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 茶생활-茶란

2015. 5. 9. 18:21차 이야기

 

 

 

생활속 茶생활-茶란 우리차 이야기

2010/02/0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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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 茶생활

 

   茶를 마시는 것만으로 위로는 머리를 맑게 하고 아래로는 소화를 돕는다.
새삼스럽게 차 효능과 성분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보다는 예절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茶생활은 꼭 건강을 위한 것 만은 은 아니기 때문이다.


   茶는 멋 부리고 형식을 꾸미는 것이 아닌 것이다.
금가고 가장 못나고 삐뚫어진 하나의 찻그릇에 정성들여 우린 한잔의 차를 담아

한순간 이나마  자기를 성찰하고 번뇌로운 영혼을 고요하게 다스리는 것으로써

茶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일상인들은 먼저 생활로서의 茶를 배우는 것이 좋고 무엇보다 즐겨 마시는 가운데

어떤 까다로운 격식을 앞세워 과시하는 것 보다 茶를 달임에 있어서 정성을 듬뿍 들이고

자연스럽게 공손한 마음으로 마실 수 있다면 茶人으로서의 기본은 갖추었다 할 것이다.

 


茶란

 

茶나무는 茶나무과(동백나무과)에 속하는 늘 푸른 나무로써 가을에 (이듬에 1월에 걸쳐서)

흰 꽃이  피며 (연분홍 꽃은 관상용) 冬栢씨앗 같은 열매(이듬해 가을)을 맺는다.
茶란 차나무의 어린 잎을 덮거나 쪄서 가공하여 만든 기호음료가 茶이다.
茶에는 녹차, 홍차, 엽차, 말차, 떡 차, 작설차, 반야차, 설록차, 옥로 차, 죽로차, 등이 있다.

 

 

무엇을 茶라 하는가 ?

 

1)茶나무는
茶나무 과(동백나무 과)에 속하는 늘 푸른 나무로써 가을에 (이듬에 1월에 걸쳐서)
흰 꽃이 피며 (연분홍 꽃은 관상용) 冬栢씨앗 같은 열매(이듬해 가을)을 맺는다.


2)茶란
차나무의 어린잎을 덮거나 쪄서 가공하여 만든 기호음료가 茶이다.
茶에는 녹차, 홍차, 엽차, 말차, 떡 차, 작설차, 반야차, 설록차, 옥로 차, 죽로차, 등이 있다.
이외에도 납 전차, 화 전차, 우 후차, 화개차등 茶의 이름은 수 없이 많다.
차의 이름은 차를 따는 시기, 차의 산지, 차의 모양, 제조방법, 전설 등의 의하여 붙어진다.


3) 茶나무의 원산지
- 중국의 서남방인 雲南지방
- 인도의 동북부인 아샘지역


4) 한국의 茶 자생지
-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제주도

 

 

차나무의 기원

 

   지구상의 茶나무는 수천만년의 역사가 있지만 차가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이용되기는 사오천년 전의 일이었다
문자기재에 의하면 주 무왕시대에 벌써 지금의 사천성 지역에서는 당지에서 나는 차잎을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3000여년 전에 중국의 운귀 고원의 사천, 귀주, 운남 인접지역에서는 차를 재배하고 가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중국보다 더 일찍 차에 대한 기록이 없어 중국은 가장 일찍 차를 재배하고 마신 국가라 할 수 있다.


   통계에 의하면 운남, 귀주, 사천성 등에 큰 차나무는 200여곳 있고 어떤 지역은 古차나무가 삼림을 이루어 그 면적이 수천무나 된다.
운남성에는 나이가 1700살되는 큰 차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높이는 32.12미터이고 둘레길이는 2.9미터인데 지금까지 나이가 가장 많은 야생형 차나무이다.


그 밖에 재배형 큰 차나무도 있는데 800여살되었고, 과도형 차나무왕을 발견했는데 나이는 1000살 가량된다.

이 세가지 부동종류의 차나무왕은 국가중점보호 나무종류로 정해져 국내외 학자들에게 茶의 기원을 연구하는 산 증거로 된다.

 

 

차문화사

 

1)상고시대
   차의 기원에 관한 일원설에 의하면 중국에서 가장 먼저 차나무를 발견했고 재배했으며, 이용가공하여 차를 마시는 풍습이 생겼다.
다성 육우가 쓴 [다경]에 의하면 차나무는 신농시대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불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잎을 따 먹었을 것이다. 불을 이용한 후에는 생잎을 다른 채소와 함께 끓여서 먹으면서

차가 인체에 미치는 효능을 알았을 것이다. 이렇듯 중국에서는 차를 신농시대때부터 마셨다는 설과 주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러한 설들은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진한때인 BC9년에 작성된 노비매매문서 <동약>에 차를 달이고 산 내용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한나라때부터는

차의 재배와 음용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지금처럼 말려서 저장하는 것이 아니고 절여서 장기적으로 보존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2)위진남북조시대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차문화가 싹트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위나라에 와서 점차 볶아 만들어 저장했는데 그것도 초기에는 생잎을 찧어서 뭉쳐 돈차로 만들어서 가운데 구멍을 뚫어 실로 묶어 보관했다.
남북조이후에는 문인들에게까지 음다풍습이 전해졌다. 또 도교가 성행해 스님들이 도를 닦을 때 졸음을 피하기 위해 차를 재배해 마셨다.

 

3)수.당시대
   수.당시대에는 국가가 오랜 전란을 겪고 하나로 통일되고, 남북교통이 연결되었으며 경제가 발전,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진 이 때 육우가 최초의 다문화 서적인 <다경>을 저술하였다.
당(618~907)나라 이전부터 중원에서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차순을 볕에 말려 덩어리인 떡차(병차)를 만들어서 여러 양념(건과류)을 첨가하여 마셨다. 몇 천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의 많은 변방 소수민족들이 이런 차를 즐겨 마시고 있다.

다성인 육우선생은 이같은 양념을 넣어 차 마시는 것에 대해 무척 반대했으며,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차 마시기를 주장했다.

당나라때의 자차음다법은 다마에 부드럽게 잘 갈은 후, 끓는 물에 차를 집어 넣어서 끓여서 마신다.

지금 우리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리차를 끓여서 마시는 방법과 흡사하다고 본다.

 

4)송대
   당나라 때에는 끓여서 마셨기 때문에 본래의 색이 변했으나, 송나라때에는 가루를 낸 점다법으로, 익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끓인 물을 부었다.

한국과 일본의 말차법은 바로 송대의 점다법이다.
점다라고 하면 단차(團茶:덩이차)를 가루내어 그 가루를 찻사발에 떨구어 끓인 물을 붓고 찻솔로 휘저어 가루와 뜨거운 물이 혼합하여 거품이 피어오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가루차를 점다라고 한 것은 송나라 휘종황제(1082년-1135년)가 <대관다론(大觀茶論)>을 저술한데서 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며 송나라 주자:(1130 -1200년)가 쓴 문공가례(文公家禮)의 관홍상제에 점다로 기록하였다.
이처럼 당나라때의 황족과 귀족, 사찰, 문인들의 차풍속이 송나라에 와서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퍼져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5)명대
   원나라가 망하고 명(明 1368년~1644년)가 탄생하면서 명 건국 태조 황제인 주원장은 서민 출신으로 누구보다도 단차(團茶:덩이차)를 만드는데 백성들의 노력과 애환을 알고 있었으므로, 홍부 24년(1391년)에 명나라 건국 태조 황제인 주원장이 덩어리차인 단차를 폐지시키는 칙령을 내려 잎차인 엽차를 우려 마시는 포다법(泡茶法 Brewing Tea)시대가 열린다.

이 칙령으로 몇 천년동안 중국 차문화를 이끌어 왔던 덩어리차는 중원의 차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다만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 변망 소수민족은 여전히 덩어리차를 음용하게 된다.

 

6)현대의 중국
   차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다양한 차가 생산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품종의 개발과 제다 공정의 연구를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연구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백차, 녹차, 청차, 황차, 홍차, 흑차, 화차류 등 모든 차 종류가 생산되어 유통되고 있으며 차를 즐겨 마시고 있다.

 


韓國의 전통茶의 역사

 

1)삼국시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홍덕 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
그러나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는 이미 1,300여전인 선덕여왕 때 차를 마신 기록이 있으며, 가락국의 시조 감수로 왕의 부인 허황 후께서 인도에서 입국하실 때 오라버니인 장유화상을 시켜 차 종자를 현 김해군 장유면의 대밭에 심어 죽로차를 만들어 마셨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차는 불타의 공양과 승려의 음용 및 예폐(禮幣)의 대용으로 쓰였으며, 특히 화랑들도 차를 마시며 심신을 수련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2)고려시대
   특히 고려시대에는 찬란한 불교문화의 발전과 함께 차가 더욱 널리 펴져 불교의식은 물론 모든 국가의식에 진다례식(進茶禮式)이 따랐으며 차의 사용이 늘어나자 궁정에서는 차를 담당하는 다방이라는 관청이 생기고. 사원주위에는 차를 가꾸던 다촌이 생기게 되었으며 차가 상품으로 거래되게 이르니 일반 평민사회에서도 차를 널리 보급되었다.

 

3)조선시대
   허나 이렇게 왕성했던 음다의 풍은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문화의 배척과 함께 쇠퇴하게 되니 임진왜란은 전후한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차는 대중 음료로서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대신 양질의 생수와 숭늉을 애용하는 생활습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를 따르는 선비 집안에서도 명절에는 반드시 “차례”가 있었으니 오늘날에도 제사 지내는 일은 “차례올린다”고 하는 것은 제사에 술 대신에 “차”가 쓰였음을 입증한다.

   또 차를 마실 때에 함께 먹던 과자인 “다식”은 오늘까지도 남아 있고 이 다식을 만들던 “다식판”이 오늘까지 쓰이고 있으며

놀랍게도 우리는 지금도 “일상다반사” (茶飯事)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다반사”란 차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니

우리 조상들이 밥먹듯이 차를 마셨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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