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28. 11:07ㆍ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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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00 회
한 국 차 문 화 특 강
제 95 회
제 목 : 묘련사석지조기(妙蓮寺石池竈記), 다가(茶歌)
강 사 : 석 용 운 스 님
1997년 7월 23일
초 의 문 화 재 단 |
묘련사석지조기(妙蓮寺石池竈記)
이제현
삼장순암법사(三藏順菴法師)가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금강산(楓岳)의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그길로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을 유람하였다. 그때 정자위에 석지조가 있으므로 주민에게 물으니, 대개 "옛날 사람들이 차 끓여 마시던 것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법사가 혼자서 생각하기를 어릴 때 일찍이 묘련사에서 두 개 돌그릇이 풀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형상됨을 생각하면 이런 물건이 아니었든가 하였다. 이내 돌아 와서 찾아보니 과연 있었는데 그 한쪽은 네모나게 갈아서 말(斗)같이 하였고 그 가운데를 둥글게 하여 절구(臼) 같으니, 샘물을 담는 곳이요. 그 아래에는 구멍이 있어 입(口) 벌린 것 같으니, 흐리고 막힌것을 뽑아 맑은 물을 고이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두곳이 움폭하고 둥근데가 있는데, 이것은 불을 때는 곳이요 그릇을 "求" 곳이다. 또 구멍을 좀 크게하여 움폭하고 둥근데 통하게 하였으니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으로서 합하여 이름하면 "석지조"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십여명 인부를 시켜 굴려다 처마 아래에 놓고 손님을 초청하여 거기에 둘러 앉게 한 다음 백설같은 샘물을 길어다 황금같은 움싹(芽)차를 끓이면서, 익제(益濟)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 최정안(崔靖安) 공이 일찍이 쌍명기로회(雙明耆老會)를 열었는데, 그곳이 지금 이 절의 북쪽 산으로 절에서 가깝기 수백보이니, 이것이 그 당시의 물건인지요. 목암(牧菴) 무외국사(無畏國師)가 이 절에 거주 하였으니, 삼암(三菴)같은 이가 일찍이 왕래한 일이 있고 한 번 글로 평가 하였다면 이 물건의 값이 반드시 3배는 되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묵은 풀속에 묻혀있게 된 것이오. 쌍명회로 부터 지금까지는 2백년이나 되는데, 처음으로 나를 위하여 한 번 나와서 앞으로 소용이 있게 되는 것이니 기문(記文)을 써서 이 물건의 그 동안 불우했던 것을 위로하고, 내가 능히 얻게 된 것을 경축하여 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쌍명회합에 대하여는 이학사 미수(眉叟)라는 이가 있어, 한포기 풀, 한그루 나무의 미세한 것에 이르기 까지도 그것이 담소(談笑) 거리가 될 만한 것이면 모두 시문(詩文)에 적었는데, 지금 그 문집 중에서 찾아 보아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 후에는 일 만들기를 좋아 하기로 최태위(崔太慰)의 형제 같은 이가 있어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이 돌이 "지조(池竈)"로 된 것이 쌍명회 전의 일이라면, 저 한송정의 것과 어느 것이 먼저가 되고 뒤가 될지 모를 일이니, 무릇 그것이 묻혀서 불우하게 된지가 오래이다. 어찌 삼암에게 만이리오, 미수에게도 역시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의 삼백년 전에 파 묻혔다가 하루 아침에 나타났으며, 삼암과 미수로도 만나지 못하였든 것인데, 법사와 만남이 있게 되었으니, 만나는 것도 이른바 운수라는 것이 그 사이에 있은 것 같다. 물건과 사람이 항상 서로 그 이름을 내게 되는 것으로서, 가정(柯亭)의 피리와 풍성(豊城)의 검(劍)이 옹(邕)과 환(煥)을 기다려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원래 두 사람의 알아보는 식견이 천년 뒤에서라도 감탄하는 바이지만, 그 이름이 난 것은 역시 두 물건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법사는 벌빙(伐氷)하는 명문의 자손으로 머리를 깍기는 하였지만, 원래가 부귀한 사람이다. 지금 천자의 사신이 되어 와서 한 나라의 임금으로도 공경하고 천애하기를 사우(師友)같이 하는데, 도리혀 소인묵객(騷人墨客)들과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장소에 거닐고 있으니, 그 도량을 알 만한 일이다. 장차 뒷날에 가서 오늘일을 미처 보지 못한 이들도 그 이름을 듣고서 이 두 석물(石物)을 알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혹시 옹과 환의 피리와 검과 같을 것인가 하였다. <지원 (至元 : 1337년> 3년 추석(秋夕)에 익제 이재현은 기한다.>
註 : 채옹(蔡邕)이 회계현(會稽見) 가정(柯亭)에서 서까래 대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기이한 소리가 나게 하였고 풍성(豊城)에 용천(龍泉) 태아(太阿) 두 칼이 땅 밑에 묻혀 있었는데 뇌환(雷煥)이 천문지리(天文地理)에 통하여 풍성령(豊城令)이 된 뒤에 옥터(獄基)에서 발굴 하였다.
벌빙(伐氷) : 경대부(卿大夫) 이상의 귀한 신분을 갖인 집에서만 상(喪) 제(祭)에 얼음을 쓰게 되었으므로 벌빙의 집이라 하였다.
註2 :미수(眉叟) - 이인로(李仁老)
妙蓮寺石池竈記 / 李齋賢
三藏順菴法師奉天子之詔 祝釐于楓岳之佛祠 因遊寒松之亭 其上有石池竈焉 訊之土人 盖昔人所以供茗飮者 而不知作於何代 師自念曰 幻時嘗於妙蓮寺 見二石草中 想其形製 豈此物耶 及歸物色而求 果得之其一 方刳之如斗 爲圓其中如臼 所以貯泉水也 下有竅如口 啓以洩其渾 塞以畜其淸也 其一則有二凹 圓者. 所以庴火 橢者. 所以滌器 亦爲竅差大 以通凹之圓者 所以來風也 合而名之 所謂石池竈也 於是命十夫轉置之宇下 邀賓客列坐其次 挹白雲之泉 煮黃金之芽 因謂益齋曰 昔崔靖安公 嘗爲雙明耆會 其地於今寺之北岡 去寺數百步而近 此其當時物歟 牧菴無畏國師 住錫玆寺 有若三菴 日嘗往來 一經題品 價必三倍 迺爲棒穢所掩沒 自雙明迨今幾 二百年 始爲吾一出而效用於前 請爲記 以慰其不遇而慶余之能得也 竊惟雙明之會 有李學士眉叟 凡一草木之微 苟可以資談咲 皆載之詩文 今考其集中 未見一語及此何耶 其后亦未聞好事如崔太慰兄弟者 來家于此 石之爲池竈 其在於雙明之前 而與夫寒松亭者 未知孰爲先后也 盖其晦而不遇也久矣 豈獨于三菴 其于眉叟 亦未之遇也 然而晦幾三百年之前 而現於一朝 雖眉叟三菴之未遇 而有師之遇 若有所謂數者 存乎其間 物之與人常相爲其名焉 柯之笛豊之劒 待邕煥而著稱固也 二子之鑑識 爲千載所服膺 亦以夫二物也 師伐氷水華胃也 雖圓其顧而素富貴者也 今爲天子之使 一國之主敬愛之如師友 顧乃與騷人墨客逍遙乎風月之場 其襟度可見矣 將使後之不及見者 聞其名而知其心之二石也 豈亦邕煥之笛劍歟(至元三年丁丑秋夕 益齋李某記碑.)
다가(茶歌) ㅡ 범해각안
책을 펴 놓고 오래 앉아 있으니 정신이 흐려지고,
차 마시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니 견디기 어렵구나.
꽃이 샘갓에 피니 물 맛이 따뜻하고 달콤하여,
물 주전자 가지고 화로 품고 물을 끓이네.
일 이 삼불(沸)에 맑은 향기가 뜨고,
사 오 육잔(椀)을 마시니 땀방울이 맑아 지네.
육우(桑苧)의 다경(茶經)은 이제야 비로소 깨달겠고,
노동(玉泉)의 다가(茶歌)는 그 대체만을 알겠네.
보림사(寶林寺)의 작설(禽舌)차는 관청(管府)에 받쳤고,
화개동(花開洞)의 진품은 궁궐에 공납했네.
함평 무안의 토산품은 남방의 기물이요.
강진 해남에서 만든 차는 북경까지 알려졌네.
마음의 누는 일시에 다 달아서 없어지고,
개운한 정신은 맑고 밝아서 반나절을 더하네.
졸음과 싸워 물리치니 눈앞이 환해지고,
소화가 잘 되고 가슴이 휜히 열렸네.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일찍이 경험했었고,
한기 가시고 독도 푸는 것은 또한 확실한 일.
공자님 묘에도 차를 올린 바 있었고,
부처님 전에도 정성스레 공양을 했네.
무등산 작설(槍旗)은 그 어짐을 이미 시험했고,
백양사 작설, 조취도 신기함을 알았네.
덕용산의 용봉단차(龍鳳團茶)는 세상에 알려졌고,
월출산에서 나는 차도 세상에서 믿고있고,
초의 스님 살던 옛터(일지암)는 이미 빈터만 남았고,
리봉(离峯) 스님 계신 곳은 지금도 편안하구나.
차 만드는 일은 법도에 맞춰 조화를 이루었고,
보관(穩藏)도 옛법에 의해 암자에 저장했네.
좋고 나쁨을 논하지 않고 남파스님 방법을 따랐고,
많고 적음을 사양하지 않고 영호스님의 뜻을 따랐네.
세속를 보니 차 좋아 하는 사람들 많아,
당송(唐宋) 양대의 성현들에게 떨어지지 않네.
선종(禪宗)의 유풍은 조주 종심선사의 화두요,
참다운 맛은 제산(霽山)스님이 먼저 얻어 보았네.
만일암에서 달 밝은 밤에 공부 하다가,
차 끓이기 위해 화로 불을 대롱으로 부네.
좋은 상자와 큰 낫을 가지고 설날을 가려서,
성학스님이 물을 길면서 태연 스님을 부르네.
만가지 병과 천가지 수심이 모두 가시니,
내 성품대로 맡겨 소요하니 부처와 같구나.
알맞게 물을 끓이고 다보를 기록하고 송(頌)을 논하는 동안,
한 개 별이 새벽에 한없는 하늘 갓을 지나가네.
어찌하여
기이하고 좋은 서적을 나에게 전해 주는가.
茶歌
梵海覺岸
攤書久坐精神小, 茶情暴發勢難禁,
花發井面溫且甘, 㪺罐擁爐取湯音,
一二三沸淸香浮, 四五六椀微汗?此,
桑苧茶經覺今是, 玉泉茶歌知大體,
寶林禽舌輸營府, 花開珍品貢殿陛,
咸務土産南方奇, 康海製作北京啓,
心累消磨一時盡, 新光淨明半日增,
睡魔戰退起眼花, 食氣放下開心膺.
若利停除曾經驗, 寒感解毒又通明,
孔夫子廟叅神酌, 釋迦氏堂供養精,
德龍龍團絶交濶, 月出出來阻信輕,
中孚舊居已成丘, 离峯棲山方安缾,
調和如法無爲室, 穩藏依古禮庵帡,
無論好否南坡癖, 不讓多寡靈湖情,
細看流俗嗜者多, 不下唐宋諸賢聖,
禪家道風趙老話, 見得眞味霽山先,
挽日工了玩月夜, 茗供吹籥煎相牽,
正笥彦銍臘日取, 聖學汲泉呼太蓮,
萬病千愁都消遣, 任性逍遙如金仙,
經湯譜記及論頌, 一星燒送無邊天,
如何, 奇正力書與我傳.
해제
다가(茶歌)는 두륜산 대흥사 만일암(挽日庵)에서 범해각안 스님이 노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다가 말고는 아직까지 발견이 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중국에는 노동(盧同)의 다가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범해의 다가가 있는 셈이다. 내용은 우리나라 각지방의 차를 예찬한 것이 특징이랄수 있으며 차의 효능 효과도 말하고 있다. 또 제다법, 저장법, 음다법에 이르기 까지 상세히 논하고 있다.
ㅡ 다음 블로그 <현로의 블로그> 마운틴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ksmtb/7484937
동문선 제69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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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
묘련사 석지조 기(妙蓮寺石池竈記) |
이제현(李齊賢)
삼장순암법사(三藏順奄法師)가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풍악산(楓岳山) 절에 불공드리고서 그 길로 한송정(寒松亭)을 유람하였다. 그 위에 석지조(石池竈)가 있으므로 주민에게 물으니, 이는 옛날 사람들이 차를 끓여 마시던 것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법사가 혼자서 생각하기를 어릴 때 일찍이 묘련사(妙蓮寺)에서 두 개의 돌이 풀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형상을 생각하면 이런 물건이 아니었던가 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찾아 보니 과연 있었는데 그 한쪽은 네모나게 갈라서 말처럼 만들고 그 가운데를 둥글게 하여 절구와 같으니 샘물을 담는 것이고, 그 아래에는 구멍이 있어 입과 같으니, 흐린 물을 나가게 해서 맑은 물을 고이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두 곳이 움푹한데 둥근 것은 불을 때는 곳이고 길쭉한 것은 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 구멍을 조금 크게 하여 움푹하게 하였는데 둥근 것은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으로, 합하여 이름하면 석지조(石池竈)라는 것이었다.
이에 10명의 인부를 시켜 굴려다 지붕 아래에 놓고 손님을 초청하여 거기에 둘러 앉게 한다음 백설같은 샘물을 길어다 황금같은 차를 끓이면서 익재(益齋)에게 말하기를, “옛날 최정안(崔靖安) 공이 일찍이 쌍명기로회(雙明耆老會)를 열었는데, 그곳이 지금 이 절의 북쪽 산으로 절에서 가깝기가 수백 보이니 이것이 그 당시의 물건인지요? 목암(牧菴) 무외국사(無畏國師)가 이 절에 거주하였으니, 삼암(三菴) 같은 이가 일찍이 왕래한 일이 있고, 한번 글로 평가하였다면 이 물건의 값이 반드시 세 배는 되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무성한 숲속에 묻혀 있게 된 것이요? 쌍명회로부터 지금까지는 2백년이나 되는데, 처음으로 나를 위하여 한 번 나와서 앞으로 소용이 되게 되었으니, 기문을 써서 그 동안 이 물건이 불우했던 것을 위로하고 내가 얻은 것을 경축하여 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쌍명회합에 대해서는 이 학사(李學士) 미수(眉叟)라는 이가 있어서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의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도 그것이 담소(談笑) 거리가 될 만한 것이면 모두 시와 문장에 적었는데, 지금 그 문집 속에서 찾아 보아도 이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 후에는 일 만들기를 좋아하기로 최 태위(崔太尉)의 형제같은 이가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이 돌이 지조(池竈)로 된 것이, 쌍명회 이전의 일이라면 저 한송정의 것과 어느 것이 먼저가 되고 뒤가 될지 모를 일이니 대개 그것이 파묻혀서 불우해진 지가 오래된 것이다. 어찌 삼암에게 뿐이리요. 미수에게도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의 3백년 전에 파묻혔다가 하루 아침에 나타나 삼암이나 미수와도 만나지 못하였으나, 법사와 만나게 되었으니 만나는 것도 이른바 운수라는 것이 그 사이에 있는 것 같다. 물건과 사람이 항상 서로 이름을 내는 것으로서 가(柯)의 피리와 풍(豐)의 검이 옹(邕)과 환(煥)을 기다려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원래 두 사람의 알아보는 식견이 천 년 후에도 본받을 만하지만 이름난 것은 역시 두 물건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법사는 벼슬하는 명문의 자손으로, 머리를 깎아 중이 되기는 하였지만 원래는 부귀한 사람이었다. 지금 천자의 사신이 되어 와서, 한 나라의 임금으로도 경애(敬愛)하기를 사우(師友)같이 하는데, 도리어 시인(詩人)이나 문장가들과 음풍영월(吟風詠月)하는 곳에 거닐고 있으니, 그 도량을 알 만한 일이다. 장차 뒷날 오늘 일을 미처 보지 못한 이들로 하여금 그 이름을 듣고 그 마음 가운데의 두 개의 석물(石物)을 알게 하려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옹과 환의 피리와 검과 같은 것이랴.
妙蓮寺石池竈記 |
ㅡ 한국고전종합DB 자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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