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7. 12:49ㆍ우리 이웃의 역사
거란족(契丹族) 中國의 歷史文化
거란족(契丹族)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4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1] 광개토대왕 때는,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 9월) [2] 395년 고구려는 염수(鹽水)[3]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4]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거란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이후에는 대체로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되었고, 서요는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 또는 한족을 나타내는 '햐타드(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3세기 이전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인(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4세기경부터 내몽고 일대에 거주했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 종족. 혼혈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거란 문자, 언어에서의 기초 어휘, 관습 등을 통해 추정해봤을 땐 거의 몽골의 친척 정도로 파악된다. 역사서로 따저봐도 몽골과 거란은 동족이나 다름없다. 몽골은 실위에서 나왔는데 실위는 동호-선비의 후손,거란도 동호-선비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되어 있다. 몽골-만주-화북의 사이에 끼어있는 위치상 4세기에 데뷔한 이래 몽골의 유연-돌궐과 만주의 고구려 화북의 북위-수,당에게 지배받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위구르와 당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당을 약탈했으며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와는 대립했다.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시키고 발해를 멸망시키고 내몽골의 실위,해를 병합하고 외몽골의 키르기즈까지 멸망시켜 초원의 패자가 된다. 그러나 거란의 압제에 저항하여 아골타 아래 일거에 일어난 금나라에게 한 방에 망하고 서역으로 도망가 서요를 세운다. 이후 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부흥운동을 몇 번 일으켰으나 모두 망하고 친척인 몽골에 흡수된다. 현재는 다우르족이 거란족의 후손으로 파악되며 몽골과 중국이 거란사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거란이란 말은 한자독음은 '계단(契丹)'[1]이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글단→글란→그란→거란으로 변화했다. 신채호가 남긴 글만 봐도 거란이 아니라 글안으로 적고있는게 보인다. 즉, 거란은 한자의 외국식 발음이 아니라 한국 내부에서 탄생된 발음이다. 거란족들은 자신들을 거란어로 키탄(Khitan)이라고 불렀다. 키타이(Khitai)[2] 혹은 키단(Kidan)이라고도 한다. 키타이의 경우는 이란식 명칭이다. 그 영향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계 국가들과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 혹은 한족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위구르어의 히타이(خىتاي)나 포르투갈어의 카타이(Catai), 몽골의 햐타드(Хятад), 카자흐어의 크타이(Қытай) 등이 예이다. 참고로 홍콩의 항공사인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의 캐세이(Cathay)는 영어의 고어로 중국을 말하는 또 다른 단어인데, 그 어원은 거란에서 온 것이다.
4세기경 전연의 영향력하에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막해의 영향력 하에 있게 되었다. 388년 고막해가 북위에게 토벌당하자 이후 어정쩡하게 독립하게 되었다.
등국 중에 북위의 군대가 크게 깨뜨리자, 마침내 달아나 흩어져 고막해와 나뉘었다. 수십 년이 지나 점차 커져서, 부락이 화룡의 북쪽 수백 리에 있게 되었다.─ 위서 거란전
그 뒤 나름대로 세력을 키워 4세기 후반 북위와 대립했으나 압도적인 세력차로 북위에 복속했고 이러한 주종관계는 야율아보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북제-북주-수-당이 물려받는다. 또한 고구려의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나 일부는 광개토대왕대의 거란 토벌로 고구려에게 복속하여 그 번병이 되었다. 일부 거란족은 최후까지 고구려편에서 싸웠다고 한다. 그 후 몽골방면의 북방이 유연으로 정리되면서 유연과 대립했고 유연이 쇠퇴할때는 유연을 공격하여 약화시키기도 하나 돌궐이 등장하며 그에 복속되고 거란과 북방간 그러한 주종관계는 위구르시기까지 이어진다.
7세기경 대하씨가 거란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대하씨는 당에 귀부하여 이씨성을 하사받게 된다. 고구려 멸망 뒤 거란에 대한 당의 지배권은 공고해지는 듯 했으나 696년 이진충이 무상가한을 칭하며 독립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이진충이 죽고 후계자 손만영이 집권한 뒤에야 측천무후는 돌궐의 도움을 받아 거란을 멸망시켰으나, 돌궐과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돌궐의 지배를 받게 된다. 돌궐이 730년대에 몰락하면서 거란은 다시 당의 영향권에 들어가지만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거란은 위구르(회흘)에게 복속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야율아보기 등장 이전까지 계속된다.
907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대통합했다.그리고 해와 실위를 정복하고 서하를 복속한 다음에, 발해까지 멸한 뒤 요나라를 건국했다. 요 건국 뒤에도 거란(키타이)이라는 이름은 요와 함께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된다.
최종적으로 야율아보기의 요 제국은 몽골고원의 키르기즈까지 멸하여 영토가 몽골,만리장성 이남 연운16주,만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고원은 직할지배가 아닌 간접지배중이였고 만주 역시 요동과 부여 지방이 여진족과 발해 유민의 반동으로 지배력이 매우 불안정했다. 그래서 실효적인 지배력이 미친 영토만 따지면 영토가 매우 쪼그라든다.
몇 번 고려를 침공하기는 했으나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다. 대신 북송을 신나게 뜯어먹었긴 했다. 하지만 거란의 여자, 매 등의 착취로 인해 분개한 여진족이 아골타 하에 규합하여 요를 멸망시켰다. 결국 1125년 여진의 금과 북송의 협공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잔존 세력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해 서요를 세웠다.
그 후엔 몽골의 발흥과 함께 거란족 대부분이 몽골의 전위부대로 활용되면서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멸망해 사라졌다기보다 문화적인 차이도 없고 금과 싸울 때부터 뜻을 함께한 몽골에 이들이 딱히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동화되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원래 유목부족의 민족 형성이라는게 그런지라... 특히 거란인들은 몽골 제국에서 크게 중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야율초재. 금나라가 요나라의 원수이기 때문에 같이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인 몽골에 많은 거란인이 협력하였다. 그 외 칭기즈 칸의 참모로 활약한 야율아해와 장군으로 활약한 야율독화 형제가 있었으며, 칭기즈 칸이 일어날 무렵 거란인들은 만주에 대요수국을 세우고 할거했다가 칭기즈 칸에게 항복, 복속되었다. 대요수국의 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고려로 내려와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웅거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 어찌 보면 고려와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한 셈. 대요수국이 대표적인 사례고, 거란인들은 금이 흔들릴때 종종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몽골과 중국은 이 종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안습인 점은 거란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한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거란은 그저 오랑캐였다 보니 티베트 문제와 달리 이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가진다. 애초에 현재 거란을 계승한 민족이 남아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지만 안습. 뭐 어차피 거란과 몽골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저나왔고 몽골도 동계로 여기기 때문에 이점은 크게 상관없지 싶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2005년 기준으로 중국의 소수민족(공식적으로 56개로 집계됨.) 중 34번째로 많다. 약 12만명. 티베트 불교, 즉 라마교를 믿는다. 분포 범위도 거란족의 그것과 대강 일치하고.... 스스로 거란계승의식을 가진데다가 중국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유전적으로도 거란의 후손이라는데.재미있는 점은 요하 유역과 하북성 일대에서 웅거하던 요가 망하고 야율대석이 서역으로 이주하여 다시 요나라를 이어갔는데도 이 문서에서는 물론 다른 매체에서 요나라를 다룰 때도 요나라는 천조제 이후로 공중분해 된것 마냥 설명되고는 한다. 더구나 거란족은 카라 키타이가 망하고도 이란까지 이주해 다시 요를 이어갔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강동성에서 포로로 잡힌 8만의 거란 유민들은 고려에서 도살업을 하거나 갖바치, 고리, 광대 일등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안 그래도 이런 일들은 천대받은 일들이었고, 거란은 역사적으로도 고려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유민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리 만무했다. 이는 조선시대가 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임꺽정이 유난히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쎄고, 칼도 잘 다뤘다고 하는데, 거란 유민들이 백정이 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임꺽정은 전투민족 거란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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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카페 <오디오와 컴퓨터> http://cafe.daum.n 자료에서 ......
사이트 1773 - <거란 사회문화사> 1, 광개토-실위와 거란족 세월호와 정치평론
2014.07.21. 17:47
http://blog.naver.com/igor5474/220067172074
"거란에 대해서 <위서>, <북사>, <수서>에서는 거란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는데,
해와는 이종동류이며, 등국중(386~395)에 모용씨에게 크게 격파되어
해와 같이 송막지간에 도망가서 숨었다고 하였으며,
...
이어서 345년에는 다시 북쪽으로 우문부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여중 5,000여락을 사로잡았는데 이때 우문선우는 북막으로 도망가서 죽고,
그때 흩어진 잔부가 바로 거란과 고막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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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는 게 요런 건데,
힙쭈구리 학바리가 뭐라고 쓴 건지 좀 애매하니 몽롱한 면이 있어요.
중국놈들 사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걸 정리한 한국 학바리 교수 말이야.
간단히 정리하면,
345년에 우문부는 1차로 공격 받아서 선우(= 칸, 황제)가 죽고,
등국중(386~395) 때 다시 공격을 받아서 송막지간으로 도망갔다는 얘기.
"등국중"이라는 게 사람이여 머시여?
학바리 글로는 간파하기가 쉽지 않지요?
백제와의 전쟁과 더불어 ,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8] 9월) [9]395년에는 염수(鹽水)[10]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11]
요것 땜에 중요하다는 겁니다.
392년과 395년.
광개토가 두 차례에 걸쳐서 거란을 공격하지요?
아닌 밤중에 거란 공격은 왜 했는가?
거란이 다 죽어가니까!
위에 인용한 글을 보면, 거란이 다 죽어간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런 첩보를 들은 광개토가 거란에 쳐들어가서는
1차로 포로로 잡혀간 백성 1만 명을 되찾고,
395년에는 2차로 쳐들어가서 도둑질을 하고 개선합니다.
이런 게 정치잖어.
피도 눈물도 없지요?
거란놈들이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서 다 죽어가니까
그 소식을 듣고 재빨리 군대를 움직여서
다 죽어가는 놈의 숨통을 끊을 듯한 기세 광개토.
정치라는 게 이런 거란 말이여.
요런 걸 잘했으니까 광개토가 영특 분자라느니 하면서 지금도 칭찬 받잖어.
그때 힙쭈구리허니 가만 있었으면 지금 역사책에서 칭찬하것어?
그래 안 그래, 맨날 공주만 찾던 애 엄마들 여러분?
정치 감각 좀 키우란 말이여.
이 땅의 정치 한다는 새끼들은 맨날 여객선 한 탕 궁리만 하면서 살잖어.
그런 새끼들 아래 살면서 정치 감각이 없으면 애들이 어떻게 되나요?
세월호가 잘 보여줬잖어?
다시 지난 주 지도 출동.
영특하신 일본놈들 지도.
고구려 왼쪽에 트리오가 있습니다.
거란, 고막해, 북위.
여기에 나오는 거란과 고막해가 바로 처음에 인용한 그 거란과 고막해.
광개토는 이중에서 거란을 쳤다는 얘기.
http://ja.wikipedia.org/wiki/%E5%A4%AB%E4%BD%99
바로 전 시대로 가보면 이런 지도.
고구려는 북방의 강대국 전연에 막혀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는 상태.
이 전연이라는 나라가 바로 모용씨 전연.
전연 바로 위에는 우문부.
이 우문부가 모용씨 전연의 공격을 받고 다 죽어가는 상태로 빌빌거리다가
광개토의 전격 작전에 휘말려 거의 다 죽을까 말까 하는 압사 상태로 몰리게 됩니다.
거란!
광개토 시절인 395년에만 해도 아주 비참했던 거란족.
그 뒤에 그들은 어떻게 됐는가?
궁금하지 않어?
계속 추적을 해보는 겁니다.
갈로맹광, 무대 앞으로!
북연은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후연(後燕)을 계승한 나라이며, 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운의 즉위를 축하하며 같은 종족으로서의 우의를 표했고, 고운도 이에 답례해, 양국은 친선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뒤 고운이 피살된 뒤 친구였던 풍발(馮跋)이 즉위했는데, 고구려는 풍씨 왕들과도 친선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당시 동으로 세력을 뻗쳐오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양자는 서로 협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위의 공격이 가열되자, 북연 황제 풍홍(馮弘)은 435년 양이(陽伊)를 고구려에 보내, 고구려군을 파견해 북연 지배층을 고구려로 망명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갈로맹광을 시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연의 수도 화룡(和龍)에 가 그 임무를 수행케 하였다. 고구려군이 화룡의 교외에 도착할 즈음 북위 원정군도 성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성 안에서는 황제 등 고구려에 의존하려는 세력과 상서령(尙書令)곽생(郭生) 등 북위에 투항하려는 일파가 대립해 있었다.
후자측에서 먼저 성문을 열고 북위군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북위군이 주저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갈로맹광은 고구려군을 성 내로 돌입시켜 무기고를 점령하고 반대파를 제압, 성내를 장악하였다. 이어 성 내를 약탈하고 불을 지른 뒤 풍홍 이하 주민들을 몰아 고구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 때 갈로맹광의 고구려군은 후미를 담당해 북위군을 경계하면서 서서히 동으로 나아갔다. 망명의 행렬은 80여 리에 이르렀고 북위군과 고구려군은 시종 첨예하게 대치했으나, 양자의 무력충돌은 없었다. 갈로맹광의 이외 행적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갈로맹광 [葛盧猛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나는 이 놈이 거란족 출신이 아닐까 싶으요.
갈로와 맹광이라는 두 놈이건 아니면 갈로맹광이라는 한 놈이건 간에
도대체가 성이 이상하지요?
꼭 우리네 을지문덕 같은 것이 정통파 고구려 같지는 않어.
"당대에 와서는 629년부터 조공하기 시작했다.
또 해수(고막해의 추장)인 소지는 당의 고구려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으며."
- 202-203페이지
투르크 = 돌궐만 고구려 땅을 누빈 게 아닌지요?
고막해 놈들도 말 타고 두두두두 달려댕깁니다.
그 고막해란 놈들이 우문부 소속이었다가 거란과 함께 큰 타격을 받았다는 고막해.
이놈들이 당태종 따라댕기면서 고구려에도 쳐들어오지요?
고막해만 쳐들어오나?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5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과 거란으로 구성된 이민족의 군대도 다수 동원되었다.
거란도 쳐들어오잖어.
돌궐에다가 거란, 고막해.
말 좀 탄다는 놈들은 다 쳐들어오는 겁니다.
유목민!
정체란 이런 거란 말이여.
힘이 약할 때에는 강대국의 용병으로서 이름을 날린다.
먹고 살고 힘들어 죽것는 상황에서 당태종이 돈 준다는데,
그걸 거절하면 추장은 부족민들의 반란으로 목 떨어지는 거지요?
사실은 당 태종이 돈을 주는 게 아닙니다.
약탈을 허 하노라!
당 태종은 이런 칙령을 내리두만.
고구려 땅에 대한 약탈을 허 하노라.
그런 칙령은 받은 알거지 고막해와 거란족은 뭐라 그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큰 절 올리고 나서 기분 좋게 고구려 땅으로 두두두두 달려가는 겁니다.
644년에 이런 칙령을 내린 바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비가 많이 내려서 당 태종이 약탈하지 말라는 칙령을 다시 내립니다.
그럼, 이런 전쟁 = 약탈을 겸비한 전쟁 시대에 고구려는 뭐 양반이었나요?
그렇지가 않지요?
약탈에는 약탈!
수 문제는 이 사실을 듣고 글을 보내 이를 꾸짖었다.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은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遼西))를 선제 공격하였고 수비하던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이 겨우 방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의 북방 요충지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수 문제는 진노하여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말갈병 1만 대군을 동원해서 요서를 선제 공격했다고 하지요?
이게 바로 약탈이란 말이여.
정규군이 멋있게 진 치고 싸우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으면 쳐들어가는 것이고,
성이 튼튼해서 들어가기 어려우면 성밖 농촌만 초토화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재물 약탈에다가 여자 약탈.
이런 전쟁 하라 그려면 문명의 물을 먹은 고구려군은 실력이 딸렸던 모양이라.
해서 그런 전쟁에 꼭 데려가는 애들이 말갈병.
말갈이라는 게 백두산 산골짜기 알거지 신세니
중국땅 가서 맘대로 약탈하라 그러면 신이 나는 거지요?
647년 보장왕 6년, 당나라 태종이 마지막 남은 숙적 고구려 침공을 다시 하려 하였다. 당나라 조정의 논의가 다음과 같았다. "평원의 다른 족속들과 달리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앞서 왕이직접 원정했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645년에 수십 만 대군을 휘몰고 고구려에 쳐들어왔던 당태종.
안시성에서 쓴 맛을 보고난 뒤에 전략을 수정했다는 위키 급보.
위의 글에서 핵심은 아래 구절.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적은 군사가 뭔 일을 하려고 하면 기동력이 가장 중요하지요?
거기에다가 승질머리는 아주 더러워야 제격.
돌궐과 거란족, 고구려 땅으로 침투하여 마음껏 약탈하라!
역사책에서는 보기 좋게 꾸미느라 말을 빙빙 돌려쓴 거지만,
알맹이만 뽑아보면 약탈하라는 겁니다.
가서 여자들 보이면 맘대로 취하고, 물건 있으면 다 가져도 좋다는 얘기.
강대국이란 이런 거란 말이여.
유목민들 동원해서 고구려 땅을 약탈하라던 당나라가 망하니까
그 유목민들이 뭔 짓을 해요?
당나라 땅에 들어가서 통치를 한다!
국가의 힘이 강할 때에는 유목민들을 배후조종한다!
비단에 금은, 딱지 가지고 조종하는 거라고 했지요?
이런 거 주면 유목민 추장들은 아주 좋아하거던.
다만 그 유목민들이 힘이 없을 때.
금나라를 선제 공격한 칭기스칸!
책을 아무리 읽어도 금나라가 칭기스칸한테 먼저 뭐라고 한 건 없는 거 같어.
그래도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먼저 공격합니다.
총사령관들 데리고 칭기스칸이 회의를 했을 거 아니야.
저 금나라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가만 놔두면, 비단에 금은, 딱지 들고 살살 이간질 한다.
그런 꼴 보기 전에 먼저 공격해서 뜨거운 맛을 보여주자.
그 뜨거운 맛이란 바로 약탈!
처음에 금나라 쳐들어가서는 약탈질만 하고 돌아가는 전략.
세계 최강 군사력을 보유한 유목민들!
이들에게 당하면 나라와 백성을 통째로 내주는 것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배후조종으로 여기저기 전선에 투입하는 겁니다.
당 태종이 이런 건 잘 보여줬고, 그 뒤에도 이런 정책은 계속됩니다.
다시 광개토로 돌아와 보면,
그 당시 광개토는 단순한 도둑질로 만족했는가?
"소, 말, 양떼를 노획했다"는 구절 말이야.
백제와의 전쟁과 더불어 ,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8] 9월) [9]395년에는 염수(鹽水)[10]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11]
근거 없는 내 짐작이지만, 협상용으로 도둑질 한 것이 아닌가 싶어.
먹고 살 땅과 함께 도둑질 해간 "소, 말, 양떼"를 돌려줄 테니까
고구려 땅에서 충성하며 살아라 하는 협상.
이렇게 되면 거란족은 안전한 보호망과 함께 먹고 살 길이 열리지요?
또 고구려로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 서로가 좋은 겁니다.
다만 거란족이라는 게 언제 반란을 일으킬 지 모르는 애들이니까
<인질>로 해서 추장의 아들들은 고구려왕이 데리고 있어야 하는 법.
이런 건 중국에서 옛날부터 써먹던 전법이고,
발해가 이런 전법에 말려든 국가였다고 하두마.
새로운 왕이 들어설 때마다 인질은 당나라로.
어쨌거나, 갈로맹광 같은 고구려 장수로 보면 이런 가능성도 충분할 거 같어.
얘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란족 같어.
장수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때 군대의 구성이 어떤 구성이었는가 하는 점.
이게 중요하다는 뜻.
어쨌거나, 345년부터 시작된 유목민 거란족의 가시밭길!
대강 감이 오나요?
이쪽 애들한테 줘터지고 저쪽 놈들한테 도둑질 당해서는 알거지 신세.
그러고 살다가 당나라에 붙어서는 약탈 명령을 받들어 고구려로 쳐들어갔다가
송막도독부!
"649년(고구려 보장왕 8) 영주(營州)와 만리장성 외곽에 거주하던 거란족의 지도자인 이굴가(李窟哥)가 거란 부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당나라의 태종은 영주에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를 설치하고, 이굴가를 좌령군 대장군 겸 송막도독부 도독에 임명하였다. 당시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싸움이 잦을 때인데, 이굴가가 시종 당나라를 지원하여 고구려군을 괴롭혔다.
654년(보장왕 13) 고구려에서는 이굴가를 치기로 결심하고, 안고에게 고구려군과 말갈병을 이끌고 이굴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굴가의 분전으로 안고가 이끄는 고구려군과 말갈병은 신성(新城:지금의 撫順 부근)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고구려군은 5백여 명이 전사하고 7백여 필의 말을 빼앗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고 [安固] (두산백과)"
안동도호부보다 먼저 생기지요?
고구려 침공 전초기지 같은 송막도독부.
이러고 살던 거란족은 그 뒤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삽니다.
그랬다가 900년 무렵에 야율아보기!
영특 분자 야율아보기!
이때부터 거란족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되는데, 모든 것은 야율아보기.
성은 야율, 이름은 아보기.
"926년 해(고막해) 부장 발노은은 회계, 토번, 당항, 실위, 사타, 조고 등
정벌에 종정하여, 큰 공을 세워서 상자를 후히 받은 바 있으며,"
- 215페이지
몽고족의 조상 실위 분들이 또 나오지요?
이때는 몽고고원으로 많이들 기어올라간 상태.
올라갔더니 초강력 군단 거란군이 쳐들어온 겁니다.
해서 묵사발이 났다는데, 실위 전부가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일부 몇몇 부족.
약삭빠른 일부 부족은 거란족에 협력했던 것인지
거란 철강 산업의 역군이 됐다고 했습니다.
일부는 초토화되고, 일부는 산업 역군.
이게 바로 약소 민족의 설움이라는 것이여.
두 번째로 해(고막해)의 부장 발노은.
해 = 고막해란 345년부터 우문부가 초토화될 때,
거란과 같이 이리저리 도망치던 부족이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같은 애들인데,
우문 선우(= 칸)이 죽으니까 바로 아래 쫄따구들이
"이제부터는 내가 대장"이라고 우겼던 모양이라.
해서 두 부족으로 쪼개져 살다가 영특 분자 야율아보기 시대인 900년 무렵에
고막해는 거란족의 계속된 공격으로 하나로 통일이 됩니다.
그러면서 거란국 = 요나라에서 고위직을 차지하며 살았다는 고막해.
일제 때 일본놈들이 태평양 전쟁이니 중국 전쟁이니 안했으면,
한민족도 이러고 살 수 있었다니깐.
만주에서 대만까지 이어지는 그 넓은 땅을 일본놈들만으로 통치할 수 있나요?
2등 민족 한민족 우대 정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는 건데,
거란-고막해 관계를 보더라도 이런 건 자연스런 과정인 겁니다.
마지막으로, 926년!
이 해가 아주 중요해.
발해 멸망 926년.
황제 야율아보기가 대군을 직접 몰고 쳐들어가서 발해 멸망.
그 해에 거란의 다른 군대는 북쪽과 서쪽에 있던 잘잘한 국가나 부족 점령.
거란의 파워가 막강하지요?
이때 군대는 40만 대군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 한창 때 군대는 30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요.
북쪽과 서쪽으로는 잘잘 국가와 부족들, 동쪽으로는 강대국 발해.
목표는 초강대국 중국!
이제 남은 것은 중국의 송나라.
안타깝게도, 926년에 야율아보기는 50대 중반의 나이로 죽었답니다.
이러면서 거란국은 혼란으로 빠져드는 와중에 나타난 걸세출의 미망인.
Women of the Conquest Dynasties: Gender and Identity in Liao and Jin China (Hardcover)
이 책이 야율아보기 미망인 얘기가 아닌가 싶은디, 안 본 거니까 정확한 건 나도 몰러.
요(遼)나라 태조의 황후. 술률씨(述律氏)로, 이름은 평(平)이고, 거란(契丹) 이름은 월매타(月埋朶)다. 태조가 즉위하자 응천대명지황후(應天大明地皇后)에 책봉되었다. 병사를 행군시키고 무리를 이끌면서 일찍이 서로 상의했다. 병사를 몰아 황두(黃頭)와 취박(臭泊) 두 실위(室韋)를 대파했다. 태조가 죽자 자신을 제(制)라 부르며 군국(軍國)의 일을 섭정했다. 태종이 즉위한 뒤 황태후(皇太后)로 높여졌다. 태종이 죽은 뒤 어린 이호(李胡)가 등극하자 세종(世宗, 태종의 아들, 태후의 손자)과 자리를 다투었다. 얼마 뒤 화해하여 병사를 거두고 조주(祖州)로 유배를 갔다. 시호는 양흠(諒欽)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술율황후 [述律皇后]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1.20, 이회문화사)
군대를 진두지휘하던 술율황후!
대단하지 아니한가?
실위 분들이 이 황후한테 박살이 났구마.
유목민과 여자!
이것도 재미있는 주제일 거 같지요?
<취수>나 당하면서 사는 존재인 유목민 여자들.
왜들 그렇게 드센겨?
이 책에서 핵심만 뽑아서 글을 쓰고 있는데, 읽을 건 못 된다.
한국 학바리가 쓰면 읽을 것 못 되는 책.
맨날 목 떨어지던 조선의 후손 여러분, 암기해!
사이트 1774 - <거란 사회문화사> 2, 공자왈 거란족 세월호와 정치평론
2014.07.22. 15:40
백제와의 전쟁과 더불어 ,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8] 9월) [9]395년에는 염수(鹽水)[10]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11]
어제는 위키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이걸 두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게 내가 던진 문제였는데,
이제는 거의 다 해석이 된 거 같어.
1. 거란은 345년과 386~395년 사이에 격파된 선비 우문부의 한 계파다.
2. 거란이 두 번째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광개토는 군대를 일으켜 거란 작전을 전개했다.
3. 거란 작전에서는 계절에 따른 유목민들의 이동 상황을 잘 알고
여름에 군대를 움직였다
4. 여름 작전이 끝나면 곧바로 겨울 작전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대강 이렇게 정리를 할 수가 있을 텐데,
여기에다가 "소, 말, 양떼"를 도둑질했다는 것은 거란족과 협상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가능성도 많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면 광개토라는 인간의 머릿속이 대강 보이지 않나요?
1. 첩보전에 능한 광개토.
2. 적 = 거란족의 생활 습관을 꿰뚫고 있던 광개토.
3. 여름 작전-겨울 작전을 능수능란하게 전개하던 두서 있는 광개토.
요건 내 평가.
1. 첩보전
칭기스칸이 호라즘 제국에 쳐들어갈 때,
독일군 탱크전과 비슷한 종심전투 전략(Deep Battle)을 구사했다고 했습니다.
이건 첩보전이 선행되지 않으면 절대로 구사할 수 없는 전략.
적의 군대 배치 상황을 꿰뚫고 핵심 지역을 단숨에 점령해야만 하는 것인데,
정확한 정보를 손에 넣지 않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겁니다.
칭기스칸은 이런 첩보전에 능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몽고군에 맞선 적들은 거의 모두가 신출귀몰한 전략전술에 놀아나게 됩니다.
이런 첩보전에서는 이순신도 제법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모든 전투를 잘 보면 첩보 부대를 미리 쫘악 풀어서
적의 상황을 손에 넣고 작전을 구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전쟁 잘하고 머리 좋은 애들은 다들 첩보전에 능하다는 얘기.
광개토의 경우에도 거란이 선비 모용씨의 공격을 받고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하니까 곧바로 군대를 출동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쪽 동네 상황에 대해서는 손바닥 보듯 했다는 뜻이고,
의사 결정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던 걸로 보입니다.
<의사 결정>, CEO들이 좋아하는 용어지요?
의사 결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첩보전!
2. 유목민인 거란족의 생활 습관
유목민이란 정처없이 떠돌아 댕기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름과 겨울에는 일정한 장소로 돌아오게 돼 있어요.
광개토는 이걸 제대로 알고 있었으니까
여름에 맞춰서 거란족을 공격하고 도둑질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문화인류학 소양이 풍부하다고나 할까?
문화인류학이 딸리면 전쟁하기도 어려울 텐데,
이 점에서는 영특 CEO들도 마찬가지.
물건 좋다고 해서 아무 민족한테나 다 잘 팔리는 건 아니라는 뜻.
민족마다 민족의 특성이 있는 것이고,
이 점에 대해서는 광개토처럼 제대로 간파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
3. 여름과 겨울 작전을 번갈아가며 구사하던 두서있는 머리
광개토왕릉비
http://ko.wikipedia.org/wiki/%EA%B4%91%EA%B0%9C%ED%86%A0%EC%99%95%EB%A6%89%EB%B9%84
이 논문에서 <정복전쟁 부분>을 클릭하면 거란 전쟁이 나옵니다.
맨 끝에 보면 사냥을 하면서 돌아왔다고 써 있습니다.
사냥은 왜 할까요?
사냥 = 군사훈련!
이건 칭기스칸도 똑같어.
유목민들은 사냥으로 군사훈련을 하는데, 수만 대군이 사냥에 투입됩니다.
그 수만 대군이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한 작전을 구사합니다.
이런 사냥 = 군사훈련은 고구려 초기부터 있었던 일이고,
광개토는 거란 작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사냥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건 전쟁은 곧바로 계속된다는 걸 뜻하는 것이고,
또 군사들에게 <긴장 풀지 마라!> 하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어요.
실제로 396년에 백제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이건 겨울 작전일 겁니다.
남쪽 나라는 겨울에 쳐들어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습니다.
그래야 말들이 두두두두 잘 달릴 수가 있는 겁니다.
전쟁 계획도!
광개토 머리속에는 전쟁에 대한 그림이 쫘악 그려져 있었던 거지요?
내가 광개토 머리를 해부해서 펼쳐 보이잖어.
여기에서 짚어야 할 것이 바로 두서!
거란 전쟁에서 이겼다고 흥청망청 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사냥 = 군사훈련으로 다음 전쟁을 준비했다는 사실.
야부리 잘 풀지?
서양 애들이 이런 걸 잘하는 거란 말이야.
한국 애들은 몬 해요.
그저 으달달달 암기하는 것만 배워서 그런가 야부리를 못 풀어.
그러니까 위인전을 읽으면 재미는 하나도 없고, 존경부터 하라고 써 있어.
그렇게 배워서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도
주사파로 김일성 수령님께 절부터 하지요?
82학번 김영환이, 그래 안 그래?
내가 광개토 위인전을 쓰면 이런 식의 분석이 들어가는 겁니다.
박사학위 논문 수준이다, 그치?
요런 걸 초등 1학년에 맞춰서 쓰는 겁니다.
미국 놈들은 이렇게 쓴다니깐.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게 마마보이 알렉산더, 전쟁 미치광이 알렉산더.
미국 놈들은 이렇게 쓰잖어.
오늘은 머리 굴리는 법부터 강의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광개토에 대해서는 읽은 바 없으요.
아는 건 달랑 395년에 거란족으로 쳐들어갔다는 사실.
이걸 가지고 거란과 칭기스칸 역사책 읽은 걸로 야부리를 푼 겁니다.
그러니 내가 본격 광개토로 들어가면 어떤 야부리가 나올 거 같어?
광개토나 칭기스칸 - 야부리 소재!
존경부터 하지 말고 말이야,
내가 이 새끼를 가지고 어떤 야부리로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걸 고민하란 말이야.
그런 재주가 없더라도 애들한테는 이런 고민을 제대로 하란 말이야.
그래야 애들이 주체 없는 주사파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 돈을 벌어먹더라도 제대로 벌어먹지.
그래 안 그래?
광개토니 칭기스칸이니 하는 애들은 다 현대로 치면 영특 CEO.
걔들이 왜 영특 소리 듣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나중에 쪽박 차고 빌어먹는 신세는 면할 거 아닌감.
전쟁에서 목 떨어진 놈이나 경제 전쟁에서 쪽박 찬 놈이나 똑같은 겁니다.
이런 놈들은 취급 안해요.
학바리 세계에서는 이런 놈들!
글 쓸 줄을 몰라요.
김위현
명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동양사
저서/ 『고려시대 대외관계사연구』 (경인문화사) 외
역서/ 『국역 요사(遼史)』 (단국대학교출판부) 외
자기가 옛날 썼던 논문을 모아놓은 책.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책으로 내면 일반 독자들을 생각해서 다시 정리를 했어야 하는 건데,
학바리들 어투 그대로 실었습니다.
학바리 어투 = 구질구질 일제 시대 문체.
여기에다가 한문은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건지.
5,000개는 알아야 읽을 수 있을 거 같어.
1,800개 고등학교 때 내 실력으로는 버티기가 버겁다.
알긋나, 학바리들?
솔직히 영어책 읽듯이 읽었습니다.
한자 나오면 건너뛰면서 문맥으로 대충 뜻만 파악하는 책 읽기.
이러니까 책은 무진장 빨리 읽었는데, 솔직히 욕 나온다.
이런 애들이 책 쓰는 스타일 연구 좀 안 하나?
왜 세계를 무대로 스타 소리 듣나?
책을 재미있게 잘 써요.
나처럼 공자왈 영재교육 못 받은 사람도 읽기에 부담이 없어.
읽기가 어렵다면 한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시대 상황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그런 건데,
한국의 학바리들은 한자 땜에 못 읽게 만들어.
한자 못 읽는 것들은 책 읽을 자격 없다, 이런 말이지?
"동단왕은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도서 10,000권을 사서
******(한자 모름)에 있는 망해당에 두고 열심히 학문을 닦아서
음양에 통달하고 음률을 알았고 의학에 정통하였는데
특히 **(한자 모름)지술이 뛰어났으며 거란, 한문학을 잘하여서
일찍이 음부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진짜 재예가 있었던 부분은 그림이었던 듯하다."
- 243-244페이지
왕이라는 자가 이런 독서영재.
책을 많이 읽었고, 의학에도 능통.
번역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다.
이런 동단왕.
동단이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 그 땅에 세운 나라.
그러니까 동단왕이라면 거란에서도 한 끗발 날리는 사람이겠지요?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의 첫째 아들 동단왕.
그러니까 야율아보기 미망인 술율황후의 첫째 아들 동단왕.
아주 비극의 주인공쯤 될 법한 동단왕!
아버지 야율아보기는 926년에 발해를 멸한 뒤 갑자기 죽었습니다.
해서 미망인 술율황후가 정권을 잡고 거란 정치를 농단하는데,
첫재 아들 동단왕은 자기 엄마 술율황후의 눈밖에 난 거라.
독서영재 출신이라 엄마 맘에 안 들었다는 동단왕.
황제 자리는 둘째 아들 태종!
황제 자리에 오른 동생 태종은 자기 형 동단왕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감시의 눈초리!
명확하지는 않다는데,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 학바리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럴 때에는 그렇다고 쳐주는 겁니다.
아는 거 없잖어?
동생이 펼치는 감시의 눈초리가 죽기보다 싫었을 동단왕!
끝내는 송나라로 망명을 갔답니다.
몰래 배 타고 도망친 거라.
도망 쳐서는 책을 10,000권씩이나 사서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모양이라.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는데, 중요한 건 독서영재 동단왕!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의 첫째 아들 동단왕.
이 동단왕은 독서영재.
유목민 거란족에서 이렇게 빨리 독서영재가 나올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단 말이야.
질문을 잘해야 한다고 했지요?
한국 학교에서는 질문 잘하면 줘터지지만,
그래도 질문을 잘해야 나중에 야부리를 잘 풀게 됩니다.
태조 이성계 - 태종 이방원 - 세종!
대대손손 독서영재 국가인 한국을 보더라도
새로운 가문 창업 2대에서는 독서영재가 나오지 않습니다.
제 3대 세종에서부터 독서영재가 나오는 겁니다.
이건 칭기스칸 가문을 봐도 똑같더구마.
칭기스칸 아들들을 보면 쌈박질만 잘했지, 독서영재랑은 관계가 없습니다.
그랬다가 3대로 내려가면 독서영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뭉케, 무대 앞으로!
http://ko.wikipedia.org/wiki/%EB%AA%BD%EC%BC%80_%EC%B9%B8
뭉케가 고려를 항복하게 만든 칸이라네.
몽고 제 4대 칸.
소르칵타니의 첫째 아들.
소르칵타니의 사촌 언니는 칭기스칸 마누라.
몽고족은 이런 데가 좀 어수선합니다.
마누라가 전쟁 전리품이거던.
어쨌거나, 이 뭉케가 아주 똑똑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외국어는 몇 개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읽은 책도 엄청났다는 뭉케.
전쟁도 잘해.
짜식이 못하는 게 없어요.
우리네 세종이는 말도 제대로 탈 줄 모르는 독서영재였지요?
몽고족이 배출한 초대형 황제감 뭉케!
나이 40에 칸 자리에 올랐다가 일찍 죽은 게 흠이랍니다.
고작 10년 동안만 칸 노릇을 하고 갔습니다.
뭉케 동생 쿠빌라이!
얘가 칭기스칸 다음으로 유명한 애지요?
뭉케가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쿠빌라이가 더 유명하고,
중국 원나라 초대 황제 쿠빌라이.
고려는 이 쿠빌라이의 사위 국가로 출세를 하는 건데,
이 쿠빌라이도 독서영재 출신이랍니다.
공자왈부터 시작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는 쿠빌라이.
여기에다가 정치의 귀재.
배가 뿔룩 나와서는 전쟁에는 별 소질이 없었던 모양이고,
공자왈 중국놈들 다루는 데에는 아주 귀재.
뭉케와 쿠빌라이의 엄마는 소르칵타니!
칭기스칸하고는 어떤 인척관계라구요?
단순 며느리가 아니지요?
중요한 건 3대째부터 독서영재!
여기도 우리네 세종이랑 비슷한 속도로 독서영재가 배출되는 겁니다.
대체로 이게 올바른 패턴인 거 같은데, 거란에서는 2대째 벌써 독서영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는 즉 공자를 국가에서 존숭하는 인물로만이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사표로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7페이지
유목민 거란의 국가 정책!
공자왈을 기틀로 삼았답니다.
이렇게 되니까 공자왈 중국놈들이 좋아해 좋아 안 해?
http://ko.wikipedia.org/wiki/%EA%B1%B0%EB%9E%80
거란은 영토를 잘 보면, 만리장성 북쪽.
그 북쪽인데도 중국놈들이 많이 들어가 살았답니다.
남쪽에서는 맨날 전쟁 하느라 살기가 고달팠던 거라.
그러니까 거란족은 중국놈들한테 살 땅을 마련해주고는
많이들 와서 살라는 유치 작전을 펼쳤다는데,
이 덕에 한창 때 군사력은 164만 대군.
초대 황제 야율아보기 때 군사력이 40만 대군이었다고 하니까
인구가 얼마나 많이 늘어난 것인가를 알 수 있지요?
중요한 건 중국놈들 유치를 위해 공자왈을 국가 기본으로 삼았다는 점.
과거제도도 남쪽 중국이나 당나라 때랑 거의 똑같이 운영했던 모양인데,
다만 거란족은 금지.
시험은 봐봐야 어차피 중국놈들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말 타는 기술 다 까먹어서 애들 못 쓰게 됩니다.
공자왈 읊어대면 나라 망한다, 거란족도 요건 잘 알고 있었던 거라.
문제는 이런 중국놈 우대 정책!
공자왈 실력으로 관리를 뽑는다는 것 자체가 중국놈 우대 정책.
이러다보니까 말 타는 실력에 비해서는 영토 팽창이 형편없었던 거 같어.
쭈구리고 앉아서 맨 공자왈이나 읊어내는 거란국 요나라.
이런 기회에 편승하여 발해 유민들도 많이들 한자리씩 해먹었고,
그중에는 고씨와 대씨도 꽤나 많았던 모양이라.
고씨는 고구려 주몽의 자손이고, 대씨는 발해 대조영 자손이지요?
거란 들어가서는 팔자들 폈습니다.
한편, 이런 거란의 문제점을 파악한 몽고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중국놈들은 맨 아래 바닥으로 깔아버립니다.
자기 자신은 공자왈 좀 읊조릴 줄 알지만,
공자왈 중국놈들은 완전 무시를 해버립니다.
공자왈에 물들면 나라 망한다!
해서 색목인을 등용하는데, 색깔 있는 눈이 색목인이지요?
아랍 출신들을 두고 색목인이라고 했고, 이들은 원나라 때에는 2등 민족.
공자왈로 망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망할 것인가?
유목민들이 중국 들어가서 통치를 하면, 닥치는 문제가 바로 공자왈.
우리 한민족은 고민도 안 하고 곧장 공자왈로 망했지요?
망하긴 망했어도, 유목민들은 이런 고민을 심각하게 했습니다.
누가 더 머리가 좋은겨?
거란의 공자왈 우대 정책!
이건 야율아보기의 장남 동단왕을 봐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2대째에 벌써 공자왈 독서영재가 나온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
말 타고 전쟁터를 누벼야 할 유목민의 아들놈이 공자왈이나 읊어댔다?
이건 야율아보기 전부터 공자왈 기반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겠나 하는 게 내 생각.
"거란이 의료산업에 관심을 두고 장려한 것은 이미 건국 직전부터이다.
즉 태조(야율아보기)의 중부인 술윤이 우월로 있을 때에
백성들에게 삼마(잠마인가?)를 심고 비단 짜는 기술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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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 얘들은 이상해.
공자왈을 읊어대지 않나, 비단을 짜지 않나?
무슨 유목민이 이따우야?
거란족이 살던 곳은 송막을 중심으로 한 내몽고.
여기 살 때부터 농사 짓고 비단 짜고 그랬답니다.
그러다가 야율아보기 덕분에 군사력과 국력이 팽창하니까
중국놈들 유치 작전을 펼쳐서 많이들 왔다는데,
그 전부터 자기들끼리는 농사에 비단 짜기를 했다는 유목민 거란족.
아주 이상한 놈들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농사 짓고 그러니까 공자왈이 체질에 맞았던 거라.
농사와 공자왈은 세트로 간다, 이렇게 볼 수가 있을 거 같어.
힙쭈구리허니 나라 망하는 지름길, 농사와 공자왈.
조선놈들이 이 길 타고 잘 망했지요?
유목민들 중에서는 아주 독특한 거란족!
글솜씨는 아주 형편없지만, 한국 학바리 책에서 이런 걸 얻을 수가 있었어요.
모르는 한자 붕붕 건너뛰고도 핵심은 잘 짚어내지요?
학교 때 밑줄 긋던 솜씨로 책 한 권을 좀 그어봤으요.
거란족을 파니까 광개토가 보이고,
그 거란족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도 대강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걸 토대로 해서 고려 때 <거란 전쟁>이라는 걸 봐야 하는 건데,
그때 위인전 출몰 인사가 바로 강감찬이지요?
솔직히 읽은 건 없지만, 위인전 강감찬은 온통 쌩야부리가 아닐까 싶어.
왜냐하면 강감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강감찬 쓴다는 놈들은 거의 모두 상상으로다가
존경부터 하자고 떠드는 놈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래서 내가 한국 위인전은 함부로 추천도 안 하는 것이고,
아예 읽지도 않습니다.
강감찬 읽을 바에는 야율아보기가 훨씬 더 낫지만,
이런 건 또 한국인들이 읽지 않지요?
남의 나라, 남의 민족 위인을 뭐 하러 읽나 하는 힙쭈구리 한국인 심뽀.
그 모양 그 꼴이니까 맨날 공자왈 읊어대다가 일제 식민지 노예로 취직.
목록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위인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 안 그래?
- 네이버 블로그 <사샤와 이고리> 꼬마작가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naver.com/igor5474/220068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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