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심헌,징심록,박제상,부도지,함경남도,문천, - 부도지(박제상)

2015. 7. 15. 10:48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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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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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지역출신 '역사의 인물' 홀대


김태권 기자 icon다른기사보기
2010-09-14 [10:37:00] | 수정시간: 2010-09-14 [14:53:24] | 10면

 

   경남 양산이 지역에서 배출된 역사적인 인물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14일 양산시양산문화원 등에 따르면 울산시 울주군은 최근 울주문화원 주관으로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 일대에서 '제1회 충렬공 박제상 문화제'를 개최했다. '박제상의 충(忠), 그 부인의 열(烈), 자녀의 효(孝)와 예(禮)를 기리는 이 문화제는 수만

명이 찾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울주군은 1992년 박제상 부인의 고향이자 망부석 전설(일본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 치술령에서 돌이 됐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만화리치산서원을 복원한데 이어 2008년에는 박제상 기념관까지 건립해 울산을 대표하는 정신문화 상품으로 개발, 전국에 홍보하고 있다.

   신라 충신인 박제상은 양산 출신으로 양산에서 태수로 있을 당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 직접 징심헌(澄心軒)을 건립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시는 1960년 옛 징심헌 자리에 건립된 효충사(경남도 지정기념물 90호) 일대 1만㎡를 전시관과 문화체험공간 등을 갖춘 역사공원으로 조성키로 했다가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7년째 착공을 미루다 최근 계획을 대폭 축소해 사업을 추진키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양산지역 문화계는 "양산시의 의지부족으로 지역 정신문화의 상징인 인물을 스스로 사장시키고 나아가 다른 지역에 빼앗기는 상황까지 벌어져 너무 안타깝다"며 "양산이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그 업적을 계승발전시키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태권 기자 ktg660@busan.com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00914000059

 


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7> 양산 [박제상] 효충사와 총체극


삽량문화축전

 

   박제상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징심록'과 아들 박문량이 기술한 것으로 알려진 '금척지'는 현재까지도 국내외 역사학계와 종교계의 연구대상이다.
   현재 효충사 터를 놓고 일부 학계에서는 박제상이 징심록 집필을 위해 지었던 '징심헌'으로 주장하고 있다.


http://blog.daum.net/joy0691/15525764

 

 

 

 

양산 효충사


  경남 양산시 소토리 효충마을에 위치한 효충사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제상과 그의 아들인 백결선생의 초상화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사당 앞에는 박제상의 업적을 적은 효충사 석비 세워져 있으며, 맞배지붕으로 만든 대문

과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져 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1946년 안종석씨에 의해 건축된 효충사는 1988년 양산향교에 의해서 제1차 개축하였고, 2008년에

는 양산시가 땅을 매입하여 제2차 개축하였다. 효충사를 신축한 후 음력 3월 중정일에 박제상과 그

의 아들 백결선생의 제사를 지내다가 박제상의 후손인 영해 박씨 문중과 마찰이 생겨 1990년대 이

후부터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는 양산시가 소유하고 있으며 관리, 보존하고 있다.

 

   효충사라는 이름은 효(孝)와 충(忠)을 중요시하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효충(孝忠)마을의 이름을

따서 효충사(孝忠祠)라고 하는데, 신라의 충신이자 효자로 알려진 박제상과 어울리는 이름이다.

    박제상의 호는 관설당(觀雪堂)이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파사금의 5세손이다.

눌지왕 2년(418), 박제상은 벼슬길에 나가 삽량주간이 되었으며, 이후 눌지왕에게서 고구려와 왜국

에 볼모로 간 아우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박제상은 신라사신으로 고구려에 가서 장

수왕을 설득해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를 데려왔다. 또 같은 해에 다시 왜국으로 가 신라를 배반

하고 도망쳐왔다고 속인 다음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味斯欣)을 빼돌려 신라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

리고 자신은 스스로 잡히는 몸이 되어 사지가 타는 고통을 받으며 소사(燒死)당했다고 전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눌지왕은 박제상에게 대아찬 관품을 추증하고 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

삼게 했다고 한다.

 

  
   또 왜왕이 박제상을 모질게 고문하면서도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자신의 신하로 삼고자 했으

나, "신라의 소·돼지가 될지언정 너희 나라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라는 단호함을 보였다. 그런

제상의 죽음을 왜왕도 안타까워했다 전해진다.

   이러한 충신 박제상이 양산 효충마을에서 태어났다하니 양산을 대표하는 위인으로 내세울 만하다.

또한 그의 아들인 백결선생은 신라 때 거문고의 명수로, 문헌에 의하면 이름이 박문량(朴文良)이라

고 한다. 그는 자비왕 때 경주시 낭산 기슭에서 살았는데,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

었기 때문에 백결 선생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아내가 이웃집 떡방아 소리를 부

러워하자, 떡방아 대신에 아내에게 들려준 떡방아 소리인〈대악(碓樂)〉이 유명하다.

 

   이렇게 충신 박제상과 그의 아들 백결선생을 모신 효충사는 박제상이 양산 태수로 있을 당시 직접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징심헌(澄心軒)의 옛 터에 세워진 사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징심헌은 1800년대 초반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각종 문헌에서 확인되지만 그 뒤 유실되면서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이후 안종석씨가 1946년 징심헌이 세워진 자리라고 추정된 곳에 효충사를

건립하였고, 또한 이 곳 마을이 박제상의 출생지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박제상의 출생지를 놓고 국내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가 징심헌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는 문헌이 남아있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효충마을이 그의 고향마을일 가능성이 높다

는 의견이다.

 

   양산시는 지난 2003년 박제상 유적 정비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 했으나, 효충마을 주민들이 박

제상 유적지 위치가 인근 감결마을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산되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징심헌이 효충마을에 있었다는 고증도 없이 사업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라며

“인근 감결마을에 박씨 집성촌이 있고 박제상이 그곳 출신이다.”며 정비사업을 반대했다고 한

다.

  이에 따라 양산시는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에 징심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학술용역을 의뢰한

징심헌이 현재의 효충사 위치 자리했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 후 양산시는 효충사(경남도 지정기념물 90호) 일대 1만㎡를 전시관과 문화체험공간 등을 갖춘

역사공원으로 조성키로 했다가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착공을 계속 미루다 최근 계획을 대폭 축소

해 사업을 추진키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양산지역 문화계는 "양산시의 의지부족으로 지역 정신문화의 상징인 인물을 스스로 사장

시키고 나아가 다른 지역에 빼앗기는 상황까지 벌어져 너무 안타깝다"며 "양산이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그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 사당의 규모가 너무 작을뿐더러 주위의 부지를 매입하고서도 아무런 복원이나

증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박제상의 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는 실

정이다. 또한 상시 관리자가 없어 상시 관람이 어렵고 사람들이 훼손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는 상태

이다.

 

 

   현재 울산에서는 박제상에 대한 문화 축제가 많이 열리고 있으며, 박제상의 아내가 그를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의 일화로 유명한 만화리에 치산서원복원하고 이어 2008년에는 박제상 기

념관까지 건립해 울산을 대표하는 정신문화 상품으로 개발, 전국에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양산시는 박제상의 출생지이면서도 아무런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이며, 문화홍보나

축제 또한 미비하여 박제상의 출생지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행적을 남기고 있다.

 

   자칫하면 박제상의 출생지라는 타이틀을 다른 지역에 넘겨줄 수 있는 상황이라서 양산지역 문화계

에서도 빠른 시일 내에 박제상 유적지 복원과 개발을 양산시에 건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지역의 위인인 박제상의 발자취와 업적을 조사하고 보존하여, 박제상이 가진 효(孝),충(忠)을

알리고 박제상의 정신을 시민들에게 널리 배우게 함으로써 효와 충이 살아 숨쉬는 양산시로 발전시

켜나가야 할 것이다.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74964

 

 

 


징심헌 터


  징심헌은 객사의 서편있었다. 오랫동안 퇴락하여 방치되었던 것을 1680년(숙종 6)에 양산군수 조헌경(曺憲卿)이 중건하고 서헌을 지었으나 1687년에 객사와 함께 화재로 소실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양산군수 유정휘(柳挺輝)가 다시 영건(營建)했으나 1697년(숙종 23) 겨울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김종직(金宗直), 「양산 징심헌의 운을 따라」

   "인물은 당시의 제일류였으니/ 충성심은 괜스레 태수 시절을 상상케 하네./ 분명코 원통한 피 갈대 위에 뿌려서/ 동해 바다에다 만고의 근심을 남겼네(人物富時第一流 精忠空想割鷄秋 分明怨血蒹葭上 留得滄溟萬古愁). "

 

○ 김종직(金宗直), 「양산 징심헌에서 밤에 앉아 본 것을 기록하다」

   "바람 소리 대밭을 깨고/ 달 그림자 난초밭을 덮는데/ 나그네는 가을 잠이 적어/ 창을 열고 솜이불을 헤쳤네./ 어둠의 꽃은 먼 들에 지고/ 맑은 기운 파도같이 밀려드네./ 물고기 뛰어 팔팔하게 놀고/ 고니 놀라는 소리 우렁찬데/ 은하수는 푸른 못에 담기고/ 가로 비껴 한 쌍의 배를 띄웠네./ 뜰 가에서 누각을 바라보니/ 고요한 언덕 하늘 높이 솟았고/ 아침 오면 방을 두드릴 곳에/ 거미줄이 얼기설기 얽혔네./ 홀연 밤 기운 더함을 느끼고/ 머리 흩으니 정이 도도하구나./ 다만 두려운 건 닭이 일찍 울어/ 관복 입고 세속 일에 분주함일세(風聲碎竹塢 月影晃蘭皐 客子少秋睡 開窓披縕袍 昏花落遙野 灝氣如波濤 魚跳乍撥刺 鵠駭鳴聲豪 星河備澄碧 橫泛一雙短 循除瞰樓閣 岑寂贖天高 朝來敲榜地 只有絡緯繰 忽覺夜氣勝 散髮情陶陶 還恐鷄早頃 冠帶走塵勞). "

 

○ 김종직(金宗直), 「양산 징심헌 아래 배를 띄우고 사겸에게 올림」

   "넘실거리는 물 찰랑찰랑 푸르러/ 강호의 흥이 점차 새로운데/ 끊어진 벼랑엔 납극 신고 오르고/ 지는 해엔 낚싯줄 드리워야지./ 대를 꺾는데 황모가 방해되고/ 뛰는 물고기는 흰 마름을 열치네./ 화장한 기생 없다 혐의치 마소./ 관도에 지나는 사람 있으니(剩水綠鱗鱗 江湖興轉新 斷崖堪蠟屐 落日且垂綸 折竹礙黃帽 跳魚開白蘋 莫嫌無粉黛 官道有行人). "

"그윽한 구경은 물가에 나와야지/ 높은 누각에선 취한 술 깨지 않네./ 버드나무 가에 그림 배를 버티면/ 대나무 아래 바둑판 울리고/ 아전들은 줄지어 인사 올리면/ 멀리 등불이 달과 별빛 대신하네./ 밤 깊어 배를 저어가노라면/ 두건과 신발에 이슬 꽃이 맑네(幽賞須臨水 高樓未析酊 柳邊撑畵艇 竹下響紋枰 群吏參鷗鷺 遙燈替月星 更深仍信棹 巾辜露華淸)."

 

http://yangs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400378&local=yangsan

 

 

 

 

 

 


   김시습 박제상이 구해온 왕자 복호가 그의 선조인데다 어려서 이웃 살던 박제상 종가 인물을 스승삼아 수업받아 이들과 인연이 깊었다. 그는 1455년 단종 폐위를 겪고는 세종이래 주어진 벼슬을 버리고 김화로 들어가는 박효손을 따라가「징심록」「금척지」를 읽고「징심록 추기」라는 글로 금척에 관한 유래와 형상, 논평 등을 기록했다.

 

   ▲ 박혁거세가 처음 등장한 나정의 발굴현장. 조선 순조 때 세운 유허비와 석재들이 한군데 쌓여있다. 김시습은 혁거세가 금척을 지닌, 단군으로부터 유래된 혈통이기에 어린 나이에 왕으로 추대됐으리라고 한다.ⓒ이순희

 

   금척의 법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오직 박제상의 집에만 전해졌는데 이는 반드시 파사왕(5대 신라임금. 박씨)이 전했기 때문으로, 이 집안에 내려오는 금척 전설이 많아도 후손들은 엄중하게 비밀에 부쳐「징심록」을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금척의 소재는 박문량의「금척지」에도 밝히지 않았다. 사록에 의하면 이미 박혁거세 때에 금척을 땅에 묻고 38개의 언덕같은 무덤을 같은 장소에 만들어 감추어 버렸다.

 

   김시습은 "지금 박제상의 종가일을 보는 후손도 사라지고 여러 집이 흩어지니 ... 금척의 수리(數理)를 풀어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다. 내가 일찌기 「금척지」를 읽었으나 그 수사가 매우 어려워서 알 수가 없었다.

   금척의 근원이 매우 멀고 그 이치가 매우 깊숙하다. 형상은 삼태성이 늘어선 것 같으니, 머리에는 불구슬(火珠)을 물고 네 마디로 된 다섯치 길이다. 그 허실의 수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천부(天符)의 수이다. 대저 그 근본은 곧 천부의 법이다. 그것을 금을 가지고 만든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요, 자로서 제작한 것은, 다 같이 오류가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11월 경복궁 고궁박물관에서 '베트남 마지막 황실의 보물' 전시회가 있어 가봤었다. 놀랍게 거기에도 왕의 도량형으로 자가 하나 나와 있었다. 1미터 길이의, 검은 옻칠을 한 나무 재질의 화사한 자개 무늬를 박은 고상한 자였는데 평면적이지는 않고 도톰한 각목처럼 두께가 있는 것이었다. 여기엔 주척(周尺)3가지 척 새겨져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쓰던 자는 그럼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도 덩달아 생겨났다. 일반의 반짓고리에 담겼던 화각자, 자개자, 금은 상감을 한 자 그런 것과 비슷할까? 아니면 어떤 형식을 엄격히 따른 것일까? 화주 장식이 붙어 있을까?

   금척의 전통은 이제 사라졌다고 봐야 할까? 금척이야기가 생소한 이들은 '금척이라니 금빛 플라스틱 자 같은거냐.'고 웃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단군 이래 금척이 있어, 금척을 묻은 고분이 있고 박제상같은 지킴이와 후손이 있고 김시습같은 지식인의 책도 있고 금척의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어 즐겁다. 역사가 오랜 나라라는 게 실감난다. 
 
김유경 언론인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8992

 

 

 


함경남도 문천 지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4805&cid=1599&categoryId=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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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도민회(인천-예술회관역), 032-515-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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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징심헌,징심록,박제상,부도지,함경남도,문천,|작성자 안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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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님의 글 중에서 전재 ......