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茶文化와 茶道精神

2015. 4. 15. 23:00차 이야기

 

 

 

 

 

      [【우리차歷史】] 朝鮮時代 茶文化와 茶道精神, 그리고 茶詩.| 茶 道····· ◈ 綠茶향기 ◈

淸信士 | 조회 184 |추천 0 | 2003.12.14. 19:17

     朝鮮時代의 茶文化와 茶道精神


◎ 槪 要

   조선 初期에 왕실과 조정의 儀禮(의례)에서도 茶가 사용되고 조선예법의 기준이 되는 朱子家禮(주자가례)
에도 祭祠(제사), 婚禮(혼례), 祠堂(사당)의 祭禮(제례)등에 茶를 올리는 獻茶(헌다)의 법도가 있어 양반 
관료 사회에 飮茶(음다) 풍속이 성행되었다. 조선중기 倭亂(왜란), 胡亂(호란)등 양란이후 경제적 사회적 
혼란으로 茶생산이 감소되어 茶文化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러나 寺院의 僧房(승방)에서 飮茶의 생활과 造茶(조다)의 기술이 유지 발전되어 왔다. 조선 말기에 茶山 丁若鏞, 秋史金正喜 草衣大禪師가 쇠퇴한 茶文化를 다시 일으키고 특히 草衣禪師는 海南(해남)에 一枝庵 (일지암)을 중건하고 40년동안 茶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韓國茶文化를 中興(중흥)시켰다.
대체로 조선왕조가 신라와 고려시대에 비하여 茶文化가 쇠퇴한 원인은 조선초기 불교의 탄압과 寺院에 重稅 (중세)를 과하여 불교가 힘을 잃은점과 일반가정의 祭禮(제례)에서도 淸酒(청주)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일 상생활에 담배와 술같은 기호품의 성행과 韓國의 좋은 生水(생수)와 식탁에서 숭융을 많이 마시는 등 한 국인의 생활습관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고 또 조선후기 地方官吏(지방관리) 茶貢(다공)에 대한 지나 친 수탈도 茶文化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朝鮮時代 茶道精神

- 청허(淸虛). 사무사(思無邪). 청화(淸和). 중정(中正) - 


다음 조선조 시대의 다도정신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조선시대의 다도정신은 西山대사의 茶詩와 한국의 茶神이라고 일컬어지는 초의선사의 동다송, 다신전 및 그의 다시 등에서 엿볼 수 있겠다. 먼저 西山대사의 茶詩에서 그의 다도정신을 찾아 보기로 하겠다. 西山대사는 중종 15년 (1520년) 3월 26일 안주에서 태어 나셨다. 속성은 최씨요, 호는 淸虛 또는 休諍 자는 현응(玄應)이다. 묘향산 에 오래 계셨으므로 서산대사라 하였다. 낮에는 차 한잔하고 밤이 되면 잠 한숨자네 푸른산 흰 구름 더불어 無生死를 말함이여 이 시에 대해 「한국다문화학」에서는 인생의 사고 즉, 生. 老. 病. 死 따위를 초월한 서산대사의 인생 관이 표현된 작품으로 보고 있다. 낮에는 차 한잔 하고 밤에는 잠 한슴자네 에는 이러한 대사의 초월적 인생관이 담겨져 있고, 푸른 산 흰 구름 하는 구절은 진리의 침묵, 대자연의 淸淨心 淸虛한 法身 등을 엿볼 수 있으며 無生死를 말함이라는 無我의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있다. 스님 몇 명이 있어 내 암자 앞에 집 지었구나 새벽종에 함께 일어나고 저녁 북에 함께 잠든다. 산골물 달과 함께 길러 다 달이니 푸른 연기나고 염불과 참선일세 여기에서도 서산대사의 고고한 정신을 알 수 있는 바, 새벽종에 일어나고 저녁북에 함께 잠든다 라는 구절 은 佛의 소리, 空의 소리, 淸虛의 소리를 담고 있으며 산골물 달과 함께 길러 차 달이는 푸른 연기 하는 구절에서는 淸虛한 空思想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날마다 하는 일은 염불과 참선일세 하는 대목은 차 달이는 일이 곧 선의 경지에 이른 것 즉, 차-염불-참선의 茶禪一體, 茶禪不二의 그의 淸虛한 반야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 산골물 길어 낙엽으로 태워 차 끓여 한잔 마시네 밤에는 바위밑에 자니 얼은 나는 용을 탄 듯하네 내일 아침 천하를 굽어 살피면 온 고을이 벌집처럼 펼쳐 있으리 여기에서 맑고 맑은 그 산골물을 손수 길어와 또 청정무구한 낙엽으로 스스로 태우는 그 한 점 꺼리김 없는 淸虛한 마음자리, 거기에 밤으로 또 대자연의 품속에 안겨 바위 밑에 자는 無所得의 정신세계 그 기슭에서 그는 淸虛의 극치인 해탈의 세계를 걷는 것 같은 마음자리, 즉 얼을 나르는 용을 탄 것 같은 그 마음자리, 이는 서산대사만이 가질 수 있는 淸虛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茶詩라 하겠다. 그리하여 이 튿날 대사는 천하를 굽어 살피면 어찌 온 마을이 벌집처럼 펼쳐 보이지 않겠는가. 서산대사의 다시 한편을 음미해 보자. 만국의 도성은 개미거머리 같고 고금의 호걸들 하루살이 벌레와 같네 창가의 밝은 달 청허에 벼개하니 차솥 물 끓는 소리 가지런 하지 않음이 풍류로워 제 1, 2행의 '만국의 도성은 개미거머리과 같고 고금의 호걸들 하루살이 벌레와 같네' 라는 구절은 마치 白居易의 詩 「와우각상쟁하사(蝸牛角上爭何事)」즉, 달팽이 뿔위의 싸움 같은 하잖은 일하고 비웃듯 만국의 도성, 고금의 호걸들 다 하잘 것 없는 미의 세계의 것임을 질타하고 이들이 거대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도인의 눈에서 볼 때는 마치 개미거머리 같고 천하를 호령하는 호걸들이라 뽐내지만 하루살이 벌레에 불과한 것으로 깨친 자의 눈에는 보인다는 뜻으로 이 구절에서 전미개오(轉迷開悟)의 높은 淸淨心 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 창가 밝은 달 청허에 벼개하니' 에서는 대사의 淸修한 모습과 해탈의 경지에 이른 淸虛한 마음 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다음 '차솥 물 끓이는 소리 그대로 풍류로다' 라고 이어지는 구절은 대사 의 禪定의 경지에 이름을 알게해 준다.
이상과 같은 서산대사의 시를 종합해 볼 때 조선조 시대를 대표하는 禪茶詩人으로서 西山대사의 茶詩는 그의 다도정신을 잘 나타내는 동시에 조선조 시대의 다도정신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를 결론적 으로 말하면 서산대사의 다도정신은 바로 淸虛, 茶禪一如 정신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한국의 茶神이라 일컬어지는 草衣禪師의 다신전(茶神傳), 동다송(東茶頌)과 그의 茶詩에 나타난 茶道精神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먼저 草衣禪師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조선조 시대에 한국 차의 중흥을 이룬 茶聖이라고까지 칭할 수 있는 분이다. 그의 속성은 장의순(張意恂)이며 나주 삼향 사람으로 자는 중부(仲孚)요, 법호는 초의이다. 15세때 전라남도 남평 운흥사에 입산하여 벽봉민생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19세때에는 운흥사의 본산인 海南 大興寺에서 고승 완호에게 법을 받는 한편 완호선사와 친분이 두터웠던 丁茶山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茶山草堂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그후 금강산 비로봉을 비롯 경사의 여러 산을 두루 답습하는 한편 김추사 (金秋史), 신관호(申觀浩), 김명희(金命喜) 등의 명사들과도 사귀어 견문을 넓히는 한편 불교와 선의 오묘(奧妙)함과 다도의 현모함을 깨우쳤다. 특히 두륜산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지관을 닦기 40년 다생 활에 높은 경지를 이룩했다. 그리하여 초의선사는 순조 28년에는 지리산 화개동의 칠불암(七佛庵)에서 유 명한 茶神傳을 저술하는 한편 일지암에서는 유명한 「東茶頌」을 비롯하여 「草衣集」이권과 「一枝庵 遺稿」등을 저술했다. 먼저 초의선사의 「東茶頌」을 중심으로 한 그의 다도정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선사의 저서 동다송 29송에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비록 茶의 水體와 茶의 神氣가 온전타 하여도 오히려 중정을 잃을까 두렵네 중정을 잃지 않는다면 건전함과 신령스러움이 잘 어울이리라

여기에서 선사는 차의 정신으로서 「中正」을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동다송」에 있어 茶의 포법(泡法)에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泡法은 中正을 얻어야 한다. 體와 神이 서로 고르고 健과 靈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을 일컬어 茶道를 다함이라 즉, 茶道에 이르렀다 함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초의선사는 다도정신의 中和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초의선사의 다도정신은 선사의 茶詩 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초의 선사가 완당(玩堂) 金正喜에게 보낸 茶詩 중에 다음 구절은 선사의 茶精 神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가을 하늘은 맑고 달빛 같아 청화(靑和)로 그 맑음 비할 수 있으랴 잘 생기고 못 생김은 감히 뉘가 말하며 진. 가 또한 다 한가지 초월함이여 위의 詩에서 다도정신의 淸和, 그리고 진. 가마저 초월하는 眞空의 세계의 높은 경지를 알 수 있다. 끝으로 초의선사의 茶詩 한구절만 더 살펴 보고 선사의 다도정신을 음미해 보자. 옛성현들이 차를 좋아함은 차는 군자와 같아 그 됨됨이가 사기가 없으매라. 사람들이 차를 먹게 된 것은 멀리 설영에서 이슬맺힌 茶눈을 따옴으로 하여 비롯되었다. 위시에서 草衣禪師는 茶의 性을 사악함이 없고 眞性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草衣禪師의 茶道觀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사무사(思無邪)라 하겠다. 思無邪란 논어 위정편(爲政篇) 第三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서 그 뜻의 깊은 보배로움을 능히 이해할 수 있다. 「詩經 300여권의 詩를 한마디로 표현하다면 생각에 있어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子曰 詩三百一言以 之曰 思無邪)」이 한구절만 보더라도 공자사상에 있어서 사무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사무사는 바로 공자사상에 있어 仁의 근원이 되는 사상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茶道에 있어서 和靜의 근원이 되는 사상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草衣禪師의 저서인 「동다송(東茶頌)」 및 그의 茶詩 등을 통해 나타난 선사의 茶精神을 종 합해 볼 때 「중정(中正)」「중화(中和)」「사무사(思無邪)」로 집약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韓國 茶道 精神을 종합. 분석할 때 화정(和靜), 청허(淸虛), 중정(中正), 중화(中和)라 하겠다.
조선조 후기에 중요한 茶人으로서 茶山 丁若鏞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겠다. 다산선생님은 <목민심서 >를 비롯한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기신 민족의 큰 스승이시다. 강진의 초암에서 18년간의 긴긴 유배생활을 하시면서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참으로 선비답게 의연하고 꿋꿋하게 사신 큰 인물이셨다.
그 분의 외롭고 힘든 유배생활에서 귀한 벗이 되어 주었던 것은 茶였고, 또한 茶山선생님은 차나무를 무척 사랑하시어 스스로 호를 다산(茶山)이라 지어셨다.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귀양 갔던 그는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심한 고문 끝에 사형에 처해질 위급한 상황에서 황일환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구해져 강진으 로 유배되었다.
1805년 정순대비의 승하로 다산의 활동에 약간의 변화가 있어 늘 만나고 싶다고 전갈을 보낸 백련사(白蓮社) 의 혜장(惠藏)을 만나러 갔다. 한나절을 보낸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고 있었다. 다산선생이 돌아 간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혜장이 뒤쫓아 와서 그 밤을 지새우며 학문을 논하게 되었고 이후 혜장이 40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6년동안 교유하였다. 혜장은 다산선생이 그렇게 좋아하는 차를 함께 마시고 정성껏 만든 차를 때에 따라 보내 주었다. 어느 해 겨울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아암 혜장(惠藏)에게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을축(1805) 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


나그네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마십니다. 글중의 묘함은 육우의 <다경삼편 (茶經三篇)>이요, 병든 몸은 누에인양 노동(盧仝)의 칠완(七椀)차를 들이키오. 비록 정력은 쇠퇴했으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 이찬황의 차 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아침 햇살에 찻빛의 일어남은 맑은 하늘에 흰 구름이 일어남 같고, 낮잠에서 일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시내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하오. 차를 갈 때 일어나는 가루는 잔 구슬인지 백설인지 등잔불 아래서는 가리기 아득한데 자줏빛 어린 차순의 향기만 그윽하오. 활황와 신천은 산신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자기 홍옥의 차완은 노공에게 양보하고 돌솥의 푸른 연기의 담소함은 한비에게 가까웁네. 물 끓는 모습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선비의 취미만을 부질없이 즐기고 용단. 봉단은 이미 바닥이 났소. 이에 채신의 병이 있어 애오라지 걸명(乞茗)의 정을 비는 바이오. 듣건데 고해를 건너는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을 뭉친 차를 몰래 보내 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고려하사 베푸는 것을 잊지 마소서.
위의 걸명소에는 차를 좋아하는 다산선생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평소 차를 즐겨 마시고 또한 차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하셔서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칠완, 그리고 차 끓이는 방법, 차의 빛깔과 향기, 물 끓는 모습, 차를 가는 방법 등 차일에 관해서 소상히 알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좋은 다완, 용단. 봉단 같은 고급 차도 알고 계시는 등 차에 관해서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천병식의 『韓國茶詩作家論』에서는 다산 자신도 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 게도 제다 방법을 가르쳤다고 논의하고 있다. 다산선생이 강진을 떠날 때 그에게 글을 배운 많은 제자들 이 중심이 된 「茶信契」를 만들도록 하여 그의 제자 24인이 다산이 떠난 뒤에도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키도록 다음과 같은 절목을 만들었다. 즉, 계원 명단, 자산 내용과 관리인, 봄가을의 시사 와 경비, 동암의 이엉잇기, 차 따는 부역, 차를 만들어 유산에게 보내는 일 등이다.
다산선생은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짓고 정원에 큰 돌을 옮겨다 놓고 물을 끌어 들어 폭포를 만들고 그 바위에다 '정석(丁石)'이라 글씨를 쓰고 이를 새겨 두었다. 처소를 귤동으로 옮긴 다산선생은 마을사람 으로부터 차 한 봉지를 얻고서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아곡의 햇차가 처음으로 피어날 제 마을 사람으로부터 차 한포를 얻었네 체천의 물이 얼마나 맑은지 한가로이 은병에 넣어 그 맛을 시험해 보리 낯선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에서도 많은 제자를 길렀으며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한 다산을 떠 받쳐 준 힘은 차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선생은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니 그의 많은 시편 들에는 愛民의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김명배는 조선의 다정신을 自得의 정신, 비우사상, 茶禪三昧 등으로 보고 있다. 아래의 茶山선생의 茶詩 는 이런 自得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산골물 차가운 소리 천 떨기 대나무에 이르고 봄의 정취는 뜨락의 한 그루 매화에 있네 지극한 즐거움 이 속에 있어도 달랠곳 없어 맑게 갠 밤에 여러번 일어나 어정거리네 위 시에는 언제 귀양에서 풀려날는지 기약도 없는 극한상황을 逍遙와 自得의 드높은 정신력으로 극복한 다산선생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정신적인 소요란 현실을 觀照하고 긍정하는 達觀의 경지이고, 自得이란 주어진 여건을 선택된 것으로 여기고 긍정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정영선은 『다도철학』에서 이러한 자득의 정신을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정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가난 한 생활 속에서도 차를 끓여 마시며 근심을 덜고 빈천을 분수로 여기는 마음가짐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선비 다인들은 차와 더불어 검박하게 살므로써 자연과 쉽게 동화되어 인간이 자연임을 체득하는 정신적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즐겁기만 한데 무엇을 근심하리오 가난과 천함이 분수에 맞도다. 위 시는 중인 계급의 학자이며 시인인 장혼이 그의 이웃의 작은 오두막집에서의 「옥경산방다회」에 참석 하여 읊은 것이다. 이처럼 선비들은 스스로 가난함과 천함을 자신의 분수로 알고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장혼은 <청렴한 선비의 갖춰야 할 물건 80개>를 들었는데, 그중에는 중요한 책이름, 기를 나무 등을 포함 하여 「이름난 차」「차솥」「바구니 다함」등이 있었다. 또 <선비가할 일 34가지>에는 글쓰기와 거울보기, 정원을 가꾸는 여러 일들과 더불어, 「차 달이기」「샘물 긷기」를 들어 선비의 검소한 생활에도 다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는가를 알 수 있다. 김시습의 다음 시는 차가 어떠한 부나 명리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 음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솥 속의 감미로운 차가 황금을 천하게 하고 소나무 아래 띠집이 벼슬아치 붉은 관복의 술띠를 가치없게 하네 옛날 서울의 신설동과 보문동 사이에 있었던 숭신방의 동대문 외계에는 우산각리가 있었다. 이 우산각의 주인공은 태조대왕부터 세종대왕까지 4대 임금을 정승으로 섬긴 유관(柳寬)인데, 우산각이란 장마철에 지붕에서 빗물이 새어 방안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일화가 있는 집을 말하는 것이다. 우산각에서 그의 외종손인 판서 이희검(李希儉)이 청빈의 전통을 이어 받고 살았다. 그의 청빈한 생활신 조란 「옷은 몸을 가리기만 하면 족하고 밥은 창자를 채우기만 하면 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빈의 집인 우산각이 임진왜란 때 불이 타서 주춧돌만 남게 되었는데 이희검의 아들로서 실학의 선구자인 판서 이수광(李?光)이 조촐하게 재건하였는데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뜻으로 비우당(?雨堂)이라는 집이름을 붙 였다. 이수광은 비우당에서 「차마시기」(飮茶)의 육언시(六言詩)를 읊기도 하고 채다론(採茶論)을 논술 하고, 사헌부의 찻때를 적어 남기기도 하였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불의 상태에 거문고도 피리도 아닌 솔바람소리 노동이 잃은 주발의 마시기를 마치니 표연한 신상은 매우 편안하여라.

 

 

 

 

효종대왕의 장인인 부원군(府院君) 장유(張維)가 적은 이수광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향을 사르지 않고, 초를 밝히지 않으며, 성악(聲樂)을 듣지 않고, 무색옷을 입지 않으며, 가재에 칠이나 조각을 하지 않고, 베옷으로 소식(素食)하는 생활」이라는 철학이 적혀 있다.
결국 조선왕조의 청빈한 관리에 대한 정신적 메카가 된 것이 비우당이라 하겠다. 이러한 비우사상에 의하여 많은 선비 다인들이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특히 淸白吏들이 차를 몹시 즐긴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청백리는 일반적으로 청렴한 관리를 말하나, 옛날에는 의정부 등의 2품이상 당상관과 사 헌부와 사간원의 높은 관리들이 추천하여 선정하기도 하였다. 높은 직책을 맡은 그들은 부를 탐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차를 끓여 마시는 생활속에서 허욕을 버리고 즐거운 마음을 지녔다.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 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 -- (중 략) --
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 한가롭게 게눈차를 끓인다네 위 시는 우리나라 다인들 중에서 다사의 달인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의 다시이다. 여기에는 지붕이 뚫린 초가집에서 살며 한가로이 글씨를 쓰며 차를 끓여 마신 청빈한 서거정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서거정은 궁핍함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조용하게 책을 읽고 차를 달이는 유유자적한 달관된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정신이 과거 선비들의 맑은 청백리 정신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다선삼매의 다도정신에 대해 살펴 보면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초의선사의 다시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초의선사가 읊은 것 중에서 「산천도인이 차를 사례함을 받들어 화답하여 짓다.」라 하는 다게 (茶偈)에서 선사의 다경을 찾아볼 수 있겠다.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기 때문이라네... 알가의 참된 근본은 묘한 근원을 다하고 묘한 근원에 집착함이 없으면 바라밀이라네

- 다음 카페 < 글사랑 차향기 > 청신사 님의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