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대륙 경영

2015. 5. 2. 17:45우리 역사 바로알기

 

 

 

 

 

     

백제의 대륙 경영

 

허정균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두통거리가 되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
>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백제사

 

   고려 시대 문장가였던 이규보(1168~1241)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계축(癸丑)년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서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읽어보니, 그 신기하고도 기적적인 사실이 세상에 전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역시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이는 귀신이나 환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번 다시 읽고, 그 근원을 점점 파면서 들어가 보니 이는 환상이 아니라 거룩한 일이요, 귀신의 짓이 아니라 신(神)의 사업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물며 국사는 곧은 붓으로 쓴 것이니 어찌 허망된 사적을 썼으리요. 김공(金公) 부식(富軾)이 <삼국사기>를 다시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동명왕의 영웅적인 사적이 거의 빠져버렸다. 이는 국사란 세상을 바로잡는 책인 까닭에 괴이한 일을 후세에 보이게 함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를 빼어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이 글로 보아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를 쓰기 이전에 이미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삼국사>에서 '구(舊)'는 <삼국사기>가 편찬되어 나온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삼국에 대한 역사책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고려 중기인 인종 23년(1145)에 와서야 삼국의 역사가 재정리한 까닭은 무엇일까.
  11세기 초 국내외 정세는 거란을 멸망시킨 만주의 금나라(1114∼1234년)가 송의 수도 변경(邊京=북송의 서울. 현재의 하남성 개봉)을 위협하면서 고려에 대하여 사대(事大)를 요구해오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인 이자겸 일파를 물리치는 데 공이 있는 정지상(鄭知常) 등이 서경천도와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국으로서의 칭제건원(稱帝建元)으로 금(金)나라나 송(宋)나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을 펼 때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보아 무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편승한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개경파가 서경 천도를 주장한 정지상, 묘청 등의 서경파를 누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계승하자'는 서경파의 주장에 대한 대안으로 신라 계승론을 제기하였다.
  이후 김부식은 1145년(인종23년) 신라 위주로 쓴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의 편찬을 끝냈다.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국의 고기는 문장이 거칠고 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사적들이 누락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임금과 왕후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국가 사업의 평안과 위기, 백성의 안녕과 혼란에 관한 사실들이 후세에 교훈으로 전하여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재능와 학문과 견식을 겸비한 인재를 찾아 권위있는 역사서를 완성하여 자손만대에 전함으로써 우리의 역사가 해와 별 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진삼국사표/동문선>

 

  김부식은 우리 고기의 기록을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보고 모두 빼어버렸으며 유교적 이념에 따라 역사를 새로 재편했다. 그 밖에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백두산을 영산(靈山)으로 받들고 있던 금나라, 그리고 송나라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한반도에 수도(首都)를 둔 신라, 백제, 고구려(고주몽 이후)의 역사만 적었다. 이같은 이유로 만주를 주 근거지로 한 환국(桓國), 배달국(培達國), 왕검조선(王儉朝鮮), 고구려(高九黎:일명 북부여)나 중국 동해안에서 활동한 백제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제외되었거나 왜곡된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사서에 대륙에서 우리 민족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잦은 왕조 교체로 많은 역사서를 낳았다. 사마천의 <사기>로 시작하는 이른바 정사(正史)라고 부르는 것만도 25개나 된다. 대체로 한 왕조가 끝난 다음에 씌어진 이십오사에는 주변국들의 이야기를 반드시 싣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상식처럼 통한다.

 

  첫째,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가리고(爲中國諱恥 위중국휘치),
  둘째, 중국의 긍지는 높이되 동이의 긍지는 낮추며(矜華而陋夷狄 긍화이누이적)
  셋째, 중국의 역사는 상세히 하고 이민족의 역사는 약술한다.(內詳而略外 내상이략외)

 

   그리하여 사신을 보낸 것은 조공을 바친 것으로 기록되고 침략을 당하여 땅을 빼앗긴 것은 봉작(封爵)을 준 것으로 왜곡된다. 진(晉)나라 때 진수(陳守)가 지은 <삼국지>에서 '백제(百濟)'가 아예 나오지 않듯이 아예 싣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를 감안하여 중국의 사서들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고구려 역사 뿐만 아니라 백제의 역사도 알 수 있다.


 

  중국에 있는 백제의 영토

 

   중국의 동해안의 평야지대는 본래 유목민족의 후예이자 기마민족인 동이족의 살던 곳이었다. 중국은 농경민족이면서도 진, 한, 수, 당, 송나라 때까지도 도읍지는 태행산맥을 넘지 못하고 오늘의 협서성이나 산서성, 하남성 등지에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 때 쌓은 만리장성의 출발점이 오늘의 톈진 북쪽에 있는 갈석산인 것으로 보아 이곳이 막히면서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해안에 분포해 있던 동이족은 차츰 고립되어 한족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들이 노·돛·키를 장착한 범선을 타고 대양항해를 하여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의 일로 그 중심지는 중국 동해안 남쪽의 주산군도였다고 김성호(金聖昊)는 그의 저서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에서 주장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에 나타나는 회계동제인(會稽東 人), 회계동현인(會稽東縣人), 회계동야인((會稽東冶人) 등이 바로 주산군도를 중심으로 중국 절강성 일대에 진출한 백제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며, 3세기 중엽에 이들 백제인은 주산군도와 한반도 및 규슈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역을 무대로 하는 고대교역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한 증거로 이 일대에서 신나라(新:AD8~23) 때 주조되었던 왕망전이 출토되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백제(百濟)'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사서에 백제인이 등장하는 것은 진(晉:265~419)나라 때부터이다. 위진남북조시대 북조의 역사를 담은 <주서(周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송·제·량 때 강좌(江左)를 점거하였으며 북위가 중원을 차지한 후에는 양측에 모두 사신을 보내어 번을 칭하면서 벼슬을 받았다.(2)
自晉宋齊梁 據江左 後魏宅中原 竝遣使稱蕃 兼受封拜 <주서(周書) 백제전>

 

 여기서 강좌(江左)는 오(吳)·월(越)의 땅을 이른다. 이를 뒷받침하듯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영토를 "서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른다(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고 하였다. 또한 우리의 역사서인 <한단고기>에는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의 땅을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內地)에 준하게 하였다.
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索籍民戶 分封王爵屯戍險塞 軍征賦調悉準內地<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이는 단순한 교류가 아닌 식민지 개척임을 말해준다. 백제는 이들 중국에 있는 식민지를 '담로(담魯)'로 편성해 왕의 자제종친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3)

 


  백제의 요서 경략

 

  중국의 25사 중의 하나인 <송서(宋書)> 등에 실린 백제의 요서(遼西)경략에 관한 기사가 처음으로 논란이 된 것은 19세기 초 남인 계열의 실학자인 한진서(韓鎭書:숙부인 한치윤과 함께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지음)에 의해서였다. 그는 그의 저서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 권8 지리고에서 백제의 요서경략에 관한 기사에 대해 말하기를,

 

 "삼가 고찰컨대 바다 건너 수만리의 요서지역에 몇 개 군을 점거했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로서 <송서(宋書)>의 명백한 착오이며 <양서(梁書)>와 <통전(通典)>은 <송서>를 답습한 것이어서 증거로 삼기에 부족하다."

 

  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자국에 불리한 기사를 반복했을 리 만무하다. 김부식 이래 반도사관이 굳어져 있음을 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요서지방은 오늘의 요동반도 서쪽이 아니다. 현재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태행산맥의 서쪽이 요서지역이고 동쪽이 요동지역이다. 요동반도는 9세기에 요(遼)나라가 만주에서 나타나면서 생긴 이름이다. 또한 바다를 건너간 것도 아니다. 태행산맥 동쪽에 있던 백제 세력이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세를 확장한 것이다. 다음 <송서>의 기록은 백제의 요서경략과 함께 태행산맥의 동쪽, 즉 오늘의 하북성 일대가 백제의 영토임을 알려주고 있다.

 

 백제는 본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는데 그후 고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였으며 백제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百濟國 本與高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后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晉平縣  <송서 권97 열전 '이만편(夷蠻編)>

 

  백제와 고구려가 요동지방, 즉 오늘의 하북성 남부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요서지역으로 진출할 무렵 중국의 북부는 선비, 흉노 등 5개의 북방 호족이 무려 16개의 나라를 세웠었던 혼란의 시대였다. 조조, 손권, 유비의 위, 오, 촉 삼국을 통합한 사마씨의 서진(西晉:265~316)은 불과 50년 만에 중국 남쪽으로 쫓겨가 동진(317~420)으로 재출발하였으며, 이후 중국 북부를 북위가 이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0년의 시기를 오호16국시대(316~420)라 하며 중국 남부에서 동진을 이어 송, 제, 양, 진으로 이어간 시대와 함께 위진남북조시대라 부른다.
  백제의 요서진출은 근초고왕(재위:346~375), 근구수왕(375~384) 대에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이루어졌다. <진서(晉書)> 모용황전에 인용된 봉유(封裕)의 상소문에 "고구려, 백제, 우문, 단부의 무리들은 모두 병세지도(兵勢之徒)"라 한 부분이 요서지역에서 백제가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다.
  선비족의 전연(前燕) 모용황은 요동을 장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342), 요서의 우문씨를 토벌하여(344) 오늘의 북경에 도읍(350)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그 중심지역인 요동, 요서지역에서 백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양서>에서도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장악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점거하여 진평군(4) 사이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晉世句麗旣略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라고 적고 있다. 한편 당나라 때 <통전(通典)>의 기록에는 이 백제군의 위치를 "오늘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百濟晋時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5)之間)"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진(晉)의 수도는 중국 동해안으로부터 수 천리 떨어진 황하강 상류지역의 낙양(洛陽)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근구수가 근초고의 태자로서 군국대권을 대리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나아가 오늘 대동강 이남을 병탄하고는 이에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아 요서, 진평 2군을 설치하고 녹산(鹿山:오늘 하얼빈)까지 쳐들어가 부여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오늘 개원(開原)으로 천도함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 오늘 섬서성에서는 진왕 부견이 강성하매 근구수가 또 진(秦)과 싸우니, 오늘의 산동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분피(奔疲)케 했으며, 남으로 오늘의 강소, 절강 등지를 가진 진(晉)을 쳐서 또한 다소의 주군을 빼앗으므로 제서(諸書)의 기록이 대략 이같음이라"
 

  북위와의 전쟁

 

  5호16국이 혼란기를 수습한 나라는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탁발씨(拓跋氏)가 세운 북위(北魏:386∼534)였다. 북위는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한 다음 후연(後燕)을 격파, 하북(河北)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지금의 산서성 대동大同)에 정하고 5호16국(五胡十六國)의 혼란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한 강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시대로 북조는 위(魏)(6)를 비롯하여 동위(東魏, 534~550), 서위(西魏, 535~557), 북제(北齊, 550~577), 북주(北周, 557~581)의 다섯 왕조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고, 남조는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으로 이어지며 수(隋)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왕조의 교체가 있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백제 24대왕 동성왕(東城王:479~501) 제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 "동성왕(東城王)은 이름은 모대(牟大)(혹은 마모:摩牟)이며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라고 쓰고 있다.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에게 요서백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마침내 동성왕(東城王:479~502) 10년(488)에 북위가 쳐들어왔다. 그러나 백제는 이를 물리쳤다. <삼국사기>는 이를 짤막하게 적고 있다.

 

  10년(488)에 위(魏)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

 

  이 기사를 두고 그럴 리가 없다 하여 고구려를 백제로 잘못 기록했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지만 다음 <자치통감>의 다음 기사는 북위가 침공한 곳은 요서지역의 백제식민지였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북위가 병력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한편 <위서(魏書)>에는 이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태화 12년(488년) 소색(9)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부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 
太和十二年, 簫○將軍陳顯達等寇過, 甲寅詔豫州刺史元斤, 率衆禦之

 

“태화 13년(489년) 정월 소색이 외국인 부대를 보내어 변방을 침략했다.
회양태수 왕승준이 반격해 쫓아냈다.“
太和十三年春正月, 簫○遣衆寇邊. 淮陽太守王僧儁擊走之 -<위서> 고조기(高祖紀)

 

  동성왕이 즉위한 해에 회수이남 남중국에는 남제(南齊:479~502년)가 송을 무너뜨리고 들어섰는데 위에서 소색은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의 뒤를 이은 무제이다. 위 기사에서 중(衆)은 외국인 부대를 일컫는 말이다. 2년에 걸쳐 고구려군과 백제군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 기사로 보아 이 무렵에 고구려와 북위, 백제와 남제 간에 동맹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북위가 후연(7)을 누르고 북중국을 통일한 데에는 고구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북위의 잦은 침략으로 위기를 느낀 연왕 풍홍(馮弘)은 "만약 사태가 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하다가 후에 일어나기를 도모하겠다.(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圖後擧)" 하면서 몰래 사신을 보내 우리에게 맞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연왕 풍홍이 436년 북위의 공격으로 고구려로 망명해 와서 송(宋)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재기를 기도하자 고구려는 풍홍을 억류해두었다가 438년 풍홍을 죽이고 북위의 편을 들어준 바 있었다. 이로써 비로소 북위는 439년 오호16국의 혼란을 평정한 것이다.
  고구려로서도 한반도에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위해서 북위와 우호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있었다. 장수왕이 491년에 죽었을 때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다'(8) 한다.
  동성왕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제의 왕에게 국서를 보냈다. 이 국서의 내용이 <남제서>에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대가 표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보낸 건위장군광양태수겸장사 고달, 건위장군조선태수겸사마 양무, 건위장군겸삼군 회매 등 3인은 지행(志行)이 청량(淸亮)하고 충정이 두드러져 지난 번 일을 시작하는 데 있어 송조에서 한 바를 따라 이번에 일을 맡겼더니 보파(步派)의 험함을 무릅쓰고 그 효과를 보았으니 마땅히 벼슬을 올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고달은 용양장군대방태수에, 양무는 건위장군광릉태수에, 회매는 광무장군청하태수에 임명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승인하였다.(10)

 

  신을 칭하고 있지만 일제시대의 조선총독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다. 남제(AD479 ~ 502)는 동성왕(479~501) 재위 기간과 같은 24년 동안 형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은 왕조이다. 24년 동안 왕은 7번이나 바뀌었다.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제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겨우 나라의 생명을 유지하는 약소국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패전을 거듭한 북위는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청하였다. 남제가 이를 받아들여 한동안 화평관계가 성립되었다. 백제와 남제 사이에 균열이 생겼으리라 판단한 북위가 490년 다시 수십만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지구의 백제군을 공격해 왔다. 이 때의 상황이 <남제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이 490년(경오년庚午年)의 전쟁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 속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지난 경오년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쓰러진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꺾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去庚午年    (북위 지칭)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屍丹野. 由是?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490년 경오년전쟁에서 패한 북위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북경 부근의 평성(平城)에서 백제의 대륙 식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낙양으로 옮겼다. 낙양으로 수도를 옮겨 전열을 정비한 위는 다시 494년 12월 대군을 일으켜 백제와 남제를 공격하였다. 남제군은 영주(寧州)자사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위군은 개전 2달만에 북위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전장에 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결국 북위군은 효문제와 함께 총퇴각을 하였다. 이 때 백제군의 활약에 대해 "사주자사 소탄이 백제군과 함께 오랑캐를 격파하였다.(司州刺史蕭誕 與衆軍 擊虜 破之)" 라고 남제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도 동성왕 19년(497년)에 북위는 또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에도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물러났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른 위는 이로써 하북성 이남을 백제-남제에 내주고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대륙 동해안의 평야지대를 장악한 동성왕은 장수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의 문자명왕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엿으며 이 때가 백제의 최성기이자 우리 민족의 최고 전성기였다.
  <삼국사기>에 "동성왕 22년(500) 봄에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장(丈)이었으며,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 임류각은 동성왕의 묘와 함께 산동성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구당서>에 "그 왕은 동서 두 성에 거처한다.(其王所居 東西兩城)" 라는 기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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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996년 도서출판 '맑은소리' 간행
(주2) 위(魏)는 모용씨가 세운 북위를 말하며 이 나라를 침략하여 땅을 빼앗은 것을 중국의 사서에는 이처럼 기록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표현은 계속 나온다. 독자들이 알아서 해석하기를 바란다.)
(주3)그 나라는 22담로가 있는데 이를 모두 자제종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其國有二十二담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梁書>
(주4)진평2군:오늘의 산서성 남부 高平과 晉城
(주5)유성:하남성 황하 남쪽, 북평:북경 남서쪽
(주6)북위:삼국시대의 위(魏)와 구별하기 위해 北魏라 부름)
(주7)후연(後燕):전연 북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자 모용 운(慕容雲)이 잔당을 모아 즉위하였으나 409년 한인(漢人) 풍발(馮跋)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주8)<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9)남제와 대립하던 북위에서 남제의 세조(世祖)를 낮추어 부른 말
(주10)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淸亮 忠款○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步波險 尋其至效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里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效○著 勤勞公務 今假行龍 將軍 帶方太守 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 邁執志周密 屢致勤效 今假行廣武將軍靑河太守" 詔可

 

ethnos44 | 2009.11.01 18:27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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