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면서
원감국사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래서 은근히 자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적은 자료를 통해 살펴본 원감선사의 생애는 감동의 물결이었다.
그는 그가 산 시대를 아파하는 노래하는 시인이었으며 나라의 안녕은 빌고 안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수행 승이었다. 短臂歌를 보면 "산승의 팔은 짧고 짧아 평생에 남을 향해 구할 수 없네. ...어찌 내 팔이 천자만자나 되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내게 친하게 하리"하며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고 있다.
동시대 인물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진보적 운동을 전개한 스님도 있지만 그는 시를 읊으며 단지 아파하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삶을 평가할 때 각자의 기준에 따라서 하겠지만, 역사는 그가 무신정권과 깊은 관계를 맺은 수선사의 법맥이라고 하여, 부패된 정혜결사를 비판할 때, 한쪽에 끼워 넣기도 하지만, 인간적으로 그를 바라본 나는 그는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바로 백성들의 고난을 아파하고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생애를 통해 고려 시대의 험난한 삶과 승으로써 국가를 바라보는 그의 인간적인 면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조심스럽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원감국사의 생애
1) 출가 전의 생애
1226년 고려시대 고종13년에 장흥지방 定安에서 그는 태어났다. 성은 魏씨이며, 이름은 원가(元凱)였다.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號紹(魏紹)였고, 어머니는 리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인 원방대부인(原邦大夫人)이었다.
9세에 처음 就學하여 經·子·史書들을 공부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남다른 재예를 갖춘
그는 17세에 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9세에 禮部試에 장원으로 뽑혀 永歌書記를 지낸 적도 있었으며, 使臣으로 日本에 가서 國威를 드날리기도 했다.
2) 그가 살아낸 시대 배경
1170년 문관들은 밤늦도록 연회를 즐기고, 무신들의 고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무신들이 반란을 도모하여 성공시킨다. 무신들의 반란이 성공함으로 해서 최씨가 정권을 잡아 60년간 세도를 하게된다. 고종시대는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들고, 몽고의 흥기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1216년 몽고군에 쫓긴 거란이 요동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해왔다. 2년 동안이나 공방전을 하다가 금과 연합하여 거란군을 격퇴하기로 결정하고 몽고군 1만 명과 동진이 합세하여 1219년 거란을 항복 시켰다.
1225년 고려와 몽고는 형제지국이 되었으나 공물을 요구하자 성을 쌓고 만약을 대비했다.
몽고에서 사신을 보내 귀국하는 길에 도적을 만나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몽고는 고의적인 살인으로 간주하여 국교가 단절된다. 1231년 살례탑의 지휘아래 압록강을 건너 내침 7차에 걸쳐 28년간 전쟁이 지속되었고, 최의의 죽음이 후 태자가 몽고의 요구에 따라 몽고에 입조하고, 삼별초의 난이 몰락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지만, 고려조정은 원에 복속 되어 12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겪게된다.
그의 나이 6세인 1231년은 몽고가 고려에 공격의 화살을 돌린 해였다. 사회는 전쟁과 기근 질병이 난무했다.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겨 왕과 귀족들은 강화로 피신하고, 남은 백성들은 주둔한 원에 의해 고난을 겪게 된다.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의 젊은이들을 전함 만드는 조선작업에 동원했고, 군량미를 강요하였다. 그러므로 농업은 황폐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은 전쟁으로 시작하여 전쟁으로 끝나는 삶이었다. 그런 삶 속에서 그는 출가를 했다.
3) 출가 배경
그가 관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가한 것은 당시 시대상황과 관계가 있을 듯하다. 원효스님의 시대도 그러했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생명이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모습이나, 고통받는 백성들이나, 아버지 紹가 몽고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사실이나, 관리로 진출하여 10년간 공무를 집행하면서 겪어야 했던 혼돈의 사회를 보면서 깊은 회의와 자아 성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젊어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을 품었다. 그가 29세 때 선원사의 원오국사를 찾아가서 스님이 되고 구족계를 받았다.
4) 출가 후의 생애
국사는 諱는 法桓, 改諱는 沖止, 自號는 宓庵, 塔號는 寶明이며, 圓鑒國史는 그의 謚號이다. 1254년 출가하여 南遊하여 각지를 편력하며 佛理를 講하여 추앙을 받았다. 산문생활 12년 때인 1266년 41세의 나이로 김해 甘露寺 주지가 되었다. 이때 어떤 禪德이 그에게 시를 청하였다.
春日花開桂苑中 어느 봄날 계수나무 동산에 꽃은 만발하였는데
暗香不動少林風 소림에 바람이 불어 어두운 향기 퍼져도 흔들리지 않네
今朝果熱沾甘露 오늘 아침엔 열매가 익어 감로가 더하는 구나.
無限人天一味同 끝없는 하늘과 땅이 한 맛일세
위의 시를 지어 주니, 이것이 人口에 膾炙(회자)되었고, 각처에서 제자가 운집하였다. 그후 감로사를 떠나 45세인 1270년에는 계족산 定惠寺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깨달음을 얻은 바 있었다.
廣長自有淸溪舌 何必更擧揚
(맑은 물 흐르는 소리 그대로 부처인데 무엇을 다시 공부하고 찾으리요.)
1269년 삼중대사, 1276년에 대선사가 되고 1278년(충렬왕 4)에는 紙薄字密의 특징을 갖고 있는 丹本大藏經 千餘冊의 결함된 부분을 수선하여 송광사로 옮기고 보전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61세인 1286년 2월에 원오국사(圓悟國史)가 입적함에 4월 16일 禪林의 뜻을 받들어 海東曹溪 6세가 되었다.
그는 수선사에서 몽고와 전쟁으로 황폐화되고 도탄에 빠진 중생의 제도와 국운회복에 전력을 다하였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그의 큰 悲願이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향을 사르는 간곡한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수선사 대중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빼앗긴 수선사의 토지를 되찾기 위해 원 황제에게 表文을 올려 寺田을 復舊하였다. 원 세조는 국사의 덕망을 우러러 자국으로 초청하여 친히 영접하고 賓主의 예를 갖추어 師傳의 대접을 하여 주었으며, 金袈裟 碧繡長衫 및 白佛 一雙을 선물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의 인품과 덕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291년 8월 병을 얻어 이듬해 1월 10일 새벽 淨髮更衣하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함에 門人이 偈그를 청하였다.
[閱過行年六十七 육십 칠 년 가지 가지 일을 지나
及到今朝萬事畢 만가지 일을 다 마치고 지금에 이르니
故鄕歸路坦然平 고향의 귀로에서 평탄하고 평화로워
路頭分明曾未失 길 머리가 분명하여 잃지 않으리니
手中 有一枝 손안에 겨우 대나무 한가지 있어
且喜途中脚不倦 또한 기쁘게 길을 가니 피로하지 않네]
이 때에 위와 같은 임종게송을 남기시고 입적하였다. 그의 나이 68세인 1293년이다. 그의 비명은 송광사 감로암에 모셔져 있고, 부도도 세워져있다.
그의 저서에는 圓鑒國師集部錄 총람 下, 海東曹溪第 6世 圓鑒國家頌, 曹溪圓鑒國師 語錄,海圖曹溪宓庵和尙雜箸, 圓鑒國師文集 등이 있다.
3. 원감록
이 책은 고려 원감국사(1236년 고종 13년에서 1292년 충렬왕 18년)의 시문집이다. 原集 補遺 續集등 三部分으로 나누어지고 내용을 보면 시가 329편 산문이 56편 수록되었다. 문장이 수려하고 잡기가 없으며, 특히 시는 아름다우면서도 彫琢(조탁)의 痕迹(흔적)이 없는 우수한 작품이다. 고려시대의 저작이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사료로서도 귀중한 자료가 되며, 몇 편의 제문은 인물사 연구에, 丹本大藏經讚疏 등은 불교사 연구에, 大元皇帝祝壽齋疏·上大元皇帝表 등은 麗·元交涉史의 연구에, 그밖에 시편에도 東征頌 등 麗·元·日의 관계 및 당시의 사회상을 잘 나타내어 주는 작품들이다.
그 중 이 시는 1280년 征東戰艦을 건조할 때 영남지방의 艱苦狀을 절규하고 있다.
영남지방의 간고한 모습, 말하려니 눈물이 먼저 흐르네
두 도에서 군량을 준비하고 세 곳의 산에서 전선을 만들었네
부세와 用役은 백 배나 되고 力役은 삼 년에 뻗쳤는데
징수는 성화간이 심하고 호령은 우뢰처럼 전하네
사신도 항상 계속되고 서울의 장수는 잇따라 오네
필은 있어도 모두 묶여 있고 채찍 받지 않는 등심 없었지
맞이하고 보내는 것은 보통 익숙하고 밤낮으로 수송이 이어지네
소와 말 완전한 등은 없고 인민도 쉬지 못하네
새벽엔 칡 캐러 가고 달빛 맞으며 띠풀 베어 돌아오니
어부는 고랑으로 몰고 목수는 해변으로 끌고
머슴 뽑아 갑옷 입히고 장정 뽑아 창 메게 하네
시간이 촉박할 뿐 어찌 촌각이라도 지연이 용납되랴.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유명이야 다르지만, 성명 온전함을 어찌 기약하랴.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뿐 억지로 살자니 얼마나 고달플까
고을마다 양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전지가 황폐되었네
어느 집인들 수색하지 않으며,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랴.
관세도 면하기 어려운데 군역은 어찌 덜겠는가?
백성의 질고는 날로 심하고 피곤은 어찌 회복되랴
접하는 일마다 모두 슬픔을 견디려니, 삶이란 진정 가련하구나
비록 형세 보존키 어려움을 알지만, 하소연할 곳 없음을 어찌하랴.
帝의 덕은 푸른 하늘처럼 덮었고, 황제의 밝음은 百日 같구나
어리석은 마음에 백성은 진실로 기다리니, 성인의 은혜 반드시 베풀어지리라.
三韓 안에서 보겠네, 집집마다 베개 높이 베고 잠잘 수 있기를.
당시의 적나라한 사실을 표현한 역사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살아낸 참담한 현실을 시의 형식을 빌어 기록으로 남긴 생생한 자료이다. 고려사에서도 찾기 어려운 당시 사회상을 원감록에는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시의 끝 부분은 어쩌던지 일본이 빨리 지면 태평성세가 오지 안으려나 하는 역설적인 표현이 아닐까? 다음 시는 1283년 농민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는 그는 이렇게 읊고 있다.
농사는 모름지기 때가 있는데, 때를 놓치면 어쩔 수 없네.
농사 때란 얼마 안 되니, 봄여름 바뀔 때가 가장 좋네
봄이 다하고 여름이 되니, 농사일을 늦출 수 없네
하늘이 시절을 알아서 은택을 사방으로 베풀지만
일본 정벌이 시급한데 농사일은 누가 다시 생각하랴.
사신은 끊이지 않고, 동으로 서로 달리네
백성들이 轉役에 가니 고을은 비었고, 말은 강가로 달려가네
밤낮으로 벌목하여,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손바닥만한 땅도 개간하지 못했으니 백성들은 무엇으로 연명하랴.
집마다 묵은 양식은 없고 태반은 굶어서 우는구나.
하물며 농사일을 잃어버렸거늘 마땅히 모두 죽음만 보겠네.
슬프다 !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리네.
슬프다 ! 동토의 백성이여, 하늘마저 슬퍼하지 않네.
언제 장풍이 물어와서 나의 泣血詩를 불어가려나.
한번 부니 천상에 이르러 임금 계신 뜨락으로 향해
시 가운데 못 다한 말, 상제로 하여금 다 알게 하리.
위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농민들은 농사철을 놓치고 전함을 만들기 위해 벌목 현장에 동원되었고, 먹을 양식이 없어 죽기 직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고도 도울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절규하면서 임금이 보지 못한 이 참상을 언제 임금에게 다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눈물과 피를 탄 그의 노래이다.
4. 수선사를 중심으로 한 사상
1) 정혜결사를 제창한 지눌
무신정권의 옹호를 받으며 부흥한 선종은 선교의 대립을 지양하여 교종을 포용함으로써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았다. 지눌은 선교일치 사상과 세속적 명리를 추구해 온 현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정혜결사를 제창하였다.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 모임을 결성하여 항상 선정과 지혜를 고루 익히는 것을 일삼으며, 예불과 경전 읽기로부터 노동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일을 꾸리면서 마음을 수양하며 한 평생 자유롭고 호쾌하게 지낼 것"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정혜결사는 1190년 대구 팔공산 거조암에서 출범하였고, 1200년에는 승주 송광산 길상사로 옮겼으며, 1205년에는 왕명에 따라 정혜사를 수선사로 고쳤다. 지눌은 종전의 선종이 문자를 배격한 데 반해 정과 혜를 아울러 닦고 직관적인 깨달음과 점차적인 수행의 결합을 지향했다.
혁신적인 수행방법으로 집권층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지눌 당시 지배자의 천수를 빌거나 호국기도를 했으며, 무신정권이 대대적인 수선사 중수불사 등을 적극 지원했다. 또한 최우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반란 진압등을 기원하며 140결이나 되는 전답과 염전, 그리고 노비 따위를 헌납했다. 지눌이 죽자 왕은 그에게 '불일보조 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정혜결사를 제창하고 기존 불교계를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한 지눌 자신도 정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2) 무신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수선사
지눌을 이어 제2세 지도자가 된 혜심은 최씨 정권의 더욱 큰 지원을 받게 된다. 최우는 자기의 두 아들 만종과 만전을 혜심에게 출가 시켜 제자로 삼게 했다. 만종과 만전의 횡포를 살펴보면 재산 증식으로 업을 삼았고, 유명한 절들을 나눠 갖고서 권세를 믿고 위세를 떨쳤으며, 몽고족을 모방한 말과 옷차림을 하기도 했고, 스스로 관인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최씨정권과 수선사의 밀착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뒤에도 14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등 수선사는 무신정권의 계속적인 지원을 받았다.
제1세 지눌(1158-1210), 제2세 혜심(1178-1234), 제3세 몽여, 제4세 혼원(1191-1271), 제5세 천영(1215-1286)을 이어 제 6세 조사가 된 충지(1226-1292)도 원나라 지배 아래서 일본정벌에 강제 징집되고 조세와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당시 민중들의 참상을 아파 하지만 본질적으로 수선사를 통해 내려오던 선교 일치 사상과 호국안민 사상을 이어 권력과의 비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명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호국안민 사상을 이은 것이 아니라, 원에 의해 수난을 당하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다고 보인다.
5 마치면서
사람은 각각 성품이 다르다. 그래서 일을 선택할 때에도 성격에 따라서 한다. 지눌이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무신정권과 결탁한 반면에 요세와 같은 인물은 참선의 병폐를 깨닫고 극복할 방도로 실천을 선택한다. 요세는 신도가 보시한 물건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고, 지눌과 혜심이 무신정권과 결탁한 것과는 달리 50년간 개경 땅을 밟지 않았다.
또한 원감국사의 시대에도 충주 대원사 주지 우본 스님은 몽고에 대한 항쟁에서 노비와 승려들의 군대를 통솔하여 침략군을 물리쳤다. 또한 승려 김윤후는 몽고 침략군의 원수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죽였다. 이들은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불교운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절 안에서 시대를 아파하는 시나 쓰고 기도나 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그를 무신정권과 결탁하여 한 생을 안일하고 편안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이다.
참고 문헌 :
[원감록] 아세아문화사, 1973
홍법원편집부, [불교학 대사전] 홍법원, 1993
정의행 [한국 불교 통사] 도서 출판 한마당, 1991
불교신문사, [한국 불교 인물 사상사] 깨달음의 총서, 1997
박영규, [고려실록] 들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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