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7. 23:47ㆍ차 이야기
고려조 대선사에 빛나는 원감국사 충지(상) 낙서장
2005.08.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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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대선사에 빛나는 원감국사 충지(상)
□愛民憂國의 大禪師 원감국사는 "장흥위씨 출신"
"국사의 위(謂)는 법환(法桓). 뒤에 충지(沖止)로 개명. 자호(自號)는 복암노인(宓庵老人). 속성은 위씨(魏氏). 정안(定安) 도초현(道艸縣-정안현의 속현 가운데 遂寧縣으로 생각됨) 사람. 아버지 위는 소(紹)로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
이것은 고려조 원감국사(圓鑑國師) 비명(碑銘)의 머리에 적힌 기록으로, 그 비명은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송광사) 감로암 전등(前嶝)에 있다. 비명의 이름은 '조계산 수선사 제6세 증시원감국사비명(曹溪山修禪社第六世贈諡圓鑑國師碑銘)이다. 이 비명은 원감국사의 사후, 21년인 1314년(충숙왕 원년) 8월에 왕명으로 한림학사였던 승지 김훈(金 )이 지었다.
비명에 기록되길, 국사는 1266년(고종13년) 11월 17일에 태어나 17세에 사원시(司院試=司馬試,國子監試)에 합격하고 19세(1248년)에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 일찌기 영가서기(永嘉書記)라는 관리로 진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선림(禪林)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 이후 1266년(원종 7년) 여름에 경상남도 김해군의 감로사(甘露寺)의 주지가 되고 1269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다시 3년 후에는 감로사를 떠나 승주군의 수선사(송광사)로 옮긴 후 1286년에는 수선사의 제6세 국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흥의 위씨 출신이라고 명기된 원감국사는 불교의 삼장(三藏)에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사림(詞林)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과 시(詩)는 당대의 유림에서도 추앙을 받았다. 그의 불교에 대한 관점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이었고, 이로 인하여 수선사 제1세였던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던 선사였다. 국사의 출중한 학문과 불교의 선지식으로 국사는 사신으로 도일(渡日)하였을 때 큰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뛰어난 문장과 출중한 도풍이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로부터까지 추앙을 받고 원나라에 초청돼 국위를 크게 선양하기도 했을 만큼 그는 큰 학자요 문인이기 전에 애민우국(愛民憂國)의 큰 승려기도 했다.
그리하여 국사는 충열왕으로부터 '대선사(大禪師)'라는 칭호에 이어, 원감국사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특히 문학적 능력은 출중하여, 사상적이고 서정적인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남겨,〈동문선〉에도 상당수가 수록될 정도여서, 국사는 한 마디로 고려조의 대선사(大禪師)일뿐더러 장흥이 낳은 대시인(大詩人)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선승인 원감국사가 바로 '장흥위씨'였던 것이다.
□원감국사는 장흥출신 위원개(魏元凱)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감국사 충지(沖止)가 바로 장흥위씨였을 뿐만 아니라, 위씨족보 곧 위씨 세계에서 명시하고 있는, 위문개(魏元凱)였음이 여러 기록들이 밝히고 있다. 비록 수선사 비명에는 속명이 원개로 기록돼 있는 것은 아니나, 〈동국여지승람〉이나 〈지봉유설(芝峰類設)〉등은 원개(元凱)가 고종 무신 (戊申) 1248년 19세에 장원급제했음을 밝히고, 원감국사 비명에서 19세(1248년)에 예부시(禮部試)에 장원 급제한 '장흥위씨' 출신의 원감국사가 바로 원개였음을 고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한국정신문화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한국불교 인물사상사>(불교신문사편), 고승열전 같은 기록, 그리고 원감국사의 생애와 시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관련 논문 등에서도 한결같이 원감국사가 장흥위씨 출신으로, 속명이 위원개(魏元凱)였음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원감국사의 가송(歌頌)·시편 등을 모은〈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1920년 송광사간), 일명〈원감록〉의 서문을 쓴 역사학자 이능화(李能和)나, 〈조계복암화상 잡록(曹溪宓庵和尙 雜錄)〉에는 수록되어 있지만,〈원감록〉에 수록돼 있지 않는 국사의 8편의 서답(書答)까지 모아 〈원감국사집〉(1988.서울아세아문화사간)이라는 책을 펴낸 진성규(秦星圭. 중앙대 사학과 교수)씨도 원감국사의 속명이 바로 장흥출신 위원개였음을 의심없이 전제하여 同 책을 주석·편집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진성규교수는 10여년간 원감국사를 연구한 '원검국사의 전문가'였기에 그의 이러한 고증·고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위씨 世系, 7세조 원개=원감국사 非公認
세계상의 혼란이 주원인, 誤傳으로
그러나 이와 같은 거의 객관적인 모든 사실(史實)의 기록과는 달리, 장흥위씨 대동보(大同譜) 등 세계(世系)에서는 고려 고종 1248년 19세로 장원급제한 뒤, 한림학사와 추밀원부사를 지낸 7세손 위원개(魏元凱)를 세계(世系)에서는 기록하여 놓고 있지만, 속명 장흥출신 원감국사 충지가 바로 7세손 위원개라는 데는 회의하면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연관시키고 있지 않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원인은 첫째, 세계상(世系上), 승계상의 착오와 혼란에서 기인된다고 보여진다. 위씨 초보(初譜, 己卯譜)에 의하면, 5세조 충렬공 계정(繼廷) - 6세조 소(沼:원개의 부친) - 7세조 원개로 계대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정으로부터 원개 사이에는 3세간에 불과한데, 계정의 졸년(卒年)이 1107년이요 그 손자인 7세 원개의 생년(生年)이 1226년(원감국사 비명 기록임. 위씨 初譜 기록으로는 1229년임)으로, 그 사이에는 무려 119년이라는 연차가 난다. 여기서부터 족보상의 계대 오전(誤傳)의 충분한 가능성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계대 오전 가능성에 대한 확증은 위씨 초보에서 위원개와 그의 아우 위문개(魏文凱)에 대한 수록난(장원급제등) 상단 공란에 '고종 무신년도를 인종 갑진년도로 교정하라(高宗戊申宜作仁宗甲辰)'고 교정을 요구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초보 이후 수정보를 펴 내면서는 상단의 자구 수정을 참고하지 않고 원개가 고종 무신년에 장원급제한 것으로 수록하고 있지만,(이같은 결과는 아마도 조선 중조 때 왕명으로 편수·編修한 〈신동국여지승람〉의 장흥편 인물조에 '위원개 고려 고종 무신년에 급제'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더 이상 그 위원개가 원감국사였다는 식의 기록은 하지 않고 있다. 초보 편수자도 충렬공과 위원개 사이의 연차의 의혹성을 고려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항렬상 동명이인은 불가능한 실정이고, 따라서 이처럼 졸년 1107년인 5세조 계정과 1266년, 또는1229년 출생의 7세조로 이어지는 계대는 어느 부문에서의 착오이거나 오전으로 보아야 당연한 일이므로, 위씨계보에서는 1226년 출생의 7세조 원개공이 바로 원감국사였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둘째, 원감국사의 〈원감록〉의 기록이나 고려사 등에 나오는 위원개(魏元凱)·위순(魏珣), 위문개(魏文凱)·위문개(魏文愷)·위문경(魏文卿), 위신개(魏信凱)·위선(魏璇) 등의 여러 이름 자의 혼선과 지명 등의 오기(誤記) 가능성 때문이다.
원감국사의 출생에 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수선사 비명에도 수녕현(遂寧縣)을 도초현(道艸縣)으로 오기하고 있다. 또, 수선사 비명에 의하면 원감국사 충지가 1299년에 태어나 19세 때 장원급제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그때는 바로 고종 31년 1244년이 된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등에는 1248년에 장원급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게다가 〈고려사〉권 74 선거지(選擧志)에는 1244년 예부시 시험장에 위원개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고 대신 위순(魏珣)이라는 이름이 보여, 위순이 충지로 추정되고 있지만, 아무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 역시 오기임에 분명하다 할 것이다,
또 〈원감록〉의 해동조계제6세원감국사가송(海東曹溪第六世圓鑑國師歌頌)편의 27수에 "舍弟平陽新守文愷 將 州治…"평양(지금의 순천)의 수령이 된 아우 문개(文愷)가 주를 다스리기 위하여 산중에 있는 형인 국사를 찾아왔다…는 시제가 나오는데, 여기서 국사는 문개(文凱)가 아닌 문개(文愷)로 표기하고 있다. 〈고려사〉에서도 문개(文凱)가 또 문개(文愷)도 아니고 문경(文卿)으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원감록〉에서 이어지고 있는 가송 28수 시편 시제 설명에도 "弟樞院堂璇…"곧 "(막내)아우인 추원당 선이…"라고 표기, 국사의 막내 아우인 신개(信凱)를 '선(璇)'으로 적고 있다.
□〈원감록〉곳곳에 국사 자신이 장흥출신이었음을 표현
이처럼, 세계상의 혼란과 무리, 기록의 신빙성 문제 등으로 위씨 대동보에서는 7세조 원개공이 원감국사와 동일인물로 확실히 공인하기를 기피하고 있으며, 승계상으로 봐서도 원개공이 7세조였다는 사실은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는데 많은 종인들도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계대와 상관없이, 그리고 속명 위원개가 원감국사라는 사실문제와 상관없이, 원감국사가 장흥위씨 출신이라는 史實까지 부인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이미 여러 역사적인 기록들이 기정 사실화되어 있는 데다, 원감국사 자신이 남긴 〈원감록〉의 기록 곳곳에서 자신이 장흥 위씨 출신임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원감국사 위씨 충지에게는 아우가 둘 있었다. 2제는 문개(文凱)로, 1225년에 장원급제하여 평양(순천)의 수령이 되었으며, 한림학사를 역임했다. 또 막내는 신개(信凱)로 두 형들처럼 장원급제는 못했지만, 과거에 합격, 장흥위씨의 명예를 빛냈다. 이러한 원개 형제들의 장원급제로 장흥(당시는 수녕현으로 지금의 장흥읍과 부산면)에는 그의 원력을 기념하는 상이 부산면 자미마을 뒤 병풍바위에 새겨져 전하고 있으며, 그들 형제들이 살았던 마을 뒤 높은 봉우리를 장원봉이라 부르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
<원감록의 가송에는 이처럼 국사의 아우였던 문개(文凱)가 문개(文愷), 문경(文卿)으로 수차 등장되고, 신개(信凱)도 추원당 선(璇)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또, 가송의 46부 '발서원지 회덕(發西原至懷德…'이나 47부 '회덕여사우중(會德旅舍雨中…)등의 시제(詩題)에서 국사가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던 현 대덕읍의 옛 지명인 회덕에서 머물렀던 기록 등도 나온다.
그러므로 고증이 확실하지 못해, 속명 위원개 원감국사가 충렬공의 7세손인 바로 위원개가 아닐지라도, 여러 문헌들을 상고해볼 진대, 일차적으로 국사의 속성이 장흥위씨요, 그의 부친은 원외랑공 위소(魏沼)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혹자는, 〈동인시화(東人詩話:조선 초, 서거정이 신라 때부터 조선 초까지 시화를 모은 책)〉에는 원감국사의 속명이 위순(魏珣)이라는 기록도 나오는 점을 고려하고, 〈고려사〉권74 선거지에도 고종 갑진(甲辰) 1244년에 '위순(魏珣) 급제하장(及第下腸)'이라 한 점과, 수선사 비명에도 국사의 장원은 19세, 곧 그 해는 1244년 갑진(출생년이 1226년이라 했으므로)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원감국사의 속성명은 위원개가 아닌 위순(魏珣)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펴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을 인정한다면 원감국사의 속명을 원개가 아닌 위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주장이나 오기문제, 이설 등을 차치해버리고 굳이 속명을 따지고 들자면, 가장 중요한 원감국사 자신이 자기기록을 남긴〈원감록〉에서 문개(文凱)의 오식인 문개(文愷) 등을 등장시키고 있는 점을 우선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원감국사의 생애와 시문학 등의 관련문집, 사료집 등을 통해 10여년 동안 집중적으로 연구해〈원감국사집〉을 펴낸 진성규교수의 주장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면. 그의 주장처럼, 원감국사의 속명은 위순이 아닌 위원개로 공인해야 할 것이라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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