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圓嶠) 이광사…“신선처럼 살고 싶다”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72)

2015. 7. 13. 13:34글씨쓰기

 

 

 

> 인문  
원교(圓嶠) 이광사…“신선처럼 살고 싶다”조선 선비의 자호(字號) 소사전(72)
한정주 기자  |  jjoo@iheadlinenews.co.kr
승인 2015.04.15  08:40:41
   
▲ 원교 이광사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자(字)는 도보(道甫).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서체를 이룩한 서예가이자 정제두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워 강화학파를 형성한 사상가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했지만 나이 20세 때인 1724년 노론이 옹립한 영조가 즉위하자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집안은 소론의 명문가였고, 아버지 이진검은 예조판서까지 지낸 소론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이 51세가 되는 1755년(영조 31년)에는 이른바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그 지방 젊은이들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남녘의 외딴 섬 신지도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리고 끝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나이 33세가 되던 1737년(영조 13년) 서대문 밖 원교(員嶠: 둥그재)라고 불리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집을 구해 살았다. 그리고 이곳의 지명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 때문에 그의 호 ‘원교’의 한자는 ‘圓嶠’라고도 쓰고 혹은 ‘員嶠’라고도 쓴다.

   특히 ‘원교(員嶠)’는 도가서(道家書)인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編)’에 나오는 신선이 산다는 다섯 산(대여(岱輿)·원교(員嶠)·방허(方虛)·영주(瀛州)·봉래(蓬萊) 등)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교’라는 호 속에는 신선처럼 살고 싶었던 이광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정주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윤철규의 한국미술명작선] ⑩ 문학이 그림으로 들어오는 모습

[중앙일보] 입력 2015.02.12 05:00 / 수정 2015.02.13 08:39

 
이광사, 이씨산방장서도(李氏山房藏書圖),

 

지본담채, 23.1×29.0㎝, 선문대 박물관 소장.


    흔히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듯하다’는 말을 합니다. 시상이 절로 떠오를 듯한 서정적인 그림에 대한 찬사입니다. 그림에 이 말이 쓰인 지는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에 한 중국 사신이 가져온 화첩으로 인해 글이 그림이 되는 사실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이 화첩을 가져온 사람은 앞에서도 등장했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입니다. 1606년 조선에 온 그는 선조에게 화첩 하나를 예물로 바쳤습니다. 그 화첩의 이름은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입니다. ‘천고에 더 이상 볼만한 것은 없으리라’라는 과장스런 제목을 단 화첩인테 과연 당시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화첩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어서 화제가 됐습니다.

   내용은 예전부터 명문장으로 이름난 문인들의 글과 시를 소재로 명나라 궁중화원들이 화려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이 된 글과 시가 20편이어서 이 화첩에는 20점의 그림이 이들과 짝이 되어 그려져 있었습니다. 글과 시는 대부분 조선 문인들도 줄줄 외고 있는 『고문진보』『문선』에 수록돼 있는 유명한 것들입니다.

 



    기록을 보면 고려 때부터 그림을 보고 시를 짓는 일은 흔히 있었습니다. 또 시를 읊으면서 그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린 예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문장 여러 편을 그림으로 그려 화첩을 묶은 사례는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이 화첩은 임진왜란 직후이기는 했지만 그림을 좀 아는 문인들 사이에 대단한 화제가 됐습니다. 글과 시가 그림이 된다는 희한한 사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화첩은 선조의 허락 아래 허균의 형인 허성의 주도로 당시 최고화가로 손꼽히던 이징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모사본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사 화첩은 왕족인 이정영이 소장했습니다. 이외에 선조는 궁중 화원을 시켜 또 다른 모사본을 만들어 당시 중국사신 접대를 담당했던 유근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하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지번이 가져온 『천고최성첩』은 조선화가가 그린 모사본 두 첩이 민간에 전하게 된 것입니다. 궁중소장 화첩은 당연히 사람들이 함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진 모사본을 당시 명사들이 돌려가며 감상했고 더러는 사비(私費)를 들여 자신만의 복사본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제작된 조선판 『천고최성첩』은 상당한 수에 이르렀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만 7본이나 됩니다.

   이 화첩은 유명 문장이나 시가 그림이 되는 과정을 실례로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화첩이 여러 본 모사되면서 유행하는 과정은 이후 18세기 후반에 대유행을 하는 시의도(詩意圖) 전개에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시의도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 한시를 소재로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이광사의 ‘이씨산방장서도’ 역시 당시 유명인사가 『천고최성첩』을 모사한 과정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그림은 아래쪽에 늙은 학자가 젊은 선비의 도움을 받으며 돌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다리 건너 숲길을 빠져나가면 산골짜기에 집에 몇채 보입니다. 개중에는 이층 누각도 있는데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집안에는 모두 책들이 가득합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글은 소식(蘇軾·1037∼1101)이 지은 명문장으로 유명한 ‘이군산방기(李君山房記)’입니다. 글은 ‘상아, 물소 뿔, 진주, 옥 같은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사람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기는 하지만 쓰임에는 적합하지 않다’로 시작하면서 ‘공자님 같은 성인께서도 학문은 반드시 책을 보는 데서 시작하였다’며 열심히 독서할 것을 권하는 내용입니다.

   소식의 친구인 이상(李常)은 젊어서 여산의 오로봉 밑 백석암에서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그리고 관리가 돼 떠나가면서 9000여 권의 장서를 그곳에 남겨 놓았습니다. 후학들은 이 책으로 공부를 하면서 그가 머물던 암자를 이군산방으로 이름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식이 친구를 떠올리며 자신은 이제 늙고 병들어 세상에 더 이상 쓰일 데가 없게 됐으니 이군산방에나 들어가 책을 읽으며 노년을 보내고자 한다는 내용을 글로 지은 것입니다.

   그림과 글을 대조해보면 그림 속에서 다리를 건너는 늙은 선비는 소식이며 계곡 안쪽에 책이 꽉 찬 집은 이군산방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람한 바위로 이뤄진 산봉우리는 여산의 오로봉입니다.

   이광사는 화가이기보다는 서예가로 유명합니다. 또한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화가들과도 교류하며 직접 그림도 그렸는데 그 중에 당시 문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천고최성첩』에 나온 내용을 다시 그려본 것입니다. 물론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기에 그림 옆에 당연히 ‘이군산방기’가 유려한 필치로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후기에 유명 문장, 유명 시구가 본격적으로 그림으로 그려지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작자미상, 『중국고사도첩』 중 ‘이군산방도’,

1670, 저본채색, 27.0×30.7㎝, 선문대 소장.  

 

 

 


이광사(李匡師·1705∼77)

   조선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로 유명합니다. 자는 도보(道甫)이며 호는 원교(圓嶠)입니다. 대대로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지만 소론이었던 이유로 당쟁 속에서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본인은 51살 때인 1755년 조정을 비방하는 나주 괘서사건에 연루되면서 종신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이후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8년 뒤에는 진도를 거쳐 신지로 옮겨져 그곳에서 결국 23년에 걸친 유배 생활을 보내며 끝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서예가로서 『원교필결』란 이론서를 저술하며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습니다. 그의 서체는 중국 영향 아래 있던 서체를 토착화한 것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로 불리었습니다. 그는 그림에도 솜씨를 보며 현재도 10여 점의 그림이 전합니다. 두 아들 중 첫째는 실학자 이긍익이며 둘째는 서화에 솜씨를 보인 이영익입니다. 간송미술관에 전하는 대폭의 잉어 그림은 유배지를 따라다녔던 둘째 이영익이 부친이 잉어 머리만 그려놓았던 것을 20년 뒤에 꺼내 완성한 그림으로도 유명합니다.

 

 


글=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 ygado2@naver.com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

 

 

중앙일보문화 홈

 

"‘說’자의 삐침이 호방하게 하늘로 솟구친다"

<허철희의 문화재 답사-5> 내소사설선당과 요사허철희 기자ljuyu22@naver.coml승인2015.02.08 14:47

 


                                                   내소사 설선당과 요사ⓒ부안21


내소사 설선당과 요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내소사 설선당과 요사는 1640년(인조 18)에 청민선사에 의해 절 안의 승려들과 일반 신도들의 수학정진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중앙내부에 마당과 우물을 두고 "回"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건축양식이다.

   설선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건물 동편의 측면 1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부엌으로 거대한 아궁이가 시설되어 있다.

   요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승방과 식당, 부엌으로 사용되고 있고, 2층은 마루로서 각종 식량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의 벽면에 환기창을 설치해 놓았다.

   이 설선당과 요사는 북쪽 끝과 남쪽 끝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에 있어서 설선당 동편과 요사 일부를 잘라내고 연결건물의 용마루를 끼워서 완성했다.

   이 건물은 인위적으로 땅을 평평하게 하고 건물을 짓지 않고 자연의 지형 그대로 자연석 초석을 사용하여 지붕을 하늘에 맞추어 지었다.

   ‘說禪堂’의 현판은 18세기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필적으로 ‘說’자의 삐침이 호방하게 하늘로 솟구친다.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로 윤순(尹淳)에게 글씨를 배워 진·초·예·전서에 모두 능했고,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를 이룩했다. 저서로 서예 이론서인 <원교서결>, <원교집선> 등이 있고, 그림은 <고승간화도>, <산수도>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영의정이경석표> 등 다수가 있다. 내소사 ‘大雄寶殿’ 현판도 그의 필적이다.

<허철희 님은 자연생태활동가로 ‘부안21’을 이끌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선시대의 서화평론<94>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초상(肖像)에 화제(畵題)를 쓰다
독립큐레이터 이택용

이택용 기자 /   입력 : 2014년 01월 31일(금) 11:33 

 

 
                     ⓒ 경북문화신문

▶해설

   이광사의 초상화이다. 그는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고, 동국진체를 이룩한 조선시대 대표적 서예가 중에 한 사람이다. 초상화면 오른쪽 상단에 화제가 쓰여 있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제작시기, 화가 등 내력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토대로 1774년에 이광사의 말년 70세의 모습을 신윤복의 아버지 유명한 화원화가 신한평이 그린 것임이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우아한 필묘(筆描)와 은근한 요철감을 표현하는 수법으로 강렬하지는 않지만 품격 있고, 깊은 전신(傳神)을 성취하였다는 점에서 수준이 높은 역작이다. 또한 신한평이 초상으로 유명하였지만 전해지는 작품이 없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희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도포에 방건(方巾)을 착용한 반신 좌상으로, 선묘를 최소화하고 음영의 변화를 강조한 이목구비의 묘사가 간결하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검붉은 얼굴색, 왼쪽 눈썹 속의 점, 코와 뺨에 엷게 퍼져 있는 검버섯 등을 세세하게 묘사한 것에서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맑고 형형한 눈빛은 이광사의 고결한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 듯 하지만 옷 주름이 번잡하여 과장된 느낌이 있고, 길고 끝이 뾰족하게 빠진 주름 모양, 각을 주어 표현한 소매 단 등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표출된다. 이러한 긴장은 수심이 깃든 얼굴 표정과 함께 유배에 처한 이광사의 처지와 심정을 전달하는 듯 하며, 화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광사(李匡師)의 초상(肖像)에 화제(畵題)를 씀

   朝鮮國 完山李公 諱匡師 字道甫 號圓嶠先生 遺像 我 英廟 壬午 先生自富寧移謫 薪智島 丁酉 八月二十六日卒 于島之 金實村寓舍 壽七十三 此本卽 先生七十歲 甲午冬 畵師申漢枰 所寫 八月 二十六日 卽 先生 降辰先生在島 自稱壽北老人

   조선 사람이며, 전주이씨로 이름은 광사이고, 자는 도보이요. 호는 원교이다. 선생은 나주괘서사건에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에서 귀양 살다가 1762년 전라도 완도의 신지도로 이배되었다. 1777년 8월 26일 73세로 신지도의 금실촌 우거에서 사망했다. 이 초상은 1774년 겨울에 선생 70세 때 신한평이 그렸다. 즉 선생은 8월 28일 졸하는 날까지 신지도에서 스스로 수북노인이라고 불렸다.

 

 

 

                           ▶ 원교 이광사의 초상(肖像)

 

이택용 기자  


- Copyrights ⓒ경북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그리움에 사무친 매창의 애절한 시가 얽힌 곳
[주말엔-이야기가 있는 전북의 사찰]우뚝 솟은 우금바위 밑 개암사<하>
2014년 06월 05일 (목) 김판용 시인·고창 흥덕중학교 교장 APSUN@sjbnews.com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질베르 뒤랑은 인간이 높은 곳을 추구하는 현상을 ‘왕자적 명상’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낮은 곳에 있으면 높은 곳을 추구하게 된다. 저 높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발전하는 것은 바로 그 왕자적 명상 때문이라고 봤다. 그렇다면 높은 곳에 서는 느낌은 어떨까? 당연히 아래를 굽어보게 된다. 내가 걸어 왔던 길, 그리고 내 일터와 삶터를 조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 거리만큼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잊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금암에서의 조망은 변산반도 전체를 그리는 작업이다. 그래서 우금암이 변산반도의 중심일 것만 같다. 고통 받았던 민중들의 염원인 새로운 세상, 그러나 개암사는 그렇게 비장하고 유장한 역사적 공간만은 아니었다. 실제 우금암을 비롯한 개암사 일대에는 변산반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들이 오롯이 서려있다. 변산반도 문화의 진수를 간직한 보고(寶庫) 중에 보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보고 나왔지만 대웅전의 면모부터가 우선 예사롭지 않다. 보물 제292호인 이 건물은 앞에서 보면 우금암을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날아갈 듯 활기차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비록 전면 측면 각각 세 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규모에 비해 추녀가 넓어서다. 실제 이 건물은 길게 드러난 추녀를 받히기 위해 살기둥까지 세웠다. 산을 배경으로 보이는 앞면과 다르게 측면에서 보면 둥둥 하늘에 떠 날아갈 것 같다.

   대웅전의 현판 글씨도 힘차다. 이 글씨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썼다고 한다. 이광사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를 완성했는데, 이 원교체는 중국의 서체에서 벗어난 진정한 해동의 필법으로 이를 동국진체라고도 한다. 이광사의 글씨는 호남 사찰 현판에 두루 걸려 있다. 왜 그랬을까? 소론이었기에 당파에서 밀린 그의 삶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실권을 했기에 벼슬에 오르지 못했고, 1755년 나주괘서사건에 연좌돼서 부령을 거쳐 완도 등지로 유배를 다니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비운의 선비, 유학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그는 누구에게도 속되지 않는 독특한 서체를 미륵의 세상을 꿈꾸었던 호남의 절집에 남긴 것이 아닐까?

   작년 6월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표암 강세황 탄생 300주년 기념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표암 강세황’ 특별전이 있었다. 표암은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 특별전시회에 표암의 ‘우금암도(禹金巖圖)’가 전시돼 특히 눈길을 끌었다. ‘우금암도’는 변산반도를 돌아본 표암이 가장 상징적 곳을 그린 그림으로 현재 미국 LA 카운티미술관에 소장돼있다. 특별 전시를 위해서 고국을 찾은 것이다. 표암은 그의 아들이 부안현감으로 있던 1770년 경 변산반도를 두루 돌았다고 한다. 이 작품은 18세기 부안을 배경으로 남긴 유일한 실경산수화로 평가 받고 있다.

 

   
  ▲ 원교 이광사가 쓴'대웅보전현판'  
 

 



   개암사와 우금암에 여기에 얽힌 것이 글씨와 그림만은 아니다. 신석정 시인은 부안의 삼절(三絶)을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라고 했다. 황진이가 있던 송도삼절에 비유한 것이다. 이매창은 부안의 기녀로 황진이, 김부용과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개암사는 매창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68년만에 부안의 아전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시들이 <매창집>이란 이름으로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출간된다. 만일 개암사가 아니었다면 매창의 시문들이 그냥 묻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매창의 기록은 유희경이 쓴 <촌은집>에도 등장한다. 이매창은 아전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머리가 영특하여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시문과 거문고를 가르쳤다고 한다. 황진이가 남성 편력이 있었던데 반해 매창은 오로지 한 남자만을 사랑했다. 그 남자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촌은 유희경이다. 유희경은 그녀보다 28살이나 많은 천민 출신이었다. 허균을 비롯한 수많은 양반들과 교류했던 매창이 왜 하필이면 천민 출신인 유희경을 사랑했을까?

 

   
  ▲ 개암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풍경  
 

 

 



   사랑에도 격이 있다. 신분으로나 돈으로 사랑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외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품격이다. 비록 기녀였지만 그녀가 추구한 세계가 유희경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또 어쩌면 천민 출신이라는 동질감도 작용했을지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유희경이 의병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를 쓰며 외로움을 달랬다. 다음은 유희경이 쓴 시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끓겨라.



   서로 헤어진 지 15년간이 지난 후 유희경이 매창을 찾는다. 이때는 몇 차례의 공을 세워 면천은 물론 당상관이라는 벼슬까지 지낸 양반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신분의 변화에도 둘의 사랑은 뜨거웠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변산반도의 명소를 돌면서 시를 썼다. 아름다운 시편들이 이 때 나왔다. 그러나 그 기간도 길지 않아 두 번째 이별이자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홀로 남은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거닐었던 길을 소요하며 늦은 밤까지 거문고를 타면서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여라



   두 번째 이별 후 3년 만에 매창은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했다 한다. 정인(情人)의 슬픔까지 헤아린 그녀의 사랑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오늘 날의 사랑 행태를 되돌아보게 하는 먹먹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보다 격조 높은 사랑을 위해 우리 앞의 바위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김판용 시인·고창 흥덕중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