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초기 박. 석. 김 3姓의 왕위교체와 흉노계 왕조

2015. 5. 3. 01:22우리 역사 바로알기

 

 

       신라초기 박. 석. 김 3姓의 왕위교체와 흉노계 왕조| 신라,가야토론방

귀거래사 | 조회 431 |추천 0 | 2011.05.14. 12:03 http://cafe.daum.net/alhc/51qG/2722 

 

신라초기 박. 석. 김 3姓의 왕위교체와 흉노계 왕조

 

    일본학자 末松保和(스에마쯔야스카즈)는『신라사의 제문제』에서 신라의 초기 왕 世系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코멘트 하였다.

 

   신라의 역사를 김부식과 일연은 각각 上代. 中代. 下代 및 上古. 中古. 下古로 나누었다. 그런데 이 두 시대구분은 서로 상이하지만 28대 진덕여왕까지와 29대 태종무열왕 이후를 구분한다는 점에서만은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무열왕 대부터 신라가 왕권확립 또는 통일완성의 시기로 접어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때에 왕의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은 신라 전체 56왕을 산술적으로 2分한 것과 같은 숫자이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上古는 22대 지증왕까지로, 박씨 7명, 석씨 8명, 김씨 7명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이것은 上古 전체 22왕을 3등분한 것과 같다(아래의 표 참조). 또 王系가 바뀔 때에는 그 방식이 前 王系와의 혼인에 의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며, 1代 뒤에 일단 前 王系로 돌아가 數 代 지난 후 다시 복귀하여 王系를 이어간다고 하는 동일 패턴으로 되어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신라 초기의 王 世系가 조작된 것이며, 신라멸망 후 고려 초에 완성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신라 초기 박. 석. 김 3姓의 왕통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능성이 있다.

 

1) 역사적 사실

2) 타 진한제국 병합의 흔적. 김씨 앞에 석씨, 석씨 앞에 박씨를 놓은 것은 신라가 병합한 나라들 가운데 대표적인 두 곳의 王系를 加上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신라 후기(원성왕 이후)의 역사적 사실의 투영

4) 신라왕실을 미화하기 위하여 중국 夏. 殷. 周 3代의 계승전설을 차용했을 가능성

 

참고로 夏. 殷. 周 3代의 계승과 신라 박. 석. 김의 왕위계승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숫자는 왕의 대수를 나타내며, 괄호 안은 왕이 아닌 조상의 대수를 나타냄).

 

夏 : 1 ————————17

殷 : (1) --------  (13) 1 —————— 30

周 : (1) ---------------------- (14) 1—————————— 37

 

박 : 1-2-3----5-6-7-8

석 :           4----------9-10-11-12----14-15-16

김 :                  (1) ----------- (6) 13-----------17-18-19-20-21-22

 

 

   이 외에 다른 가능성도 있겠지만 위의 설 가운데에서는 두 번째의 설을 나는 선호해왔다. 특히 진흥왕순수비에 나오는 3부 중에서 탁부는 사로국(경주), 사탁부는 사벌국(상주), 본피부는 벽산가야(성주)를 가리킨다는 설명에 매력을 느꼈다. 신라가 주변의 진한제국을 병합함에 있어 무력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고 혼인을 주요 수단으로 썼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3姓의 교체가 혼인으로 평화롭게 이루어진 것으로 기술되어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 夏. 殷. 周의 왕위계승을 차용한 것이라는 설에 더 마음이 끌린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신라왕위의 3姓 교체는 夏. 殷. 周의 왕조교체와 흡사하다. 나는 지난번 <역사문>에 올린 글에서 신라왕족 김씨의 흉노 出自를 주장했다. 그런데 신라왕실의 초기계보가 夏. 殷. 周의 왕조교체를 모방한 것이라면 이것은 신라왕실 김씨의 出自가 흉노라는 것의 유력한 방증이 된다. 왜냐하면 <사기> <한서> 등에 흉노의 시조가 夏后氏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문무왕비문에는 신라왕족의 조상으로 火官之后(순임금)가 나온다.

 

   그렇다면 신라 초기의 王 世系는 순전히 조작이고 허구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술되어 있는 미추왕의 조상에 대한 계보는 문무왕 비문에 의하여 대체로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문무왕비문에는 성한왕(세한, 열한)이 왕실 김씨의 시조로 되어있다. 사기와 유사에는 성한왕의 先代 김알지가 시조로 되어있지만 그는 실존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김알지는 석씨계의 첫 왕인 석탈해에 의하여 양육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왕실 김씨의 시조를 신비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설화이겠지만 동시에 알지가 김씨왕계를 前 王系와 연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인물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석씨왕계는 실제로 있었던 것일까? 탈해는 외래자이므로 그가 왕이 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석씨계의 왕은 8명이 있었지만 석씨는 내물왕 이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나는 석씨왕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석씨왕계라는 것은 신라의 王系를 夏. 殷. 周의 故事에 비유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실제로는 경주 토박이호족(박씨)과 흉노계 호족(김씨)사이의 왕위교체만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설화가 만들어 진 것은 흉노 出自인 신라왕족이 자신들의 시조가 중국의 三皇五帝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신라 초기의 역사는 문자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전승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上古까지의 삼국사기의 기술내용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 초기의 王 世系는 최종적으로는 고려 초에 확정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底本은 신라의 下代(선덕왕 이후)에 신라왕실과 경주귀족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본다. 즉 박혁거세 王系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문자기록은 없었고 전승만 있었는데 下代의 경주귀족에 의하여 그 계보가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신라의 왕 世系가 김씨 一系로 되어있지 않고 박혁거세 王系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로, 그 시기에 朴氏가 대두하여 왕과 왕비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기원에 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기원전부터 경주에서는 몇몇 마을의 촌장(호족)들이 모여 제사와 정치를 주관하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BC57년이라고 특정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 경주에는 진한 6부의 촌장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한 그들이 제사와 정치를 주관했다. AD57년 경, 중국 山東반도로부터 흉노의 한 무리가 海路로 아진포에 도착하였다. 경주의 호족들은 이들이 선진문물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고 경주 거주를 허용했다. 인접국과의 전쟁 시 그들을 용병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1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그들은 선진문물 덕분에 또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여 경주사회에서 신흥호족으로 부상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대표가 촌장회의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이윽고 3세기 후반에는 경주 유력호족의 데릴사위가 되어 신라의 왕이 되었다. 이것이 김씨왕조의 첫 왕인 미추왕이다. 미추왕의 원 뜻은 ‘밑 왕’(밑=미추)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첫 왕이라는 뜻이다. 신라의 왕위는 17대 내물왕부터 김씨가 세습하지만 내물왕은 미추왕의 조카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미추왕 대부터 세습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신라의 역사는 BC 57년 박혁거세가 경주에 사로국을 건국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신라는 王系가 박씨에서 석씨로, 석씨에서 김씨로 바뀌었다. 이것이 삼국사기의 설명이다. 이 삼한의 일국으로서의 신라는 12대 첨해왕 이후 王系가 김씨계로 바뀜으로써 끝나고 13대 미추왕 代부터 왕위세습제의 고대국가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라는 처음부터 김씨왕조였다고 본다. 즉 신라는 김씨왕계의 첫 왕인 미추왕(262~283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3세기 후반 후한왕조의 국내가 어지러워짐에 따라 낙랑대방군의 지배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이로 인하여 한반도에서 새로운 질서가 태동한 결과라고 본다.

 

   그럼 경주에 치우쳐 있던 사로국이 진한 12국 가운데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흉노계의 도래라고 생각한다. 혹시 그것이 흉노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외부의 충격이 있었다고 본다. 외부로부터의 충격 없이 고대의 농경사회가 고대국가로 변모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제는 부여족의 南下로, 왜국은 韓族의 渡海南下로 성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ㅡ 다음 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 귀거래사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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