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의 생애

2015. 3. 10. 01:00우리 역사 바로알기

 

 

 

 

 

       기황후의 생애| 우리나라 역사 지식

이소영 | 조회 162 |추천 0 | 2013.12.28. 10:56

 

『元史』에서는 기황후가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다고 하였으나, 『高
麗史』를 참조해보면 기황후의 조상들이 武臣執權期부터 활동하였다는 사
료를 찾아볼 수 있다. 기황후의 曾祖인 允肅은 武臣政權期에 崔忠獻에게
발탁되어 上將軍에 임명되었다가 門下侍郞平章事까지 올랐었다. 『高麗
史』에는 高祖洪潁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祖琯은 大將軍에 이르렀다고
나와 있다. 또한 琯은 典法判書朴喗之(李藏用의 外孫)의 딸과 결혼할 정
도의 가문은 될 정도였으니 한미한 출신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으로 사
료된다.


  기황후는 奇子敖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奇子敖는 1266년 태어나 蔭敍로
散員에 제수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摠府散郞의 자리에 오른 후, 宣州의
守까지 올랐고, 1328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典書 李行儉
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부인 李씨는 益州李氏로 贊成事三重大匡益山府
院君李公遂와 형제지간이었다. 기자오에게는 아들이 다섯으로, 軾, 轍,
轅, 輈, 輪이었다. 딸은 막내인 기황후까지 모두 세 명이었는데 큰딸은 商
議評理 趙希忠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典議令 廉敦紹에게 시집갔다.


   막내딸이 元나라의 第二皇后에 오르자, 父는 秉德承和毓慶功臣榮安王에
추증되었으며 母는 榮安王大夫人이 되었다. 家門에는 貞節이라는 정표를
내리기도 하였고, 高麗에서는 李氏府를 두어 慶昌府라 하였다. 이러한 혜
택은 그녀의 형제와 친척들에게도 이어졌다. 兄轍은 僉議政丞德城府院君
大司徒遼陽省平章事, 轅은 元에서는 翰林學士, 高麗에서는 僉議贊成事德
陽君, 輈는 大匡元尹, 輪은 右常侍가 되었다. 奇轍의 아들 有傑은 贊成事,
世傑은 上議軍, 賽因帖木兒는 平章事가 되었으며 奇皇后의 다른 조카 중에
天麟(完澤普化)은 版圖摠郞, 그리고 天驥, 有傑, 田龍은 모두 郞將이 되었
다.73) 또한 이들은 元나라에서도 특별한 우대를 받았다. 奇轍은 大司徒遼
陽省平章에 임명되었으며 弟轅은 翰林學士, 그리고 그밖에 轅의 子完者
不花가 元나라의 사신으로 高麗에 왕래하였다.


   奇氏女가 皇后로 冊封되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처음 그녀는 순
제의 茶심부름하는 궁녀를 거쳐, 애유식리달납을 낳고 비로소 제2황후가
될 수 있었으며, 자정원을 설립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세력기반을 단단히
쌓아 정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녀가 궁에 들어온 해에 대해서
는 확실한 사료적 근거는 없지만 대략 8세 때에 元나라 宮室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16세가 되던 해인 1233년에 궁전 의식의 茶待
接夫로 선택되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출생년도를 1218년경
으로 추정하고 있다.
   美貌의 宮女들이 가득하였던 元나라 皇室안에서 高麗貢女출신의 宮女
奇氏가 유독 황제의 총애를 독점하게 된 것은 물론 황후의 미모가 결정적
인 조건이었다. 奇皇后의 미모는 상당하였다고 전해지는데, 朱橚은 『元宮
詞』에서 기황후의 미모를 “살구 같은 눈, 복숭아 빛 뺨, 버드나무 같은
가는 허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아름다운 외모만이 기황후
가 순제의 환심을 사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년시
절부터 갖은 고초를 겪었던 順帝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황제로서
의 세련된 교양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庚申外史』에서는 순제에 대하여
“황제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림과 천체관측을 좋아했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그는「懷兩都賦」라는 장편시를 지어 자신의 풍부한 문학적 재
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순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기황후의 총명한 면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을 뒷받침
해주는 사료로『元史』에서 기황후의 성품을 “빼어나게 영리하다.”고 표현
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기황후는 제2황후가 된 후에도 황후
로서의 교양과 기품에는 손색이 없었는데, 『元史』의 “기황후는 『女孝
經』과 각종 史書를 읽었으며, 각지에서 진상되는 좋은 음식은 먼저 太廟
에 제례를 지낸 후 먹었다.” 라는 기사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奇氏가 皇后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高麗出身宦官들의 영향이 상당하였
다. 환관들은 대개의 경우 옥새의 보관, 궁정 공사의 감독원, 궁중의 예절
에 참석하는 등 하급 직원으로 대궐에서 종사하였다. 宦官들은 世祖代에
몇 십 명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그들의 숫자가 順帝代에 내려와 천명 이상
으로 증가하였으며 그 영향력도 점차 커져갔다. 元나라의 환관들은 대부
분 고려인이었는데, 이들은 朝廷內에서 宮女, 고관․무인(怯薛, 怯薛歹,
kešik)84)들과 함께 상층사회를 이루었다. 元代에 宦官들은 대개 황후의 재
정을 관리하였던 徽政院이나 資政院에서 일을 보았다.
   이러한 환관들이 기황후를 지지하게 된 배경에는 같은 고려출신이라는
점과 元나라에 바쳐진 불우한 처지라는 유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환관들의 입장에서 볼 때 高麗人미녀를 황제에게 소개하는 것은 元朝廷
안에서 자신의 집단세력을 보강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으므로 고려출신
환관 徽政院使 禿滿迭兒는 1333년 12월에 奇氏를 順帝에게 소개시켰던 것
으로 보인다. 禿滿迭兒는 高龍普(?~1362)86)의 몽골이름으로 高麗煤
場사람이며 본관은 全州이다. 그는 奇皇后의 총애를 받아 資政院使까지 올
랐으며, 奇氏가 第二皇后로 책봉된 이후인 1341년(忠惠王復位2年) 2월에
는 高麗에서 三重大匡完山君에 봉해졌다.
   많은 고려출신의 환관들 가운데, 『元史』宦者傳에는 중에 단 두 명만
이 게재되어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高麗人朴不花인데,89) 그는 奇氏와 같
은 幸州사람으로 故鄕이 같았다.90) 朴不花는 至正6年(1346)에 資政院使로
임명된 후, 奇皇后의 최측근들인 高龍普, 姜金剛등과 함께 소위 資政院黨
을 형성하여 元나라의 황실과 조정에서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그는 군사통솔 기관이었던 樞密院의 고위직인 同知樞密院使도 겸임
하였다.


   위와 같이 고용보, 박불화, 강금강 등과 같은 고려출신 환관들은 기황후
의 정치 목적을 실현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元과 高麗정계
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答納失里皇后의 축출, 順帝內禪
陰謀, 愛猷識理達臘의 皇太子책봉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개입하여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그들은 고려에도 자주 드나들며 국
왕의 옹립과 폐위 등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고려 조정에도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과시하였다.


   奇氏女가 皇后가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脫
脫이다. 그는 奇宮女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伯顔을 정계에서 축출하여
奇氏가 第二皇后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伯顔의 甥姪인 脫脫은
順帝의 뜻에 따라 至元6年(1340) 2月에 伯顔을 축출하였으며, 그 해 4月
에 위그르 人인 帝師沙刺班92)이 提請하여 宮女奇氏는 第二皇后가 될 수
있었다. 脫脫은 至正元年 백안축출의 공로가 인정되어 中書右丞相에 올
라 과거 백안의 정치를 쇄신해 갔다. 토니노 푸지오니는 脫脫의 집권시
기를 2期로 나누었다. 그의 집권 제1기는 1340년부터 1344년까지이며, 제2
기는 그가 실각한지 약 4년 뒤인 1349년부터 1355년까지이다. 脫脫은 어렸
을 때부터 유교적인 교육을 받았는데, 이 영향으로 그는 집권 후에 과거제
도를 복귀시켰으며, 권농정책과 왕권의 강화를 모색하는 유교적 정책을 실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儒學의 지원자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脫脫은 1345년 이후에 실각하였는데 곧 다시 집권하였다. 1347년 11월에
탈탈의 부친 馬札兒台(Majartai)가 별세하자, 監察御使太平(賀性一)은 부
친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하여 탈탈이 還京할 것을 허락해주었고, 이것은
탈탈에게 정권을 다시 잡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이듬해
4월에 太傅가 되어 1349년 윤월에 다시 중서우승상에 임명되었고, 그로부
터 약 5년간 정권을 독점하였다.


   1344년 탈탈이 몰락할 때까지 기황후일파와 탈탈의 관계는 양호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元나라에는 황태자를 大臣의 저택에서 기르는 전통이 있
었다. 이에 따라 脫脫은 기황후의 소생인 愛猷識理達臘을 6살 때까지 양육
하였으며, 황태자의 복을 빌기 위해 大壽元忠國寺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황태자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탈탈과 기황
후의 관계는 꽤 좋았던 것으로 풀이되며, 그들은 공조체제를 유지해가면서
중앙정계를 주도해 갔다. 그런데 탈탈이 몰락하고 別兒怯不花(Berke
Buqa)98)가 집권하자 奇皇后一派는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別兒
怯不花는 脫脫과 맞섰던 인물이었으므로, 몰락했던 脫脫의 재집권은 기황
후 일당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고하였다. 즉 高龍普가 監察御使曲曲의 탄
핵을 받은 적이 있었고, 1348년 11월에 별아겁불화가 監察御使張幀의 탄
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에 監察御使李泌이 奇氏를 탄핵하여 妃에 강
등하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 때 高龍普도 高麗로 유배되었다. 탈탈이
1349년 윤7월에 중서우승상에 임명되자 奇皇后는 哈麻를 통하여 애
유식리달납의 皇太子책봉을 요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탈탈은 이를 이행하
지 않았는데, 그가 愛猶識理達臘의 황태자 책봉의식을 주저했던 이유는 哈
麻의 성장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正后伯顔忽都의 子眞金(Jingim)
의 출생은 애유식리달납의 황태자 책봉을 주저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
가 되었다. 眞金은 정후의 아들이었으나 너무 어려 황태자로 선발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順帝로서도 몽골인의 태자가 있는 상황에서 고려인에게
얻은 子를 책봉하는데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하여 황태자 책봉

정에 시간을 끌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로 연결된 특이한 혈통의 소유자였다. 그는 元丞相阿忽台와 고려인 洪奎의

長女사이의 소생이며,
그의 아내 역시 고려인 金侚의 5女였다.
 이와 같이 奇皇后가 추구하는 목적에 反하는 脫脫의 행동들은 그들의

관계를 대립하게 하였다. 또한 太傅였던 탈탈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기황후 측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愛猷識理達臘을 황태자로 책봉하고자하는 奇氏는 먼저 재정적인 수단을
확보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재정적 뒷받침은 그녀가 원조정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는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資政院黨을 효율적으로
포섭하는 데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奇皇后와 高麗出身宦官들은
至元6年(1340) 12月 資政院을 創置하여 그들의 세력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資政院은 본래 徽政院의 구조를 이어받은 기관이다. 元代
의 徽政院은 世祖의 至元31年에 太子裕宗이 사망함에 따라 太子를 補益
하던 詹事院의 錢糧․工役등을 太后휘하에 두게 하고 명칭도 시대에 따
라 변동이 심하였다. 順帝代의 휘정원은 元統元年(1333) 12月에 文宗의
皇后이며 順帝의 叔母인 不答失里太后의 재부를 관장하기 위해 두었던
곳이었다. 즉, 徽政院은 본래 황태자의 재정을 충당하는 기관으로 창설
되었으나 太子裕宗의 사망 後인 至元31年(1294)에 皇后의 기관에 예속되
었으며, 徽政院의 기본적인 기관들을 이어받은 資政院은 1340년에 奇氏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資政院은 기황후의 재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여주었고, 그것이 밑바탕이 되어 그녀의 소원이 실현될 수 있었다.
資政院은 織染雜造人匠總管府와 總領諸路打捕應房納綿等戶總管산하의 全
機關에서 상납되는 재부들을 비롯하여 1329년(天曆2年)에 추가된 集慶路
의 錢粮을 기본재원으로 하고 있다. 특히 集慶路는 南京地方에 위치하
여, 三縣二州를 포함하였는데, 당시 1329년에 214,538가구, 1,072,690명의
인구가 살았으며 그의 공역과 세를 거두었다. 奇氏는 자정원 창치 후에도
계속하여 할당 받은 재정을 확장하려고 노력을 하였던 것 같다. 그 일례로
1359년에 강남이 반란군의 손에 들어가 集慶路의 세액을 절감하였을 때
資政院에 약 4,000 가구를 추가 예속시켰던 점을 들 수 있다. 資政院이
설치되면서 初代資政院使는 宦官高龍普가 되었다. 자정원사는 반드시 환
관 출신이여야 하지는 않았으나 자정원의 성격상 자정원사로는 환관출신
이 많았다. 그런데 『元史』에서는 至正7년, 당시 中書右丞相이던 別
兒怯不花의 피핵사건을 다루면서 그를 변호했던 高龍普를 거론하며 徽政
院使라고 표현하고 있다. 至正7年은 휘정원이 資政院으로 개편된 지
이미 7년이나 지난 시점으로, 『元史』의 이러한 표현을 단순한 오기로 보
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하여 李龍範은 휘정원이 자
정원으로 개편되면서 본래 휘정원사였던 高龍普가 자동적으로 資政院使가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사실이라면 휘정원이 자정원으
로 개편될 때, 奇皇后가 이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徽政院使였던 고용보가
도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奇皇后는 不答失里太后의 재부를
점유하기 위하여 그녀를 제거하고 자정원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러한 不答失里太后와 燕帖古思母子의 축출에는 아마도 高龍普와
朴不花의 배후조종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353년 6월 20일 애유식리달납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中書令․樞密使에
임명되었다. 정권을 잡은 그의 가장 급선무는 탈탈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는 탈탈이 張士誠(1321~1367) 반란군의 거점인 高郵城을 포위하
고 있을 때 그를 모략하였다. 그러자 1354년 12월 23일에 탈탈의 친동생
也先帖木兒(Esen Temür)가 유배되었고, 다음날 탈탈도 폄직되었다. 한편
順帝는 脫脫의 권세가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자 그에 대한
모략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탈탈을 雲南지방으로 유배 보냈던 것이다.
이렇듯 탈탈이 몰락하였으나 기황후는 이에 만족치 않고 황제의 자리까지
아들에게 물려주도록 계획하여 그것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즉 순
제로 하여금 황제의 자리를 그의 長子이자 기황후의 子인 愛猷識理達臘
황태자에게 물려주도록 하는 禪位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탈탈의 몰락
이후 1355년 5월부터 定住(Ding Zhu)가 집권하였다. 定住는 順帝禪位운
동을 지지하였던 哈麻와 입장차이가 컸다. 그는 皇帝와 御史臺의 지원을
받아 哈麻를 사형시켰다. 1357년에는 定住에 이어 搠思監(Chösgem)이 右
丞相이 되었으며, 그는 皇太子를 지지하였다. 한편 左丞相인 太平은 順帝
를 지지하였는데, 奇皇后가 아들과 의논한 뒤 朴不花를 태평에게 보내어
순제에게 양위를 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평은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이
지 않았고, 오히려 황제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이에 순제는 그러한
기황후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겨 그녀를 약 두 달 동안 만나지 않았다. 애
유식리달납은 이 일에 대하여 복수심을 품고 그가 御命을 거슬렀다는 누
명을 씌웠으며, 결국 태평은 1363년에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順
帝의 양위를 도모한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
었다는 점에서 기황후와 資政院黨의 세력이 황제에 견줄 정도로 컸었다고
예상된다.


   奇皇后는 1360년 孛羅帖木兒(Bolod Temür)의 犯闕事件으로 그 지위
가 위태로웠으나 결국 孛羅帖木兒가 실각하였다. 또한 그가 실각하고 약 2
개월 후인 1365년 8월에 伯顔忽都皇后가 薨去하자, 같은 해 12월에 기황
후가 正后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정후로 책봉되면서 肅良合氏, 完者忽都
(Öljei Qutuq)라는 몽골 名을 받았다. 이것은 奇氏가 몽골의 국적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몽골 귀족들의 눈치를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기도 하였으며, 正后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것이기도 하였다.
奇皇后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희망하였던 목적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
나 그녀가 정후가 된지 약 3년 만에 元이 中國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벌어졌다. 周元璋은 1368년 南京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明’이라고 칭하였으며, 북벌을 단행하여 몽골인들을 장성 밖으로 구축하였
다. 北으로 쫓겨난 元나라는 비록 高麗에 전과 같은 큰 영향을 미치지
는 못 하였으나 14세기말까지 東北亞에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군사
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서 해왔다.


   順帝는 恭愍王18年(1369)에 上都에서 應昌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곳에
서 다음 해인 1370년에 그는 奇皇后의 소생인 愛猷識理達臘에게 皇帝의
자리를 이양한 뒤 서거하였다. 愛猷識理達臘은 北元의 昭宗으로 1378년
까지 재위하였다. 이후, 昭宗의 뒤를 이은 아들 脫古思帖木兒가 1388년까
지 황위를 계승하였는데, 이것은 곧 기황후의 후손들이 대략 14세기말까지
北元의 정상에 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元의 鮒馬國인 高麗의 여인이
元皇室의 여성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지 않
을 수 없으며, 또한 그녀의 후손들이 北元과 같은 외국세력의 皇位를 이어
받은 것은 한국사상 유일한 것으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金佳賢, <元末, 奇皇后의 政治的位置와 그 影響>, 水原大學校 敎育大學院
석사학위 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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