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주의 茶이야기 <36> 원효의 무애(無碍)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본다도의 근원은 초암차입니다. 초암차는 다시 정신적 원류와 생활화를 위한 실천 방법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차실과 차 도구, 차 달이는 법과 마시는 일에 내재된 역사와 변천사 등은 그 실천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초암차의 사상적 기원을 이루고 있는 원효와 매월당의 차정신(茶精神)에 관하여 살펴볼 작정입니다.
초암차 정신은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이는 단숨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화엄경 한 구절에서 우주적 깨달음을 이룬 뒤
무애(無碍) 사상을 펼쳐 보인 원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애란 지극히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는 뭇삶들을 이롭게 함이며,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건네주는 것이며, 자유의 실천이며 아무 거리낌 없음입니다. 참다운 깨달음은 반드시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원효의 정신세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무애무(舞), 무애가(歌), 무애차(茶)지요.
권력이나 소임을 얻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쓰는 귀족불교의 폐해를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고통받는 현실 인간들의 짐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 고뇌하던 나머지 깨달은 것이 무애사상이지요.
원효의 무애사상은 깨달음과 나눔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깨달은 바를 세상에 나눠줄 수 없다면 팔만대장경도 고름 닦는 걸레요, 밑 닦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강렬한 민중의식이 그속에는 충만해 있습니다.
참된 수행자란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모습을 통해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여겼지요. 그들이 기뻐할 때 더불어 기뻐해주고 그들이 아파할 때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 여긴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벌거숭이 그대로의 인간 삶, 소박한 모습, 진실한 인간 이해 방식이 가장 급했지요. 그런 이해의 방식으로 원효가 만든 것이 무애춤, 무애노래, 무애차였습니다.
무애춤은 기쁨이나 슬픔을 아무런 격식이나 전제된 것 없이 속에서 우러나는 대로 팔과 다리를 흔들고 머리를 흔드는
춤입니다. 무애노래는 누구든 따라 부를 수 있는 ‘나무아미타불’을 큰소리로 외치면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애차는 굳이 차나무 잎을 가공하여 우려낸 것이 아니라도 목마를 때 갈증을 달래주고 허기질 때 주린 창자를
달래주는 맑은 물이나 따뜻한 국물을 뜻합니다. 이때 무애차는 반드시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럿이 있을 때 마시는 순서나 격식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오직 모두가 평등하게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원효의 무애사상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으로 인하여 얼룩지고 피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따뜻이 감싸주기 위한
것입니다만, 신라 사회에서는 원효를 파계승이라 하여 철저하게 소외시켰지요. 그때 일본에서는 이같은 원효의 차정신을 놀라운 마음으로 모셔가서 그들 사회의 혼돈과 무지를 일깨우는 데 활용했습니다. 그 증거가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 설총(薛聰)조에 있습니다.
설총의 아들 중업(仲業)이 신라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 원효의 ‘금강삼매론’을 읽은 일본승려가 중업을 반기는
장면인데 서기 779년의 일입니다. -----------------------------------------------------------------
(중략) (일본의) 서대사의 차올리는 의식은 매우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불단에 차를 올린 뒤에는 절 주변 사람들을 초대하여 차를 함께 나눠 마셨거든요. 사람마다 차그릇을 따로 정하지 않고 큼직한 찻사발(일본에서는 오우부쿠라 했음)에다 차를 그득 담아서는 모인 사람들이 차례로 돌려가며 마셨습니다.
차를 한 그릇에 담아 여럿이서 돌려 마시는 풍습은 일본에 없던 낯선 것이었는데, 이는 원효의 무애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우부쿠라는 찻사발을 일본의 어떤 전설에서는 무애 찻사발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생략)
원효의 무애사상을 실천하는 한 방법인 무애차는 일찍이 원효가 신라의 서민, 천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운 '음식 나눠먹는 형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라 서민, 천민들은 가난한데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그들 특유의 공평한 분배 방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큼직한 바가지 하나에다 먹을 것을 구걸하여 담았지요. 음식을 얻어오면 바가지를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앉습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바가지에 손을 넣어 한 움큼씩 음식을 집어먹거나 숟가락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옆사람을 생각하여 늘 조금만 덜어내지요. 국물이나 숭늉물도 그렇게 돌려 마셨습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보고 크게 깨달았지요. 그렇게 나눠먹고는 박을 두드리면서 춤을 추고 노래했습니다. 먹이를 준 분들에게 감사하는 뜻이지요. 여기서 농차가 비롯되었습니다. (정동주의 茶이야기 <37> 일본의 원효사상)
원효는 삼국통일 전쟁이 남긴 비극의 얼룩을 지워내면서 인간의 고통이 얼마나 깊고 크며, 인간에 대한 불쌍함과
애처러움은 또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원효가 깨달은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이 대비심(大悲心)이며 보살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지붕 밑에서 한 그릇에 담긴 밥을 함께 먹는 것과 같은 삶을 실천했습니다. 민중속으로 들어가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삶을 추구했지요.
바가지 하나에 담겨 있는 밥이나 국물을 골고루 나눠 먹으면서 해맑게 웃고, 먹고난 뒤에는 춤추고 노래하여 세상 근심을 덜어내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밥이나 국물을 담는 바가지였습니다. 마치 석가모니 시대의 흙발우가 지닌 의미와도 닮았지요.
이같은 원효의 무애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무애차가 되고, 다시 농차라는 이름의 초암차 형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정동주의 茶이야기 <38> 무애사상의 내력
ㅡ cafe.daum.net/choinmock/Ixuy/790 초인목(艸人木)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차문화 산책-07-제7회 농차와 원효의 무애사상1
카카오TV | 2007.04.04 | 재생수100
차문화 산책-08-제8회 농차와 원효의 무애사상2
카카오TV | 2007.04.04 | 재생수53
카카오TV | 2007.04.04 | 재생수54
서대사의 오오차모리(大茶盛) 행사 - 원효의 무애차에서 비롯됨. 2009.12.09
cafe.daum.net/jbj5202/Bjs/3816
(사)한국차문화협회 천안지부,원유전통문화연구원(다림헌) 자료 중에서 전재 ......
서대사 대차성
김영우 본지 객원기자
일본의 나라(奈良)시 동쪽에는 나라 제1의 관광지인 동대사가 있고 서쪽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사찰 서대사가 있다. 서대사는 동대사를 창건하고 차나무를 심은 백제승려 행기(行基)보살(668~749)의 좌상이 있는 곳이다.
서대사는 동대사와 맞먹는 장대한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3회에 걸친 화재로 지금은 한적한 소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차인들은 한번쯤 들려 볼만한 곳이다. 서대사에 들어서면 전각이 없어진 기단과 석등(石燈)이 보인다. 석등의 화사석(火舍石-註1)에 있는 화창(火窓-註2)에 나무틀을 한 것을 보고 놀랐다. 옛날 석등을 사용할 때 만든 화창을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본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옛것을 그대로 보여 주려는 일본인들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사찰에 있는 석등은 어둡고 깜깜한 중생의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주어 바른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로 사찰의 불당 앞에 탑과 함께 세워진다.
금당입구에서 대형다기에 담겨진 차를 나누어 먹는 서대사 큰차담기(大茶盛)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율종(律宗)의 에이슨(睿宗)스님이 1239년 정월 하찌만궁에 올린 차의 여줄가리(註3)를 스님들에게 마시게 하였는데 이것이 서대사의 큰차담기 시초가 되었다.
"법주사 희견보살상" *사진 자료 http://blog.daum.net/baekdu-daegan/46 찻그릇-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앞 희견보살상(머리에 대형 다기를 이고 있다)
김명배의 저서 ‘일본의 다도’에 의하면 큰차담기는 지름 30cm를 넘는 큰찻잔에다 차를 담아서 참가자에게 마시도록 베푸는 것이라고 하였다. 큰차담기에 사용한 큰찻잔은 상위에 커다란 차선(茶筅)과 함께 놓여있었다. 서대사의 차를 나누어 먹는 다법은 원효의 무애차(無碍茶)에서 왔다고 한다. 원효의 무애사상을 실천하는 한 방법인 무애차는 일찍이 원효가 신라의 서민, 천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운 음식 나눠먹는 형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서민, 천민들은 가난한데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그들 특유의 공평한 분배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큼직한 바가지 하나에다 먹을 것을 구걸하여 음식을 얻어오면, 바가지를 가운데 놓고 빙둘러 앉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바가지에 손을 넣어 한 웅큼씩 음식을 집어먹거나 숟가락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옆 사람을 생각하여 늘 조금만 덜어 내곤 했다.
서대사 금당의 부처님께 합장하여 예를 드린 후 불단 뒤쪽으로 슬며시 가보았다. 불단 뒷벽에는 16나한도가 붙여져 있었는데 오래되어 귀퉁이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한도를 보고 나는 또 한번 놀랐다. 그림 속의 나한들은 호랑이를 깔고 앉아 있었는데 나한에게 깔린 호랑이 모습이 전혀 무섭지 않고 오히려 친근감 있게 그린 우리의 호돌이형 호랑이였다.
촬영 일본 그림에서 호랑이는 일반적으로 사무라이처럼 사납고 날카롭게 그려지지만 우리 조상들은 공포의 대상인 호랑이를 친밀하게 표현해서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그래서 우리 민화 속의 호랑이는 유머스럽고 친근감 있는 호랑이이다. 이것은 우리 조상의 멋이며 여유이다. 우리 조상들의 유머스럽고 친근감 있는 호랑이의 그림을 서대사에서 본 것이다. 16나한도의 사진을 찍어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었다. 행기보살, 석등의 화창, 무애차, 나한에 깔린 호랑이 모습, 모두가 처음 보는 것이지만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있기 때문 일 것이다. 1월 하순의 나라는 동백꽃 닮은 수바끼의 떨어진 꽃잎이 주변을 붉게 만들어 놓아 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고 흰 동백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註1)불의 집이란 뜻으로 불은 진리의 빛 ,곧 부처를 상징, 따라서 화사석은 부처가 머무는 집의 의미를 가짐 註2)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 본래는 나무틀에 창호지를 붙여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음. 註3)①주된 물건이나 줄기에 딸린 물건, ②중요하지 않은 나머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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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차| 茶 이야기 梅月堂 | 조회 33 |추천 0 | 2016.03.17. 06:52
무애차(無碍茶)
말차(抹茶)를 다완(茶碗, tea bowl)에 격불하여 돌려 가면서 마시는 경우를 많이 볼 수 가 있습니다. 위생적인면을 생각 한다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다법(茶法)에는 위대한 불교사상(佛敎思想)이 숨겨져 있습니다. 일본의 농차(濃茶)는 무애행위의 무애사상(無碍思想)과 말차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다법(茶法)입니다. 서기 7세기 신라의 승려로 해골 물로 잘 알려진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무애차(無碍茶)에서 비롯 되었습니다. 무애차는 염불과 함께 한 그릇의 물이나 차를 돌려 마셨던 행위를 말합니다.
일본 화엄학(華嚴學)의 집대성자이며 일본차의 시조인 명혜상인(明慧上人)은 화엄공부를 하던 중 신라의 승려였던 원효대사를 알게 되면서 그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성인(聖人)으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많은 전쟁으로 타락한 일본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그가 저술한 6권의 "화엄연기회권(華嚴緣起繪券)" 중 두 권에 원효의 생애와 사상을 남겼습니다. 명혜상인은 타락한 일본 스님들 보다는 청정한 신라스님들을 모델로 하여 일본불교를 중흥하고자 평생을 두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원효에 대한 존경심은 그의 제자 예존상인(叡尊上人)을 통해 보다 더 실천적으로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80년 정변으로 세이다이사(西大寺)가 파괴되었을 때 명혜상인에게 무애사상을 배운 예존상인은 이곳을 재건하면서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기 시작 합니다.
그는 남을 배려하는 정신을 가르 치기 위하여 죽을 끓이고 큰 그릇에 퍼 담아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한 그릇에 담긴 죽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는 풍습이 생기게 됩니다. 그 후 1239년 세이다이사에서 법회가 끝난 뒤 하치만궁(八幡宮)에서 제사를 지내며 차를 올렸습니다. 제사에 올랐던 차는 약으로 썼는데, 이때부터 절 주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 그 차를 나누어 마시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큰 그릇에 담긴 차를 한 모금씩 돌려 마시는 이 의식은 예존상인이 실천했던 죽을 나누어 먹는 행사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예존상인이 스승에게 배운 원효대사의 무애사상은 그 후 세이다이사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한 그릇에 담긴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평등과 건강과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이다이사(西大寺)의 차 돌려 마시기는 원효대사가 신라의 서라벌(지금의 경주)에 있는 거지들과 함께 살면서 실천했던 "무애차"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 그릇의 물이나 차를 돌려가며 마시는 원효대사의 무애차와 무애사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농차" 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말차를 다완에 여러 사람이 돌려 가면서 마시는 행위를 다소 위생상 불결 한것은 사실 입니다. 그렇게 마시고 안마시고는 본인의 취향이겠지만, 그 다법에 담긴 위대한 불교사상을 알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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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 카페 > Daum카페 cafe.daum.net/chadoj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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