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석산(碣石山)이 무엇이고 몇 개이며 어디에 있는가?

2015. 3. 4. 03:56우리 역사 바로알기

 

 

 

중국 고대 역사 | 나의 이야기

 

작은거인 2015.02.19 18:38

 

 

      

갈석산(碣石山)이 무엇이고 몇 개이며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2천여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갈석산에 대하여 논하였지만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말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필자가 논쟁을 종결지을까 한다.
‘갈석산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을 가지고 무슨 뚱딴지같은 바보스러운 질문을 하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모두가 모르고 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갈석산은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의 대상이자 이를 모신 성전(聖殿)인 ‘ᄉᆞᆫ’과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산(山) 2종류가 있으며, 장소는 지금의 당산시 부근에 성전인 ‘ᄉᆞᆫ(역사서에서는 碣石之山:갈석지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이 있고 지금의 난하 삼각주 해변에 있는 갈석산(山)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진황도시(秦皇島市)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山) 3곳에 존재한다. 역사와 한문에 능하지 못한 필자가 많은 훌륭한 분들이 연구한 자료를 모아서 평가하고 검토해 보도록 하자.

 

     우선 문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중국 대륙의 문명은 우리의 선조들이 열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 기간은 짧게는 3황5제시대(B.C. 2300여 년)까지, 길게는 상(商)나라가 멸망하는 B.C.1122년(중국이 확정한 연대는 B.C. 1046)까지 2~3천 년 간이다. 그 증거는 『산해경』과 『상서』〈우공편〉이고 『우공구주도(禹貢九州圖)』이다. 여기에 갈석지산(碣石之山), 또는 갈석(碣石)이 나오는데 한국이나 중국에서 자기 선조들의 신앙을 깡그리 잊어버려서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모두 갈석산(碣石山)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렸다. 독자들도 한번 확인해 보라 이 3가지 고전에서 ‘갈석산(碣石山)’이라는 말이 있는지.


   둘째, 자연지형인 2개의 갈석산(碣石山)은 모두 장성과 연관을 지우는데 최초에 연(燕)나라가 쌓은 조양(造陽:저양沮陽의 저는 조로 발음한다) - 양평(襄平) 또는 요동반도(遼東半島) 간의 목책을 진(秦)나라가 그대로 사용하였고 한(漢)나라는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이 초기장성의 출발점이 해변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이다. 당연히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출발한다(有碣石山 長城所起)’는 말이 성립된다. 그리고 이 초기장성의 관문으로 임유관(臨渝關)이 있었다. 임유관의 이름은 그 관문이 요서군 임유현((臨渝縣)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의 명칭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러다가 한무제(漢武帝)가 원봉 3년(B.C. 108)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정벌하고 나서부터 명(明)나라까지 어느 시기에 쌓은 장성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장성이다. 그리고 위치가 달라졌으니까 당초의 관문인 임유관(臨渝關)은 자동적으로 없어지고 새로운 관문을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름붙인 것이다. 그러나 세인들은 당초의 장성이 해변의 갈석산(碣石山)에서 출발한다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인근에 있는 바위산을 ‘갈석산(碣石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늘상 쓰던 대로 ‘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출발한다(有碣石山 長城所起)’는 말을 사용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지도를 보라 어디 장성이 갈석산에서 출발하는지를. 따라서 지금의 갈석산은 장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산이다. 하북성(河北省) 진황도시(秦皇島市) 창려현(昌黎縣) 소재 갈석산(碣石山)은 장성(長城)의 동쪽 끝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에서 안쪽(서쪽)으로 50여 ㎞ 떨어져 있다. 비교하자면 서울의 북한산의 도봉산에서 경기도 오산시까지의 거리이다. 그리고 초기 장성의 임유관에서 후기 장성의 산해관까지는 150여 ㎞ 떨어져 있으며 비교하면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많은 분들이 찾아낸 사료를 하나하나 보면서 검토해 보자.

 

1.『산해경』 〈북차삼경( 北次三經507)〉에

 ‘갈석지산(碣石之山)이라 하는데 승수가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 강(바다)으로 간다. 갈석지산에는 포이의 물고기가 많고, 그 위에는 옥이 있다. 그 아래에 푸른 옥이 많다(曰碣石之山。繩水出焉,而東流注於河, 其中多蒲夷之魚。其上有玉, 其下多青碧。)

 

● 해석 : 산해경에 나오는 산(山)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산(山)이 아니고 우리 선조들이 5~6천 년 전에 확립하고 믿었던 신앙의 대상인 ‘ᄉᆞᆫ’을 말한다. 순수한 우리말이다. 사내를 뜻하는 ‘丁(정)’자를 『훈몽자회』에서 ‘ᄉᆞᆫ 뎡’이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남성의 심벌(성기)을 뜻하다가 중원대륙에서는 짐승, 새, 물고기 ,용 등 상상의 동물간의 신체조합(예;말의 신체에 용의 머리 馬身而龍首, 새의 머리에 용의 몸 龍身而鳥首)과 더 나아가 사람과의 조합하는 신의 형상(예;인면수신人面獸身, 인면조신人面鳥身)을 만들어 나갔으며, 나중에는 인간의 형상을 띄게 되었다. 산해경을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대상을 모신 사당(신전)을 이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사서에서 ‘之山(지산)’이라는 표현을 한 것은 신앙시설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원래는 ‘ᄉᆞᆫ’을 나타내는 글자가 있었으나 버려져서 ‘산(山)’이라는 글자를 차용하여 기록하려다보니 궁여지책으로 ‘之山(지산)’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러한 종교적 의미를 망각하게 되어 말뜻이 잊혀지고 말았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청구지산(靑丘之山), 회계지산(會稽之山), 공상지산(空桑之山), 조가지산(朝歌之山) 등은 산(山)이 아니다.

 

2. 『상서』〈우공편〉 우(禹)가 구주를 순행할 때에 제일 먼저 익주를 도는데 마지막 글이다.
     ‘갈석을 오른쪽으로 돌아 강(바다)으로 들어갔다(來右碣石 入于河).’
 
3. 『사기』〈하본기〉에

禹行自冀州始。冀州:既載壺口,治梁及岐。既修太原,至于嶽陽。覃懷致功,至於衡漳。其土白壤。賦上上錯,田中中,常、衛既從,大陸既為。鳥夷皮服。夾右碣石,入于海
  ‘… 우(禹)가 익주(冀州)에서 시작하여 … … 조이(鳥夷)의 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돌아 바다로 들어갔다.’

 

 ● 해석 : 우공이 누구인가?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夏)나라를 연 임금이다. 그러나 그가 나라를 열기 이전에 치수사업을 할 당시의 신분은 조선(朝鮮)이 중원에 설치한 식민지 구려(九黎)에 살던 사람이다. 구려는 조선 초기에 번조선(番朝鮮)의 한(韓:왕)인 낭야(琅耶)가 다스리는 곳인데 단군왕검께서 2차 하위 지방국가인 우(虞)나라의 순(舜)에게 정치를 맡기고 낭야한(琅耶韓)이 이를 감독히게 하였다. 순(舜)의 신하로서 치수를 담당하는 사공(司空) 직책에 있었던 사람이 우(禹)이다. 따라서 우(禹)는 지금의 북경지방에서부터 아래로는 양자강 남쪽 250여㎞ 지점에 있는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紹興市) 소재 회계산(도산)까지 장장 1,100㎞를 대상으로 치수사업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작 그가 나라를 열었을 때에는 그 크기가 지금의 경상남북도 만하거나 대만크기 정도였다. 위치는 낙양일대이다.
    결론적으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돌아 바다로 들어간다(來右碣石 入于河).’는 구절에서 갈석은 ‘산(山)’이 아니다. 어디에 산이라는 말이 있는가? 중원대륙에서 몇 번째 가는 대단히 큰 신앙시설이므로 대‘(大)’자을 앞에 붙인 것이며 여기를 방문하여 예배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은 물론 중국의 역사학자 100%가 산(山)으로 오해하고 있어서 문제가 꼬인 것이다. 앞으로 『산해경』이나  『상서』〈우공편〉이나 여기서 유래한 『우공구주도(우공구주도) 』를 인용한 갈석산은 산(山)이 아니고 신앙시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사기』〈진시황본기〉에

三十二年(B.C.215), 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壞城郭,決通隄防。其辭曰:遂興師旅,誅戮無道,為逆滅息。武殄暴逆,文復無罪,庶心咸服。惠論功勞,賞及牛馬,恩肥土域。皇帝奮威,德并諸侯,初一泰平。墮壞城郭,決通川防,夷去險阻。地勢既定,黎庶無繇,天下咸撫。男樂其疇,女修其業,事各有序。惠被諸產,久并來田,莫不安所。群臣誦烈,請刻此石,垂著儀矩。
  三十二年(B.C.215) 시황이 갈석(碣石)에 가서 (ᄉᆞᆫ을 참배하였다) 연나라 사람 노생으로 하여금 신선들인 선문과 고서를 찾아보도록 하였다. 갈석문에 글을 새기고(刻碣石門) 성곽을 파괴하고, 둑을 무너뜨려 통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생략)

 5. 『사기』〈효무본기〉에 

「上乃遂去,并海上,北至碣石,巡自遼西,歷北邊至九原。五月,返至甘泉。有司言寶鼎出為元鼎,以今年為元封元年。」
   해상으로 북쪽의 갈석(碣石)에 도착하여 (ᄉᆞᆫ을 참배하였다) 요서(遼西)에서부터 북쪽의 변방을 거쳐 구원(九原)까지 답사하였다. 그리고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

 6. 『한서』〈무제기〉에 

「元封元年 … 行自泰山,復東巡海上,至碣石。自遼西曆北邊九原,歸於甘泉。」
  원봉 원년(B.C. 110)에 태산부터 행차하여 다시 동쪽으로 순수하고 바다를 건너 갈석(碣石)에 도착하였다. (ᄉᆞᆫ을 참배하였다) 그리고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서한 말의 역사학자 문영(文潁)이 주를 하기를, 갈석은 누현(絫縣)에 있었는데 이 현은 지금은 폐하여 없어지고 임유(臨渝)에 속한다. 이 돌은 해변가에 서 있다.

 

  ● 해석 : 진시황이나 그의 아들 호해(2세 황제)나 한나라의 무제가 올랐다는 갈석산은 산이 아니고 갈석ᄉᆞᆫ(碣石之山)이었다. 증거를 보자. 시황제가 글을 어디에 새겼는가? ‘刻碣石門’ 즉 ‘갈석의 문(門)에 새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무제는 태산을 거쳐 산동반도 북쪽의 항구에서 바다(발해)를 건너 갈석ᄉᆞᆫ에 들리고 다음에 요서지방을 순시하고 더 이상 동쪽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따라서 ‘自遼西曆北邊九原’ 즉 ‘요서군에서부터 북쪽의 변경 구원까지 둘러보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원봉 원년(B.C. 110)으로서 한무제가 조선(번조선의 후신인 위만조선)을 정벌한 원봉 3년(B.C. 108) 이전이므로 당시의 경계인 지금의 난하(패수, 요수)에서 그 이상 동쪽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문영(文潁)이 주를 한 것은 검토하면, 『한서』〈지리지〉에서 요서군에 임유현(臨渝縣)과 누현(絫縣)이 있다. 그러나  『후한서』〈군국지〉 에는 임유현(臨渝縣)만 있고 누현(絫縣)은 나오지 않는 현명이므로 문영(文潁)의 말이 맞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맞으려면 임유현(臨渝縣)은 해변을 끼고 있는 현이어야 해변가에 갈석이 있다는 말이 맞게 된다.
  
  (잠정 결론 1 : ‘갈석ᄉᆞᆫ’이 있는데 위치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잠정 결론 2 : 요서군 임유현 해변가에 갈석산이 있다)

 

 7. 『설문해자』 (P449 아래)

碣(갈) : 特立之石也 東海有碣石山 (碣石山見 禹貢地理志 右北平郡驪成縣 大碣石山在縣西南 非東海郡也 東海字疑誤)

'특별히 표나게 수직으로 서 있는 바위이다. 동해에 갈석산이 있다.(우공지리지에 갈석산이 보이는데 우북평군(右北平郡) 여성현(驪成縣)에 대갈석산(大碣石山)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동해군이 아니다. 동해는 오자가 아닌가 의심이 된다.)

 

● 해석 : 본문은 해변의 갈석산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에 주석()에서는 『우공 지리지』를 언급하였으므로 갈석ᄉᆞᆫ을 말하며 그 규모가 대단히 크므로 대갈석산(大碣石山)이라고 하였다. 그 의치가 우북평군 여성현 서남에 있다는 것도 맞다. 말 그대로 동해군(東海郡)은 오기이다.

 

 (잠정 결론 1-1 : ‘갈석ᄉᆞᆫ’은 대갈석산이며 우북평군 여성현 서남에 있다)

 

 8. 『한서』〈지리지〉 우북평군(右北平郡)에

 驪成,大揭石山在縣西南。莽曰揭石
   여성현에 대갈석산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왕망은 게석이라고 하였다.

 

 (잠정 결론 1-1 : ‘갈석ᄉᆞᆫ’은 대갈석산이며 우북평군 여성현 서남에 있다)

 

 9. 『후한서』<군국지>에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에 또 다른 갈석산(碣石山)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표현은 ‘산해경에 말하길 갈석지산이 있는데 그 위에는 옥이 있고 아래에는 청벽이 많다 (山海經曰碣石之山 其上有玉…其下多青碧).

 

 (잠정 결론 1-2 : ‘갈석ᄉᆞᆫ’은 갈석지산이며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에 있다)

 

10. 『대명일통지』

 碣石山在昌黎西北五十里
 갈석산(碣石山)은 창려현 서북 50리(20㎞)거리에 있다.

 

 (잠정 결론 3 : 갈석산(碣石山)은 창려현 서북 50리(20㎞)거리에 있다.)

 

 11. 『영평부지:永平府志』

 (갈석산은) 바로 창려현 남쪽의 선인대(仙人臺)로 생각한다.


 (잠정 결론 3-1 : 갈석산은 지금의 창려헌 남쪽의 선인대(仙人臺)로 생각한다)

 

12.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창여현 아래에) 이 현 경내의 여러 산들은 대체로 모두가 갈석(碣石)에서 갈라져 나온 언덕이다.(蓋縣境諸山 大抵皆碣石之支阜)‘

 ● 해석 : 의미가 없는 말임

 

 13. 『창려현지』

갈석산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 해석 : 지금의 갈석산임

 

 (잠정 결론 3-2 : 갈석산은 지금의 창려현에 있다)

 

14. 『위서:魏書』〈지형지:地形志〉

비여(肥如) … 고죽산사(孤竹山祠)가 있는데 갈석이다.

 

● 해석 : 『한서』〈지리지〉 에 요서군에 비려(肥如)가 있고  영지(令支)에 ‘고죽성이 있다(有孤竹城)’고 하였으므로 맞지가 않으나 요서군 지역 인근에 사당이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갈석ᄉᆞᆫ과 관련성이 있다.

 

15. 『수서:隨書』〈지리지〉

노룡에, … 장성이 있고, 관관(關官)이 있고, 임유관(臨渝關)이 있으며, 갈석이 있다.

 

 ● 해석 : 지금의 산해관을 말하고 있다. 산해관 이전에 임유관이 있었으므로 의미가 없다.

 

 16. 『원화군현보지:元和郡縣補志』

공영달(孔穎達)의 말을 인용하여 ‘평주의 동쪽에는 바다에서 30리 정도 떨어져서 멀리 이 산이 바라다 보이는데, 무덤 비슷하게 아치형으로 홀로 툭 튀어나와 있는 돌이 있어 그 기둥 같은 모습이 바로 우공의 갈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 청나라 엄관(嚴觀)이라는 사람이 원래 당나라 때에 이길보(李吉甫)가 편찬했던 당 지지총지(地志總志)라 할 수 있는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가 전해 내려오다가 일부가 산일된 것을 보충하여 만든 책이다.

 

 ● 해석 : 우공의 갈석산은 ‘ᄉᆞᆫ’이므로 해안의 지형과는 무관

 

 17. 정초(鄭樵)의 『통지:通志』나 두우(杜佑)의 『통전:通典』도 갈석은  노룡에 있는 것으로 적고 있다.

 

  (잠정 결론 4 : 갈석산은 지금의 노룡현에 있다)

 

18. 곽박은 ‘『산해경』에 이르기를 임유현의 남쪽 물속에 있다.’

 

 ● 해석 : 산해경을 언급하면 갈석ᄉᆞᆫ이므로 해안 물속을 이야기 하므로 가치가 없다.

 

 19. 『신당서』〈지리기〉에

 ‘석성은 원래 임유(臨渝)이다. … 임유관(臨渝關)이 있으며, 다른 이름으로 임려관(臨閭關)이라고도 하며, 커다란 해관(海關)도 있고 갈석산도 있다.’

 

 (잠정 결론 1-2 : 갈석산은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에 있다)

 

20. 남송의 구양태(毆洋態)가 지은 『輿地廣記』에는

 ‘석성현(石城縣)은 원래 임유(臨渝)이다. 양한(동한․서한) 때에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고 진(晉)나라 때에는 기관을 축소시키면서 양락(陽樂)에 편입시켰다. 『우공편』에서는 갈석산이 있으며, 진시황제나 한무제가 모두 이곳에 올라 커다란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 돌의 윗 부분이 둥그런 비갈처럼 생긴 모습을 하고 있고 바닷가에 서 있다고 해서 갈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 해석 : 요서군 임유현에 갈석산이 있다는 것과  『우공편』을 언급하였으므로 갈석ᄉᆞᆫ을 이른다. 그러나 바닷가에 있다고 하는 것은 지형이므로 다른 성질의 것을 혼합한 것이므로 가치가 없다.
 21. 삼국 위나라 조조(155 ~ 220)가 건안12년(207)에 북쪽으로 오환(烏桓)을 정벌하고 회군하던 도중에 갈석산에 올라 둘러보면서 바다를 보았으며, ‘觀滄海’라는 시를 남겼다.


觀滄海
東臨碣石 以觀滄海
水何澹澹 山島竦峙
樹木叢生 百草豊茂
秋風肅琴 洪波涌起
日月之行 若出其中
星漢爘爛 若出其裏
辛甚之哉 歌以詠志
관창해
동으로 갈석에 올라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물은 넘실거리고 산처럼 생긴 섬이 그 속에 솟아나네
무더기로 자란 나무 무성한 온갖 풀들
가을바람 소슬한데 솟구치는 커다란 물결
해와 달이 그 속에서 나오는 듯
반짝이는 은하수 그 속에서 나오는 듯
어와 좋을시고 우리 소망 노래하세
 

 ● 해석 : 위나라의 조조가 살았던 당시는 지금의 장성이 있었을 것이므로 지금의 갈석산에 올라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잠정 결론 4 : 갈석산은 지금의 노룡현에 있다)

 

21. 『위서:魏書』〈문성제기〉, 『북제서:北齊書』〈문선제기〉

북위 문성제(文成帝)가 태안 4년(458), 북제 문선제(文宣帝)가 천보 4년(553) 거란을 정벌하고 동아오던 길에 갈석에 올랐고, 창해를 바라보았다.

 

● 해석 : 역시 이 시기에는 지금의 만리장성 부근에 있는 현재의 갈석산을 말한다고 보는 것아 타당하다.

 (잠정 결론 4 : 갈석산은 지금의 노룡현에 있다)

 

 22. 곽박(郭璞:276~324)은  『水經』〈河水注〉에서

 ‘한나라 사공(司空) 속관인 왕황(王璜)이 말한 것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옛날에 날씨가 연일 계속하여 비가 내렸는데다 동북풍까지 불어서 , 바닷물까지 넘쳐나서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수백리가 침수되었다.『(河入渤海 渤海地高 於韓牧所欲穿處) 漢司空掾王璜言曰 王者天嘗連雨 東北風 海水溢 西南出 浸數百里』‘ 라고 하였으며, 이에 장절(張折)이 말하길, ’갈석은 바다속에 있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바닷물 속으로 잠겨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였다.
 왕황이 말한 것은 『한서』〈구혁지:溝洫志〉에 나와 있는 것으로 왕망(王莽)때에 강물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는데 수 백명이나 되었다. 
위 원문에서 ‘浸’은 원문은 ‘九河之地 已爲海所漸矣’를 줄인 말이다.

 

  (잠정 결론 2-1 : 위치는 모르지만 해변가에 갈석산이 있다)

 

 23. 『구당서:舊唐書』〈태종기:太宗紀〉

 당태종은 정관 19년(645)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을 나올 때 , 임유관을 출입하면서 역시 갈석에 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며 시를 적은 적이 있다.


春日觀海
洪濤經變也
翠島屢成桑

之罘思漢帝
碣石想秦荒

   

 이에 당시 수행하던 유사도(柳師道) 등이 이 시에 화답하면서 글을 썼다. 그리고 겨울에 회군하면서 ‘次漢武臺 刻石以紀功德’이라고 하였다. 

● 해석 : 역시 이 시기에는 지금의 만리장성 부근에 있는 현재의 갈석산을 말한다고 보는 것아 타당하다.

  

 (잠정 결론 4 : 갈석산은 지금의 노룡현에 있다)

 

24. 역도원(酈道元)은  『수경:水經)』〈유수주:渝水注〉에 기록하시를

 ‘지금 바다를 향해 용도(埇道:길에 흙을 더 돋우어 쌓은 길)와 같은 돌이 있는데 수 십리나 된다. 바로 그 산 꼭데기에 기둥처럼 생긴 커다란 돌이 가끔 보일 듯 말 득 커다란 바다 한 가운데 서 있다. 조수가 밀려 올 때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조수가 파도와 함께 밀려나면 움직인다거나 가라 앉지는 않지만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얕은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이 이를 이름하여 천주교(天橋柱)라 한다.’고 하였다.

 ● 해석 :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용도(埇道)가 수 십리나 된다‘고 하였으므로 마치 금강산 외금강의 ’총석정‘처럼 긴 바위기둥이 바다위로 높이 솟아 병풍처럼 절벽을 이루는데 멀리서 보면 하늘에 떠 있는 다리처럼 보이고(天橋), 길이가 수 십리, 즉 적어도 30~40리(12~16㎞)는 된다는 의미이므로 당연히 반도가 되며 천연의 장벽이 된다는 의미이다. 
 

 (잠정 결론 2-1 : 위치는 모르지만 해변가에 갈석산이 있다)

  

 ※ 임유(臨渝) : 전․후한 때에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고, 진(晉)대에는 기관의 축소로 양락(陽樂)에 편입되었다. 수(隨)말에는 노룡(盧龍)의 군치소를 임유로 옮겼고, 당나라 때에는 석성(石城)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요(遼)에서는 천주(遷州)에 속했으므로 유관(渝關)이라고 불렀다.

 25.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유수(渝水)에 관해 기록하기를

 ‘서남으로 산을 돌아 하나의 옛 성의 서쪽을 거치는데 세상에서 하련성(河連城)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임유의 옛 성이다. 유관(渝關)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관문이 강물의 험한 곳에 의지해 있기 때문이다.’

 서달(徐達)은 ‘처음에 옮겨 동쪽으로 갔는데 구관(舊關)과는 60리 떨어져 있어 산해관(山海關)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옛 유관(渝關)은 바로 원래의 무녕(撫寧) 유관진(渝關鎭)이다. 고인들은 항상 갈석을 유관과 함께 연관시킨다.

 

 ● 해석 : 유관(渝關)이 바로 임유관(臨渝關)이라는 말이다. 처음에 장성의 동쪽 관문이 임유관(臨渝關)인데 동쪽으로 60리(24㎞) 떨어져 있는 산해관(山海關)은 신관(新關) 이라는 뜻이고, 임유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고인들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잠정 결론 1-3 : 갈석산은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에 있다)

 

26. 『주서:周書』〈于翼傳〉에 기록하기를

 ‘대상(大象)원년(579) 익(翼)에게 명하여 장성으로 순찰하도록 하고, 정장(亭障)을 세웠으며, 서쪽으로 안문(雁門)을 거쳐 동쪽으로 갈석에 이르렀다.’
 

27. 당태종은 요동을 정벌하면서 ‘요갈(遼碣)’에서 출병하였다고 하였다. 

28. 당나라 고적(高適)의  『연가행:燕歌行』에는 ‘縱金伐鼓下渝關 旌斾逶迆碣石間’라는 구절이 있다.
29. 『전당시:全唐詩』 에 청나라 고종(건융제) ‘산해관’이라는 시에

 ‘長塞滄瀛倚 雄關碣石邊’
   ‘장새(장성)가 푸른 바다에 기대어 있고 웅장한 관문은 갈석의 변두리에 있네‘

 

 ● 해석 : 당시에는 지금의 갈석산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30. 『임유현지(臨渝縣志)』

 ‘금산취(金山嘴)는 성 서남쪽으로 60리(24㎞) 떨어져서 절반쯤 바다로 들어가 있다. 삼면이 바다를 향하고 있으며, 동서를 왕래하는 모든 돛단배들은 유독 이 곳에서만 올라가서 조망하는 것이 가장 볼 만하다.’
  ※ 嘴(취) : 부리, 주둥이, 사물의 뾰족한 끝

 

● 해석 : 임유현에서 남쪽 방향의 해변이라면 바로 해변 갈석산을 이르는 다른 말이 금산취(金山嘴)이므로 해변 갈석산이다.

 

 (잠정 결론 2 : 요서군 임유현 해변가에 갈석산이 있다)

 

31, 호위(胡渭)의 『우공추지:禹貢錐指』

‘여성(驪成)에 있는 산이 대갈석(大碣石)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만큼, 틀림없이 소갈석(小碣石)이 있었을 것이며, 무녕현(撫寧縣) 남쪽 일대의 이어진 산들을 모두 갈석(碣石)으로 여겼는데  이 말은 이치에 맞다.

 

 ● 해석 : 여성(驪成)에 있는 대갈석(大碣石)은 갈석ᄉᆞᆫ이다.

 

  (잠정 결론 1-3 : ‘갈석ᄉᆞᆫ’은 갈석지산이며 우북평군 여성현(驪成縣)에 있다)

 

32. 『진서:晉書』〈권 14 지(志) 제 4, 지리 상 평주(平州)〉조에

 ‘생각컨데 (평주는) 우공(禹貢)의 기주(冀州)지역으로서 주나라 때에는 유주(幽州)의 경내였고, 한나라 때에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다. 후한 말에 공손탁(公孫度)이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을 일컬었다. 그 아들 강(康), 강의 아들 문의(文懿) 등이 모두 요동을 제 마음대로 차지했는데 동이구족(東夷九族)은 모두 그에게 복종해서 섬겼다. … 함녕(咸寧) 2년(278)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개 군국으로 나누고 평주(平州)를 두었다. 거느리는 현은 26개, 호(戶)는18,100이다(10여만 여명으로 추정). … 낙랑군(樂浪郡)에는 조선(朝鮮)․둔유(屯有)․혼미(渾彌)․수성(遂城)․누방(鏤方)․사망(駟望) 등 4현이 있다.’
  주석하기를, 낙랑군에 대해서는 ‘한나라에서 두었다. 관할 현은 6개이다. 호는 3,700(2만 여명)이다.’ 하고, 조선현에 대해서는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했던 땅이다(周封箕子地).’ 수성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장성을 쌓기 시작한 곳이다(秦築長城之所起)’고 하였다.

 

 ● 해석 : 우공(禹貢)을 언급하였으므로 갈삭ᄉᆞᆫ을 말한다.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있다. 그러나 진나라는 B.C. 107년에야 위만조선을 치고 지금의 수성현 지역을 정복할 수가 있었으므로 여기서 장성을 쌓았다는 것은 허위이다.

  

(잠정 결론 1-3 : ‘갈석ᄉᆞᆫ’은 갈석지산이며 우북평군 여성현(驪成縣)에 있다)
 
      그런데  『진서:晉書』는 당태종의 역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어찬사서이다. 책의 내용이 많이 왜곡되고 가공되어 위서라고 중국역사학자들도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서진(西晉)은 삼국의 수 십 년간의 혼란을 끝내고 통일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양자강 이남에 한정되는 동진(東晋)으로 바뀌었는데 마치 대국인 것처럼 가공한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지는 초기에는 신뢰할 수가 있지만 회제 영가(永嘉)이후가 문제가 많다고 한다.

 

 33. 고산자 김정호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누현(絫縣)조에 갈석산에 관한 기술이 나오는데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수경주:水經注』에 누현 갈석산은 바다를 향해 가둥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이름하여 천교(天橋)라 하였으며, 누현의 고성은 청려현(昌驪縣) 서남쪽에 있다(『수경주:水經注』 絫縣碣石山 枕海有大石如柱形 世名天橋 絫縣古城在昌驪縣西南).’”  그리고 (『성경지:盛京志』까지 인용하여 ‘성경지에 이르기를 누현(絫縣)은 광녕(廣寧) 서북쪽에 있었는데 나중에 고구려에 속했고, 요(遼)나라 때는 의주(宜州), 금(金)나라 때는 의주(義州), 원(元)나라 때는 대녕로(大寧路)에 속했다(『盛京志』云 絫縣在廣寧西北 後屬高句麗 遼宜州 金義州 元大寧路).’라고 적고 있다. 
 
 ● 해석 : 『한서』〈지리지〉 에서는 요서군에 누현(絫縣)이 있다. 창려현 서남쪽이라면 방향도 맞다. 바로 해변 갈석산을 말한다.

 

 (잠정 결론 2-4 : 요서군  누현(絫縣) 해변가에 갈석산이 있다)

 

〈종합결론〉
 1. ‘갈석ᄉᆞᆫ’은  우북평군(右北平郡) 여성현(驪成縣) 서남, 또는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에 있다.
 2. 갈석산(碣石山)은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 또는 누현(絫縣) 해변가에 있다.
 3. 갈석산(碣石山)은 지금의 창려현(昌黎縣), 또는 노룡현(盧龍縣)에 있다.
  이상의 3개로 압축할 수가 있다.

 

    

 

그런데 앞의 2. 『상서』〈우공편〉 이나 3. 『사기』〈하본기〉에서 마지막에 언급한 글귀 ‘夾右碣石,入于海(河)’에 대해서 세 사람이 주석을 단 것과 다른 사서에서 언급힌 내용을 집대성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夾右碣石 入于海. 集解孔安國曰 碣石 海畔之山也. 集解徐廣曰 海一作河. 索隱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是北平之碣石’
  (「사기」〈하본기〉에)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 바다로 들어 간다’고 하였는데 〈집해〉에서 공안국은 말하길 ‘갈석은 바닷가에 있는 산이다.’ 〈집해〉에서 서광은 말하길 ‘해(海)를 하(河)로도 쓴다.’ 〈색은 지리지〉에서는 말하길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에 있다.’ 〈태강지리지〉에서는 말하길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여기서 출발한다.’ 또한〈수경〉에서는 말하길 “요서군 임유현 남쪽 바다에 있다. 대개 갈석산이 2개인데 여기서 말하는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레 표와 같다.

 

3개의 갈석산 위치와 관련 특징

 

갈석산

갈석산

갈석산

위치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

낙랑군 수성현

요서군 임유현 남쪽 수중

장성

 

한무제~현재의 장성

 

특징

갈석산을 오른쪽에 끼고 바다로 들어감

요수가 장성을 가로질러 남하

 

 

 

 


   문장에서 갈석산이 2개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3개이다. 어찌된 영문일까? 1번은 신앙시설이라고 하였으므로 사실은 산(山)이 아니므로 그런 의미에서 산은 2개 뿐이다. 그러나 의문스러운 것은 글을 쓴 사람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앞에서 종합결론을 내린 것과 거의 일치한다. 다 같이 1번은 우북평군(右北平郡) 여성현(驪成縣) 서남쪽이 있으며, 3번의 창려현(昌黎縣), 또는 노룡현(盧龍縣)에 있다는 갈석산이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며, 2번의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 또는 누현(絫縣) 해변가에 있는 갈석산은 역시 요서군 임유현 남쪽 수중에 있다고 하는 것과 일치한다.
  

양수경의 「수경주도(水經注圖)」〈유수편(濡水篇)〉을 보면 갈석산이 2개가 있다. 하나는 현재의 갈석산이고, 다른 하나는 유수(濡水:지금의 난하)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의 앞 바다에 있다. 첫 번째 갈석산은 지도의 상단에 표시된 대로 옛 요서군의 군치였던 양락에 있다. 창려

 

 

현(昌黎縣)에 가깝다. 역사서에서는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이다. 하단의 바다에 있는 두 번째의 갈석산은 뾰족하게 솟아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바로 위쪽에 설명하기를 ‘천주교(天柱橋)’, 즉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과 같다고 하고, ‘석여용도(石如甬道)’, 즉 돌이 마치 복도처럼 생겼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에 있는 갈석산은 바로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 남쪽 수중에 있다는 갈석산이다.

〈난하 삼각주:낙정현(乐亭县)과 창려현, 갈석산은『수경주도』에서나 지금이나 같은 지명이다.〉
「수경주도(水經注圖)」〈유수편(濡水篇)〉의 지도를 현재의 지도와 비교하여 보자. 난하는 하구가 전형적인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다. 난하와 장하, 대청하(옛날의 유수), 신난하(옛날의 목구수)가 노난하에 의하여 갈라져나온 강들이다.엣 지도에서는 낙정현 서쪽에 있는 유수(濡水)가 주류였으며 지금의 대청하이다. 지금의 난하는 옛 지도에서는 물길은 그려놓았지만 강의 이름도

 

 

 

없다. 이러한 지형의 특성으로 인하여 강의 흐름이 바뀌고 이름도 바뀌고 하여 역사기록을 한 사람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고 본다. 이 일대가 요하 하구이며 바로 요댁(遼澤)이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왜  해변 갈석산(碣石山)은 다른 기록에는 없고 현재는 그 흔적도 찾을 수가 없을까? 행방을 찾아보자.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에 다시 주석을 한 〈수경주소〉에 ‘옛날 한나라 시대에 바닷물이 파도가 쳐서 넓은 땅을 침식하니, 같은 지역에 있던 갈석의 뿌리도 넓은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았다(昔在漢世 海水波襄 呑食地廣 當同碣石苞淪洪波也)’고 하였다.

   수경안(守敬按)이〈하수주(河水注)〉에서 “한나라 시대의 왕횡이 말하기를 ‘비가 쉴 사이 없이 내리고, 동북풍이 불어대더니 서남쪽으로 해수가 넘쳐 수 백리의 땅을 침식 하였다. 따라서 장안이 이르기를 바다에 있던 갈석이 바닷물에 가라앉았다(漢王璜曰 往者天嘗連雨 東北風 海水溢 西南出 侵數百里 故張晏云 碣石在海中 蓋淪于海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 오나라의 태자(太子) 위소(韋召) 의 글에 ‘옛날에는 (갈석이) 바닷가 하구 해빈(海濱)에 있었는데 세월이 이미 오래 흘러 점점 바다로 빠져들어 해안에서 500리나 멀어졌다(舊在河口海濱 歷世旣久 爲水所漸淪入於海 去岸五百里)’하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500리는 200㎞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기록도 있다. 우북평군은 요서군 보다는 서쪽에 있는데 여기에 있는 갈석산도 바다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리지(地理志)」에 ‘대갈석산은 우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었는데, … 지금은 바다에 복도처럼 우뚝 솟은 돌이 수 십리에 뻗어 있다. 큰 조수가 밀려오면 보이지 않고 조수가 밀려나면 그대로 있어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하늘다리기둥이라 한다. … (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 王莽改曰揭石也 漢武帝亦嘗登之以望巨海 而勒其石於此 今枕海有石如甬道數十裡 當山頂有大石如柱形 往往而見 立於巨海之中 潮水大至則隱 及潮波退 不動不沒 不知深淺 世名之天橋柱也 狀若人造 要亦非人力所就 韋昭亦指此以為碣石也)’. 앞에서 본 지도의 임유현 남쪽 바다에 있는 갈석산과 북평군에 있는 갈석산을 하나로 생각하고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착각이 아닐까 한다.

참고로 69년에  대만에서 발행한  현재의 장성과 갈석산의 위치 지도와 '대명여지도 북직례여도'에서 산해관(원)과 창려(4각형)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첨부하였다.

 


 

 


   바다에 침몰되었다는 지역이 또 있다. 「독사방여기요」에 ‘한나라 때 양평(襄平), 요양(遼陽) 2현은 요동군에 속했다. 후한 때에도 양평현 땅을 가지고 있었고 진(晉)나라에서 후위 때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나 후위 고제 때에 고구려가 점유하였는데,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다시 양평현이라 불렀으나 후에 발해에 침몰되었다(漢襄平遼陽二縣地 屬遼東郡 後漢仍爲襄平縣地 晉及後魏因之 高齊時爲高麗所據 唐平高麗 復曰襄平縣 後沒於渤海).’  여하튼 바다에 있던 갈석산은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에 바다에 침몰되었다. 우리는 1976년에 일어난  당산(唐山) 대지진을 기억하고 있다. 리히터 7.8의 강진으로 60~80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일대는 지진대에 속한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양평현(襄平縣)은 2곳이나 된다. 「한서」〈지리지〉에서 요동군의 북쪽에 있는 양평(襄平)과 여기서 말하는 남쪽에 있는 양평현(襄平縣)이다. 만약에 양평현(襄平縣)이 바닷가에 있었던 지방이라면 초기의 장성이 시작되는 요서군 임유현에 있던 갈석산은 양평현(襄平縣)과 함께 지진과 해일로 인하여 수중으로 가라앉았다. 따라서 ①연장성을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쌓았다거나, ②연(燕)나라의 국경이 ‘동쪽으로는 조선과 요동반도 까지’라고 하는 말과, ③‘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출발한다(有碣石山 長城所起)’는 말들이 모두 일치한다. 연(燕)나라나 진(秦)나라의 장성의 동쪽 기점은 요서군 임유현이나 요동군 양평현의 남쪽 끝자락인 요동반도(遼東半島)의 갈석산이며, 한무제가 BC108년에 요동에 있는 위만조선을 정벌한 이후에 현재의 장성이 위치한 지역에 장성을 수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장성은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출발한다(長城所起)’는 말을 쓸 수가 없는 지형조건을 가지고 있다.


2015. 2. 19일  소산 심상인

 

  ㅡ 다음 블로그 <불함산> 작은거인 님의 글에서 ......

(2015.2.19일자 이 글이 첫 포스팅인 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