이 이곳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신비스런 체험을 한 의미가 명백해 진다. 그러므로 화랑이 용감한 무사집단으로 변한 것은 신라가 본격적으로 삼국통일전쟁을 치루면서였다.

 

새로운 사실은 이뿐이 아니다.

이 책의 서문에는 화랑이라는 명칭이 첫번째 대표화랑인 위화랑에서 비롯됐다고 쓰고 있다. 화랑의 명칭에 대한 기원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화랑이란 명칭은 많이 들어왔지만, 왜 화랑이라 불렀는지 그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은 이렇게 화랑이 첫번째 대표화랑인 위화랑의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랑의 구성과 조직체계까지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화랑이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렇게 튼튼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는 주장도 강력합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전해져 오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김대문이 쓴 것처럼 만든 가짜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사본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도대체 어떤 내용 때문에 한권의 사서에 대한 논란이 10년째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화랑세기 필사본의 마지막 부분.
김대문이 이 책을 쓴 이유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향음, 즉 신라어로 화랑의 세보를 저술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초자식이 공무의 여가에 화랑집단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일과, 각 계파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등을 기록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대표화랑이었던 김대문의 아버지가 화랑의 족보를 썼는데 아버지가 죽자 자신이 그것을 이어서 썼다는 내용으로 이 책의 저자가 김대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은 필사본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진본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위작의 근거가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필사자가 가짜책을 만들어놓고 김대문이 쓴 것을 베낀 진본인 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내용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논쟁은 올해로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향가다.

6세 대표화랑인 세종조에 나오는 송출정가.

562년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당시 전쟁에 나가는 사다함을 위해 그의 애인 미실이 지은 것이다. 이 향가는 화랑세기보다 후대의 사서인 삼국유사를 참조한 증거로 의심 받는다.

 

노태돈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필사본 화랑세기에 향가를 수록하고 있는데 향가는 13세기 쓰여진 삼국유사에 마지막으로 수록돼 있다. 그 이후는 향가가 지어지지도 않고 해독되지도 못했다. 이것이 다시 해독된 것은 1929년이다. 이점과 필사본 화랑세기가 삼국유사를 참고했다는 것을 연결시키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1929년이후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필사본에 수록된 향가는 위작을 만들 당시 창작된 것일까? 전문가를 찾아 향가의 내용을 풀이해 봤다.



그런데 1929년 이후에 이런 향가를 만든다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김학성 교수 (성균관대 국문학과)

제생각으로는 도저히 그 당시 향가 해독 수준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필사를 할 당시 일제말기인데... 당시 우리나라 향가수준은 향가를 억지로 읽어나가는 해독의 수준이었다. 그래서 양주동같은 분은 겨우 전체작품을 번역, 나머지 전문 국어학자들은 2,3수 정도를 겨우 읽는 정도, 그래서 읽어내기 바빳던 그 시절에 하물며 작품을 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당시에 이미 향찰로 쓰여진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필사본에 나오는 화랑들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에 관한 기록도 진위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중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마복자라는 용어다.

마복자는 화랑이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관계를 맺는 것을 제도화한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마복자라고 한다. 실제로 이런 관계가 존재했던 것일까?


이종욱 교수 (서강대 사학과)

마복자는 신라사회의 성적인 문란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지만, 실제 마복자는 그 이상 중요한 정치적인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 비처왕의 경우 마복 7성이 있었다. 그 중엔 법흥왕도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마복자와 마복자를 거느린 사람과의 관계는 후견자와 추종자의 관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사본은 마복자 풍속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낭도의 아내가 임신을 하면 자신이 모시는 우두머리인 화랑에게 총애를 얻는데 이 때 남편이 사함(재물)을 바친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다시 들어가 또다시 총애를 얻고 재물을 바친다는 것이다.

노태돈

화랑세기에서 주목된 것이 마복자 풍속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약자의 성을 강자가 유린하는 것을 공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기간에 그것이 유지된다면 과연 사회질서의 기본단위인 가족이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심지어는 조종 대신들의 처까지 마복자 풍속에 노출돼 있다면 당시 사회질서의 기본단위인 가족이 유지되긴 어렵다고 본다.

 

신라시대 토우나 각종 기록들은 신라인들의 성에 대한 의식이 자유로왔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필사본에 기록된 남녀관계는 그 정도가 심하다. 여성들도 자유분방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사다함에게 향가를 지어준 미실의 경우 남편 외에 6명이나 되는 정부가 있었다.

 

이종학 소장 (서라벌 군사연구소)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 성생활이 문란하다. 하지만 기마유목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관계뿐 아니라 형수,처제... 죽으면 부인으로 맞는다는 것은 자신의 종족이 단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생활 풍습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fila17kioo.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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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 <화랑세기>는 진본일 수밖에 없다.

 

 

1. 순국무사 화랑은 국가권력과 역사학계의 날조품

   신라 화랑도는 순국무사도의 상징이다. 신라 왕실과 신라 '국민'을 위해 멸사봉공한 집단이 화랑도라고 한다. 이러한 화랑상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얼마나 타당한가?

순국무사 화랑은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의 부산물이며 폐기물이다. 근대 국민국가는 그 구성원인 '국민'에게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대신 각종 의무를 부과한다. 또 국민국가는 자칫 모래알과 같은 국민을 하나로 통합키 위해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시민종교'(civil religion)와 같은 '사회통합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게 된다. 국가는 이러한 '시민종교'라는 신앙을 매개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충성을 더욱 유발하게 된다.

순국무사 화랑이라는 시민종교도 이런 목적에 따라 '창시'되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일제 식민강점기 단재 신채호와 해방 이후 이선근 박사였다. 이들은 각기 그 시대 상황에 걸맞는 국민의 이상형, 다시 말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칠" 국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화랑도에서 찾았다.

   이들이 화랑은 순국무사라고 본 근거는 고려 중기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였다. <삼국사기>는 신라인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나오는 구절이라면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賢佐忠臣.현좌충신)가 여기(화랑도)에서 우뚝 솟았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良將勇卒.양장용졸)가 여기(화랑도)에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 똑같은 말을 두 군데서 되풀이 인용하고 있다. 이 말은 결코 모든 화랑도가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라는 뜻이 아니다. 화랑도 출신 중에 그러한 인물이 많았다는 뜻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을 근거로 학계는 순국무사 화랑상을 창출해 냈다. 그것은 첫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의 '기념비'(monument)임을 알지 못했고, 둘째,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인용한 <화랑세기> 구절을 김대문의 말로 오해한데서 비롯됐다.

'현좌충신 양장용졸' 운운은 설혹 그 뿌리가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있다고 해도 <삼국사기>에 인용되는 순간 김부식의 말과 논리로 둔갑할 뿐이며 결코 김대문의 텍스트가 아니다. 김부식이 <화랑세기>에서 유독 '현좌충신, 양장용졸'이라는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이상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좌충신...'은 김부식이 <삼국사기> 열전에 올릴 신라인을 고르는 잣대가 되었다. 따라서 이 말을 결코 김대문의 텍스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텍스트가 아니라 김부식 및 고려시대의 ‘기념비’(monument)일 뿐이다. 기념비는 이데올로기성이 짙기 때문에 그것을 둘러싼 신화성과 선전성, 설화성을 도려냄으로써 '기록물'(document)로 탈구축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념비성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20세기 한국사학계는 "현좌충신..."이 김부식의 말임에도 그것이 신라인 김대문의 텍스트라고 해석함으로써 화랑도가 순국무사도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처럼 화랑도는 순국무사 집단으로 설정됨으로써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국민표상'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실제 역대 정권에서 화랑도는 그렇게 활용됐다. 특히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화랑정신은 곧 국민정신과 동의어였다.

따라서 '순국무사 화랑'이란 거대한 그림은 국민통합을 이룩하려는 국가권력과 여기에 역사학이 야합해 그려낸 날조품(invention)이었던 것이다. 



   이제 의심할 바 없이 순국무사단으로 '규정'된 화랑도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김대문의 작품을 베낀 진본인지, 아니면 20세기 소설적 창작품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유력한 근거로까지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들(한국고대사학계)이 말하는 화랑상은 고려시대 텍스트인 <삼국사기>를 토대로 구축한 화랑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아주 틀린 말이요, 정확히는 그들이 속한 근현대 역사학이 만들어낸 화랑상일 뿐이다. 더불어 이런 화랑상은 더욱 확대되어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대해서도 근현대 역사학이 구축한 것과 같은 화랑상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런 요구가 필사본 <화랑세기>의 화랑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필사본은 가짜라는 결론이 도출된다"(21쪽)

요컨대 지금껏 학계가 구축한 화랑도상과 필사본 <화랑세기>에 묘사된 화랑도의 모습이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에 필사본은 가짜라는 것이다. 국민국가 창출이라는 같은 깃발 아래 국가권력과 역사학이 야합해 창출한 화랑도상을 잣대 삼아 필사본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려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 필사본 <화랑세기>의 폭발력

   그렇다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과연 김대문의 바로 그 <화랑세기>인가? 1989년과 1995년에 각각 두 종류가 공개된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해 학계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으나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가짜라는 주장이 우세한 편이다.

이러한 필사본 진위판별을 위해 고고학․비교문헌사학․언어학․문자학․민속학․신화학․인류학․고문서학 등을 망라한 광범위한 그물망을 쳐보았다. 이를 위해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삼국시대 상황을 전하는 '기록물'이 아니라 고려시대 권력의 '기념비'이며 <화랑세기> 또한 김대문과 신라의 '기념비'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화랑세기>가 제대로 보인다. 왜냐하면 <화랑세기> 또한 신라의 기록물이 아니라 김대문의 ‘기념비’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필사본은 신라인이 아니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대목을 곳곳에서 노출하고 있다. 이는 필사본이 김대문의 작품일 수 밖에 없다는 증거가 된다.

예컨대 신라만의 독특한 신분제로 거론되는 '골품제'는 필사본 검토 결과 모든 존재 기반을 상실했다. 지금까지 모든 신라사 연구자는 '골품'을 성골․진골의 두 골(骨)과 6두품5두품4두품 등의 두품(頭品) 신분을 합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필사본은 물론이고 <삼국사기>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골품'은 '골의 품계(단계)'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골품, 즉, 골의 품계는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왕위(王位)와 신위(臣位)를 구별하는 기준선이었다. 성골은 왕이 될 수 있는 존재라면 진골은 신하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실체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한 신궁(神宮)은 신국(神國) 신라를 표상한다. 이곳에는 죽은 왕이나 생전에 대영웅으로 칭송된 신라인들이 죽은 다음에 모셔진 사당이었다. 신라 왕은 살아있는 신(神)이었다. 더욱 놀랍게도 이처럼 신성한 신궁에는 왕이 총애하는 여인과 섹스하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품도 모셔져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신라무덤이 무수하게 출토하는 각종 '섹스 토우'의 비밀이 마침내 풀리게 된다.

   신라 하대 최대의 미스터리 인물로 꼽히는 37대 선덕왕(재위 780-785) 김양상은 알지-미추-내물-김춘추로 이어지는 경주김씨가 아니라 금관가야 수로왕의 후손이며 김유신 가문에 속하는 김해김씨라는 충격적인 사실도 밝혀졌다. 김양상은 김유신의 친동생인 김흠순의 증손자였다. 이로써 경주김씨가 신라왕위를 독점했다는 학계 및 일반의 상식 또한 여지없이 붕괴됐다.

<삼국사기>는 삼광-원술 등의 김유신 자식들이 김춘추와 문희(김유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지소공주 소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장남 삼광(三光)만큼은 지소 소생일 수 없음은 <삼국사기> 기록 자체의 모순에서도 확인된다.

삼광은 필사본을 통해 김유신이 18살에 장가든 영모라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임을 규명했다. 필사본에 따르면 유신과 영모는 진광-신광-작광-영광의 광(光)자 돌림 네 딸을 두었다. 김유신이 딸 넷을 두었음은 <삼국사기>에서도 확인된다. 삼광은 필사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필사본과 <삼국사기><삼국유사> 인명 분석을 통해 신라시대에 이미 돌림자를 썼음을 밝혀내고 이를 근거로 삼광(三光)은 어머니가 영모임을 밝혀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김춘추의 아버지로 거론되는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논쟁 또한 기존 접근 방식과는 아주 다르게, 돌림자를 근거로 이 둘은 다른 사람임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 용수와 용춘은 한 사람이 아니라, 용(龍)을 돌림자로 쓴 형제였다. '용수 혹은 용춘'을 지금까지 모든 연구자는 한 사람이라고 보았으나 필사본에는 용수가 김춘추의 친아버지이며 용춘은 양아버지로 나온다. 필사본을 토대로 검토한 결과 <삼국사기> <삼국유사> 자체가 이미 용수와 용춘을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어떤 연구자도 시도하지 못한 신라시대 돌림자의 양태를 분석하는 한편 그 의미를 파헤쳤다. 그 결과 신라에서는 불교가 본격 도입되고 불교식 이름이 판을 치기 시작하는 법흥왕-진흥왕 무렵에 이미 형제자매간에 돌림자를 썼음을 확인했다. 또 신라인들은 형제자매 뿐만 아니라 부모-자식간에도 돌림자를 썼다는 놀라운 성과를 제출했다.

이와함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지에 남아있는 각종 설화를 필사본과의 비교검토를 통해 설화성과 신화성을 걷어내고 역사기록으로 완전히 환원시켰다.

예컨대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보낸 모란씨 서되를 심었으나 향기없는 꽃을 피웠다는 기록은 선덕여왕이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해 남자 세 명을 들이고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필사본 기록이 설화적으로 변형된 형태임을 밝혀냈다. 죽은 진지왕이 귀신이 되어 도화녀라는 미녀와 정을 통해 비형랑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설화 또한 필사본을 대조할 때 진지왕이 폐위되어 3년 동안 유폐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아들 비형랑을 낳은 사실을 바탕으로 엮어낸 이야기임을 규명했다.

   또 심청의 공양미 삼백석으로 널리 알려진 바다에 대한 인신공양 풍습이 신라 때 있었던 풍속이었음을 <일본서기> 관련 기록까지 찾아 보충함으로써 증명했다. 또 김유신의 여동생 자매 중 언니 보희가 김춘추를 시중 들지 못한 까닭은 <삼국유사> 기록처럼 "외간 남자와 자리를 함께 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날 마침 병이 났기 때문임을 필사본과 <고려사>에 나오는 태조 왕건의 아버지 작제건 탄생설화의 검토를 통해 입증했다.
더불어 신라에서는 남색(homosexuality)이 일반화돼 있었으며 필사본에 나타난 이른바 ‘파천황’의 성풍속은 겉으로는 난삽해 보이지만 대단히 엄격한 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해 냈다.

   기존 사서 어디에도 생몰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은 "봄 2월에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는 <삼국사기> 진평왕 재위 6년(584) 조 기록과 대비할 때 13살에 즉위했다는 필사본 <화랑세기> 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했다. 다시 말해 진평왕 즉위 한동안은 섭정이 이뤄지다가 왕이 18살이 된 재위 6년째에 친정(親政) 체제를 구축하면서 건복이라는 연호를 반포했다. 또 신문왕 원년(683)에 일어난 김흠돌의 반란은 기존 학계 주장처럼 신라의 전제왕권 확립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상대등 또한 왕권을 견제하는 진골귀족세력의 대표와도 전혀 관계가 없음을 밝혀냈다.

고고학적 측면에서는 월성 해자와 포석정, 35금입택, 분황사 옆 원지 발굴성과를 필사본이 진본일 수밖에 없는 증거로 댄다. 필사본에는 사다함의 신하 무관랑이 빠져 죽은 곳이 신라왕성, 다시 말해 월성의 해자를 구지(溝池), 즉 도랑 겸 연못이라고 하고 있는데 실제 최근 발굴 결과 월성 해자는 구지로 밝혀졌다.

흥청망청 술마시는 곳으로 알고 있는 경주 포석정은 최근 발굴 결과 그 축조시기가 신라의 삼한통합 이전인 7세기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다. 신라말기에 건립됐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포석정은 필사본에는 포석사(鮑石祀) 혹은 포사(鮑祀)라는 이름의 사당으로 나오고 있으며 더구나, 삼한통합 이전인 법흥왕 때에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필사본 발견 이전 학계 대다수는 <화랑세기>가 순국무사적인 화랑들의 전기일 것이라고 보았으나, '세기'(世記)라는 명칭으로 볼 때 <화랑세기>는 화랑들에 대한 전기물이기는 하되, '족보적이며 계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야 한다. <화랑세기>가 이러한 모습일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제목 <화랑세기>에 들어가 있는 '세기'라는 말을 모두가 무심히 보아 넘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는 초대 풍월주 위화랑 이래 마지막 32세까지 역대 풍월주들의 '족보적 전기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무수한 증거들로 볼 때 "필사본 <화랑세기>는 신라인 김대문이 썼다는 바로 그 <화랑세기>를 베껴 적은 것이며 따라서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사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또 "필사본이 진본이라는 증거가 이처럼 무수하게 포착되고 있음에도 학계 상당수가 이를 가짜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기득권 수호를 위한 지식폭력일 뿐이다".


 

     - 다음 블로그 <토함산 솔잎파리> 솔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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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다시 쓰는 화랑세기24 (화랑세기를 보는 눈) 스크랩북

2005/06/09 22:47

복사 http://blog.naver.com/bruce5/14001381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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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실 공식 블로그 | 미실사랑
원문 http://blog.naver.com/misil2005/40013751457
《다시쓰는 화랑세기》... <24> 화랑세기를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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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89년 처음 발견된 ‘화랑세기’는 당시 역사학계 뿐 아니라 역사에 관심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학자들간에 서로 눈치(?)를 보며 논의되고 있을 뿐 소수의 학자를 제외하고는 학계에서 본격적인 연구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신라의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김대문이 681년에서 687년 사이에 썼다는 진본 ‘화랑세기’의 필사본인 이 책의 진위가 완전히 가려지지 못한데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그동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저본으로 삼아 학문적 체계를 쌓아온 학자들의 폐쇄성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삼국통일을 위해서 심신을 단련하고 정의로운 모습으로만 각인돼온 화랑이 어느날 갑자기 남의 여자를 빼앗고, 뇌물문제를 일으키는 등 어떤 측면에선 일그러진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화랑세기에서만 보이는 화랑도의 구체적인 조직체계와 정치적인 지위 등 새로운 사실(史實)은 기존의 화랑도 연구의 틀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할 만큼 새로운 것이기도 했다.

이 연재에서도 소개되었다시피 화랑세기엔 지금 우리의 잣대로는 이해하지 못할 대목이 많다. 대표적인 내용이 아랫사람의 임신한 아내를 취하는 마복자제도. 무관이 친구인 사다함의 어머니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든지 출세를 위해 아내를 상납했다는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한강유역에서 동북해안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곳곳에 순수비를 세워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진흥왕은 아들 동륜태자와 관계를 맺던 여자를 침실로 불러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그래서 보수적인 기존의 역사학계에서 화랑세기는 1930년대 박창화라는 사람이 지어낸 위작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화랑세기가 다루고 있는 540년에서 681년까지는 유교문화가 신라사회에 자리잡기 전이어서 유교적인 도덕관념에 젖어 버린 지금의 시각으로 화랑세기를 보아서는 신라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색안경을 끼고 화랑세기의 내용을 매도하는 입장에 서서는 화랑세기가 그려내는 신라사회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인 400여명이 등장하는 이 책에는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신라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어있다. 백성들을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때 쓰여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로는 신라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더구나 유교와 기독교 등으로 무장된 오늘날의 도덕적인 시각은 화랑세기에 가득 들어있는 1천3백여년전 신라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이 화랑세기의 기록을 믿는 학자들의 주장이다.

   화랑세기는 중국과 일본, 백제·가야 등의 대외관계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왕이 주연을 베풀던 곳으로만 인식돼온 포석사가 나라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이라는 사실 등 새로운 내용들을 알려주고 있다. 또 6세 풍월주 세종편에 기록돼있는 향가인 ‘풍랑가’는 국문학사에 향가를 한 편 더 보태준 셈이다.

유학자인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신라 왕들의 복잡한 통정(通情)관계 등의 내용이 서술된 화랑세기를 일부러 멀리했으리란 추측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도 삼국사기에 ‘김대문이 화랑세기에 썼듯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나왔다’고 기록해 화랑세기를 완전히 묵살하지는 못했다.

화랑세기에서 신라사회는 엄격한 골품제사회였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어떻게든 혈연적으로 얽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누구에게서 태어나느냐가 바로 정치 사회적인 신분과 역할을 결정했기 때문에 근친혼이 성행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대목은 삼국사기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죽죽조에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부하인 검일의 처를 빼앗은 내용이 나온다. 삼국유사에 들어있는 ‘처용가’의 내용도 처용이 그의 아내를 뺏기고 부른 노래이며 ‘서동요’는 진평왕의 공주인 선화가 백제인 서동과 사통(私通)하는 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이는 화랑세기에 보이는 사통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이냐 위본이냐는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골품제를 유지하기 위한 당시 왕들과 귀족들의 고심을 들여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의 궁궐인 월성(月城)에 숨어든 기분이 드는 것을 화랑세기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지금 학계에는 화랑세기의 위작설이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지만, 20세기에 이뤄진 한국 고대사 연구체계에 물들지 않은 학자들에 의해 사서로서의 당당한 가치가 받아들여질지 여부는 학계의 연구결과를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만약 일본황실도서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창화 필사본의 원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재야 역사학자들은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주장하고 있고, 젊은 역사학도들이 학위논문에 화랑세기의 내용을 인용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화랑세기는 한국고대 신라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이자 한국 고대의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화랑세기가 앞으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일 ‘판도라의 상자’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 조해훈기자

<지금까지 연구 성과>

   지난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한국고대사학계에서 곧 이 책에 대한 진위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화랑세기에 대한 진위논쟁은 곧  서울대 노태돈교수를 중심으로 한 위서론자들과 서강대  이종욱교수를 중심으로한 진본론자들로 구분돼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 최근까지 관련 논문이 50여편이나 나왔다.

책으로는 지난 1989년 본지에 화랑세기를 번역, 연재했던 한문학자 이태길씨가  그해 7월에 도서출판 민족문화에서 화랑세기  원문과 번역문, 그리고 해제를  수록해 ‘화랑세기’를 발간했다.

이어 1997년에는 한문학자 조기영씨가 도서출판 장락에서 화랑세기 필사본과 발췌본을 완역한 책 ‘화랑세기’를 출간했고  1999년에 이종욱교수가 소나무출판사에서 ‘화랑세기-신라인의 신라  이야기’를 출판했다. 이  교수는 이책에 필사본과 발췌본 번역문과 원문, 역사학술지에 발표했던 논문 두편도  같이 싣고 있다. 그는 또 지난 해 12월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를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왜 진본일 수 밖에 없는가를 상세하게 근거를 들며 밝히고  있다.신라사 연구자들에 의해 ‘아직 사서로서 완전 인정을 받지는 않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식으로 화랑세기의 내용 인용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화랑세기의 영향력이 학계에 커져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일본에서도 1989년부터 역사학자 히로나카 요시오(弘中芳男)씨를  비롯, 신라 화랑도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 국내학자들과 일본학자들에 의해 화랑세기 원본  찾기 추적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언제 홀연히 우리들 앞에  화랑세기가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찾을수록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조해훈 기자/2001-03-02

 

  ㅡ 네이버 블로그 < 마이 노트> 휘날리며 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