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차 문화의 기원>
17세기 - 티로드를 타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박에 의해 처음 영국이 차를 접하게 됨
18세기 초 - 귀부인(상류층)들이 티 타임을 갖기 시작 (당시에는 사치품으로 인식)
<영국 차 산업 촉진 배경 ①산업혁명>
18세기 말 산업혁명에 의해 형성된 중간 계층의 문화와 함께 홍차문화가 발달 (일상품으로 전환)
(이는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탄생한 홍차 문화라는 점에서 동양의 차 문화와 차이가 있음)
중간계층의 형성, 급속한 성장,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은 차의 수요를 더욱 빨리 증가
(중간계층은 상류층에서 형성된 차 문화를 유지하고 확산시키는데 일조)
<영국 차 산업 촉진 배경 ②제국주의>
수입으로만 의존해야 하는 차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으므로 차를 재배 할 수 있는 식민지들을 소유하려는 경향이 강해졌고, 홍차 문화는 홍차 제국주의로 전개됨
cf) 홍차 제국주의 : 차 시장을 점령하기 위해 중국과는 아편전쟁을, 식민지인 인도와 실론섬에는 차나무를 재배하여 차 시장의 우위를 영국이 가져가게 되는 배경
(이 과정에서도 계속 수요가 급증하여 차의 가격이 상승하게 되었고, 자구책으로 차의 재배와 생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노력의 일환으로 아쌈 지방의 차나무를 영국에 전하게 되는데, 이 때 아쌈 차나무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실론에 옮겨지면서 실론차가 생기게 됨.)
<홍차의 발전 배경>
영국은 산업혁명 이전부터 음주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술은 열량을 낼 수 있고,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금주운동이 시작되면서 술 대신 차를 마시게 되었다.
또한 차는 음습하고 안개가 자주 끼는 영국의 날씨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따뜻하고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19세기 초엔 차가 사치품이 아닌 일상품으로 차가 실생활에 스며들어 갔으며, 티 클리퍼의 시대가 도래되어 티 레이스가 영국민 전체의 행사가 되기도 한다. (티 클리퍼란 차를 운반하는 배를 의미하고, 티 레이스란 햇차를 누가 먼저 가져오는지에 대해 회사 간 경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종류의 티 타임>
1. 티 브레이크(tea break) : 쉬는 시간 농장의 노동자들에게 차를 지급하자 작업능률이 향상 되는 것을 알게 되어, 하나의 티 타임으로 자리 잡게 됨.
2. 하이티(high tea) : 음다 습관의 하나로, 낮은 티 테이블이 아닌 식사용의 높은 탁자를 사용한 데서 유래하고, 고된 노동을 마친 노동자들이 상당한 양의 음식과 커다란 다관에 우린 뜨거운 차와 함께 먹었다고 한다. (하위계층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계층으로 발전)
3.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 : 마리아 러셀이 빅토리아 여왕을 불러 같이 차와 디저트를 먹으며 사교의 시간을 갖은 것에서 유래되며, 연회적인 식사를 좋아하는 많은 중상류층의 가정으로 확대되고, 여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에서 세련된 화제와 예의바름을 추구하는 사교의 장이자 영국의 홍차문화를 상징하는 티타임으로 자리 잡게 된다.
cf) 이러한 티 타임의 발전 또한 홍차의 발전 배경과 상호작용 했다고 볼 수 있겠다.
cf) ‘1. 인도의 차 산업’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영제국 홍차 탄생과정’과 ‘다즐링의 기원’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다.
<1. 인도의 차 산업>
cf) 큰 흐름은 다음과 같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차 수요 급증 -> 차 가격 상승 -> 영국 영토 안에서 차를 생산하고자 하는 열망 ->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식민지 인도에서의 홍차의 개발, 생산과 그 수입안” 필요성 도래
-> 인도에서의 차 사업은 개인에게는 돈벌이, 정부에게는 대영제국에 수입을 가져다주는 세입원이 됨.
“영제국 홍차(The Empire Tea) 탄생”
앞서 큰 흐름에서 본 것 처럼 차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될 수 있다는 보증이 없고, 영국내 차의 수요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차가 사치품이 아니라 서민식품의 하나로 자리 잡음으로써 영국의 손으로 차를 공급할 필요가 생김.
이로 인해 차위원회를 결성하고, 역사 깊은 중국종으로 인도에 재배하려 하나 계속 실패.
그러던 와중, 아쌈 지방에서 새로운 차나무를 발견하여 조사 및 연구를 시작한 ‘찰스 부르스’에 의해 아쌈 지방에서 차 재배가 가능해짐.
아쌈의 신품종은 찻잎의 크기가 컸으며, 열대기후에 잘 견딜 뿐만 아니라, 뛰어난 맛을 냄.
“다즐링의 기원”
아쌈의 차가 성공한 이 후에도 중국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함.
1841년 켐벨박사가 꾸마온의 중국종 차나무의 종자를 얻어 히말라야 구릉지대에 차 나무를 심음. 다즐링은 내한성 및 추운 날씨에 잘 견디어 부드럽고 섬세한 싹을 잘 생산해냈다.
켐벨박사의 후원아래 1856년 ‘쿠셩 앤 다르즐링 티 컴퍼니’가 설립되고 다즐링이 발전함
“차의 산지”
[아쌈, 데라둔, 꾸마온, 다즐링, 카차르와 실헤트, 캉그라, 하자리백, 치타공, 테라이, 닐기리, 두아스]
이 중, 아쌈은 맛이 깊고 부드러우며 수색도 붉은색을 띠어 홍차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1년 내내 찻잎을 딸 수 있으나 5월 중순에서 6월말에 따는 두물차(Second Flush)가 새싹을 많이 포함한 최고의 차이다.
우리가 마실 다즐링의 경우, 인도 북동부에 위치하며, 다원이 해발 1,000-2,000m사이에 점재. 일교차가 심하며 연간 강우량이 3,000mm를 넘는 등 차 생산에 가장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홍차의 산지로는 독특하게 계절에 따른 채엽 시기가 있는 지역으로, 차를 따는 시기는 수색이 옅은 오렌지색을 띠고 향은 어느 계절보다 강한 봄차(3-5월), 찻 잎이 짙은 밤색을 띠며 과일향과 꽃향으로 표현되는 산화 발표향이 진한 여름차(5-6월), 조금 억센 가을차(10-11월)로 나뉘어진다.
“차의 제조”
차의 제조법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손으로 직접 전통적으로 만드는 방법.
둘째, 중국식의 수가공법을 이용한 방법.
셋째, 기계화된 방법 (롤링머신, 건조기 이용)
이 중, 세 번째 방법을 통해 단순한 가공의 형태에서 공장화된 제조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어 기계화 대량생산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는 능률적이며 위생적이고 안정적인 품질의 홍차가 탄생하게 된다.
1. 위조(withering) : 잎을 말리는 것으로 일광위조 혹은 인공위조를 실시
2. 유념(rolling) : 찻 잎을 비벼 그 표피를 비롯한 세포조직을 파괴하고 즙을 나오게 하는 과정
3. 발효(fermentation) : 90%의 습도, 22-28℃의 온도로 발효. 빛깔과 향, 맛을 좌우하는 화학반응
4. 건조(drying) : 산화발효를 적당한 상태에서 멈추게 하여 유통시키기 쉽게 하기 위한 공정
5. 선별(sorting) : 체를 통해 찻잎의 크기나 형상별로 나누는 것
“찻 잎의 등급”
Flowery Orange Pekoe : 가장 고급, Flowery는 잎의 눈을 가리킴.
차나무에 달린 순서대로 Orange Pekoe, Pekoe, Pekoe Souchong, Souchong이라고 불림.
중국산 백차와는 대조적으로 충분히 산화 발효해 차의 빛깔이 선명한 오렌지 빛을 띠는 찻잎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Orange Pekoe라 불림. Orange Pekoe는 차의 상급품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Broken의 종류로는 Broken Pekoe, Pekoe Dust, Broken Mixed Tea, Broken Souchong, 찻잎 전체와 큰 찻잎 조각들을 거르고 남은 조각 중에서 큰 것을 뜻하는 Fannings, 이보다 더 미세한 Dust가 있다.
<2. 실론의 차 산업>
“역사적 배경 및 성공과 발전”
영국 동인도회사가 실론섬의 식민지를 차지하였고, 19세기 중반까지 커피 재배지로 성장.
이 후, 커피나무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대체작물로 차를 재배하기 시작.
‘제임스 테일러’가 험악한 산악지대를 다원으로 개간 및 제다법과 홍차의 등급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 및 유념기를 개발. 그로 인해 실론의 홍차가 단기간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아쌈은 아쌈 티 컴퍼니에 의해 대부분의 차의 생산이 통제된 것과 달리 실론의 차는 개인 다원에 의해 제조되고 판매되었음. 아쌈의 차가 강하고 감칠맛이 돌아 블렌딩용으로 고려되었다면, 섬세하고 높은 고도에서 재배되는 실론차는 스트레이트 티로 판매가 되면서 맛과 질이 훌륭하다는 평판을 받게 되면서 성장.
즉, 실론의 차 산업은 차 재배에 적합한 지형과 기후, 인도 차 산업을 모델로 삼은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경영과 재배, 가공 기술을 바탕으로 견실하게 성장했다. 이 후, 홍차하면 많은 이들이 부드러운 황금 빛깔의 실론티를 연상할 정도로 실론은 전 세계 홍차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차 수출국이 되었다.
“실론의 차 산지와 다원”
실론의 차는 인도의 다즐링과 마찬가지로 일교차가 심하고 안개가 발생하기 쉬워 매우 좋은 품질의 차를 생산할 수 있다. 해발고도에 따라 차 등급이 나뉘어지며 하이그로운(High Grown)차들의 품질이 좋다. 일반적으로 주야간의 일교차가 큰 하이그로운 홍차인 우바, 누와라엘리야 홍차는 보다 산뜻하고 향긋하며, 캔디 등 미디엄 그로운 홍차는 부드럽고 깔끔한 맛과 향이 특징이다. 로우 그로운 홍차에 속하는 갈 등은 진하고 깊이 있는 맛을 낸다.
<19세기 영국 차 산업의 특징>
“차의 산업혁명”
인도에 이어 실론에도 다원이 개발되고 새로운 차 회사들이 세워지면서 차에 대한 붐을 일으켰다. 차를 유념하고 건조시키며 선별하고 포장하는 과정이 자동화되고 대규모 플렌테이션을 운영하며 생산성의 급증 및 이익이 상승하게 되었다.
차의 생산이 기계화, 대량화되고 차 산업이 급속히 확대됨에 따라 더 이상 국민음료인 차를 다른 나라의 생산에 의존하지 않게 되어 비로소 영국차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 차 산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홍차보다도 좋은 홍차를 더 싼 값으로 공급할 수가 있었다.
영국의 홍차산업은 세계 차 시장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는데 이 배경은 차의 산업혁명이라 일컬을 수 있는 기계화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는 점 외에도 상업학에 능통한 정부의 차 시장에서의 주도적 역할도 크게 작용하였다.
“차 기업의 설립”
중국의 무역시장이 개방되고, 식민지인 인도와 실론의 대규모 다원에서 차가 재배되자, 새로운 차 무역 회사들이 영국 전역에 설립되었고 차와 다른 식료품들을 취급하던 작은 상점들이 성공적인 기업으로 탈바꿈해간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브록본드, 호니먼티, 잭슨스 오브 피카딜리, 립톤, 미자와티, 테일러 오브 헤로게이트, 트와이닝, 위타드 오브 첼시가 있다.
이 중, 잭슨스 오브 피카딜리는 얼 그레이 백작에게 중국차의 블렌딩 비법을 전수 받아 얼 그레이를 시판하였고, 립톤은 인도, 실론, 미국에 다원과 농원을 갖춘 기업으로 현지에서 홍차를 생산 및 가공함으로써 싼 가격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차회사가 되었다. 트와이닝의 경우,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 왕실로부터 납품할 수 있는 영예를 얻은 회사이다.
<영국 차 음식에 관한 역사(시대순으로)>
16세기 초, 그 당시 매우 선진화되고 발전 된 문화를 가진 중국의 물자와 기술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중국은 유럽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아시아 항로를 개척하게 된 계기, 또 자본주의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됨. 이 때에는 차가 대단한 귀중품이어서 먼저 왕후와 귀족들이 마시기 시작한 후 차츰 상류층으로 번져감.
영국인들이 처음 차 접했던 곳은 "커피하우스" 영국 전역 각 도시에 사교의 장이 됨. 커피와 차, 찻잎을 판매.
영국특유의 홍차 문화 형성의 계기는 1662년 찰스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공주 캐서린이 차 애호가였는데 궁정의 알코올 문화가 차 문화로 바뀜. 그래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고품격의 취미를 향유한다는 것을 의미, 상류층 여성들의 파티를 중심으로 유행하게 됨.
Tea Party는 '고품격 습관'의 인식이 있었으므로 동인도회사는 해마다 새로 생산된 차를 왕실에 진상함으로써 왕비와 귀부인이 마시는 차라며 널리 홍보함.
후에 메리2세 여왕이 계승함으로 메리여왕은 네덜란드로부터 차, 자기, 칠기 등 동양적 취미를 들여옴.
18세기에 영국인들의 홍차수요가 급증함.
왕실과 귀족층에만 있던 문화가 먼저 상류층 가정으로 들어옴. 아침식사 메뉴인 고기, 술 대신 빵과 토스트, 차, 커피, 초콜릿을 먹게 됨. 보통 여자들이 저녁식사 후 휴게실 같은 티하우스에서 차를 마심. 상류층의 음다습관 정착으로 음다예절이 생기고, 차에 설탕, 우유나 크림을 첨가해 마시는 음다법도 정착.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관행 확산. 차의 소비 증가. 서민들도 차를 마시면서 상류층의 기분을 느끼고자 함. 차에 붙는 높은 세금으로 밀수 차와 가짜 '영국산 차', 위조차 성행. 음다습관이 대중 속으로 스며듦. 18세기 말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 즐기는 음료가 됨은 물론 일상생활 필수품이 됨.
점차 영국식 홍차 문화가 확산. 티파티와 티가든. 티가든은 자연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정원문화와 차 문화가 결합한 사교의 장소. 티파티의 전신이며 오늘날 애프터눈 티파티가 탄생하게 됨.
오랜 전쟁으로 경제가 어려워져 1767년 타운센트 법(Townshend Acts)을 제정, 차에 무거운 세금 징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차는 비싸고, 다른 나라들이 광둥성에서 사들이 차로 인해 차를 먹기 힘듦.
19세기 국가산업, 국민음료로써 중요한 위치.
빅토리아여왕 재임 기간 중 차 산업 1. 아편전쟁 결과 중국과의 차 무역 확대. 2. 식민지 인도와 실론에 차 플랜테이션 개간을 통해 값싸고 맛있는 차 공급. 3. 만국박람회를 통해 인도와 실론 차를 소개함으로 영국을 넘어 세계인의 음료로 거듭남.
영국의 도자기 산업 역시 자유경쟁을 통해 발전 됨. 독일과 프랑스의 도자기 품질과 견줄 만큼 도자기 산업이 발전 됨.
차문화가 완전히 정착
부르주아지들이 등장함으로 사회전반 모든 생활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옴. 오후의 티타임은 모든 계층의 즐거운 생활습관이 됨.
점심과 저녁사이의 시간이 너무 길어 차와 함께 다식(tea food)을 먹은 개인적인 습관이 상류층 부인들 사이로, 영국전역에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 잡음.
영국 홍차의 특징이라면 잔에 넘칠 듯 가득한 밀크티를 서너 잔씩 그치지 않고 마셔대는 넉넉함, 화려한 tea setting이다. 특히 애프터눈 티. 벽난로 앞에 차려진 티테이블, 차와 다구, 각종 다식들과 이야기들로 오는 풍성함, 그러한 분위기에서 느끼는 생활의 아름다움, 마음의 여유가 홍차의 진수. 그래서 서민들이 하기엔 부담.
시간 |
19세기 초 귀족 |
19세기 중반 상류 사회 |
19세기 중반 중산층 사회 |
아침 |
호화로운 아침식사 |
호화로운 아침식사 |
훗날 상류사회에서 중류사회로 확산되어 왔으며
애프터눈 티 시간이 4시로 당겨진 것 말고는 모두 같다.
|
오전 |
11시 일레븐지즈(Elevenses) |
점심 |
가벼운 피크닉풍 점심식사 |
가벼운 피크닉풍 점심식사 |
오후 |
4시 cake을 곁들인 애프터눈 티 |
5시 cake을 곁들인 애프터눈 티 |
저녁 |
8시 정찬 |
8시 정찬 |
밤 |
저녁식사 후 티타임 |
19세기 초 산업혁명 노동자
설탕을 넣은 홍차를 기본으로 하는 '영국식 아침식사'는 카페인이 다량 함유된 즉효성 있는 칼로리 보급원이었음. 일하는 도중 '티 브레이크' 역시. 산업혁명의 시대인 19세기 초반 정신이 번쩍 든 상태인 노동자가 공장 경영자들에겐 꼭 필요한 존재였음. 홍차는 칼로리도 없고 가격도 비쌌기에 홍차와 설탕이 들어가는 식사는 주로 런던 등 남부도시 먼저 퍼지고 북부지방에서는 저렴하고 영양가 높은 감자와 포리지를 중심으로 먹음. 후에 두 식사 형태가 결합하여 근대 영국서민의 아침식사가 됨. 노동자들의 애프터눈 티 역사는 19세기 말로 추측되며 점심과 저녁사이에 티타임을 설정해 홍차와 함께 빵, 버터, 케이크, 스콘 등을 먹었다고 전해짐. 애프터눈 티가 정착됨으로 노동자들의 저녁식사도 가벼워졌다고 함.
작성자 : 우케이(http://blog.naver.com/fp_woo)
http://blog.naver.com/fp_woo/40176650863
dalcom | 조회 433 |추천 0 | 2008.02.14. 22:19
8-12 세기 영국 역사 연표 (701-1200)
1066년
노르만디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마지막 침공을 지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인을 물리치고, 노르만디 왕조의 첫왕 윌리엄됨.
1154-1189년
플랜트 재닛 왕조의 첫왕 헨리 2세 통치. 법률의 개혁과 더불어 국민이 왕궁에 들어갈 수 있게 되다. 이 궁중 재판의 전례에서 영국의 관체제가 발전. 교회의 권한을 축소시키려는 헨리의 시도에 토마스 아베켓이 켄터베리성 1170년에 헨리의 기사 네명에게 암살. 이것이 로마교회에 대한 왕권의 반발 시작이다.
13-14 세기 영국 역사 연표 (1201-1400)
1215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실패하여 돈을 내기 위한 존 왕이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자 제후들이 분노하여 존 왕에게 대헌장에 동의하도록 요구. 이 문서는 제후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왕의 권력남용을 막도록 되어 있다.
1249-1284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대학 설립.
1264년
세금을 두고 다시 왕과 분쟁을 일으킨 제후들은 시몽 드 몽포르의 휘하에서 기를 들고 루이스에서 헨리 8세를 물리치고 1265년 드 몽포르는 도시 출신 하원의원들과 기사들로 구성된 의회를 소집하지만 오래가지 못함.
1314년
배노크번의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유지.1337-1455년 프랑스에 제국을 세우려는 잉글랜드의 포부가 백년전쟁을 유발시키기고 몇 가지 중요한 승리로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넓은 지역을 얼마 동안 차지하나 잔다르크의 출현으로 1453년 프랑스는 칼레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탈환.
1348- 1349년
흑사병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
15세기 영국 역사 연표 (1401-1500)1403 헨리 핫스퍼(Henry Hotspur), 스류즈베리(Shrewsbury)에서 패배. 1405 요크(York)의 스크롭(Scrope) 대주교 처형. 1408 브램험 무어(Bramham Moor)에서 노섬벌런드 (Northumberland) 백작 패배. 1413 헨리 4세(Henry Ⅳ) 사망: 헨리 5세(Henry Ⅴ) 즉위. 1415 에진코트(Agincourt)에서 영국의 승리. 1419-20 영국의 노르만디(Normandy) 정복. 1420 영국과 프랑스 간의 Troyes조약. 1422 헨리 5세(Henry Ⅴ) 사망; 헨리 6세(Henry Ⅵ) 즉위. 1435 베드포드(Bedford) 공작 존(John) 사망; 프랑스-브르고뉴 조약. 1445 헨리 6세(Henry Ⅵ), 앙주(Anjou)가의 마거릿(Margaret)과 결혼. 1449-50 프랑스, 노르만디(Normandy)를 침공. 1450 서포크(Suffolk) 공작 살해; 존 케이드(John Cade)의 반란. 1453 프랑스, Gascony 침략; 헨리 6세(Henry Ⅵ) 와병. 1455 요크(York) 공작 리챠드(Richard)와 왕당파 간의 알본즈(Albands)성 전투. 1459 블로어 히스(Blore Heath)와 러드포드 브릿지(Ludford Bridge)에서 요크(York)공작 패배. 1461 헨리 6세(Henry Ⅵ) 폐위; 에드워드 4세(EdwardⅣ) 즉위. 1465 헨리 6세(Henry Ⅵ) 체포. 1469 워릭(Warwick) 백작 리챠드(Richard)와 클레런스(Clarence) 공작 죠오지(George)의 반란 . 1470 에드워드 4세(Edward Ⅳ) 폐위; 헨리 6세(Henry Ⅵ)의 복위. 1471 에드워드 4세(Edward Ⅳ) 복위; 바넷(Barnet)에서 워릭(Warwick) 백작 사망; 헨리 6세( Henry Ⅵ) 사망. 1475 에드워드 4세(Edward Ⅳ), 프랑스 원정; 영-프 간의 Picquigny 조약 1477 윌리암 캑스톤(William Caxton), 영국에서 인쇄술의 의한 최초의 책 발간. 1483 에드워드 4세(Edward Ⅳ) 사망; 에드워드 5세(Edward Ⅴ)의 즉위, 폐위, 사망; 리 챠드 3세( Richard Ⅲ) 즉위; 버킹엄(Buckingham) 공작 헨리(Henry)의 반란. 1485 리챠드 3세(Richard Ⅲ), 보스워스(Bosworth)에서 헨리 튜터(Henry Tudor)에게 패배. 헨리 7세(Henry Ⅶ) 즉위.
17세기 영국 역사 연표 (1601-1700)1601 에섹스의 반란. 1603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 사망.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James VI)가 제임스 1세 (James I)로 즉위. 1604 스페인과 평화조약(런던 조약 Treaty of London); 햄턴 궁정회의(Hamton Court Conference)(왕, 주교, 청교도들 참석) 1605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 1606-7 제임스의 왕정연합 계획 실패. 1607 버지니아 식민지 정착. 1609 아일랜드에서 노던 공작 반란 발발; 스코틀랜드인과 영국 청교도에 의해 북아일랜드 얼스터(Ulster)의 경작이 시작됨. 1610 Great Contract(왕정 재정개혁)의 실패. 1611 흠정역 성서(Authorized Version of Bible)의 발행(영국교회와 청교도의 공동작). 1612 제임스1세(James I)의 큰아들 헨리(Henry) 왕자 사망. 1613 엘리자베스( Elizabeth) 공주, 팔라틴 선제후(Elector Palatine)와 결혼. 1617-19 버킹엄 공작 죠지 빌리어즈(Geroge Villiers)의 부상. 1619-22 이니고 존스(Inigo Jones)가 왕립 연회관(Banqueting House)를 설계. 1620 Pilgrim Fathers가 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로의 종교적 이민을 개시. 1622-3 찰스 왕자(Prince Charles)와 버킹햄(Buckingham)이 스페인 공주에게 청혼하기 위해 스페인에 갔으나 퇴짜를 맞음.
1624-30 스페인과의 전쟁.
1625 제임스 1세(James I) 사망;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계승하고 프랑스의 루이 13세(Louis XIII)의 여동생
앙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와 결혼.
1626-9 프랑스와의 전쟁.
1628 권리청원(the Petition of Right) 제출; 하비(Harvey)가 혈액순환에 대한 이론 발표; 버킹검의 암살.
1629 찰스 1세(Charles I), 의회를 해산하고 의회없이 통치하기로 결심.
1630 매서츄세츠(Massachusetts)로의 대거 이민 시작.
1634-40 찰스 1세의 조함세(造艦稅 Ship Money) 소송사건.
1637 햄프든(Hampden) 판례가 조함세를 징수하자는 찰스 1세의 요구를 지지함.
1637-40 스코틀랜의 찰스 정권 붕괴. 강권으로 찰스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두 차례의 시도가 있었음.
1640 장기 의회(Long Parliament)가 소집됨.
1641 영국과 스코틀랜드 정부 개조; conciliar court 폐지, 특별세, 3년세(triennial bill), 대간언(Grand Remonstrance) 폐지; 울스터 구교 (Ulster Catholic)의 반란.
1642 찰스 1세와 의회와의 싸움(the Civil War).
1643 왕의 군대 우세; 스코틀랜드가 국회의 편을 들어 침공.
1644 의회군 우세.
1645 중립을 고수하던 'Clubmen'의 군대가 양 편을 모두 위협; 왕당파 군대 해산, 의회군이 군을 재조직함(New Model Army).
1646 왕이 스코틀랜드에 항복; 주교제와 국교의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폐지되고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확립.
1647 군대의 반란; 급진 세력, 의회의 전제를 비난.
1648 Second Civil War; 스코틀랜드가 왕의 편에 서서 패배함; 지방 세력 (Kent, Colchester, South Wales, Yorks 등)의 기세가 꺾임.
1649 찰스 1세의 재판과 처형; 영국은 공화정으로됨.
1649-53 단일 의회로 된 '잔여의회(Rump' Parliament)의 통치. 상원과 국왕의 폐지.
1649-50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아일랜드 정복(Drogheda 대학살).
1650-2 크롬웰, 스코틀랜드 정복. 던바(Dunbar)와 우스터 (Worcester) 전투.
1651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 Leviathan)>이 출판됨.
1652-4 First Dutch War.
1653 크롬웰, Rump를 해산하고 Nominated Barebones Assembly를 조직. 그 자신은 호민관(Lord Protector)이 됨.
1655-60 스페인과의 전쟁.
1655 왕당파 반란 실패.
1658 크롬웰 사망. 그의 아들 리챠드(Richard)가 그를 계승.
1659 리챠드(Richard), 군대에 의해 물러남. 잔여국회(Rump)가 회복됨. 그러나 군대에게는 불만스러운 존재였음.
1660 찰스 2세(Charles II) 복위.
1662 영국교회가 복원됨. 영국 학사원 (Royal Society)에 칙령이 내려짐.
1663 신교 자유를 부여하려는 왕의 첫 번째 시도 실패.
1665-7 Second Dutch War.
1665 대역병(Great Plague) 발생.
1666 런던의 대화재 발생.
1667 밀턴(Milton)의 <실락원 (Paradise Lost)>이 출판됨.
1672-3 신교 자유를 부여하려는 왕의 두 번째 시도 실패.
1672-4 Third Dutch War.
1674 곡물 하사금 (Grain bounties)이 도입됨(영국은 식량 자급자족).
1678 Titus Oates and the Popish Plot; 번연(Buyan)의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의 1부가 출판됨.
1679-81 휘그당(Whig)과 토리당(Tory)당의 출현.
1683 The Rye House Plot.
1685 찰스 2세 (Charles II) 사망. 제임스 2세(James II)의 승계; 찰스 2세 (Charles II)의 서자 먼모스(Monmuth)의 반란 실패.
1687 제임스 2세 (James II)의 신교자유령 선언 (Declaration of Indulgence); 뉴튼(Newton)의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됨.
1688 제임스 2세 (James II)의 아들 출생.
1688 윌리엄 오렌지 (William Orange)의 침공; 제임스 2세(James II) 사망. 윌리암 3 세 (William III)와 메리(Mary)가 계승.
1689 신교자유 령 (Toleration of Act).
1690 보인 전투(Battle of the Boyne); 윌리암 3세(William III)가 아일랜드와 프랑스 군대를 격퇴.
1694 잉글랜드 은행 (Bank of England)이 창립; 메리 여왕(Queen of Mary) 사망. 1695 Licensing Act의 폐지
1697 아우스부르그(Augsburg) 동맹국과 프랑스와의 리스윅(Lyswick) 평화조약 체결; CivilList Act는 왕실의 살림을 꾸려갈 기금 마련을 위해 투표를 실시함.
18세기 영국 역사 연표 (1701-1800)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그레이트 브리튼이라는 이름으로 결합.
1700-1800년 농업의 발전.
1714-1727년 조지 1세 통치.
1727년 조지 2세가 계승.
1760년 조지 3세가 계승.
1765년 제임스 와트가 증기를 동력화하여 엔진을 발명.
1769년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수력 장치를 이용한 방적 장치 특허.
1775년 영국의 식민지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로 아메리카에서 독립전쟁의 발발.
1783년 영국의 패배로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승인.
1793년 프랑스인이 혁명 집정부 하에서 네덜란드로 침공하자 영국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 이 전쟁은 1799년 나폴레옹의 권력을 장악한 이후까지 이어짐.
19세기 영국 역사 연표 (1801-1900)
1801년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가 연합 왕국을 이룩.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프랑스 해군을 물리침.
1815년 웰링턴 공의 지휘하에 영국군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폴레옹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다른 국가들이 빈 회의에서 유럽의 새로운 국경을 설정.
1820년 조지 4세 계승.
1825-1855년 1만 5천 킬로미터의 철도 부설.
1830년 윌리엄 4세 계승.
1833년 공장법이 최소 노동연령을 9세로 정함. 광산과 공장의 근로 조건들에 대한 개혁.
1837-1901년 빅토리아 여왕 하의 대영제국의 팽창.
1853년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중앙 아프리카 탐험.
1857년 벵골 군대의 반란이 인도의 반란을 유발. 영구의 통치에 반대하는 민중봉기에서 수천명이 목숨을 잃고,
1858년 인도 통치법은 인도에서의 행정권을 동인도 회사로 부터 국왕에게 인계.
1859년 찰스 다원의 <종의 기원>> 출판.
1875년 영국의 수에즈 운하의 주식 획득.
1899-1902년 네덜란드 정착자들과의 보어 전쟁이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짐. 이 전쟁으로 영국은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을 장악.
20세기 영국 역사 연표 (1901-1996)
1901-1910년 에드워드 1세 통치.
1905-1911년 자유주의 행정부가 중요한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여러 가지 사회보장제도 실시. 노년기 연금이 창설되고, 건강 및 실직보험을 실시.
1910년 조지 5세 계승.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미국의 참전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로 이끎.
1921년 아일랜드의 공화주의자들과 당국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고, 남부 아일랜드에 독립을 승인. 아일랜드 자유국이 1937년 에이레로 국명이 바뀜. 북아일랜드는 연합왕국의 일부로 남음.
1922년 영국방송회사의 설립. BBC 방송국은 공공기관으로 바뀜.
1926년 광부들의 분쟁이 노동조합 회원들의 지원을 받아 전면 파업. 9일만의 파업으로 1927년 노동조합 분쟁법이 동조 파업을 불법화시킴.
1936년 윌리스 심프슨과 결혼을 위하여 에드워드 8세가 왕위 포기.그의 동생 요크공이 조지 6세로 오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0년 5월에 원스턴 처칠 수상이 연립 정부가 형성.
1944년 6월 6일 '디 데이'에 대한 대규모 연합군 병력이 노르만디 해안에 상륙하여 독일군 과 맞섬.
1944년 새로운 교육 법안으로 15세까지 의무교육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1945-1951년 은행, 철도, 광산, 제철, 조선, 가스와 전기등 주요 산업의 국유화. 무료 의료 혜택을 위한 국민건강보건 제도 제정.
국민보조법으로 극빈지에게 수당을 마련함.
1947년 영국 제국의 영토적인 와해가 시작. 인도가 독립하고 아대륙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 끝에 두 국가로 분리.
1952년 엘리자베스 2세 계승.
1956년 이집트의 지도자 가말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로 위기의 고조. 영국 군사의 움직임에 대한 유엔의 적대행위 종식요구로 영국군 철수.
1968년 북아일랜드의 신교도와 카톨릭 사이의 긴장이 내란 상태까지 진전.
북아일랜드의 요청에 따라 영국군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제압.
1969년 북해에서 유전 발견.
1973년 유럽 경제공동체의 회원국이 됨.
1979년 첫 번째 여수상인 마거릿 대처 수상 취임.
1 선사시대의 영국
선사시대의 영국에 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브리튼섬이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던 5만년 전에 이미 혈거수렵(穴居狩獵)의 종족이 살았으나, 빙하의 확대와 함께 떠난 것으로 보인다. 영국해협의 함몰로 대륙과 떨어지고 난 뒤 갈리아 ·발트해 연안 등의 지방에서 새 종족이 건너왔으며, 이어 신석기시대에 이베리아인 등 비(非)아리안계 인종이 이주하여 수렵 · 목축과 원시적인 농경에 종사하였다. 그후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초기에 걸쳐 대륙의 켈트 제족이 침입하여 선주민을 제압하고 정착하였으며, 북부에 거주한 게일인보다 남부에 거주한 브리튼인이 진보한 문화를 가졌다. 그들은 물고기와 짐승고기 외에 밀 ·보리 ·귀리 등을 먹었으며, 짐승가죽 외에 삼[麻]과 양모의 직물을 착용하였다. 또 다신교를 믿고, 소부족으로 갈라져 서로 독립해 있었으며, 딘 또는 둔이라고 하는 방벽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런던(London)이라는 지명은 소택지의 성을 뜻하는 켈트어 린딘(Lyndyn)에 기인하며, 나중에 로마인이 이를 라틴어로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 로마인의 점령
영국 브리튼섬의 켈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로마의 지배였다. 갈리아 지사(知事)로서 프랑스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종족이 브리튼인의 지지를 받아 저항했기 때문에 BC 55년과 BC 54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 섬을 원정하였다. 브리튼의 부족들은 연합하여 대항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격파하고 템스강 주변의 일부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후 본국의 정치 때문에 3개월 만에 떠났으며, 로마인의 본격적인 공격은 약 1세기 후까지 연기되었다.
제정시대(帝政時代)의 클라우디우스는 43년 원정군을 일으켰고, 8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스코틀랜드까지 침공하였다. 그후 로마인은 타인 하구(河口)에서 솔웨이만(灣)까지 브리튼섬을 동서로 횡단하는 장성을 구축하였으며, 현재의 잉글랜드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약 4세기 동안 지배하였고, 런던이 상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의 유적은 여러 군데에 있는 데, 런던 등지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바스에서 발굴된 온천이 특히 유명하다.
랭커스터 ·맨체스터 ·윈체스터 ·체스터 ·레스터 ·글로스터 ·우스터 등의 지명의 어미는 당시의 병영지(兵營地)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성(城:Castra)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인의 비극으로는 이케니 부족의 여왕 보아디케아의 반란과 참패의 비화가 유명하다.
3 앵글로색슨 영국
영국은 4세기 후반까지 픽트인 ·스코트인 등 북방계 켈트인의 침입과 함께 게르만인의 침입이 시작되어 로마인의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후에도 색슨 ·앵글 ·주트 등의 게르만인의 침입이 잇따랐으며 대륙에서의 게르만의 민족이동, 특히 고트인의 로마침입에 따라 5세기에 로마의 군대가 철수하자 로마의 지배는 완전히 끝났다.
침입한 게르만인은 원주민인 브리튼인과 싸웠으며, 6세기 말에는 현재의 잉글랜드에서 북부와 동부를 앵글인, 템스강 이남을 색슨인, 켄트주(州)와 와이트섬을 주트인이 차지하고, 켄트 ·에식스 ·서식스 ·이스트앵글리어 ·마시어 ·웨식스 ·노섬브리어의 7개 왕국을 건설하였다. 로마시대의 그리스도교는 게르만적 다신교(多神敎)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7왕국 시대에 성(聖)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다시 도입되었다.
생활의 중심은 농촌으로 옮겨지고, 로마시대의 도시는 일부를 제외하고 폐기되었다. 주민은 장로 ·자유민 ·노예로 나뉘었고, 노예는 죄인 또는 채무불이행자였다. 장로의 권력은 큰 것이었으며, 국왕을 세워도 절대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후일의 마그나 카르타는 이 전통에 기인한다.
부족은 혈족공동체였으며, 가장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공산생활(共産生活)을 하였다. 사우샘프턴(Southampton) ·버밍엄(Birmingham) ·햄스테드(Hampstead) 등의 지명의 어미는 가족이 사는 곳을 의미하며, stead는 독일어의 Staad(도시), ham은 독일어의 Heim(집)과 어원이 같다. 7왕국은 약간의 성쇠를 거쳐 9세기 전반에는 웨식스왕 에그버트에 의해 통일되어 잉글랜드 왕국이 성립하였으며, 전 잉글랜드가 그 지배에 복종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란 앵글인의 토지라는 의미이다.
8세기 말부터 시작된 북방 데인인의 침입은 9세기 중엽부터 규모를 더하였으며, 웨식스 지배하의 각 왕국 중 동쪽의 여러 나라는 데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그버트의 손자 앨프레드와의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며, 그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손자 에셀스탠은 각각 데인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전 잉글랜드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데인인은 조직적 ·국민적 침입을 시작하였으며, 11세기에는 웨식스왕 에셀레드 2세가 노르망디로 망명하고, 데인인 카누트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4 노르만 정복
영국의 카누트가 죽은 뒤 데인 왕조는 2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후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이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앵글로색슨 계통의 왕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1066년 에드워드가 죽은 뒤 의동생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공(公)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진격해 왔으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군을 격파, 윌리엄 1세(정복왕)가 되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말하는 노르만정복(Norman conquest)이다. 그는 대륙의 봉건제를 채택하였으며, 앵글로색슨인의 토지를 노르만 제후에게 봉지(封地)로서 나누어 주었다. 또 전 잉글랜드의 토지 ·인구 ·가옥 등을 기재한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을 작성하여 왕실재정의 기초를 굳히고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시작하였다.
둠즈데이란 그리스도교의 최후의 심판날을 의미하는데 이 장부의 기재사항이 최종적 권위라는 뜻에서 그렇게 명명하였다고 한다. 후일 지주와 지배계급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봉건적 억압을 ‘노르만의 멍에’라 하여 저주하고, 옛날의 앵글로색슨 사회를 이상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윌리엄 1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대립하여 교회에 대한 국왕의 관리권을 주장하고 주법정(州法廷)과 교회법정을 분리하는 등 왕권을 신장시켰다. 교회재판권을 둘러싼 헨리 2세와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의 싸움, 또 후일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한 영국국교회(英國國敎會) 확립의 연원(淵源)도 여기에 있다. 헨리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조카 스티븐과 딸 앙주 백작부인 마틸다 사이에는 왕위계승권이 계속되었는데, 스티븐이 죽은 후에는 결국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프랑스에서 와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에 플랜태저넷(앙주)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세력을 회복한 제후(諸侯)를 누르고, 재판제도의 정비, 관료제와 용병제(傭兵制)의 확립 등으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으로 유명한 다음의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카 존왕[失地王]은 헨리 2세 이래의 대륙 영토의 절반을 잃고 중세를 과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에 러니미드에서 존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대헌장)에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이 헌장은 봉건제후의 권력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런던 이하의 자유시(自由市)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유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적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아들 헨리 3세도 남은 대륙령(大陸領)을 상실하고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주대표(州代表) 몽포르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항하였으며, 그 밖에 시민대표도 포함시킨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의회의 기원이며, 3명의 에드워드왕 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에드워드 3세 때 주와 도시의 대표가 왕에게 청원서를 내고 이를 귀족과 고위성직자가 심의하는 관행이 생겼으며, 상하 양원제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한편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대륙령을 잃었기 때문에 왕권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려고 했는데, 웨일스는 곧 잉글랜드령이 되었으나 스코틀랜드는 1313년에 에드워드 2세군(軍)을 대파하여 독립을 확보하였다.
5 왕위계승시대
프랑스에서는 샤를 4세가 죽은 뒤 카페 왕조가 발루아 왕조로 바뀌었는데, 이에 영국은 카페가(家)의 혈통을 가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133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전쟁의 발단이며, 왕위계승전인 동시에 사실은 일찍이 상실한 앙주령(領)을 회복하고 최대의 양모시장인 플랑드르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전반에는 영국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는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는 계속 패배하여, 마침내 칼레 외의 모든 대륙령을 상실하고 전쟁은 끝났다. 백년전쟁의 2년 후에는 국내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1455년부터 30년간 내전이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랭커스터공(公)이 장남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즉위, 헨리 4세로서 랭커스터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파와 에드워드 3세의 막내아들의 손자 요크공(公) 리처드를 옹립하는 요크파가 대립한 것이다. 이 전쟁은 양가의 문장(紋章)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렀다.
리처드가 전사한 후 요크파가 승리하자 헨리 6세는 망명하고, 에드워드 4세가 요크왕조를 열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 때, 왕이 어린 것을 틈타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왕과 그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는데,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웨일스의 튜더가(家)의 헨리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여 헨리 7세가 되고,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그 동안, 노르만 때문에 앵글로색슨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노화(農奴化)된 농민의 지위는 14세기에 들어서부터 차츰 향상되고, 농민의 계층문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1348∼49년의 흑사병은 인구의 1/4 이상을 죽이고, 남은 농민의 지위를 높였다. 영주계급(領主階級)은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억압을 강화하였으며, 이에 와트 타일러 등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는 실패했으나 농민의 감소로 부역의 폐지와 지대(地代)의 인하, 영주직영지(領主直營地)의 대출(貸出) 등이 부득이했으며, 장원(莊園)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한편, 14세기에 영국의 무역은 양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머천트 스테이플러스가 일종의 상인 길드로서 무역독점권을 가지고 왕실재정의 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테이플러스의 규제에서 벗어난 모험상인의 활약이 뚜렷해졌으며, 15세기에 들어서자 모험상인회사가 등장하여, 모직물 무역의 독점권을 가지게 되었다.
6 절대왕정에서 시민혁명으로
영국에서 장미전쟁으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 향신(鄕紳)과 시민을 추밀원(樞密院)에 기용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하여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재정을 단단히 하는 등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가 처형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가 양모가격의 등귀(騰貴)에 따른 인클로저운동과 함께 이들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밑에서 섭정(攝政)이 된 서머싯공(公)과 그의 실각 후의 워릭 백작은 카톨릭에 따르던 교지(敎旨) 내용마저 신교화함으로써 헨리의 사업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며, 수장령(首長令)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정(政情)의 곤란성, 특히 몰수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으며,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을 제정하고(1559) 신앙개조(信仰箇條)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공히 확립하였다. 여왕은 가신단의 해체, 수도원령의 몰수, 인클로저운동 등으로 생긴 빈민대책으로서의 구빈법의 제정, 도제조례(徒弟條例)의 제정 등 국내정책을 충실히 하는 한편 식민사업도 추진하였으며, 러시아회사 ·레반트회사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설정하는 등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밀어나가고,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租稅)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
이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審査律)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7 정치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復位)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화폐개주(貨幣改鑄)·무역차액·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윌리엄 치세의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
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윌리엄과 앤 시대에 휘그와 토리는 교대로 정권을 잡았으나, 앤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즉위한 조지 1세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치세는 휘그의 전성기였으며, 특히 1721∼1742년의 월폴 정권과 1756∼1762년의 대(大)피트 정권은 그 대표이다. 월폴은 책임내각제를 확립하였으며, 토리와도 협조하여 남해포말회사(南海泡沫會社) 사건 후의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피트는 7년전쟁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였으며, 1763년의 강화로 캐나다, 미시시피 동쪽을 영유하는 영국 제국의 길을 열었다. 1760∼1820년의 조지 3세 재위기간에는 토리 정권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의 전분야가 일변하였다. J.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R.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S.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E.카트라이트의 역직기(力織機) 등이 잇따라 발명된 데다 J.와트의 개량 증기기관도 가세하여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이 달성되었다. 또한 새 기술은 제철·채탄에도 파급하였고, 나중에는 철도부설에까지 이르렀다.
농촌에서도 제2차 인클로저운동, 비료개량, 탈곡기의 보급 등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농촌의 탈곡기 파괴 운동과 도시의 방직기 파괴 운동 등이 있었으나, 이러한 반항도 자본주의의 진전을 막지 못하였다. 사회과학면에서도 J.벤담의 정치학, A.스미스, D.리카도의 경제학 등 자유주의 사상이 중상주의를 대신하여 새시대의 요청에 따랐다.
프랑스가 18세기 말의 정치혁명으로 기도한 사회를, 영국은 경제혁명에 의해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 1846년의 곡물법 폐지, 1849년의 해운법 폐지 등은 모두 산업자본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의 발전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도 불가피하였다. 1799년의 단결금지법, 1819년의 피털루사건 후에 있었던 6법 등의 탄압 입법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성도 진행되어 1834년에는 전국 노동조합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매년선거·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大請願運動)을 벌였는데 그 결과, 선거법은 1867년과 1884년의 개정을 거쳐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면서도 한쪽에서는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으며, 기타 수에즈운하를 매입하고 이집트를 보호령화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발전시켰다.
8 대영제국 붕괴
영국의 제국주의적 발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미국 등 후진국의 세계시장 진출과 더불어 1873년에는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수출은 감퇴하고, 실업인구는 증대하였다. 또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비숙련노동자의 조직과 사회주의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1884년에는 쇼와 웹 등의 페비언 협회, 모리스와 하이드맨 등의 사회민주연맹이 결성되었으며, 1893년에는 번즈와 하디 등의 독립노동당이 형성되었다.
1900년에는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들에 의한 노동자선거위원회가 실현되어 1906년에 노동당이라 개칭되었으며, 그 해 선거에서 29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자유당 내각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노동쟁의법 ·노인연금법 ·국민보험법 등의 사회정책 입법을 하였으며, 특히 1908년의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은 대토지 소유에 대한 중세(重稅)를 사회정책의 재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에서 부결되었으며, 자유당 정부는 1911년 상원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는 국회법을 성립시켰다.
독일의 확장정책으로 지위를 위협받은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대항하였으나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7년 독일의 잠수함작전과 러시아혁명으로 인한 러시아의 연합국 이탈 때문에 영국은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참전한 미국과의 협력으로 1918년 독일에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과 자치령 등의 지위가 향상되고, 상대적으로 영국의 지위가 저하되었다. 특히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條例)는 본국 의회의 입법이 자치령의 동의 없이는 자치령에 적용되지 않음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대영제국은 사실상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노동당은 전후의 불황을 배경으로 착실한 약진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의 선거에서는 142명의 당선자를 내어 보수 ·자유 양대 정당의 대립을 무너뜨렸다. 노동당은 1923년에는 191명의 의원을 확보, 1924년에는 처음으로 소수당이면서도 노동당 단독내각을 성립시켰다. 1926년에는 보수당 정부하의 노동자 총파업이 패배하여 총파업은 불법화되었으나, 1928년에는 여성참정권이 확대되어 남자와 대등한 정치적 권리가 실현되었다. 1929년에는 노동당이 제1당이 되어 제2차 노동당 내각이 탄생하였다.
1929년의 세계공황은 세계의 정세를 일변시켰다. 미국은 사회자본의 증가로 공황을 극복하였고, 영국은 연방제국과 경제블록을 결성하여 이를 타개하였다. 그러나 이 공황으로 독일 ·이탈리아·일본 등의 군국주의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1930년대 독일에는 나치스 정권이 대두하여 또 다른 확장정책을 노골화하였다. 보수당 정부의 J.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에 대한 융화정책을 계속하고 전쟁 회피에 주력하였으나, 1939년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프랑스와 함께 대독(對獨)전쟁에 돌입하였다.
1940년에 영국은 처칠 총리의 거국일치 내각을 만들었으나 프랑스가 항복한 후의 전국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러나 1941년의 독일·소련전(戰) 발발, 미국·일본 개전에 따른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유리하게 돌아갔으며, 1943년에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고, 1945년에 독일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종결에 성공하였다. 노동당은 독일 항복 후의 선거에서 처음으로 절대다수의 의석을 얻었으며, 포츠담회담에서 처칠 대신 새 총리 애틀리가 참석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은행·민간항공·탄광·철도·철강업 등을 잇따라 국유화하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저화로 복지국가정책을 취하였으나, 전쟁에 따른 경제적 곤란, 식민지의 연이은 독립, 미·소 양 블록의 긴장으로 인한 재군비 등 때문에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1951년의 처칠 정부하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완화되고 국유화 정책도 역전되었다. 1955년 처칠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은 이든 정부는 이듬해의 수에즈 사건으로 국위를 더욱 손상시켰다.
이어 H.맥밀런, A.F.흄의 두 보수당 정부도 미국과 소련의 발전 때문에 영국의 국제지위 향상과 경제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으며, 1964년에는 정권을 윌슨의 노동당 정부에 넘기고 말았다. 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시장의 발전으로 영국은 유럽 내의 상대적 지위마저 저하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영국에서는 노동당 정부에 이어 E.히스 보수당 정부도 EC 여러 나라와 가맹교섭을 속행하였으며, 마침내 영국연방 국가와의 관계, 농업보호문제, 국민감정 등 곤란한 문제를 남기면서도 EC 내의 한 나라로서의 활로를 찾았다.
|
출처 :인생에서 숨기고픈 알아야 할 것들 원문보기▶ 글쓴이 : 열정바이러스
ㅡ 다음 카페 <태계황선생 >dalcom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cafe.daum.net/myrrh/N8Uq/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