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다선일미의 현장 ①│초의선사 법손 화중스님 그후 이야기
“광복 이후 대흥사 다풍 누가 이었는가”
석천(본지 편집위원)
지난 석달 사이 한국 차인들에게 역사적 사건이 연이어 빚어졌다. 그 첫째가 지난해 11월 작설차를 화두로 한국 차문화를 바로 세운 초의 법손 화중지산 스님에 대한 발굴이고, 두 번째는 지난해 9월 중국 사천성(四川省) 대자사(大慈寺)에서 개최한 무상선사(無相禪師) 학술연토회와 한중다예교류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차계의 지각 변동은 이미 2001년 예견했었다. 끽다거의 본고장 하북성 조주 백림선사에 차시비가 세워지면서 무상법맥을 중국 정부가 공식인정하면서 그 수순으로 무상이 당나라 시기 주지로 있었던 대자사에서의 차문화 교류는 예견된 일이었다. 그 무렵 중앙일간지에서는 천 년간 망각을 딛고 일어선 무상선사를 크게 보도한 바 있다. 그 뒤였다. 2004년 11월 본지를 통해 처음 초의 법손 화중지산 스님이 공개되면서 차문화계는 일파만파로 번진다. 지금까지 초의 법손으로 응송(應松) 박영희(朴英凞 1893~1990) 스님으로 굳어져 있는데, 웬 뚱딴지 같이 화중이냐며 새롭게 던진 화두에 충격적이었다. 왜 여태 이런 스님이 알려지지 않았는가라고 질책의 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화중스님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계기는 몇 해전 대흥사에서 다맥 전수라는 새로운 이변이 벌어지면서 그 뒤를 쌍계사가 이어 새로운 다맥 전승제도를 만들면서 차계 전체가 다맥이란 새로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초의선사가 대흥사에서 열반에 든 지 45년 뒤 범해각안(梵海覺岸·1820~1896) 스님이 초의의 다풍을 고스란히 이어오면서 대흥사의 다풍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후 지난 2001년 10월 14일 송광사에서 열린 금명보정 선사의 학술회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부휴-소요태능-연담유일-아암혜장-초의선사로 이어지는 새로운 다풍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 학술회의를 끌어내는데 필자가 앞장을 섰고 당시 송광사 주지인 현봉스님이 적극 수용함으로써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송자로 알려진 금명보정(錦溟寶鼎·1861~1930) 스님은 순천 주암면 운월리에서 태어나 15세 때 송광사에 출가하여 제방의 종장들을 모시고 내외전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강호의 선원을 두루 참방하여 선정을 닦으면서 후학을 제접했고 80여 편의 차시를 남겨 차인들이 주목했다. 금명보정 선사는 50년간 묻혀져 오다가 송광사가 극적으로 금명보정 선사의 차시를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다선일미 논의의 불을 당겼다. 당시 토론의 자리에서 “왜 이토록 귀중한 자료가 세상에 일찍 알려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현봉스님은 “어느 한 문중이 자리잡으면서 그 밖의 문중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 불문율일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금명보정 선사 학술회의가 차중심으로 부각되자 당시 한 토론자가 발표자로 나온 김영태 박사에게 “한국의 다맥이 과연 존재하느냐라”는 질문에 “다풍은 있어도 다맥은 없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해왔다. 한국 선다의 고향으로 송광사가 부각되는 까닭은 보조국사 이후 다송자 보정선사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는데 다시 80송을 남긴 보정선사가 부각되지 않는 이유는 송광산문의 법풍이 서산-부휴의 선종정맥이 전멸한 탓으로 역사에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다선의 고향으로 대흥사가 부각되는 까닭은 초의선사의 다풍이 연연히 이어져 오면서 대흥사는 한국 다선의 고향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선일미란 원래 송나라 때 원오극근 선사가 일본인 제자에게 써준 4자진결인데 그 말이 일본 무라다쥬코우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오극근 - 백운수단 - 양기방회를 거쳐 고려 때 석옥청공에게 법을 받아온 태고보우 국사에 의해 고려로 이어져 왔다. 그렇게 보면 일본보다 오히려 이 땅에서 다선일미 사상이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진다.
다도와 선도(禪道)는 민간형성의 도(道)의 근본정신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현대의 다도는 선승 에이사이(榮西) 선사가 중국으로부터 차종을 수입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다도는 무라다쥬코우(材田珠光·1422~1502)에서 시작되어 다케노쇼오(武野紹鷗)를 거쳐 센노리큐(千利休)에 이르러 완성되었는데, 일본선학을 완성한 이큐(一休)선사에 의해 다선정신이 굳어졌다. 또한 다선일미는 중국에서 발원하여 일본에서 발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칸(古鑑)의 『차와 선』에도 원오의 친필 족자를 센노리큐 차실에 자랑스럽게 걸어 놓고 있다고 적고 있다. 특히 다선일미의 선풍을 선다일여(禪茶一如)라는 말로 바꾼 무라다쥬코우가 새로운 차법인 초암차를 도입한 후, 뒤를 이어 센노리큐와 와비차로 대성시킴으로써 다선일미가 일본차의 정신인양 말하고 있다.
초의 선사가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 평생을 보낸 뒤 그가 열반에 든 지 45년 만에 그의 다풍을 이은 범해각안과 보정선사 등이 초의의 다풍을 면면히 이어왔다. 차문화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면서 한국다선의 조정으로 대흥사가 떠오르면서 그 대흥사의 다풍을 누가 이어왔느냐에 대해 부쩍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응송 박영희가 초의의 법손으로 초의의 다풍을 이어온 것이 전설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지난 해 11월 본지가 초의 선사 법손인 화중스님을 밝혀냄으로써 초의 다풍을 이은 화중스님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독자들로부터 화중스님의 육성을 좀 더 자세히 밝혀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고 화중 스님을 역사 밖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던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1995년 작고한 예용해 선생이 1983년 당시 발표한 ‘우전차, 그 후 이야기’에 대한 논고를 본지 독자를 위해 초의선사 법손 화중스님에 대한 이야기 전문 전체를 다음 호에 소개하기로 했다.
지난해 11월 작설차 화두삼아 한국차 바로 세운 초의 법손 화중스님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자 맨 먼저 그 문제를 거론한 곳은 영남일보였다. 2005년 1월 7일 초의다맥과 응송과 제자 박동춘 편에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광복 이후 대흥사의 다풍을 누가 이었는가를 두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어떤 이는 응송스님을 어떤 이는 초의선사가 살았던 대광명전을 지키며 그의 다선일미정신을 이어간 화중스님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처럼 초의선사가 한국차의 중흥조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까닭은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실장 말처럼 조선 후기 진경시대가 끝나갈 무렵 초의 의순과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의 등장으로 차문화를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그 중심에 초의가 나와 우리차의 정신을 중정청경으로 정리하며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또 다른 경지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차의 세계》2005년 2월호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